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1권 21화 – 전쟁터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전쟁터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오호…, 황제의 말대로 저기들 있군.”
탄벤스와 트루비아의 국경선 저 너머에 은십자 기사단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다크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은십자 기사단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치레아 기사단이 보유한 타이탄 20대와 1, 7, 8전대의 잔여 세력 42대만으로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리한 작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 7, 8전대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겨우 34대만 남았는데, 수도에 남아 있던 8대를 보충 받았기에 42대로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레아 기사단의 경우 그녀 개인의 기사단으로서 강자에게 타이탄을 준다는 원칙에서 벗어나서 그녀의 친구들에게 배당한 타이탄도 많았을뿐더러, 루빈 스키 대공의 물밑 작전에 의해 그녀에게 할당된 기사들도 그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각 전대장들과 치레아 기사단 부단장인 카알 폰카슬레이 백작은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심사가 복잡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서 있는 제스터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이동되어 온 상태였기에, 어떻게 하면 빨리 코린트에 정보를 전할 수 있을까 그 궁 리를 한다고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코린트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 쓸데없이 얼굴 표정을 굳힐 필요 없다구. 적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그렇게 긴장을 해서 쓰나? 자, 모두들 모여 보라구. 작전 회의를 해야 할 것 아냐?” 모두들 쭈뼛쭈뼛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을 때, 제스터가 그녀에게 허둥지둥 말했다.
“저, 전하,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사옵니까?”
“왜?”
“저 그게 말이옵니다. 그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다가 그 말이 전하라는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숙녀’에게 해도 되는 말인지 망설여지기 시작했던 것이 다. 제스터가 머뭇머뭇 말을 못하고 있자 짜증이 난 다크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냐? 빨리 말하지 않으면 아가리를 찢어 놓을 테다.”
“화, 화장실에…….”
제스터가 마지못해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들 키득거리는 가운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너는 작전하고 상관없으니 가봐도 좋다.”
“옛, 전하.”
제스터는 자신의 상전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재빨리 숲으로 달려갔다. 그는 다크와 오랜 시간 함께했기에 그녀가 마나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달려간 다음 자신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의 목걸이는 마법사도 아닌 제스터가 통신을 할 수 있도록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제작된 마법 도구였다. 제스터는 그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여기는 고양이 벼룩, 늑대 굴 나오세요.”
그가 암호를 정확하게 말하자 목걸이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통신 마법과는 달리 수정 구슬을 통한 것이 아니기에 상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뭔지를 알리는 암호가 들어가는 것이다.
“예, 여기는 늑대 굴,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고양이는 탄벤스 국경선 옆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습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입니까?”
“지금 나는 고양이와 함께 와 있습니다. 박쥐 하나에 해당되는 정확한 정보입니다.”
박쥐 하나라면 특급 정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언제?”
“기습인 만큼 아마도 내일 새벽쯤에 돌진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귀하의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스터는 필요한 말만 전한 후 재빨리 통신을 끝냈다. 괜히 통신이 길어져 봐야 들킬 확률만 높아지는 것이다. 제스터는 허둥지둥 자신이 있던 위치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돌격!”
우렁찬 외침 속에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저마다 창과 도끼, 철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특히나 치레아 기사단의 드라쿤이 뿜어내는 황금빛 때문에 그 움직임은 더욱 현란했다.
“이런 젠장! 이게 기습이야?”
“알게 뭐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
팔시온과 미디아는 타이탄 전투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이런 식의 농담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팔시온의 말 대로 이건 기습도 뭐도 아니었다. 다크는 작전 회의를 하자고 한 후 밤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돌격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부하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그 건 일언지하에 묵살되었다. 그런 후 이렇게 허겁지겁 준비를 갖춰 돌격하고 있는 것이다.
코린트의 은십자 기사단은 평화 협상을 자신들에게 좀 더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국경 부근에서 대규모 기동 연습을 준비 중이었다. 병력의 이동과 더불어 기동 연습 준비가 겹치다 보니 크라레스에서는 그것을 상대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것으로 오판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은십자 기사단이 주둔 중인 평원 부근에는 기동 연습 때 사용될 타이탄의 보조 장비들인 철퇴나 창 등이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기동 연습 전에 몸을 풀기 위해 타이탄에 타고서는 서로 간에 대결을 펼치고 있는 타이탄들도 몇 대 보였다. 하지만 지축을 울리며 백주대로를 달려오는 이 엄청난 크라레스의 타이 탄 무리들을 그들이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적이닷!”
일제히 웅성거리며 모두들 타이탄을 끄집어내어 탑승하고 있는 가운데 가가린 후작은 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카이론의 임시 사령부에 계십니다, 각하.”
카이론이라면 탄벤스 공국의 수도였다. 투르넨 후작은 새로운 공왕을 즉위시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수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곳 탄벤스 주둔군의 총사령관 이었기에 모든 것을 그가 총괄해서 지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재 은십자 기사단에는 부단장이 없었기에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타이탄 부대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부사령관인 가가린 후작에게 맡겼다. 그런 후 가가린 후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 트루비아와의 국경선에 도착하여 기동 연습 준비를 하고 있 었던 것이다. 물론 기동 연습 당일에는 투르넨 후작이 도작하여 참관(參觀)할 예정이었다.
“사령관 각하께 빨리 연락해라. 크라레스 기사단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고 말이다.”
“옛, 각하!”
가가린 후작은 통신 마법을 시도하고 있는 마법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은십자 기사단의 작전관(作戰官)을 바라봤다.
“자네는 정찰조를 좀 더 폭넓게 배치하게. 특히 후방에 대한 적의 공격대가 있는지 주의해서 살펴.”
“옛!”
“내가 타이탄들의 전투 지휘를 하는 동안 잘 부탁하네.”
“옛, 각하.”
작전관은 기사인 사령관이 타이탄을 타고 일선에 나가 버렸을 때, 전체적인 부대의 지휘를 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가가린 후작이 자리를 비운 동안 타이탄 부대가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도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들을 지휘하여 가가린 후작의 지시대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정찰 조들을 더욱 폭넓게 배치하고, 또 새로운 3개 정찰조를 후방에 투입하여 뒤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했다.
가가린 후작은 자신의 타이탄을 몰고 일선으로 달려 나가 부하들이 전투 대형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독려했다. 그들이 준비하는 동안에 적들의 타이탄은 이제 코앞 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가가린 후작은 기습을 위해 달려오는 적들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이쪽이 93대의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다면 적은 60여 대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공격군이 눈에 보이는 저 정도 규모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저것들 외에 우회 공격대가 따로 있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도 아니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기에 시야가 확 트여 있었다. 조심만 한다면 결코 놈들에게 약점을 잡힐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가가린 후작의 시야에 앞서 달려들고 있는 적 타이탄들 뒤에서 먼지를 뚫고 뒤따르는 타이탄이 언뜻 보였다. 타이탄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기에 엄 청난 먼지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일단 가가린 후작이 상대를 보고자 마음먹은 이상 그것은 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먼지 사이로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에, 짙푸른 색을 칠한 크라레스의 최신형 타이탄이 6년 전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코린트군에게 최대의 타격을 입혔었다는 것을 가가린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먼지 뒤로 보이는 상대방의 타이탄이 바로 그 소문의 타이 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 가가린 후작에게는 이번 전투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떠올랐다.
정보부장인 베르딘 후작은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 자신의 책상 위에 붉은 표지의 문서가 놓여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장식용의 가벼운 여름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책상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붉은 표지 사이에 노란색의 줄이 세 개 쳐져 있는 문서……. 이것은 특급을 뜻하는 표시였다.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베르딘 후작은 먼저 그 서류부터 집어 들고 황 급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방금 벗어 놨던 여름 외투를 다시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이었 다.
“헉헉…….”
씨근덕거리며 그가 달려들자 공작의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이 창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물론 경비병도 자신이 막아선 상대가 베르딘 후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하지만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예법을 무시하려고 하는 베르딘 후작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젠장! 비켜랏!”
베르딘 후작은 거친 동작으로 경비병을 밀치고 공작의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도 황급히 그를 뒤따라 들어와 그를 제 압하려고 했다. 어쩌면 상대는 베르딘 후작으로 변장한 적의 첩자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바로 그때 마법사로부터 새로 도착한 통신문을 건네받고는 그것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베르딘이 공작의 눈초리가 사납다는 것을 느낀 순간 공작은 그 통 신문을 갈기갈기 찢어서 내팽개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어딘가로 분통을 터뜨릴 만한 대상을 찾고 있던 공작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꽃병을 집어 들고는 처음에는 바닥에 내리꽂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베르딘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꽃병은 그대로 베르딘의 머리통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요란한 음향이 울려 퍼지고 산산조각이 난 도자기 조각과 물, 그리고 꽃들이 허공을 떠돌며 비산하는 가운데 이미 기절해 버린 베르딘의 몸은 뒤로 나자빠졌다. 그 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특급 기밀문서 또한 땅바닥에 떨어져서 나뒹굴었다.
“정보부라는 새끼들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얏!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기습을 가해 오는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뿌드드득 하는 이빨 갈리는 소리와 함께 으르렁거리는 로체스터 공작의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
루빈스키 대공은 까미유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회의 도중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마법사가 종이쪽지를 전하자, 그것을 받아 든 까미유의 손은 부들부들 떨 리기 시작했고, 표정은 한껏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상대가 받아 든 종이쪽지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기에, 냉철했던 기사가 저렇듯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뭔가 코린트에 큰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고 생각하며 그게 뭘까 궁리해 보는 루빈스키 대공이었다. 황제가 죽었을까? 아니면 로체스터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것도 아니면…….
루빈스키 대공의 상념은 곧이어 끊어졌다. 까미유가 갑자기 불타는 듯한 분노에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까미유는 이가 갈 리는 듯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귀하가 이렇게도 비열한 인간인 줄 몰랐소. 어떻게 평화 협상을 하면서 감히 본국에 대해 기습할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젠장!”
까미유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함께 루빈스키 대공의 뒤에 도열해 서 있던 기사들이 그에 대응하여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까미유를 수행 해 왔던 기사들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세 동작은 순차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동작이었다.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은 상대가 왜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는지 도저히 짐작을 할 수 없었기에, 차분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그 꾸밈없 는 눈동자를 보며 까미유는 자신의 분노를 억눌렀다. 아무래도 루빈스키 대공은 그 비열하기 그지없는 기습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그의 다 음 행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머뭇거리고 있는 상관을 마법사가 급히 막았다. 마법사는 이제야 겨우 상관을 막아설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만큼 서로 간에 검을 뽑아 드는 속도가 빨랐 다.
“후작 각하, 참으셔야 합니다. 일단 전하의 지시대로 수도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자신을 말리는 마법사를 뒤로 밀치며 까미유는 그 종이쪽지를 든 채로 조금 앞으로 나와서는 종이쪽지를 손바닥에 붙인 채 책상을 힘껏 내리찍었다. 까미유의 손 바닥에 가격당했을 뿐이었는데도 책상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눈동자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을 향해 까미유는 내뱉듯이 말했다.
“전쟁터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까미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홀로 남겨진 루빈스키 대공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쪽지를 집어 올 렸다. 한순간 엄청난 힘으로 내리찍던 까미유의 손바닥과 탁자의 사이에 위치했는데도 종이는 아주 말짱했다. 곧이어 루빈스키 대공의 손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 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라.”
투르넨 공작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후였다. 사방에서 거대한 타이탄들이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 힘과 기술을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고 그 결과 패배해서 땅바닥에 자빠져 있는 타이탄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도착한 투르넨 후작의 시선에 제일 먼저 잡힌 것이 자신의 부하들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는 거대한 방패와 검 을 들고 간단하게 자신의 부하들을 그야말로 때려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자마자 투르넨 후작의 머릿속에는 6년 전 악몽 같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고 있던 그 거대한 타이탄. 그때 그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인해 남부집단군의 타이탄들이 괴멸당했다.
그리고 자신이 치욕적일 만큼 지독한 패배를 당하게 만든 주 원인은 그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놈이 있었기에 서로 간에 밀고 밀리던 그 균 형은 삽시간에 박살 나 버렸던 것이다.
“후퇴하랏!”
투르넨 후작은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려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놈을 상대로 여기서, 이 전력으로 싸운다는 것은 6년 전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하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내어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가면서도 계속 후퇴하라는 외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상대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을 이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도망치도록 놔 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루빈스키 대공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로 인해 상기되어 있었다.
“오오, 먼 길에 수고했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반갑게 맞이하는 자신을 향해 분노에 얼룩진 시선을 보내오는 루빈스키를 보고 황제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빈스키는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서 종이쪽지 를 그에게 들이밀며, 노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게 정녕 사실이옵니까?”
루빈스키가 내미는 쪽지에는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탄벤스 공국에 주둔 중이던 파견 기사단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보고가 적혀 있었다. 힐끗 그것을 본 후, 황제는 시선을 루빈스키의 눈동자로 다시 돌렸다.
“사실이라네. 코린트가 일거에 트루비아를 쓸어버리기 위해 기사단과 함께 군대를 탄벤스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후에 내린 결정이었지.”
루빈스키는 황제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었기에 정말 사력을 다해 노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습을 가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만약 적이 기습을 가해 온 후에 되받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집결시킨 병력이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90대가 넘는 적의 기사단을 기습이 아니라 면 어떻게 막을 건가? 코린트도 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꿍꿍이가 있기에 이쪽을 그렇게 탓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놈들도 이번에 본국의 힘이 어떤지를 느꼈을 테니, 이쪽에서 선후를 차근차근 따져서 교섭을 청한다면 응해 올 테지.”
“기습은 성공했사옵니까?”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들었네.”
“누가 지휘했사옵니까?”
“자네가 없었기에 치레아 대공에게 부탁했었네.”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골이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크를 보냈다면, 모르면 몰라도 상대방은 거의 치명타를 당했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어느 정도 타격을 당했 다면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멸을 시켜놨다면 그 이후의 사태는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