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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1권 13화 – 인연의 시작

인연의 시작

묵향이 머무르게 된 집은 작은 방이 세 개, 부엌이 한 개, 천장에 다락이 한 개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이었다. 묵향은 우선 하인들이 머무르는 작은 방을 하나 차지하 고 앉아서 집의 수리부터 시작했다. 그가 수리를 하기 위해 나온 인부들에게 지시를 한 지 나흘 만에 집은 깨끗이 수리되었다. 방 한 개를 욕실로 만들고 천장이나 벽을 수리하는 작업이었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방 대인이 하녀를 한 명 주겠다고 했지만 식사는 표국에서 했으므로 목욕하고 잠만 자는 집에 하녀 를 둘 필요는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표두로서 물품이 안전하게 운송되도록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자 얼마 되지 않던 인원들이 3백 명 정도로 늘어났고, 표국은 각종 화물이 출입함에 따라 쉴 사이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묵향은 바쁜 와중에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 시간이 없으면 잘 시간을 줄여서라도 운기조식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무공을 익히고 있었는데, 요즘 그 가 힘쓰고 있는 것은 어검술(御劍術)이었다. 어검술이란 글자 그대로 칼[劍]을 다스리는[御] 기법이다. 강기와는 달리 어검술은 진기를 이용하여 검이 가진 모든 힘 을 밖으로 끌어내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어검술을 사용하면 보통의 강철 검으로 신검(神劍)과 같은 파괴력을 낼 수 있다. 그의 어검술은 아직 초보적인 단 계다. 검강을 뿜어내기 직전 검에 붉은빛의 강기가 뇌전이 흐르는 것같이 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어검술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 다. 하지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궁금증만 쌓여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날도 묵향은 검과 씨름을 하다가 골치가 아파짐을 느끼고 밖으로 나왔다. 여러 가지로 심경이 복잡할 때는 바람을 쐬면서 걷는 게 상책이다. 집구석에 들어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보다가 한 계집아이가 만두를 훔치는 것을 봤다. 그 아이는 만두를 가지고 얼마 가지도 못해 잡혀서 뭇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묵향이 끼어들었다.

“아직 어린앤데 너무 심한 게 아니오?”

묵향은 코피를 흘리고 있는, 때가 꼬질꼬질 묻은 옷을 입은 비쩍 마른 열두 살가량의 소녀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심한 게 아니오. 얘는 맞아야 해. 어디 가서든 일해서 벌어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둑질부터 하려고 드니…….?”

주인은 그러면서 또다시 그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이는 그냥 포기한 듯 맞고만 있었다. 반항하지도 않는, 아니 반항할 기운도 없는 그 아이를 보고 묵향의 마음이 움직였다. 묵향은 또다시 쥐어박으려는 가게 주인의 손을 잡았다.

“아이를 놓아 주시오.”

묵향이 잡은 손에 힘을 약간 더 주자 사내는 바로 손을 놓았다. 그러자 묵향도 주인의 손을 놨는데 그 손에는 붉게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묵향은 소녀를 보고 물었 다.

“왜 훔쳤니? 일을 해서 벌 수는 없었냐?”

“저는 너무 어려서 아무 일도 시켜 주지 않아요.”

아이는 힘없이 대답했다. 묵향이 바라보니 아이는 그렇게 맞았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너 요리 잘하냐?”

“예? 못해요.”

“할 수 없지. 날 따라 오너라.”

아이가 주춤주춤 망설이자 묵향이 말했다.

“일자리를 주려는 거다. 일을 하고 싶냐?”

그 말을 듣자 아이는 조르르 따라왔다. 묵향은 천천히 걸으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소연(蘇衍)이요.”

“좋은 이름이구나. 식구는 있냐?”

“집에 아픈 엄마가 있어요.”

“아버지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너희 집이 어디냐?”

“그건 왜 물어요?”

“너에게 일을 시키려면 너의 어머님께 허락을 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

“응…, 그럼 따라오세요.”

소연이의 집은 낙양 구석의 빈민가에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으로 소연이는 묵향을 안내했다. 묵향은 망설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창을 넘 어 들어온 하수구 냄새 때문인지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고, 방구석에는 다 떨어져 걸레가 된 이불을 덮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소연이 어머니의 병세가 심각한 것처럼 보였기에 묵향은 소연이의 어머니를 안고는 급히 의생(醫生)을 찾아 갔다. 가마 따위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안고 가는 것이 환자에게 충격이 적게 가기 때문에 그냥 여인을 안고 갔다. 의생의 말로는 여인의 병은 과로와 영양실조가 원인이었다. 그는 의원 부근에 자리를 잡고 그 여인이 적당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마를 불러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다음부터 묵향의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여인은 한 달가량 영양 있는 음식과 탕약을 먹으며 몸을 조리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향은 그 여인을 가 정부로 고용하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가져다주었으므로 집은 작은 편이었지만 모녀에게는 상당히 풍족한 삶이 시작되었다.

여인은 어려운 생활 때문인지 음식 솜씨가 형편없었지만 묵향과 소연이가 열심히 먹어 대는 동안 어느덧 차차 나아졌다. 그리고 소연이는 점점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소연이와 함께 집 앞에 작은 정원을 만들고 꽃씨를 뿌렸다. 그리고 소연이에게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글이나 그림, 음악 등을 가르쳤다. 소연이가 곧잘 했으 므로 바쁜 와중에서도 소연이를 가르치는 것은 묵향의 조그마한 기쁨이었다.

어느 날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소연이가 마루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묵향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무술을 해요?”

“뭐?”

퍼뜩 정신이 든 묵향이 되물었다.

“아저씨도 무술을 할 줄 아느냐고요.”

“왜 그러니?”

“오늘 거리에서 칼싸움을 하는데, 사람이 하늘로 새처럼 붕붕 날았어요. 아저씨도 날 줄 알아요? 아저씨도 칼 차고 있잖아요? 가르쳐 줘요.”

아마 소연이는 근처 마을에 놀러 갔던 모양이었다. 묵향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소연이가 살던 낙양성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 그래서 심심하면 아이들과 어울려 놀 기 위해 가까운 마을로 갔다. 이번에는 아마 무림인들이 싸우는 걸 보고 놀란 모양이다. 소연이의 말도 안 되는 질문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저씨는 하늘을 날 줄 몰라.”

“아저씨는 약해요?”

“응, 약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작은 집에서 살고 있잖아. 내가 강하면 많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이만큼 큰 집에서 살겠지.”

묵향이 과장스럽게 손짓을 하며 말하자 소연이는 이해한 모양이다. 묵향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까불다가 잠든 소연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연이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을까? 쓸데없이 피비린내 나는 무림의 세계에 발을 들이밀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리 저리 생각하다가 아무리 여자 애라도 약간의 호신술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연이도 무술을 배우고 싶냐?”

“예.”

“그럼 가르쳐 주기로 하지. 내가 잘 모르니까 그렇게 대단한 건 못 가르쳐 준다. 그렇지만 무술을 배우면 심신을 닦는 데 많은 도움이 되니 한번 배워 보렴.” “예, 그러면 아저씨가 내 사부가 되는 거예요?”

“아니, 그냥 배우는 거지 사부는 무슨……. 나는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어. 우선 심법부터 배우는 게 좋다. 이건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이란 것으로 정통적 인 도가의 내공수련 심법이지. 이걸 꾸준히 익히면 무병장수할 뿐 아니라 몸과 마음이 예뻐진단다.”

“아저씨도 그걸 익혔어요?”

“익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너에게 가르치겠냐?”

“하지만 아저씨의 모습은 예쁜 게 아니잖아요?”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실수했구나. 예쁜 게 아니라 튼튼해지는 것이다. 이건 우연히 내가 배운 것인데ᅳ마교에서 훔쳐 배웠다고는 죽어도 못 가르쳐 주지―여 태까지 내가 익히던 것보다는 더 뛰어난 심법이지. 이것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내가 좀 수정을 해서 만든 것이니 다른 이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알겠냐?” “예.”

“그리고 이걸 익히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와 자기 전에 2각에서 4각(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매일 수련해야 한다. 할 수 있겠냐?”

“예.”

“이걸 익히기 시작한 다음에는 다른 심법은 익히지 말고 언제나 이것만을 익혀야 한다. 안 그러면 내공이 정순(純)하지 못해서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단다.” “예, 그런데 내공은 뭐고, 정순하다는 건 또 뭐예요?”

“내공이란 건 몸속에 쌓이는 형태가 없는 힘인데, 이걸 이용해서 네가 말한 대로 날아다니는 거란다. 너도 날아다니는 걸 봤다면서?”

“예, 그게 내공을 이용해서 날아가는 거예요?”

“그렇지, 정순하다는 건 맑고 순수하다는 말이야. 내공이란 건 정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말한 대로 날아다닐 수 없어. 알겠니?”

“예.”

“도가의 심법은 마음을 편안히 다스리는 데 그 모든 요결이 있지. 그 때문에 심마(心魔)에 빠지지 않고……..

“심마가 뭐예요?”

“그러니까, 에… 심마란 여러 가지 잡념을 말하는 거야. 오욕칠정(五慾七情)에―이런 말을 해서 알아듣나?ᅳ아니, 심마란 나쁜 거란다. 이게 생기면 아주 나쁜 일 을 당하게 되니까 그냥 그렇게 알고 있거라.”

“예…….?”

묵향은 소연이에게 약간씩 무공을 가르쳤다. 그는 소연이에게 위험 부담이 대단히 큰 마교의 심법을 가르치기보다는 도가 계통의 것을 가르치기로 작정했다. 그리 고 현문의 내공심법을 익히면 사술(邪術)에 걸리지 않는다. 심신을 맑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향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작고 귀여운 소녀에게 사술에 걸리지 않게 해 주는 현문의 심법을 가르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정통 마교의 고수들과는 달리 살수 등 특수한 계층에 종사하는 마교의 고수들은 다른 사파나 정파의 무공을 폭넓게 익힐 수 있다. 그 무공의 장단점을 알아야 기습 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무공들은 마교가 한 번씩 정파와 충돌을 벌이면서 습득하거나 훔쳐 낸 것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소림이나 각 문파들보다 더 많은 정파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마교라고 볼 수도 있다.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험 (天險)의 요새였고, 그 덕분에 한 번도 본거지를 습격당한 적이 없다. 그리고 관부에서도 손을 못 쓰기 때문에 그 결과 수많은 무공들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그에 비 해 정파의 무리들은 황궁의 압력에 못 이겨 많은 수의 무공서적들을 넘겼다. 다만 각 문파의 최고 무공은 약탈하지 않는 한 압력을 가한다고 뺏을 수 있는 성질의 것 이 아니었다.

소연이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묵향은 매일 밤 소연이의 방에서 두세 시진을 보냈다. 묵향이 처음 소연이가 잠든 방에 들어왔을 때 소연이의 어머니는 약간 놀랐다. 방에 들어온 묵향이 다짜고짜 소연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묵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으리, 어째서 이러십니까?”

“왜 그러시오?”

“소연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게 아니오. 나는 다만 안마를 해 줄 뿐이오. 지금 아이에게 무공을 약간 가르쳐 주고 있는데, 밤에 안마를 해 주면 좀 더 빨리 익힐 수 있소.”

“그렇습니까?”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묵향은 속옷만 남긴 채 옷을 다 벗기고 천천히 내력을 쏟아 소연이의 혈도를 뚫어나갔다. 거의 두 시진 동안 안마를 한 묵 향은 아직도 자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시오.”

“꼭 비밀로 해야 합니까, 나으리?”

“그럼 내가 맨날 안마한다고 온 마을에 떠들 것이오?”

“알겠습니다, 나으리.”

대강의 내용을 안 그녀는 손쉽게 허락했다. 하지만 묵향이 말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으니, 낮에 무공을 익히거나 심법을 익힐 때는 내력이 강제적으로 혈도를 돌아 천천히 내공이 쌓이지만 밤이 되어 잠이 들면 그 내력은 멈춰 원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밤에 내공의 고수가 혈도를 타고 강제적으로 내력을 돌려 주면 낮에 익히는 것의 두 배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모든 사부(師父)들이 제자에게 이걸 해 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작업은 먼저 시술자가 2갑자 이상 되는 내력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정도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이러한 방법을 시도하다간 시술자의 몸이 견디질 못하고, 또 진기의 유도에 실패하면 상대방도 심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그리고 2갑 자에 이른다 하더라도 매일 몇 시진씩 이런 시술을 해 대면 내력의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칫 진원지기(眞原之氣)를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시진에 걸친 이 인타유기혈공(引他誘氣功)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했기에 그녀는 그가 단순한 안마를 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음 날 딸이 아주 상 쾌한 기분으로 깨어나서 심법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묵향을 완전히 믿었고 더 이상의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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