드래곤 라자 7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1화
…그러나 드래곤 라자가 보여주는 애매 모호한 태도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를 주종 관계로 착각하고 있다. 이 드래곤 라자의 애매 모호한 태도는 훗날 그 들의 재앙이자 바이서스의 재앙인 저 갈색 산맥의 크라드메서의 라자 살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온몸을 불태워 바이서스를 구하고자 했던 바이서스의 진정한 은인 저 할슈타일 후작, 300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라자 가문의 수장마저도 간과한 단 하나의 사실이 있었으니…………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 도 가치 있는 이야기」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3권 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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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입으로 숨을 쉬면 안 된다. 코로 숨쉬어야 된다. 하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얼음장 같았고 코는 이미 얼어붙은 것 같다. 지금 콧김을 세게 뿜으 면 아마 얼음 조각들이 더 많이 튀어나올 거야. 계속해서 차가운 공기가 들어간 목에서는 피맛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젠장. 지독한 산바람이야. 우리는 절벽 옆을 따라 난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위로 까마득한 절벽, 반대쪽은 아래로 깎아지른 벼랑. 그리고 멀리 산봉우리들과 바위, 숲, 그리고 구름들. 어쨌든 높은 산지에서 볼 만 한 것들은 다종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으니 벼랑 쪽으로 다가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따라서 떨어질 염려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웃기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거세게 부는 바람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벼랑 쪽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한 손을 바위 벽에 붙 인 채 손바닥이 쏠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걸어야 했다. 쏠리는 것은, 어쨌든 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계속 들어올리고 있는 팔은 추위와 피로 때문에 곱아드는 느낌이 온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지쳐서 저절로 아래로 늘어지는 손을 힘들게 들어올려 바위를 짚는 것은 이제 의지나 힘보다는 습관성에 가깝다. 지금까지 걸어왔고, 멈추지는 않았으니 그저 걸어가는 것.
“태양은 말이지.”
앞에서 꿋꿋이 걸어가던 엑셀핸드가 난데없이 말한다.
“이보다도 훨씬 더 높은 등반을 매일 한다구.”
꽤나 쉬어버린 목소리다. 난 피식 웃으며 다시 레니를 추슬러올렸다. 레니는 내가 추슬러올리는 대로 맥풀린 몸을 맡기더니 내 귀에 대고 힘없이 말 했다.
“미안해, 후치.”
“괜찮아. 말을 끌고 오는 것보다야 레니를 업고 걷는 것이 미관상으로도 훨씬 보기 좋고 기분도 좋은 일이야. 아, 이런 너무 속보였나?” “후치…….”
“그런데 밧줄이 아프거나 하진 않아?”
“아니, 안 아파. 전혀.”
레니는 밧줄과 망토를 이용해서 내 등에 업혀 있었다. 산 속의 길을 걸으며 두 손을 쓰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짜낸 방법이다. 어머니들이 아기를 업을 때 사용하는 포대기처럼 난 망토와 밧줄을 적당히 이용해서 레니를 내 어깨와 허리에 묶어버렸다. 그래서 배낭은 가슴 앞으로 메고 바스타드는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레니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은 허리나 다리를 파고드는 느낌이겠지. 사실 나 역시 OPG를 끼고서도 어깨가 내려앉는 느낌이거든? 하지만 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뒤쪽에선 말을 끌고 갈색 산맥을 올라오는 사람들이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지친 채 따라오고 있었다. 말들도 역시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 로 지쳐 있었다. 아, 말은 원래 말을 하지 않던가? 말들은 온몸이 하얀 거품으로 뒤덮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고 있었다. 선더라이더를 제외 한 모든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있다는 점에서 길시언은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거야. 말들이 저렇게 지치지만 않았어도 레니를 말에 태우고 올 수 있었을 텐데, 덕분에 내가 레니의 말 노릇을 하고 있잖아.
사실 길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시무시하고 내려다보는 절벽은 현기증이 날 정도이긴 하지만, 어쨌든 길 자체는 평 탄하고 완만한 것이다. 게다가 엑셀핸드는 우리 일행을 생각해서 가장 쉬운 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급한 경사나 계곡 같은 것을 만나지 않 는 대신 추위에 떨면서 완만한 경사를 지겹도록 올라간다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걸어온 것이 벌써 여섯 시간째다.
돌맨 할슈타일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꼭두새벽에 출발했다. 새벽녘에 걷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짐은 모두 말 여섯 마리에 나눠 실었기 때문에 가뿐하게 몸만 가지고 걷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엑셀핸드는 갑자기 길에서 벗어나더니 산 쪽 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도 아닌 계곡과 능선 사이를 뭔가에 걸리고 넘어지고 하면서 힘들게 걸었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나자, 우리들이 중 부 대로를 왼쪽으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는 위치에 올라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샌슨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저게 중부 대로야? 우와, 높이도 올라왔네?”
“흐음. 이곳이 드워프들의 통행로로 접어드는 지름길이라네. 중부 대로로 해서 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거든.”
“아,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중에 드워프들의 광산에 갈 수 있는 것입니까?”
“못 되어도 정오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여기서 대충 아침 요기를 하고 출발하세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중부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서, 땔감을 구할 수 없어서 불도 피우지 못한 채 차가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운차이가 갑자기 눈 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중부 대로 쪽에 사람들이 보이는군.”
아래를 내려다보자 과연 조그맣게 꼬물거리는 붉은 반점들이 보였다. 온통 회색이나 갈색, 초록색 등의 땅에서 붉은색 옷은 잘 보였다. 그런데 운차 이는 그 옷과 그 얼굴까지 대충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꼬마가 보이는군. 15, 6세쯤 되어보이는데. 가벼운 갑옷. 무장은 단순해.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 희한하군. 모두들 머리를 바싹 깎았는데. 아주 짧아.”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검과 파괴의 레티의 프리스트들입니다. 돌맨의 일행이군요. 으음.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30명. 돌맨까지 31명이오.”
“그래요.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자 엑셀핸드는 기분 좋게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됐군! 저 녀석들은 이 지름길을 모르거든. 그래서 훨씬 더 서쪽으로 간 다음 자날 한타 봉으로 들어오는 드워프들의 통행로로 접어들게 될 거야. 대 략………… 여덟 시간이나 아홉 시간쯤 앞서게 되겠군.”
“좋군요. 우리가 앞서고 있다는 말이네요? 힘이 나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엑셀핸드는 갑자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엑셀핸드는 이렇게 말했다.
“두 시간 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네.”
그리고 두 시간은커녕 한 시간도 못 가서 모두들 말에서 짐을 풀어내어 어깨에 메어야 했다. 말들이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대단히 힘들어했기 때문 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다섯 시간 후, 난 갈색 산맥의 수목 한계선 근처에서 등에 완전히 지쳐버린 레니를 업은 채 절벽 옆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이다.
엑셀핸드는 지치지 않았다는 듯이 기세 좋게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후치, 정말 강단이 대단하군? 인간치곤 정말 괜찮아. 한 사람까지 업고서 말이야.”
“불쌍해 보인다면 나 대신 레니를 업어주시죠?”
“그래줄까?”
“굳이 레니의 다리를 땅에 질질 끄는 것으로써 자신의 드워프다움을 느껴보시고 싶으시다면야………….”
나와 엑셀핸드의 농담을 듣고 있던 레니가 다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후치. 너무…… 무겁지?”
“아냐. 천만에. 레니는 너무 가벼워. 살 좀 불려야 시집가겠는데.”
“시집 안…….. 간다니까!”
“그 말이 아냐. 지금으로선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갈 확률이 높다는 말이지. 살 좀더 붙이고, 좀 포동포동해져야 사랑받겠다? 왠지 장작개비를 등 에 멘 듯한…….”
“……후치이잇!”
“오우, 오! 안 돼. 당기지 마! 이런, 귀 잡아당기지 마! 절벽이 옆이야! 균형 잃으면 떨어진다구!”
“꺄아악! 후치! 흔들지 마! 꺄아악! 꺅!”
“레니, 제발! 눈, 눈 가리지 마!”
우리가 이런 괴상망측한 구경거리를 제공한 덕분에 일행들은 모두 크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멀리멀리 울려퍼졌다. 잠시 후 우 리들은 다시 고요 속에서 자날 한타 봉을 올라갔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을 돌이켜봐도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오로지 지겹도록 다리를 움직이던 느낌뿐이다. 아, 굉장한 추 위도 기억난다. 간혹 우리들을 둘러싸서 꿈속을 걷는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던 짙은 구름들도 기억나고, 굽이굽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기막힌 산봉 우리의 모습도 기억나고, 고산 지대라서 볼 수 있는 말라붙은 고목의 모습도, 그 아래 힘들게 자라나는 이끼들…………, 기억나는 게 꽤 많네? 레니를 업 고 있던 등은 따스했지만 얼굴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얼어붙어서 상당히 희한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기억나는군.
그렇게 또 다른 구비를 하나 돌았을 때, 갑자기 눈앞이 크게 펼쳐지며 우리 앞에는 분지가 나타났다.
“우와?”
내 목에 머리를 파묻은 채 거의 까무러쳐 있던 레니가 놀라서 머리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레니 역시 짧게 숨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우와?”
자! 지금부터 여기 서서 올라오는 일행들을 감시하자. 그들도 모두 ‘우와?’라고 말할까? 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우와?”
샌슨……………, 역시 나의 헤아림을 벗어나지 못하는군. 껄껄껄. 우리들은 앞으로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분지의 끄트머리에 일렬로 서서 눈앞에 펼쳐진 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희한한 장소였다. 계속되는 절벽과 산봉우리들 사이에 이런 지형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했다. 언뜻 보기에 분지는 꽤나 넓었는데 거의 우리 고향 헬턴트 마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지금껏 올라오면서 바위의 회색에 익숙해진 눈은 눈앞에 펼쳐진 풀들의 현란한 초록색에 질려버리 고 말았다.
분지 주위의 산봉우리들이 바람을 막아줘서인지 이곳에는 안개 비슷한 그 구름들도 없었고 나무들도 모두 꼿꼿이 자라나고 있었다. 분지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곡이라고 불러야 될까? 옆에서 튀어나온 봉우리들 때문에 분지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분지에서 옆의 산봉우리들을 만 나는 위치에는 거대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려가지 않을 거야?”
엑셀핸드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들은 간신히 분지로 내려섰다.
“아, 후치. 이젠 내려줘.”
레니를 내려주고 나자 정말 날아오를 정도로 몸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따스하게 보호되던 등허리가 선들선들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흐음. 상 쾌하군. 말들은 풀을 밟게 되자 다시 기운을 내는 듯했다. 그 점에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한없이 올라오기만 하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바야흐로! 평지를 걷고 있는 것이다. 다리가 그대로 없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우리가 들어온 분지의 입구에서 아래쪽으로는 길이 나 있었다. 길 옆으로는 키가 작고 억센 풀들이 빽빽하게 나 있었다. 간혹 바위들 사이에서 멧토 끼 같은 것이 훌쩍 뛰는 모습도 보였다. 멧토끼라. 크라드메서의 배를 채우려면 토끼가 몇 마리가 필요할까? 그런 생각에 잠겨 길을 따라걷고 있을 때 다. 갑자기 앞에서 걸어가던 제레인트가 멈춰 섰다.
뭐지? 갑자기 왜 길을 막고 멈춰 서는 거야?
제레인트를 돌아보자 그는 우리 정면의 숲 사이로 드러난 거대한 절벽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쩍 벌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난 크게 놀라버렸다. 아니, 왜 이러시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그대로 그 절벽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거대한 절벽의 아 래쪽에는 굉장히 커다란 굴이 뚫려 있었다. 히야. 그 동굴 진짜 크네. 그 크기로 말할 것 같으면 드래곤이라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 정도………… 마음 대로 오갈 수 있을…… 정도……?
그때 제레인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레어닷!”
으악! 크라드메서의 레어다! 일행들은 일대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몸을 숨겨! 몸을 숨겨!”
일행들의 소란 속에서 길시언의 고함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렸다. 그는 검을 뽑아들고는 길에서 벗어나 나무에 몸을 붙였다. 말들의 요란한 비명 소 리. 앰뷸런트 제일은 발길질을 하다가 샌슨을 걷어찰 뻔했다. 샌슨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아 버렸지만 “아이고!” 곧장 몸을 굴려 일어나더 니 검을 뽑아들었다. 칼은 길 옆으로 후다닥 달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으악!” 그런데 쓰러질 뻔한 칼을 네리아가 간신히 부축하는 모습 뒤로, 난 아주 이상한 것을 보고 말았다.
아프나이델이 얼굴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선 운차이가 싸늘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상황에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 때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핫하하하하!” 뭐야? 아프나이델이 돌았나? 너무 무서 운 일을 당해서 순간적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다거나…………….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 거대한 동굴에서 동굴의 크기에 비해 볼 땐 우스꽝스럽게 작아보이는 세 명의 드워프들이 달려나온 것이다.
우리들이 모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동굴에서 달려나온 드워프들은 우리들 쪽으로 열심히도 달려오고 있었다. 굉장한 속도. 드워프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달려왔다. 그때 네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엑셀핸드?”
엑셀핸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동굴에서 달려오는 드워프들 쪽으로 마주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지? 제레인트가 사태를 알아차린 사람 특유의 날 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크라드메서에게 쫓기는 거야!”
이런 젠장! 길시언은 이를 갈면서 외쳤다.
“이런, 엑셀핸드를 도와! 드워프들을 구해!”
“젠장! 준비도 못하고 바로 싸움이냐!”
샌슨과 길시언은 곧 검을 하늘에 휘두르며 달려갔다. 그러자 뒤에 있던 아프나이델은 이제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난 아무래도 사태가 이상하다고
보고는 운차이를 살폈다.
“운차이? 가야죠?”
“왜.”
“어, 어, 드워프들을 구해야………..”
“뭐로부터.”
어, 어라? 왠지 할말이 없어지는 기분이 든다? 크라드메서로부터라고 대답하면 창피를 톡톡히 당할 것 같은 기분이…………. 그때 아프나이델이 겨우 웃 음을 멈추고 말했다.
“저, 저건 드워프들의 광산이야. 킥킥킥!”
뭐라구? 그때 저편에서 엑셀핸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오래간만이야, 친구들!”
으으윽.
“그렇다면 지금은 폭풍 전의 고요, 뭐 그런 겁니까?”
아프나이델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으더니 합장한 손으로 이마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난 고개를 돌려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는 절벽에 뚫려 있는 거대한 광산에서 허겁지겁 달려나온 드워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광산에서 일하다가 그대로 나왔는지 이마에 희한하게 생긴 상자를 붙인 채였다. 그 상자는 이마에 대고 가죽끈 같은 것으로 머리에 묶게 되어 있었고 그 안에선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캄캄한 갱도 속에서 사용하는 조명인가 보지? 그들의 몸에도 뭔가 알 수 없는 장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희한한 광부용 장비들보다 더 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그들의 얼굴이었다.
그것 참.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는데. 양지기가 아닌 바에야 양떼들이 모두 똑같아 보이듯이, 나에겐 드워프들이 모두 똑같아 보인단 말이야. 똑같이 작은 키에 똑같이 다부진 몸매, 똑같이 늘어뜨린 수염(광산에서 나온 드워프들의 경우엔 수염이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 좀 달랐지만). 입고 있는 옷마저 똑같았다면 도저히 구분하지 못했을 것 같군.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자 역시 서로에게서 미미한 차이는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똑같은 목소리로 들렸던 그 목소리들도 이제는 그런 대로 각자의 성격을 담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드워프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대화를 나누 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는 것이 지루해진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피로한 얼굴을 한 채 바위에 앉아 있다가 내 얼굴을 마주보고는 어설픈 미소를 짓는 레니가 보였다.
“힘들지?”
레니는 간신히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쓰러진 사람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레니는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숨가쁘게 말했다.
“힘들어.”
“다리 주물러줄까?”
“하아, 하아. 그럼 좋지.”
레니는 바위에 앉은 채 다리를 쭉 뻗었다. 으윽. 사양할 줄 알았는데. 난 레니의 옆으로 다가가 OPG를 벗고는 그녀의 깡마른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 했다. 레니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아흐흑, 아흐흐흐! 하악, 아후우!” 곧 맥빠진 동작으로 머리를 푹 숙였다. 레니의 비명소리에 놀란 제 레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 왔으니까, 더 힘들 일은 없을 거야.”
레니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으면서 말했다.
“다 왔긴 하지만, 후우, 후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긴, 진짜 그게 문제는 아니다.
갈색 산맥의 북쪽 경계에 있는 자날 한타 봉의 서쪽 사면, 드워프들의 대광산 입구 가까운 곳에 지쳐버린 채 앉아서, 우리는 지금 크라드메서를 추적 할 길이 막혀버렸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엑셀핸드와 드워프들을 바라보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다시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웨이크닝 사운드가 멈춰버려서 더 이상 위치를 추정해 볼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크라드메서는 이제 웨이크닝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한 모양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답니다. 드워프들은 지금까지 들려온 웨이크닝 사운드로서 크라드메서의 레어를………… 꽤나 좁은 반 경 내에 설정할 수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도를 작성했다는군요. 허엇? 맙소사. 반경 1펜큐빗 정도랍니다.”
칼은 갑자기 히죽 웃으며 실없는 말을 했다.
“나도 한 때는 드워프어를 공부해 볼까 했지요. 결국 욕심만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런데 아프나이델께서는 어떻게 드워프어를 아는 겁니까?”
칼은 적당히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붉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지금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텅스 마법으로…………….”
“흠. 아인델프 님께서는 드워프어를 사용해서 말씀을 나누시잖습니까.”
일부러 자기들 말로 하고 있는 것이니 엿듣는 것은 조금 무례한 것이 아니냐는 칼의 점잖은 질책은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시뻘겋게 변하게 만들었다. “예. 엿듣는 것이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어차피 엑셀핸드 님이 전해 주실 말이니까.”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조금 전의 자세로 돌아가 버렸다.
절벽 옆의 이 광산은 분지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조금 돌리면 분지 바깥에 펼쳐진 갈색 산맥 지대 전체의 조망을 바라 볼 수도 있었다. 웅혼한 산맥과 봉우리들, 시야 닿는 곳 모두가 산봉우리였다. 마치 어마어마하게 큰 쟁기로 마구 파헤쳐 버린 땅처럼 주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평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갈색 산맥인가?
공기가 희박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맑아서 그런 것인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들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산봉우리들은 터무니없이 멀어진다. 지상의 아기자기한 사물에 익숙한 눈으로 바라보기엔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운 곳이다. 한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해도 그것은 사실 점이 아니라 집채만 한 산인 것이다. 산, 산, 산, 지평선은 사라져버렸다. 산봉우리들을 감싸고 도는 구름들은 마치 산들이 너울을 쓴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경악해 버릴 광경에서 고개를 돌려 보다 안심되고 내 수준에 맞는 사물인 사람들을 본다.
운차이는 가엾게도 기가 팍 죽어버렸다.
그는 갈색 산맥의 조망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래쪽의 분지만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에선 샌슨이 지금 무슨 대화가 오 가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운차이를 향해 이죽거리고 있었다.
“이봐, 운차이. 괜찮은 경치잖아. 한번 고개를 들어보라구.”
“시끄러.”
“여기까지 어렵게 올라왔는데, 좀 봐두는 게 좋잖아?”
“이 자식아! 날 귀찮게 하지 마!”
운차이는 이를 북북 갈더니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허, 참. 네리아는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운차이. 정말 왜 그러는 거야? 왜 산들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거지?”
“내 사정이니까 신경 끊어!”
네리아의 눈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녀는 욱 하면서 앞으로 한 발 내딛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젓고는 조금 전보다 더 상냥하게 말했다.
“알았어. 운차이가 불편하다면 굳이 볼 필요야 없겠지. 미안해.”
운차이는 고개를 조금 들어 이상하다는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난 소리없이 이죽거렸다. 아이고, 저걸 이해 못해? 사막에서 태어나서 지평선을 바라보며 산 사람이 갑자기 이런 고지대에 올라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어. 수평선을 보며 자라난 항구의 소녀인 레 니는 운차이를 잘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후아, 후아. 나도 사실 저 광경, 무서울 정도야. 이쪽을 보는 게 편해. 후아아…………. 운차이 아저씨 마음을 알겠는걸.”
“무섭다고?”
“응. 저렇게 많은 산봉우리들이 내 발 밑으로, 히유우우. 멋있긴 하지만, 헤엑. 너무너무 끔찍하기도 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아.”
“끔찍하다고? 흐음. 그렇게까지 심한 건가?”
그때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운차이에게서 굉장히 울리는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난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긴 내가 있을 곳 이 아니야………….” 운차이를 바라보고 있던 칼이 이 사태를 간단한 말로 정리해 주었다. “가벼운 고소 공포증이로군.” 그러자 네리아는 까르르 웃었다. “헤에, 헤. 난 낙뢰 공포증이고 넌 고소 공포증이니? 까르르르!”
흐음. 이상한 곳에서 동질감을 느끼는군?
잠시 후 엑셀핸드는 광산에서 달려나온 드워프들을 돌려보내고는 우리들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간신히 운차이는 정신이 빠져나가 버릴 듯한 거친 산악과 산봉우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들의 풍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엑셀핸드는 별말은 하지 않은 채 우리들을 인도했다. 우리들이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달려나왔던 그 드워프들은 절벽에 거대하게 뚫려 있는 광산으 로 뛰쳐나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다시 들어갔지만, 엑셀핸드는 광산 입구 옆으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분지 안쪽으로 걸어갔다. 제레인트 가 의아한 듯이 질문했다.
“어, 광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엑셀핸드는 무슨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지 처음에는 제레인트의 질문을 제대로 듣질 못했다. 그래서 제레인트는 한번 더 질문해야 했다.
“응? 아, 그래. 광산은 작업터지. 물론 저 아래에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저택과 방, 그리고 자네들에게야 장엄의 홀보다 못하게 보이겠지만 우리들 보 기엔 훨씬 아름다운 홀도 있긴 하지. 그렇지만 우리들의 친절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네들을 저 아래로 데리고 내려가는 것은 자네들에게 너무 힘든 일 이 될 걸세. 저 안은 어둡고 가파르거든. 다행히도 우리들은 지하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들을 위해 지상에 오두막을 몇 개 마련해 두었지.”
그때 길시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두막이라구요? 저게 말씀입니까?”
길시언이 가리키던 방향을 보자 나는 곧 얼이 빠져버렸다. 네리아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와아아앗! 굉장해!”
“뭐어야, 이건. 빛의 탑 아냐? 엑셀핸드! 그래서 그때 놀라지 않았던 거군요?”
“뭐? 아, 그 엉터리 환각 말인가?”
엑셀핸드가 말한 그 오두막이라는 것을 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이서스 임펠에 있던 그 황당무계한 건물, 빛의 탑이었다.
건물들은 분지 옆의 산비탈을 따라 제멋대로 쌓여 있었다. 건물들 사이로 길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어떤 길은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어떤 길은 다른 건물의 아래에 있는 기둥들 사이로 나 있는 식이었다. 게다가 어떤 길은 허공에 놓인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수많은 계단들과 다리가 있어서 간 신히 돌아다닐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 식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건물들은 모두 크기가 다른 사각형이었는데 어떤 건물의 경우에는 아래에 있는 건물 들보다 더 튀어나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산비탈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견 무질서한 듯한 그 건물들이 모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칼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항상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제 포기해야 되겠군.”
엑셀핸드는 싱긋 웃음으로써 칼의 칭찬에 대답했다. 제레인트는 감탄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정말 신기한 마을이군요. 물기가 없어요.”
“예?”
“물, 그러니까 급배수 시설이 안 보인다고요. 식수는 떠서 나를 수도 있겠지만 배수는 어떻게 하는 건지? 어디 물 흐를 만한 곳이 안 보이는군요?” 그러자 엑셀핸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행이 어리둥절해하자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난 전에 여기 와보았습니다. 생각해 보시죠. 여기는 드워프들이 만든 도시입니다. 당연히 배수로는 지하로 나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보시면 알 겠지만 급수 시설도 모두 지하에 되어 있어 물을 떠 나를 필요는 없습니다.”
“예? 아니, 어떻게?”
“산 위에 저수지를 만들고 거기서 지하를 통해 이 도시로 물이 내려오게 하는 거랍니다.”
“아, 놀랍군요.”
일행이 탄성을 터뜨리자 엑셀핸드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자! 설명보단 직접 보는 것이 낫겠지. 말들은 저기 보이는 저 건물에 매어두면 되네. 마구간일세.”
샌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구간이요?”
“왜 그러나? 아, 그래. 하하하. 우리야 말은 없지만 노새는 이용하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일단 노새를 매어두는 그 마구간으로 걸어갔다. 마구간은 낮은 위치에 있는데다가 다른 건물들에 비해 월등히 커서 그 위로 다른 건물이 몇 개 얹혀 있었다. 안에는 광물을 실어나르는 데 쓰는 것으로 짐작되는 노새들이 많이 매어져 있었는데, 마구간 하면 연상되는 지저분함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히야. 드워프들은 마구간도 정말 멋들어지게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단단한 석조 건물이었고 안에는 포 석까지 깔려 있었다(하긴, 돌로 되어 있어야 위에 있는 건물들의 하중을 견디겠지). 그리고 마사 하나하나가 모두 벽돌로 구분되어 있었고 안에는 짚이 가득 쌓 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채광은 만족스러운 수준이었고 답답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풍이 별로 들어오지 않 는다는 것이다! 길시언은 감탄했다.
“이래서야 임펠리아의 마구간이 부럽지 않겠는데!”
흠. 드워프들은 모두 뛰어난 건축가라더니 사실인가 보군. 우리들은 크게 감탄하면서 지친 말들을 매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굉장한 마을인데. 그런 데 이 멋진 마을엔 왜 드워프들이 하나도 없지? 손님용이라더니, 드워프들은 모두 지하에 사나? 마침 네리아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 말했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지? 다들 일하러 갔나?”
“어, 잠깐. 저기 하나 보이는데.”
샌슨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자 좀 높은 곳에서 한 드워프가 집 앞에 있는 널찍한 마당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마당이라는 것 이 사실 다른 건물의 옥상이긴 했지만. 어쨌든 마당인지 옥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곳에서 파이프를 피우고 있던 그 드워프도 우리를 발견했다. 파이 프를 손에 든 그 드워프는 손을 들어올리며 텁텁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어, 망령 난 엑셀핸드 아닌가? 돌아왔구먼?”
윽! 이, 이게 뭐야? 난 칼에게 대단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칼은 당황해 버렸다.
“아니,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건가, 네드발 군?”
“노커는 가장 고귀한 드워프라면서요?”
“물론 그러하네.”
“그럼 저 드워프는 굴을 너무 많이 파서 불쌍하게도 머리가………….”
“아, 아닐세. 네드발 군. 어째 자네는 그 모양인가. 왜 고귀한 것을 대하는 예절에서 인간과 드워프가 똑같으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아, 아! 하하하. 하아?”
씨이. 그게 또 그런가? 우리 일행들이 칼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엑셀핸드는 위쪽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이 좋은 낮에 손에 연장 대신 파이프나 들고 있어? 이 미친 드워프 같으니!”
샌슨은 알았다는 듯이 기품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함으로써 우리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분도 상당히 고귀하신 드워프인가 보군요.”
그러자 엑셀핸드는 콧소리를 심하게 내고는 말했다.
“뭐, 고귀해? 웃기는 소리! 아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가서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이 정신 나간 드워프의 상징 같은 놈아!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거라!”
엑셀핸드는 우리들을 인솔해서 올라가기 시작했고 위쪽의 그 드워프는 두 다리를 딱 벌리고 선 채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네리아와 운차이는 가파 른 계단을 사뿐사뿐 잘도 올라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올라가기가 꽤 힘든 계단들이었다. 이런 젠장. 드워프들의 다리 길이에 맞춰져 있어 계단이 너무 낮잖아. 낮은 계단으로 높게 올라가려니 자연 계단 폭이 좁고 경사가 가파르다.
이리저리 꺾이는 계단을 오르고 구름다리를 하나 건너자 그 드워프가 서 있던 마당 또는 옥상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드워프는 히죽히죽 웃으며 우 리 일행들을 관찰하더니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이봐. 이 인간들이 크라드메서를 때려잡으러 온 용사들인가?”
크라드메서를 어쩐다고? 우리들이 이 감당하기 버거운 누명(?)에 당황해하자 엑셀핸드는 이를 가는 것 비슷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놈. 요 미친 녀석!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크라드메서를 잡겠다고?”
그 드워프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귀를 좀 후비더니 태평하게 말했다.
“어디 보자. 모두 아홉 명인가? 하하하! 인원도 딱 맞는구먼 그래. 저기 저 소녀를 제외하면 이게 바로 크라드메서의 파멸을 위해 결성된 엑셀핸드의 여덟 별이로구먼?”
윽. 당신이 제외한 그 소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는지? 엑셀핸드는 이제 자신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진노한 목소리로 외쳐대었다. “이놈아!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냐?”
“아니지. 저 소녀도 포함한 다음 저 마법사를 제외하면 되겠군? 저 마법사는 핸드레이크의 역할을 하면 될 테니까. 완벽하군.”
“어어억! 무시당했다! 네놈에게!”
아프나이델은 너무 거대해져 버린 자신에 대해 당황해하고 엑셀핸드는 깡그리 무시되어 버린 자신에 대해 화내는 동안 칼이 먼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칼 헬턴트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일하프 크루겐. 바일하프나 바일, 아무 쪽이나 좋을 대로 부르면 되네. 이 광부들의 낙원에서 히터의 일을 맡고 있다네.”
“아, 그러시군요. 히터 님이시군요.”
히터라구? 노커는 두드리는 사람이라지만, 그렇다면 히터는 뭐하는 사람이지? 두드리기 전에 가열하는 사람인가? 윽. 그건 대장장이식 생각….., 잠깐. 그렇다면 그게 바로 드워프식 생각이잖아. 히터 바일하프 크루겐은 우리들과 주욱 인사를 나누고는 말했다.
“자네 일행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 반갑구먼.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이제 여기서 푹 쉬면서 그 동안의 고통을 잊게.”
“예? 고통이라니요?”
“아, 상대가 앞에 있으니 말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엑셀핸드와 함께 다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내 충분히 짐작하네.”
엑셀핸드는 이제 실성한 듯이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마구 당기고 있었다.
“허, 허허허! 허어으악!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이 발생한 것이렷다!”
이게 무슨 기합이지? 어쨌든 엑셀핸드는 그렇게 외치더니 곧 빠르게 움직였다. 드워프와 불의 카리스 누멘이여! 당신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 할 수 있나이다. 엑셀핸드가 정말로 ‘민첩하게’ 몸을 날린 것입니다! 엑셀핸드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바일하프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그의 뒤를 붙잡았 다. 물론 바일하프도 드워프답게 땅딸하고 굵은 허리를 가지고 있어 엑셀핸드의 짧은 팔로 껴안기엔 좀 어려웠기 때문에 엑셀핸드는 그를 껴안는 대 신 한 손으론 뒷덜미를 쥐고 다른 손으론 벨트 뒤를 붙잡아 통째로 위로 들어버렸다. 휘익!
“굉장해!”
레니는 크게 벌린 입을 재빨리 두 손으로 가렸다. 위로 들어올려진 바일하프는 숨가쁜 목소리로 외쳤다.
“헤에엑! 이, 이 망령 난 드워프가!”
“이놈! 내가 첫 번째로 두드린다는 거 모르냐! 네 녀석의 몸으로…………, 크억!”
아이고, 맙소사! 바일하프는 들어올려진 채 그대로 팔꿈치를 뒤로 날려 엑셀핸드의 콧잔등을 찍어버렸다. 엑셀핸드는 무너져버렸고 그대로 바일하 프의 뚱뚱한 몸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바일하프는 엑셀핸드를 깔아뭉갠 채 누워서는 계속해서 그를 뭉기적거리며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런 미안하군. 자네가 첫 번째로 두드려야 되는데, 실수로 내가 먼저 두드려버렸는걸? 하지만 히터인 내가 열받기도 전에 자네가 먼저 열받아 버렸으니 공평한 거겠지? 하하하!”
키 큰 인간들이 얼빠진 얼굴로 내려다보는 가운데 땅딸막한 드워프 두 명이 포개어져 있는 모습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웃기는 기분을 들게 했다. 엑 셀핸드는 충격과 압력 때문에 잔뜩 짓눌린 신음소리만 겨우 내었다. “이, 이놈……………!” 일행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로 바일하프와 엑셀핸드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만은 다시 칼에게 의혹에 가득찬 눈길을 보내었다.
“노커….., 정말 고귀한 드워프라는 거 맞아요?”
“흠, 커흠! 음. 물론이지! 당연하다네!”
“왠지 신빙성이 없게 들리는데요.”
어쨌든 우리들은 바일하프 크루겐이 앉아 있던 마당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바일하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자네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 건물을 치워두었네.”
“아니, 혼자서 말씀이세요? 이 큰 건물을?”
“응? 하하. 물론 아니지. 젊은이들과 부인네들은 일을 마치고 다들 자기 일터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네. 그리고 내가 자네들을 맞이하고 돌봐주기 위 해남았고.”
“그런데 저희들이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동굴에서 뛰쳐나온 드워프들도, 그리고 이 바일하프 씨도 우리가 도착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눈치인걸? 바일하프는 고개 를 기분 좋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 노커 엑셀핸드가 자네들을 데리고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시간을?”
바일하프는 파이프를 맛있게 피우며 말했다.
“어제 레브네인 호수쪽에서 올라가는 빛을 보았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페어리퀸을 굉장히 화나게 만들어버린 모양이더군. 엑셀핸드가 돌아올 때가 거의 되었고, 또 레브네인 호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 왠지 예감이 이상해서 내가 다른 드워프들에게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네. 사실 유사시 엔 호수까지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네. 그런데 자네들이 올라오는 것이 멀리서 보이더군.”
“아아.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자네들의 일 맞는가? 페어리퀸을 화나게 만든 것.”
“저희들이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은 아닙니다만,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은 맞습니다.”
칼의 대답에 바일하프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 이야기는 천천히 듣도록 하지. 방은 많고 모두 잘 치워두었으니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 가지게.”
음. 정말 방이 많긴 하네. 꽤나 커다란 건물인걸. 안에 있는 가구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드워프용이 아니라 인간용이라서 불편할 일은 없었다. 통로의 크기나 방의 크기 모두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모양인데. 일행들이 모두 방을 잡고 나자 바일하프는 욕탕과 식당의 위치를 가르쳐준 다음 말했다.
“씻고 와서 음식을 드세나. 그리고 그때까진 일 이야기는 하지 말고. 아, 망령 난 드워프. 네 녀석은 식당이 먼저일 테지?”
“이놈아, 당연하지! 하루 종일 산을 탔단 말이다.”
뭐가 당연한 건지 잘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산을 탔으니 좀 씻어야 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우리들은 방들 앞으로 길게 나 있는 복도를 따라 복도 끝에 있는 욕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놀랍지도 않은데.
욕탕도 석조로 되어 있다! 그래, 안 놀라겠어! 내 개념으로 욕조라는 것은 거대한 나무 물통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몇 사람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석조 목욕통을 만들어두었다. 저기에 어떻게 더운 물을 채울까? 어, 어라? 그러고 보니 물 끓이는 아궁이도 없잖아? 그럼 어떻 게 물을 쓰라는 거지? 그런데 힘겹게 옷을 벗고 앙상한 몸을 드러낸 아프나이델은 일단 부르르 떨더니 욕탕 끝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러더니 벽에 달려 있는 이상하게 생긴 쇠붙이를 만지작거렸다. 뭐야? 아프나이델이 손을 어떻게 움직이자 쇠붙이 끝에 달려 있는 대롱에서 뜨거운 물 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헤에에? 마법이에요?”
“응? 하하. 마법이 아니라 기술이다. 이걸 돌리면 뜨거운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
와? 그거 신기하네? 길시언과 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프나이델의 주위에 우르르 몰려서서 그 신기한 대롱을 감상했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 진 대롱이었는데 벽에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바퀴를 돌리자 물이 나오고, 반대로 돌리면 물이 그치는 것이다! 우화, 그거 정말 신기하네.
그러나 칼이나 아프나이델은 이게 신기하지도 않은지 구경하지도 않고 그대로 목욕통 안에 들어가더니 곧 죽은 사람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목욕통 안에서 눈을 감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린 것이다. 제레인트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샌슨이 정중하게 물장난을 요구했음에도 불구 하고 “받아랏, 후치! 핫하하하!” 난 그것을 사양해야 되었다. 그 세 사람이 익사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으니까.
완전히 늘어져버린 운차이 역시 욕조에 들어가자 그제야 화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간혹 바퀴 달린 물대롱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요?”
운차이는 수면으로 눈만 내민 채 살벌한 시선으로 바퀴 달린 물대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고 그러자 머리카락이 그의 얼 굴에 착 달라붙은 가운데 그의 눈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낮고 음산하게 말했다.
“저거, 단단히 고정되어 있겠지?”
갑자기 길시언이 욕조 바닥에 미끄러져버렸다. 왜 저러는 거지? 길시언은 어푸거리면서 간신히 물 위로 머리를 내밀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 을 쓸어내렸다. 그는 차마 운차이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은 채 그를 외면하면서 히죽거렸다.
“하, 하하. 운차이. 뜨거운 물이 만들어지는 곳은 다른 곳이다. 좀 떨어진 보일러에서 물을 끓이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곳과 저 수도꼭지 사이는 파 이프로 연결되어 있고, 저 수도꼭지는 그 파이프의 끝에서 물이 나오게 했다 말게 했다 하는 조절 장치일 뿐이야.”
“…..알고 있었어.”
입은 열 때 유용할 경우가 많지만, 때론 닫고 있을 때 얻는 것이 많을 수도 있어. 히히히. 나도 OPG를 다시 끼고 저걸 떼어내 볼까 생각하고 있었거 든.
어쨌든 그 거대한 몸을 마구 움직이며 물장난을 심하게 치던 샌슨에게 점잖게 설교를 내리고 있던 칼이 설교를 하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가 익사 할 뻔한 사고만이 있었을 뿐, 아무도 익사시키지 않으면서 무사히 목욕을 마쳤다. 아, 사고는 하나 더 있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네리아와 레니가 들어간 쪽에서 앙칼진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라! 흘러라! 쏟아져라! 줄줄 새라! 이이…………, 또 뭐 없니, 레니?”
“터져라?”
“맞아맞아. 드워프들이니까 좀 과격한 걸 좋아할지도 몰라. 터져라, 물! 안 터지는데?”
모두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할 수 없이 내가 문 밖에서 고함을 질러주었다.
“그 위에 있는 바퀴를 돌려봐요!”
“꺄아아악!”
쿠당, 쾅쾅. 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도 또 한참 동안 귀가 멍멍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 끝에 네리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허리야……….. 응? 뭐야. 안 들어온 거야?”
“후아, 후아. 밖에서 말한 거예요. 괜찮아요?”
“후치잇! 간 떨어질 뻔했잖아! 이걸 돌려? 안 돌아가잖아!”
“반대쪽으로 돌려보면 어떻겠어요, 네리아 언니?”
“어멋! 어, 어엇! 쏟아진다! 이거 어떻게 멈추는, 앗, 뜨거! 어푸! 어푸! 코에 물 들어갔다! 레니! 도와줘!”
으으윽. 일행들은 모두 욕탕 쪽에서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은 심히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내게 말했다.
“네드발 군. 난 항상 자네에 대한 나의 신뢰를 표현할 길을 모색해 왔지. 이제 이 뒷수습을 부탁하는 것으로써 내가 자네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표 현하겠네!”
그리고 칼은 총총히 걸어가 버렸으며 나머지 일행들도 배신스럽게도 모두 뒤를 따라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으윽. 욕탕 밖에 서서 친절하게 수도꼭 지 사용법을 외쳐주고 있어야 된단 말이지.
겨우 레니와 네리아 모두 뽀송뽀송한 얼굴로 욕탕에서 나오고, 그래서 우리 세 명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이미 얼큰하게 취한 엑셀핸드가 우리들을 맞 이했다.
식당은 커다란 베란다가 달린 넓은 공간이었다. 베란다 쪽에서는 갈색 산맥의 봉우리들이 끝없이 늘어선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였다(그래서인지 운차이 는 베란다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방 가운데로 커다란 직사각형의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드워프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 참 희한하네. 사람들이라면 몰려와서 구경을 한다거나 이야기를 걸거나, 하다못해 환영이라도 할 텐데 여기 드워프들은 모두 일만 하나 보군.
일행들은 이미 식사중이었고 바일하프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면서 엑셀핸드와 정겨운 악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 나 칼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면서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이건 잘 모르겠군. 드워프 방식의 지도라서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걸. 퍼시발 군? 자네가 대충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샌슨은 맥주를 주욱 들이켜고 나서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군사 지도와 특별히 다른 점은 없습니다. 이쪽이 북쪽입니다. 그걸 모르셔서 어려우신 겁니다. 여기가 우리가 있는 자날 한타 봉서사면이므로 보시는 바와 같이 추정 지역은 이 점을 중심으로 한 직경 1펜큐빗의 원을 그리게 되는 거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단지 북쪽을 찾는 것이 어려운 겁니 다. 음하하하!”
칼은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퍼시발 군. 한 번만 더 묻는 걸 용서해 주게. 우리가 여길 샅샅이 뒤져 크라드메서를 발견하려면 시일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아, 그걸 물으신 겁니까? 에, 그러니까 능선이 요렇고…………, 보급도 시원찮고 지대도 고약하군요. 이 절벽들의 경우엔 조사하는 것이 만만찮겠는데 요. 근사치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순 없겠습니다만 이 정도라면 1, 2개월 정도 걸린다고 해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칼은 머리를 좌우로 가로젓더니 힘없이 말했다.
“자네에게 힌트를 줄 수 있어 기쁘네, 퍼시발 군. 상대는 이그누스 드래곤이야. 따라서 그의 레어는 드워프나 하플링들의 굴처럼 작은 굴이 아닐세. 아주 큰 굴이 필요할 거야. 그리고 레어에서 나와 돌아다닐 때도 상당히 넓은 공간이 필요할 걸세. 내 말 이해했는가? 좁은 절벽 사이라든지 숲이 너 무 밀생해서 거동이 어려운 곳은 제외해도 된다는 말일세. 아무르타트의 레어가 있는 끝없는 계곡을 연상해 보겠나?”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한 시간이면 됩니다.”
콰당! 오래간만에 만난 드워프제 맥주에 취해 있던 엑셀핸드가 뒤로 넘어져버렸고 아프나이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엑셀핸드는 씩씩하게 일어 나더니 테이블로 돌진했다. 순간!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휙 그려졌다고 느꼈을 때 이미 엑셀핸드는 테이블 위에 완전무결한 개구리 자세로 올라타 앉 아 있었다.
“어디야? 자네 말은 이 지역에서 크라드메서가 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뿐이라는 말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짐작하는 거지? 너 누구냐?”
“많이 취하셨군요. 에, 설명하지요. 전, 아, 전 샌슨 퍼시발입니다. 에, 저는 언젠가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의 레어 근처에 접근해 본 적이 있습니 다. 그래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전 칼이 말했듯이 드래곤의 레어이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든 이착륙에 수월하도록 주위에 갑자기 솟 아오른 산봉우리 같은 것은 없어야 됩니다. 하지만 다른 생물이나 인간들의 접근이 쉬운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몸이 걸어다니려면 나무가 너무 많으면 곤란하겠지요.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아마 오랫동안 수면기에 있었을 테니 자라지 않던 나무들도 자라났을지 모릅니다. 자, 그럼 간단합 니다. 하늘로 트여 있는 지형. 하지만 접근이 어려운 곳. 커다란 굴이 있을 수 있는 지형이며 동시에 수령이 짧은 나무들, 즉 양수림(陽樹林)이 조성된 곳이지요. 여깁니다!”
난 샌슨이 짚은 곳을 바라보며 ‘내 생각과 같군!’이라고 외치려 했지만 네리아가 질문해 와서 그러지 못했다.
“후치야. 양수림이 뭐니?”
“아프나이델에게 물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크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말합니다. 숲은 먼저 양수림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아래에 음수(陰樹), 그러니까 그늘에서 잘 자라는 나무들이 조성되지요. 그래서 음수들이 충분히 자라나면 먼저 있던 양수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의 분포를 보고 숲의 나이를 짐작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 경우엔 드래곤의 수면기를 짐작하는 방법이 되겠지요.”
“헤에?”
네리아가 만족했기 때문에 난 샌슨이 짚은 곳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과 같군!’이라고 외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실망해야 되었다. 난 지도를 볼 줄 모른단 말이야. 하지만 길시언은 한 손으로 턱을 쓸어만지면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이 지형은 그렇게 생기긴 했군. 거대한 생물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고. 그리고 날아오른다고 볼 땐, 주위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던 상승 에 방해될 지형은 없군.”
음. 내가 말하려던 것보다 훨씬 멋있게 말하는군. 엑셀핸드는 테이블에서 뛰어내리더니 곧장 배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가세!”
바일하프는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바로 잡으러 가는 건가? 그럼 오늘 저녁엔 드래곤 파이를 맛볼 수 있겠군.”
“이, 이이, 이이익! …………잠깐. 내가 대답하면 무시하지 않을 거지?”
“아, 아니지. 나도 함께 가볼까? 드래곤과의 싸움이라는 것은…………….”
“이놈이 또 무시했어!”
바일하프는 낄낄거리더니 우리 일행을 보며 말했다.
“여기는 접근하기 쉬운 곳이 아닐세. 푹들 쉬고 내일 아침에 단단히 채비를 갖추고 출발하세. 말은 아마 놓고 가야 할 테고, 식량이나 다른 준비물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 보게. 무기는 어떤가? 드래곤 슬레이어로 불릴 만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드워프제 무 기들이 꽤 있다네.”
“또, 또 무시했어억!”
‘노커의 절규’라는 제목을 붙이면 그럴듯한 장면을 배경으로, 칼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해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크라드메서가 우리를 해칠까 걱정하고 있지요.”
“뭐라구?”
“우리는 크라드메서에게 라자를 연결지어 주기 위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라자? 드래곤 라자 말이야? 누가 라자인데?”
“여기 있는 레니 양입니……….., 레니 양?”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레니는 깜짝 놀라더니 곧 의자에서 일어나 황급히 바일하프에게 인사했다. 바일하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레니? 페어리퀸 말인가?”
“예?”
“레니라면, 그건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가운데에 있는 이름이잖아. 본명은 혹시 다레니안 아닌가?”
“아, 아뇨. 애칭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레니예요.”
“그래? 허헛. 그거 좋은 이름이군. 그럼 다레니안의 애칭인 레니가 아니라, 레니의 애칭인 렌이라고 부르면 되나?”
“예? 렌이요? 좋으실 대로. 아, 아니, 그냥 레니라고 불러주세요. 전 그런 이름은 익숙하질 않아서요. 부르셔도 못 알아들을지도 몰라요.”
“알겠네. 그래. 아가씨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는 건가?”
“예? 예. 그래요. 그런 것 같습…………, 그렇습니다. 제가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어요.”
바일하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니를 바라보았고 레니는 얼굴이 빨개진 채 머뭇거리더니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네리아는 레니의 목을 감싸안 으며 웃었다.
“렌? 그거 괜찮네. 까르르르. 그럼 난 넬인가? 넬이라고 불러봐. 운!”
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동시에 운차이에게 집중되었다. 운차이는 창백한 얼굴로 몰려든 시선을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서 구시렁거렸다. “운이 뭐야………….” 샌슨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바일하프 씨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그 덩치 커다란 녀석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말일세. 크라드메서는 웨이크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 같은데, 아프나이델, 그럼 도대체 얼마 후에 깨어나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정확하겐 알 수 없습니다. 엑셀핸드? 웨이크닝 사운드가 멈춘 것은 언제랍니까?”
테이블에서 내려오고 있던 엑셀핸드가 대답했다.
“어? 어. 그건 어젯저녁이었다고 하더군.”
“어젯저녁이라구요. 그럼…………, 크라드메서의 나이를 알면 좋지만 그건 모르고 안전하게 하루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루요? 그럼 오늘 저녁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하지만 그건 안전하게 생각한 것이고, 아마 크라드메서는 나이가 대단히 많은 드래곤일 테니까 그렇게까지 빠르게 일어난다고 불안해할 필요 는 없겠지요. 게다가 그건 단지 깨어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프나이델은 손을 모으더니 천천히 말했다.
“깨어났다고 해서 바로 날아오를지 말지는 크라드메서의 마음대로잖겠습니까? 어쩌면 깨어나서 그대로 누워 있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서 바로 일어날 수도 있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요. 어쨌든 활동기 에 접어들었다 해서 레어에서 꼭 나오지는 않고 그대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나와서 가까이에 있는 드워프들의 광산을 덮칠 수도 있겠 고, 그대로 바이서스의 하늘을 유린하기 시작할 수도 있겠죠. 그건 그의 의사에 달린 문제로군요. 하지만 긴 수면기를 방금 끝내었으니 아무래도 영 양 보충이 시급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프나이델의 말투는 평범했지만 방 안의 온도는 제법 내려가는 것 같았다. 길시언은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안전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찾아보는 것이………….”
일행의 눈썹이 모두 힘없이 내려갔다. 드워프의 광산으로 찾아오는 동안 모두들 너무 지쳐버린 것이다. 모두들 말은 하지 않은 채 칼만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결국 칼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드래곤과 라자의 계약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크라드메서가 만일 어딘가로 날아 가 버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그를 붙잡는 것은 어렵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수면기에 있었던 크라드메서가 곧장 날아오르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됩 니다. 물론 제멋대로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칼은 일행의 얼굴을 주욱 둘러보고 나서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모두들 쉬도록 합시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건. 글쎄요. 대단히 중요한 만남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허겁지겁 달려오는 데만 급급했습니 다. 우선 시간이 우리들을 채찍질했고, 그 다음 여러 가지 방해들이 우리들을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차분히 생각해 볼 여유 같은 것은 없이 그저 맹목 적으로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달려온 덕분에 결국 우리들은 이곳에 도착했고, 크라드메서는 이제 지척에 있습니다.”
일행 모두의 얼굴에 짙은 감정의 그림자가 지나쳤다. 그래, 길었어. 그렇지만 결국 여기까지 온 거야. 우리들 중 한 사람도 헤어지지 않고……………, 아, 이루릴이 없군.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 중 하나도 떨어져나가지 않고 서로를 도와가며 여기까지 왔군. 우리는 이제 마지막 고비, 목적 달성 의 최후의 순간에 와 있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 팔을 조금 벌리더니 말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일행들에게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칼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정은 특별히 고맙다는 말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거라고들 하지만, 전 여러분들이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와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는 아닙니 다. 그 험난한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자질과 능력을 보여준 것이며, 각 개인의 자질과 능 력은 모두가 특별한 것이며 원래 존중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칼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자 괜히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난 여러분들이 모두 끝까지 서로를 믿고 주저함이나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어떤 역경보다도 동료의 좌절이나 실패 가 더 우리를 아프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강인한 여러분들은 한 번도 좌절하거나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던 레니마저도 어느새 눈을 크게 뜬 채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젖 어 있는 것 같았다.
“퍼시발 군의 지혜로 그의 소재를 찾아내는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시간은 지켜졌고, 우리는 여기 있으니, 이젠 우리들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려봐 야 될 때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오늘, 남은 시간 동안 우리들 모두 마음을 정리하고 그 중요한 만남에 대처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는 여유가 필요하 다고 생각됩니다. 하하하………….., 어쩌면 내일의 만남은, 우리 모두의 남은 평생 동안 기억될 만남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들을 되새 겨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길시언은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는 내일 크라드메서를 만나는 겁니다. 우리 시대 최강의 드래곤을 만나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의 신화를 만나는, 그런 기분이 드는데요?”
제레인트의 말에 아프나이델이 드물게도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몇 백 년 후엔 우리들은 신화의 등장 인물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레인트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갑자기 허리를 펴더니 근엄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말을 조심해야 되겠군. 후대의 사람들이 날 이 일행의 어릿광대로 평가하는 것은 반갑지 않은걸.” 하하하…………. 웃음이 번졌다. 신화? 글쎄. 난 오늘 신화의 정의 하나를 내릴 수 있겠는걸?
아버지의 일상은 아들의 신화가 되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