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15화 : 고귀하신 분의 부하 – 2
고귀하신 분의 부하 – 2
이번에 뜻하지 않게 벌어진 샌드 웜과의 전투는 미행하는 자의 정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놈이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통신을 할 때, 어느 정도 강도로 마력을 발산하는지를 보면 거리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즉, 링카 성까지의 단거리 통신이라면 콘도르 쪽 사람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콘도르 쪽이 아니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월터는 시선을 라디아에게 돌려 물었다.
“어느 쪽 사람인 것 같아?”
라디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몰라・・・・・・ 아직 통신마법을 쓰지 않았어.”
숫자에서 밀리는 만큼, 몰래 조심하며 뒤따라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샌드 웜과 전투를 벌인 것까지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거대한 샌드 웜이 지표면 위로 튀어나와 타이탄들과 격전을 벌였고, 또 죽임을 당했다.
더구나 이쪽은 샌드 웜과 전투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보고를 위한 통신을 보내기 딱 좋은 환경인 것이다.
월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흠,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샌드 웜과 싸우는 장면을 봤으면서도 이런 특급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다고?” 월터의 말에 정보부 출신인 파벨도 전적으로 찬성했다.
“맞아요. 저 같았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상부에 보고부터 했을 거예요. 설사, 발각당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생각도 그래.”
말을 하던 파벨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방금 전에 봤던 정체불명의 기사가 도주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언데드에요! 저쪽에 언데드 떼가 나타났어요.”
“언데드?”
모두의 시선이 파벨의 손을 따라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모래를 뚫고 일어서고 있는 언데드 떼를 언데드 떼는 방금 전에 자신들을 피해서 도망친 기사를 중심으로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 기사는 타이탄을 다시 불러낼 여유가 없었는지 맨몸으로 언데드 떼를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링카 성 전방에 포진하고 있다던 바로 그 언데드 떼로군.”
모습을 드러낸 언데드의 종류는 생각 외로 다양했다. 병사들의 시체는 물론이고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동물들, 그리고 사막에 서식하는 몬스터들까지 있었다.
“정확한 위치도 알지 못하고 왔는데, 운 좋게 제대로 찾아왔네.”
“맞아, 아주 운이 좋아. 크크, 저 녀석 우리를 피해 열심히 도망치더니 꼴좋군. 어? 그런데 저 녀석, 어딘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월터는 어디서 봤더라 중얼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도망치던 기사는 처음 보는 강력한 검술을 구사하며 주위 언데드들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그 기세 탓에 주위는 짙은 모래 먼지로 뒤덮여 제대로 보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와 월터 일행과의 거리도 상당히 멀었고.
“흠, 크라레스의 검술과 비슷한 것 같은데…………….”
월터의 추측에 다이아나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우리 쪽 사람은 아니야. 아까 본 타이탄의 형태는 처음 본 거였으니까.”
“그런가? 검형이 꽤 비슷한 것처럼 보였는데…………. 뭐, 먼지 탓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니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겠지.”
기사 한 명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탓에, 매복을 풀고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는 언데드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언데드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잖아. 사막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동물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
“거대한 샌드웜까지 언데드가 되는 판에 뭔들 언데드가 되지 않겠냐.”
라디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저렇게 폭넓게, 종류를 불문하고 언데드가 되는 현상은 늪지대같이 방대한 독기가 집중될 때만 발생해. 하지만 이런 사막지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말이 안 돼.”
“촌락의 모든 동물들이 언데드가 되었던 걸 봤잖아. 촌락도 되는데, 여기 서식하는 동물들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이런 경우, 사막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봐야 하는데,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제아무리 마왕이 강림했다 해도 이 넓은 사막 전체를 오염시킨다는 건 불가능해. 더구나 모래 속 깊은 곳까지 오염시킨다는 건 더욱 힘들지.”
월터 일행이 언데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기사가 내뿜는 강력한 생명력에 이끌려 주변에 있는 언데드까지 깨어나 전투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사막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대형 몬스터의 사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건 거대 장갑사자로군. 정말 엄청난 덩치야………….”
“우리가 사막을 왕복할 동안 구경도 못했는데, 여기서 뼈대로나마 구경해 보네. 사냥할 수만 있었다면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멋진 갑옷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거대 장갑사자는 여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장갑사자보다 2배쯤 컸고, 갑옷을 두른 듯한 두터운 가죽의 강도도 훨씬 더 뛰어났다. 그래서 가죽 갑옷 제작에 있어서 손꼽히는 소재들 중 하나였다.
“나는 살아있는 멋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저렇게 말라비틀어진 뼈다귀가 아니라………….”
“어? 그런데 저놈 생각보다 강한데?”
언데드의 강함은 살아있을 때의 강함에 거의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강력한 뼈대와 뼈대 속에 비축되어 있던 마나의 양에 따른 결과였다. 거대 장갑사자 언데드도 그 명성만큼이나 막강할 게 당연할 텐데, 순식간에 박살이 나서 흩뿌려지는 걸 보며 다이아나는 놀라고 있었다.
“이제 갓 언데드가 된 것과, 오랫동안 생명력을 흡수하며 성장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 게다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구경만 해서는 제대로 된 강함을 파악하기 힘들어.”
“그건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타이탄의 소유를 인정받은 기사야. 나름 실력은 어느 정도 있다고 봐야겠지.”
기사와 언데드와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라디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강한 기사는 아니야. 뷰 마나 포스에 의하면, 별로 강한 기사는 아니라고 나와.”
뷰 마나 포스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각자가 쌓은 마나의 절대량만을 보여줄 뿐, 그 순도가 어느 정도로 짙은지는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전투 경험이나 무예 숙련도도 파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대략 어느 정도 수준의 기사라면 어느 정도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다는 등식이 성립하기에 기사의 수준을 파악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내가 알기로는 뷰 마나 포스는 각자가 지닌 마나의 절대량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월터의 지적에 라디아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
월터는 씨익 미소 지으며 라디아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검술에 대해서라면 라디아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기사의 수준은 단순히 마나의 양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아. 검술의 숙련도, 생사를 가르는 경험…………. 그렇기에 마나 양이 자신보다 적은 기사에게 죽는 일도 비일비재하거든.”
라디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기사는 모르겠지만 마법사들 간에는 그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아. 제아무리 실전경험이 높다고 해도, 싸이클의 힘은 절대적이거든. 어지간히 바보짓을 하지 않고서는 한 단계 낮은 마법사에게 패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마법사는 기사와 같은 근육뇌를 지니고는 절대로 될 수가 없기도 하고.”
확실히 라디아의 말에 일리는 있었다.
라디아나 파벨이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한 후 결론을 내리는 것에 비해서 자신이나 다이아나는 즉흥적,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마법사는 그럴지 몰라도 저 녀석은 기사야. 기사는 내가 너보다는 더 잘 알아.”
“아, 그러셔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더 이상 시간 끌었다간 독 먼지를 덮어써야 할 거야. 볼 거 다 봤으면 슬슬 떠나자고.”
기사의 막강한 검술에 언데드들이 연이어 터져나가고 있는 탓에 시독을 짙게 머금은 모래 먼지가 서서히 주변으로 퍼지고 있는 중이다.
“더 볼 거 있어?”
월터의 물음에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제 떠나자.”
여기까지 오는 동안 꽤 시간이 걸린 만큼, 돌아갈 계획은 이미 세워놓은 상태다. 며칠 전에 들어갔던 링카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가는 의심을 받을 테니, 다시 제리아 성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몇 발짝 채 옮기지도 않았을 때였다.
지금까지 미행만 하고 있던 정체불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잘생긴 사내였다. 자신들을 미행하느라 제대로 씻지 못한 탓에 외양은 지저분했지만 그게 더 사내를 야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인상도 인상이었지만, 탄탄한 몸매만 봐도 적잖은 수련을 쌓은 고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 뜻밖에도 상당한 미남이네요.”
라디아가 농담을 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건, 월터와 다이아나라는 든든한 방패가 자신의 옆에 서 있기 때문이다.
사내는 싸울 의향이 없다는 걸 보여주듯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에 마주하듯 월터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리아 성에서부터 뒤를 몰래 쫓아오더니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시는군.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사내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서로 관심 사항이 같은 것 같아서 뒤를 따라오게 되었소. 내 정체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주 고귀하신 분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중이오.” ‘고귀하신 분이라…………..?”
저 정도 실력자가 누군가에게 직속되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있다면 왕족을 곁에서 모시는 근위기사 정도…………….
자신도 근위기사이기에 월터는 별생각 없이 말을 받았다.
“고귀하신 분이 누구인지는 우린 알고 싶지도 않소. 그래, 무슨 일이시오?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하시오. 독기를 머금은 먼지가 몰려오기 전에 이 지역을 벗어나고 싶으니까.”
사내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막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 사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변에 대해 서로 힘을 합쳐 조사하는 건 어떻겠소?” 다이아나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흐음……. 이쪽은 넷이고, 그쪽은 혼자잖소. 우리가 너무 손해인 것 같은데?”
사내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핫, 내가 혼자일 리가 없지 않소. 방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아주 고귀하신 분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니깐. 그쪽이 손해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그 말에 월터는 짐짓 주위를 빙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동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소? 아무래도 혼자뿐인 것 같은데?”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넉살 좋게 말했다.
“괜한 오해 살 일은 하기 싫기에 일단 나 혼자 왔소. 제리아 성을 벗어난 뒤부터 기척을 숨기지 않았기에 그쪽에서도 내가 뒤따르고 있다는 걸 파악했을 거 아니겠소. 내가 악의를 품고 접근했다면 기척을 드러낼 이유가 없지.”
월터는 잠시 고심을 하다 입을 열었다.
“귀하의 타이탄을 먼저 보여준다면 그 제안을 받을지 말지 생각해 보겠소. 귀하는 우리들의 타이탄을 봤을 테니 우리 정체를 알고 있을 거 아니오. 서로 공평한 게 좋지 않겠소?”
월터의 제안에 사내는 뜻밖에도 흔쾌히 응했다.
“뭐, 꼭 보고 싶다면야 어쩔 수 없지. 라미루스, 나와라.”
공간을 열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타이탄. 한눈에 봐도 대량 생산되는 타이탄과는 격을 달리하는 고상함을 지니고 있었다
공들여서 디자인해 놓은 아름다운 곡선.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닌 타이탄의 모습에 월터가 신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타르가스? 미센트라 왕국의 근위 타이탄이 어째서 여기에……………?”
미센트라 왕국은 오래전에 신성 아르곤 제국의 손에 멸망해 버린 나라였다. 그런 만큼 그곳에서 노획된 타이탄을 다른 나라에서 쓰고 있을 수는 있다.
미센트라 왕국의 근위 타이탄은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었던 데다, 성능도 상당히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 타이탄에 그려져 있는 문장은 월터의 기억으로는 미센트라 왕국의 것이었다. 그것도 근위 기사단장이 몰던 기체였다.
즉, 사내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혹시………… 올란도 크론다이스 공작이십니까?”
“흠,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왕실을 지키지도 못한 나에게 그런 공대는 해줄 필요 없네. 그냥 올란도라고 부르게.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긴 했지만, 올란도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예전 신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오히려 말이 잘 통하게 됐으니까. 누군가 뒤에 더 있는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 자신은 혼자였다 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뒤에 엄청난 조직이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지만, 그건 조금만 행동을 함께해도 들통날 게 뻔했다.
그런 면에서 상대가 자신을 알아봐 줬다는 건 올란도로서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올란도는 타이탄에게 공간 저편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 후, 월터와 다이아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가? 함께 행동하는 것이…”
하지만 월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이곳에서 조사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본국에서도 돌아오라는 지시가 내려온 상태고 말입니다.” 물론 올란도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해서 발견한 싱싱한 제물인데 이대로 도망치도록 놔둘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말을 따르게 할 만큼 그럴듯한 미끼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