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6권 11화 – 또 다른 반전
또 다른 반전
춘릉 앞의 벌판이 잘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무영문의 「감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일대의 감시를 무영문 쪽에서 해 주겠다고 통보를 해 온 상태였기에, 홍진 장로는 그곳에 비마대 요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는데, 손을 덜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말이다.
그런데 그 감시소라는 곳이 꽤나 수상쩍었다. 무영문의 요원 몇 명이 숨어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어야 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꽤나 널찍해 보이는 천 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주위에서 베어 온 나무나 풀로 아주 세심하게 천막을 위장해 놨기에, 산 밑에서 봐서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묵향의 몰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옥화무제는 여기에서 묵으며 묵향과 장인걸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녀에게 장인걸 쪽 진영에서 전서가 날아왔다. 태산에 파둔 함정에 묵향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에 옥화무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 과 무영문에 위해를 가하려던 적을 드디어 없애 버린 것이다. 3중으로 함정을 준비했었는데, 겨우 1단계에 걸려 죽어 버렸다는 게 오히려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 다.
옥화무제는 함께 있던 비영단주에게 명령했다.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어요. 본문으로 철수할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예, 태상문주님.”
비영단주는 곧바로 단원들에게 명령했다.
“철수 준비를 해라. 본문으로 돌아간다.”
“옛!”
천막을 걷고,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바쁘게 비영단원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 밑에서 커다란 전고(戰鼓)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둥!
옥화무제가 산 밑을 내려다보니, 장인걸의 대군이 출진하여 춘릉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옥화무제는 철수 준비를 하고 있는 비영단원에게 명령했다. “그 의자 좀 이리로 가져오세요.”
“옛!”
근심이 사라져서인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옥화무제는 의자에 앉은 뒤 비영단주에게 말했다.
“단주도 이리로 오세요.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놔두고 그냥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비영단주는 옥화무제가 앉아 있는 자리에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간단한 다과와 술도 가져오라 했다.
50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이 일사분란하게 춘릉성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마교와의 치열한 공방전도 박진 감 넘치는 구경거리였다. 이름값에 걸맞게 마교도들의 무공은 엄청난 것이었고, 거의 학살극에 가까울 정도로 금군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금군 또한 사기를 유지 하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걸 보며 옥화무제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묵향의 갑작스런 죽음을 이용해 장인걸이 그의 세력을 흡수해 버리는 것이 옥화무제가 가장 우려했던 점이었다. 안 그래도 금나라를 등에 업고 있어 엄청난 세력 을 과시하고 있는 그에게 그것은 날개를 달아 주는격이었다.. 그렇게 되면 무림맹의 힘으로도 장인걸을 상대하는 게 버거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옥화무제의 생각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아무리 지금 장인걸과 자신이 손을 잡았다고 해도, 그가 너무 큰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옥화무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마교를 간신히 이긴 금나라가 무림맹과 싸워 서로 양패구상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무림에는 무영문에 위협을 가할 만한 세력이나 고수가 다 사라 지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마교의 잔당들과 장인걸이 대회전을 벌이며 서로의 세력을 갉아먹고 있으니 옥화무제가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마교의 잔당들은 장인걸의 대군을 상대로 기대 이상으로 분전하고 있었다. 과연 마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옥화무제가 감탄사를 흘리고 있을 때, 마교의 잔당들은 장인걸의 본진을 향해 계속적으로 뚫고 들어갔다.
“정말 놀랍습니다, 태상문주님. 갑작스런 교주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땅에 떨어졌을 텐데도 저런 괴력을 발휘하다니.”
“저들이 아직 교주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하던 옥화무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옥화무제는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저들의 능력이 좋아서 뚫고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저 뒤쪽을 보세요. 장인걸의 본진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장인걸의 유인책에 말려들고 있는 거란 말씀이십니까?”
“아쉽게도……. 아마 저들이 본진에 도착하는 순간, 그때 장인걸은 승부수를 던지겠죠. 저 막강한 전력을 없애기보다는 흡수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비영단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 되었군요.”
“그래도 저 정도라도 싸워 준 게 어디에요? 장인걸의 부하들도 많이 죽었지만, 마교도들도 꽤나 죽었잖아요. 그 정도로 만족해야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결국 마교의 선봉대는 장인걸의 본진까지 뚫고 들어갔다. 순간, 옥화무제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과연 장인걸이 자신의 예상 대로 마교의 잔당들을 흡수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질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변수가 등장할까. 그녀는 저들이 장인걸의 휘하로 그대로 흡수되기 보다는 뭔가 새로 운 변수가 등장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바람대로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바로 묵향이라고 하는. 묵향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옥화무제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변수를 원하기 는 했지만, 그 대상이 묵향이라면 차라리 장인걸이 마교의 잔당을 흡수하는 게 나았다.
“아니! 저, 저자가 어찌 살아 있단 말입니까?”
옥화무제는 거칠게 술을 따라서 단숨에 마신 뒤 씨근거렸다.
“우리 모두가 속았다는 말이죠. 저 능구렁이 같은 자식한테!”
장인걸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그녀는 이빨을 뽀드득 갈았다. 묵향이 비록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기는 했지만, 계략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내 심 중원 제일이라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다니.
위에서 내려다보니, 진형을 구축하며 마교도들의 앞을 막아서는 1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2진 무사들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마교를 막아서는 것 은 1진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까지 이 혼전에 끼어들면서 전장은 피아를 구분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도 전장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묵향이었다. 장인걸의 본진과 접촉하기 전까지 묵향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었지만, 그가 앞으로 나서자 무시무시 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과연 무림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자다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영단주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교주의 무공은 놀랍기 그지없군요. 어찌 사람이 저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꼭 없애야만 하는 거예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놀라운 고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는 여기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잠시 전장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옥화무제는 비영단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맹주는 지금 어디에 있죠?”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동 속도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늦어도 1시진 이내에 도착할 겁니다.”
“곤륜무황은요?”
“곤륜무황 또한 거의 비슷한 시간쯤에 도착할 겁니다.”
비영단주는 높직한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저쯤에서 합류할 듯싶습니다. 저 산 뒤편이라면 다수의 무인들이 매복하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공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숨어서 전장을 관 찰하기에도 더없이 좋을 테니까요.”
“청소는 깨끗하게 해 놨겠죠?”
비영단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하하핫,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상문주님. 그쪽은 물론이고, 이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비마대원들을 깨끗하게 소탕했습니다.”
“그걸 교주가 눈치 채지 못해야 할 텐데…….”
“하하핫,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태상문주님. 이런 난리통에 어떻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교주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첩자망이 와해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홍진 장로가 이끄는 비마대도 꽤나 훌륭한 정보 단체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이없이 무영문도들에게 소탕당한 것은, 방금 전까지 무영문도들과 협동하여 장인걸 을 상대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서로가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무영문 쪽에서는 비마대에 대한 모든 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영문 쪽에서 배신의 칼날을 들이댔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믿고 있던 동료에게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두들겨 맞았기에 비마대원들은 미처 대비할 겨를조차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마대가 완전히 소탕된 그 빈 공간으로 맹주와 곤륜무황이 거느린 2개 집단이 이동했으니, 그걸 묵향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옥화무제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산 쪽을 힐끔 바라봤다. 맹주라면 자신의 근심을 날려 보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지금과 같이 묵향이 소모전을 계속 펼쳐 준다면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묵향에게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지만, 장인걸은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묵향이라는 거목 하나만으로 도 벅찬 상태였는데, 그에게는 우수한 부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마 지금 그에게 묵향이 거느리고 있는 정도 수준의 부하들이 있었다면, 승패가 어떻게 갈렸을지 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장인걸 휘하의 고수들이 지닌바 능력 이상으로 선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마교 쪽으로 전세가 기울고 있었다. 장인걸이 사용하는 전술이 매우 악랄한 것이기는 했지만, 묵향의 부하들이 그 전술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일선에서 묵향의 부하들과 격전을 벌이던 실혼인들이 이제
거의 다 죽어 버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예상보다 적이 훨씬 더 강합니다, 교주님.”
보고를 듣는 와중에도 적을 향해 직접 화살을 날리는 장인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전투 시작 전에 보였던 자신감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그는 마교의 평 균적인 전력을 한영성 교주가 있던 그 시절로 잡고, 모든 작전을 세웠었다. 하지만 막상 부딪치고 보니 그보다 훨씬 더 강했다. 지금 마교가 지닌 전력은 어쩌면 역 대 최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적을 처음부터 밀어붙이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방치한 것이야말로 장인걸이 한 최악의 실수였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총력전이다! 수하들에게도 제령단을 복용시켜라.”
“존명!”
장인걸은 직속 수하들에게만은 제령단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장이었으니까.
장인걸의 직속 부하들까지 제령단을 복용했음에도 전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치열하던 전장은 한눈조차 팔 겨를이 없을 정도로 더욱 흉험하게 바뀌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옥화무제의 기분이 조금씩이나마 좋아지기 시작했다. 장인걸이 묵향을 상대로 꽤나 잘 싸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판세로 봤을 때, 결국은 묵향이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적은 장인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온전한 전력을 보유한 맹주가 거느리고 있는 정파연합 앞에 묵향은 결국 쓰러질 수 밖에 없으리라.
“수고했어요. 잘 가세요, 흑살마왕.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을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쉽군요. 후후훗, 어차피 죽을 거 마지막까지 발악을 해 주면 정말 좋겠군요.” 이때,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면서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던 장인걸이 갑자기 뒤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금나라 병사들은 아직까지도 엄청난 숫자가 살아 남아 계속 밀려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이 아무리 많이 살아남아 있다 해도 소용없었다. 군의 수장인 장인걸이 도망쳐 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옥화무제는 혓바닥을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더 버텨 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요.”
도망치는 장인걸을 묵향이 쫓아가자 워더리 장군이 이끄는 2천의 정예가 묵향의 뒤를 따르려는 호법원 고수들을 죽음을 각오하고 막아섰다. 그 순간, 묵향은 자신 이 고립된 줄도 몰랐다. 부하들의 통솔은 모두 철영에게 맡긴 상태였기에, 그는 오로지 장인걸만을 잡기 위해 내달렸다. 물론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다 죽 여 버리면서.
그런 묵향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은 천마혈검대원이었다. 구양운 장로와 대원들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어려 있었다.
구양운 장로가 검을 뽑아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개진(開陣)!”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따라 4척이나 되는 핏빛 혈검(血劍)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귀곡참륜진(鬼哭斬輪陣)이 발동되는 순간, 장인걸은 그들의 뒤로 피하며 묵향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쓸데없는 짓!”
묵향은 손에 쥐고 있던 빛의 검을 쳐내렸다. 빠르게 날아오던 화살은 빛의 검에 닿는 순간, 한줌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묵향의 장기는 경공술과 신법을 활용한 초근거리 접근전이다. 최대한 적과 가까이 붙은 상태에서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묵향은 장인걸에 게 바짝 접근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마혈검대원들이 양옆으로 쫙 늘어서며 묵향을 한가운데에 놓고 포위망을 형성했다.
구양운 장로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회(回)!”
묵향을 중심으로 진이 돌기 시작했다. 묵향을 포위하고 있는 천마혈검대원들은 전원 다 화경에 근접하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묵향을 중심으로 빠르 게 돌며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옥화무제가 놀랍다는 듯 비영단주에게 말했다.
“저건 귀곡참륜진! 설마 장인걸이 혈교의 진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군요.”
“마교 고수들 중에서 혈교의 무공을 가장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이 흑살마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진안에 갇혀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묵향의 모습을 보며 옥화무제의 입매에 미소가 살며시 피어올랐다.
“보아하니 교주는 저 진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묵향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하던 비영단주가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진법을 모르면서도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다니. 과연 천하제일고수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 은 움직임이었다.
“그가 진법을 공부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어요. 어쩌면 진법에 대해서 아예 지식이 없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승산이 있겠군요. 귀곡참륜진은 고수를 상대함에 있어서 꽤나 효율적이라고 알려진 진법입니다. 귀신이 날아오는 듯한 환영(幻影), 귀청을 찢는 듯한 곡소리.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감각에 혼란을 야기한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러자 옥화무제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모르고 계시는 게 있군요.”
“예?”
“귀곡참륜진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런 감각의 혼란 따위가 아니에요. 포위하고 있는 고수들의 공력만큼이나 지독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서운 거죠. 지금 저 안은 웬만한 사람은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의 압력이 짓누르고 있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는 거죠.”
무수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묵향은 꿋꿋하게 싸우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하제일고수라는 위명을 얻은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신위였다. 그러다 묵향의 공격 이 한 번씩 번뜩일 때마다 피보라가 짙게 일어났다. 중상을 입은 천마혈검대원은 진 밖으로 이동했고, 그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다른 대원이 빠르게 메웠다.
그런데 이때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던 천마혈검대원의 상처가 급속도로 낫더니, 곧이어 멀쩡하게 다시 공격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지켜본 비영단주의 눈이 놀라움으로 화등잔만 해졌다.
“아니, 저럴 수가! 저게 귀곡참륜진이 맞습니까? 귀곡참륜진에 상처를 치료해 준다는 효능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비영단주만이 아니었다. 옥화무제 역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귀곡참륜진을 개량한 것인지, 아니면 귀곡참륜진처럼 보이는 다른 진법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뭐든지 간에 탐나는 건 사실이에요. 저런 진법만 입수할 수 있다면, 본문은 당장에라도 구파일방을 추월해 버릴 수 있을 텐데…….”
“흑살마왕이 준비를 많이 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장인걸은 진 밖에서 묵향을 향해 연신 화살을 쏘고 있을 뿐, 전투에 직접적으로 가세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도 그 편이 묵향에게 훨씬 더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팽팽한 접전이 계속 이어지는가 싶더니,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는 묵향의 손에 뭔가 영롱한 빛의 구슬 같은 것이 생기는 순간 시작되었다. 묵향의 손 에 빛나는 구슬 같은 것들이 맺혔다 싶은 순간, 사방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진을 구성하고 있는 천마혈검대원들과 묵향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검으로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롱한 빛의 구슬이 날아왔지만 대원들의 반응은 침착했다. 그 전에 이런 무공에 한 번 당해 본 적도 있었고, 그 가공할 만한 위력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랬기에 대원들은 나름대로의 대처 방법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묵향이 빛의 구슬을 던짐과 동시에 자신의 검에 내공을 잔뜩 실어서 그대로 들이밀었다. 이건 묵향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응이었다. 희대의 마검 인 천마혈검에 내공을 잔뜩 불어넣자 그 파괴력은 거의 어검에 맞먹었다. 천마혈검과 빛의 구슬이 부딪치자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 났다.
콰콰콰쾅!
천마혈검대원들은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공격을 한 것이었기에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어력이 떨어져도 옆에 있는 동료들이 도와줬 다. 더군다나 그들은 분산되어 있는 게 아니라, 진식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공력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반면 묵향으로서는 완전히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바로 앞에서 폭발한 빛의 구슬들로 인한 타격은 거의 현경급 고수에게 기습공격을 당한 것과 똑같은 충격을 그에게 안겨 줬다. 더군다나 묵향은 상대를 얕잡아보고 있었던 만큼, 제대로 된 방어벽을 펼쳐 놓지도 않았었다.
“크으윽!”
묵향의 옷은 거의 다 찢어져 흔적도 찾기 힘들었고, 몸 전체는 미세한 혈흔들로 낭자하게 변했다. 급하게 호신강기로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이 지경이었다. “우웨엑!”
내장까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은 터라 정신이 일순 아찔했다. 하지만 묵향은 쓰러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런 수를 쓸 줄이야.”
입에 묻은 핏물을 쓱 닦은 다음 묵향은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본좌를 애 먹이다니, 과연 천마혈검대로군. 하지만 재롱은 여기까지다.”
천마혈검을 잃은 대원들은 등 뒤에 메고 있던 발화창을 꺼내 들고 또다시 공격해 왔다. 발화창은 바로 코앞에서 발사가 되는 무기인 만큼, 더욱 무서운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대폭발이 일어났는데 저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비영단주의 물음에 옥화무제가 대답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교주가 일격을 날리려고 하는 순간을 노려 그걸 저쪽에서 맞받아친 거예요. 교주의 손에서 강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원구 같은 것이 여러 개 솟아난 뒤 그걸 던지려는 순간, 상대가 먼저 그 원구에 검을 날렸어요. 폭발은 그때 벌어졌죠. 검에 맞은 원구는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원구들까 지 폭발에 휩쓸리며 같이 폭발해버린 것 같아요.”
설명하면서도 옥화무제는 천마혈검대를 보유하고 있는 장인걸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자신에게 저런 훌륭한 부하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장 상황이 또다시 반전되었다.
묵향의 손에서 영롱한 빛줄기가 솟아오르더니 땅바닥에 힘껏 틀어박혔다.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회오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의 모
든 것을 집어 삼켜 버렸다. 콰콰콰콰쾅!!
폭발음과 함께 피어오른 짙은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이미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천마혈검대원들은 모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건 장인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교주는 방금 전의 그 대폭발로 인해 상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순식간에 끝내 버린 모양이었다. 옥화무제가 자세히 보니 묵향은 쓰러져 있는 장인걸을 붙잡고 뭔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묵향의 표정은 아주 험악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장인걸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듯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이었다.
과연 그들은 지금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옥화무제의 짐작으로는 묵향이 장인걸에게 물어볼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소연이의 행방일 것이다.
“쓸데없는 짓.”
그렇게 중얼거리는 옥화무제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소연이의 행방을 지금 그에게 물어봐야 헛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태산에서 매몰되어 죽어 버렸 으니까.
장인걸은 분명히 자신에게 말했었다. 쥐약을 둥지 안에 넣어 둘 거라고 말이다. 묵향을 유인하기 위해서라지만 마지막 패로 써먹을 수 있는 소연을 그런 식으로 소 모해 버리는 장인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의 대격전을 지켜보니 장인걸의 행동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냉혹한 교주를 상대로 소연을 인질로 잡고 협박을 해 봐야 별 차이가 없었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아마 장인걸은 소연을 죽인 뒤 두고두고 묵향을 괴롭게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다시 그녀가 보니 대화를 나누던 묵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미친 듯 분노했다. 갑자기 묵향은 장인걸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장인걸의 손과 발이 기형적으로 꺾여 버렸고, 처절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옆에 서 있던 부하들이 그를 말렸지만, 묵향이 멈췄을 때 이미 장인걸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장인 걸의 몸 상태로 봤을 때, 죽었거나 아니면 죽기 직전의 상태이리라.
이때, 분노한 묵향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잘 모르겠지만, 주위의 고위급 간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더니 각자 거느린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묵향이 어 떤 명령을 내렸는지는 그 부하들의 다음 행동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장인걸을 패죽인 만큼, 이제 더 이상의 살육은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마교도들의 손속은 더욱 잔인하게 펼쳐졌다. 아마 묵향이 금군 병사들을 모두 다 도륙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마교도들이 금군 병사들을 살육한답시고 뛰어다니는 게 옥화무제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손뼉을 치고 좋아할 일이었다. 비 록 지휘관을 잃어 사기가 꺾인 금군 병사들이지만 물경 50만이나 되는 대군이다. 병사들을 학살한다고 마교도들이 힘을 빼면 뺄수록, 다음에 이어질 대회전에서 정 파 무림이 승리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