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魔)와의 재회
파도처럼 밀려왔던 살기 너울이 달에 당겨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숨어 있던 열다섯의 그림자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인사가 끝났나? 아니면 1부 끝인가? 일단 안으로 들어와 보란 이야기인가?”
비류연이 조용히 뇌까렸다. 초대받았는데 안 들어갈 수는 없었다.
“가죠!”
그의 말을 신호로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년은 무척 키가 작아 보였는데 얼굴이 아주 귀여웠다. 피부는 솜털처럼 부드럽고, 귀여운 얼굴에 박힌 두 개의 검은 보석은 아주 크고 맑아 보였다. 그리고 몸에 는 바다처럼 푸른 비닷옷을 감싸고 이곳저곳에 화려한 금은 장식이 달려 있었다. 물론 소년의 몸에 어울리지 않는 검이나 칼 같은 병장기는 보이지 않았다. 오색 수 실로 만든 공이나 가지고 놀고 있으면 딱 어울릴 그런 모습이다.
그 소년은 홍매곡 입구 근처에서 한 아름드리 매화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귀여워라!”
진령이 꺄악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말에 화설옥이 정말정말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동생으로 삼고 싶어! 라고 외친 것은 남궁산산이었다. 저 애를 동생으로 삼 을 수만 있다면 남궁상 열과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남궁상에게 썩 달가웠을 리는 없다.
때문에 ‘여기에 웬 소년이?’라는 당연한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남궁상이 소년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꼬마야! 여기 홍매곡의 총관님이 계시는 곳이 어딘지 아니?”
그제야 소년이 돌아보았다. 멀리서 볼 때도 귀여웠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귀여움’을 토하고 있었다.
“짜식, 귀엽긴 무진장 귀엽구만!’
여자들의 반응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남궁상이 다시 한번 물었다. 혹시나 질문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꼬마야, 그러……”
번쩍!
남궁상의 두 번째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싸늘한 한광에 기겁하며 얼른 몸을 빼야 했다. 느닷없는 기습이었다.
“무, 무슨 짓이냐!”
일장 뒤로 몸을 날린 남궁상이 소리쳤다. 그의 가슴 앞섶은 날카롭게 잘려나가 있었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으면 심장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조금 전까지 아무 것도 없었던 소년의 오른손에는 지금 은빛으로 빛나는 차가운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철사처럼 가늘고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낭창했는데 그 안에 머금 은 한광과 예기만은 범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특수하게 제작된 검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은 가늘고 날카로운 만큼 빠르기까지 했다.
잔뜩 뾰로통하게 부은 얼굴로 소년이 외쳤다.
“난 꼬마가 아니에요!”
소년의 시큰거리는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익어 있었다. 꼬마라는 말이 그렇게나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꺄악! 귀여워어어어!”
뒤에서 여자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방금 남궁상이 한번 죽을 위기에 처했다 살아났다는 시시한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합창 중에 진령 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는 사실이 더욱더 남궁상을 못마땅하게 만들었다.
“에휴…….”
남궁상이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소유야! 무슨 일이냐?”
소년의 등 뒤로 몇몇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남자와 여자, 모두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조금 전에 느꼈던 기와 같은 기를 지닌 사람 들이었다. 일부러 안면을 익히러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태도였다.
계속해 보자는 건가?’
그렇게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했다.
“아, 이(二) 사형!”
소유라 불린 소년이 선두에서 걸어온 청년을 보며 얼굴을 활짝 폈다.
곧 둘째 사형이라 불린 사내와 남궁상이 마주섰다. 눈빛이 매처럼 매서운 자였는데 자세히 보니 왼쪽 뺨에 사선으로 길게 검흔이 하나 나 있었다. 그 사내의 무기 는 한 자루의 날렵하게 생긴 기형도인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기형도를 지닌 사내였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묻는 태도가 무척이나 거만했다. 신경에 거슬렸는지 남궁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면서도 묻는다? 마치 일부러 도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에게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가 아니었소? 마천각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한결같이 무례하오?”
남궁상이 핀잔을 주었다.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으면 그럴 것이오.”
사내가 태연하게 대꾸한다. 남궁상도 지지 않는다.
“사형이 이렇게나 무례하니 사제가 저토록 무례한 것이겠지. 사제 교육이나 좀 똑바로 시키시오.”
“무슨 일 있었느냐?
기형도를 지닌 사내가 묻자 소년이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내가 주먹을 쥐고 소년에게 가볍게 알밤을 먹였다. 그러고는 호통 쳤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
“죄, 죄송해요.”
그제야 남궁상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그 얼굴은 더욱 보기 좋게 구겨지고 말았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소심해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손을 쓸 때는 독하게, 한 치의 동정심도 담아서는 안 된다고 했지! 왜 목을 노리지 않고 가슴을 노렸느냐? 게다가 너의 마음이 한 호흡 망설이는 바람에 베는 것마저 실패하지 않았느냐!”
“죄송해요, 이 사형!”
자신의 목을 제대로 따지 못한 일로 사제를 꾸짖는 사내를 바라보는 남궁상의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그의 속은 곧 분화할 화산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 르고 있었다.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지 사내와 그 뒤에 따라온 몇 명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쯧쯧, 저런 간단한 도발에 저렇게 쉽게 넘어가서야!
지켜보던 비류연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옆에서 염도가 괴기스런 흉소를 흘리고 있었다. 저들은 나타났을 때부터 고의적으로 인솔자인 염도와 빙검을 무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빙검은 차가운 눈빛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염도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성깔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흐흐, 이 애송이 놈들이!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염도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도발에 넘어간 사람은 비단 남궁상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에휴!”
옆에서 비류연의 나직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멈춰라!”
천무학관 대표단들과 마천각 대표단들이 신경을 곤두세운 채 기세등등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호통과 함께 한 명의 노검객과 그의 수행원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왔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말썽은 금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호통을 치는 노검객의 기세에는 사뭇 위엄이 넘쳐흘렀다. 범상치 않은 기백, 타인을 압도하는 기도가 노검객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연 이 노검객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지 몇몇 청년들이 기세를 죽였다. 이 노인에게 거역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노검객은 꽤나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어라? 할아버지!”
먼저 아는 척을 한 쪽은 비류연 쪽이었다. 그는 노인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분명 검마 초월이라 자신을 칭했던 노인이었다.
순간 노검객의 얼굴이 마치 실패한 문장이 실린 채 휴지통에 내던져진 연서(戀) 조각처럼 구겨졌다.
“으잉? 네, 네놈은!”
검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수백 번의 풀무질에 달구어진 쇠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삽시간에 끓어오른 화기가 배출구를 찾지 못한 채 몸 안에서 방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노사님? 아시는 분입니까?”
검마 초월의 곁에 다가온 한 명의 청년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검마는 기다렸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저딴 놈! 난 모른다!
“???”
예상을 웃도는 격한 반응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비류연이 알고 있는 얼굴이 또 하나 있었다. 극도로 인간관계가 좁기로 유명(?)한 비류연인데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된다니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비류연의 시선이 검마를 따라온 한 명의 중년인을 향했다. 꽤나 인상에 남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비단 비류연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하인처럼 수수한 복장을 하고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 그와 직접 대면한 이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록 비류연 빼고는 모두들 먼 발치에서 봤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이라 다들 기억들은 하고 있었는 데도 말이다.
그 사내는 그가 누구보다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의 부탁을 받고 이 여행에 동참한 것이었다.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모용휘의 물음에 사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군요.”
사실 그는 정말로 모용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비류연이 물었다.
“어라? 우리 전에 어디선가 어떻게 만난 적이 있었지 않나요?”
“하하하! 글쎄 사람을 잘못…….”
고개를 돌려 비류연과 시선을 마주친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다시 한번 만나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새겨준 인물이 빙긋이 그때의 그 소름끼치는 미소와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남자는 격동하는 자신을 다스리는 데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만 했다.
‘그래, 당연한 일이야, 당연한 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 아니던가.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천각 제자들 중 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좀더 제대로 변장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사내는 후회했다.
“거참 이상하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긴가 민가 하기는 했지만 비류연은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 그 일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러나 모용휘는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라도 할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휴우…….”
사내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듬뿍 안겨주던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이미 숙소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위험했어.. .!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 같았다.
‘설마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분의 당부가 있었기에 벌써부터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그저 풀숲에 숨어 빠끔히 지켜보는 관찰자일 뿐. 자신의 신분은 지금 자신의 역할에 방해가 될지언정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좀더 주의해야겠어!”
사내는 조용히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사내의 그림자 위로 조용히 석양이 내려앉았다.
열병(閱兵)한 군대의 창칼처럼 우뚝 솟아 있는 험산준령의 날카로운 그림자 뒤로 짙게 깔린 황혼의 석양빛은 황금색 불꽃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답군!”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을 몰고 다니는 냉막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아래를 굽어보았다. 얼어붙은 신월 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맺혔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두 눈동 자는 웃음을 모르는 듯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황혼의 하늘은 피처럼 아름다운 붉은 빛깔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봉황은 삼백 년에 한 번 불꽃 속에 몸을 던져 잿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했던가?”
재생과 부활!
“영생의 불사조. 불꽃의 신조 또한 그러하거늘…, 지금의 강호는 너무나 낡았어!”
낡은 것은 새롭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순간 사내의 두 눈에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이제 내가 너를 재생의 불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사내가 계속해서 외쳤다.
“낡은 과거는 이곳 회색 잿속에서 흐트러지고, 새로운 역사가 새벽의 여명 속에서 태어난다. 이제 과거의 이야기는 모두 이곳에서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이야기 가 시작되리라!”
푸드득! 날개 소리와 함께 한 마리 커다란 매가 날개를 접으며 그의 어깨에 앉았다. 그 기상이 사뭇 늠름하다. 매의 깃털은 사내의 눈에 비치는 석양에 붓을 찍어 칠해 놓은 것처럼 붉었다.
붉은 매……. 그 매의 이름은 적뢰(赤雷)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