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13화 – 무료한 은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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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13화 – 무료한 은설란

무료한 은설란

한 여인의 섬섬옥수가 창문을 열었다. 밝고 시원한 햇살이 열린 창문을 통해 아녀자의 방에 허락도 받지 않고 난입해 들어왔다. 따뜻하고 포근한 오전의 햇살. 여인의 시선이 창 밖을 향한다. 여인은 이 제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창 밖을 통해 보이는 널찍한 시가. 분주히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 군데군데 눈에 띄는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 언뜻 보이는 옷자락의 매화 무늬.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녀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각자의 짐을 지고 거리를 바삐 왕래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조금 위로 올려보자 지평선 저편에 병풍을 치고 서 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산 맥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녀의 시선이 그 중 한 봉우리를 향한다.

산의 이름은 화산(華山)이라 했다. 중원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산.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하나인 서악(西) 화산. 봉우리의 이름은 천무봉(天武峯)이라 했다.

은설란은 지금 좀 삐쳐 있었다. 새침한 표정으로 뾰로통해져 있다. 왜냐하면 화산규약지회가 열리는 천무봉까지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노와 함께 이곳 매화루에 남겨져버렸다. 회의노인은 동행했음에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녀를 데려가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사실 이곳까지 함께 동행시켜준 것만 해도 나름의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격도 없으면서 천 무봉까지 동행이라니……. 현실적으로 절대 실현 불가능한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미인계를 앞세운 그녀의 억지와 비류연의 손 거듬으로 인해 가능했던, 파격에 파격을 거듭한 행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이해는 가능해도 감정적으로 납득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무엇보다 불만스런 문제 하나가 지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심심해!”

시름 어린 이마에 찌푸려진 미간을 한 아름다운 미녀의 한숨과 함께 섞여 나온 한마디. 볼이 움푹 들어가고 붉은 빛깔의 석류 같은 매혹적인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 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산들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그녀의 귀밑머리를 흔들며 하얀 볼을 살짝 간질였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다시 한번 천무봉을 향했다. 그녀는 지금 저 봉우리의 어느 한 곳에 있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변덕스럽게도 금세 다시 시무룩해 지고 말았다.

“냉랭할 정도로 과묵하지만 의외의 지고한 순진함 때문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 소저도 없고…….”

한 떨기 수선화를 지키는 날카로운 한 자루의 검 같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여인인 독고령도 없다. 그리고 항상 활기차고 힘이 넘치며 웃음을 잃지 않는 이진설도 없 었다. 항상 남에게 미소를 전염시켜 주는 아이였는데……. 물론 지금은 효 공자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녀라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녀의 생각이었다.

‘효 공자……. 아니, 갈 공자!’

효룡을 떠올리자 그와 혈육의 인연으로 얽혀 있는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또다시 마음이 울적해지면서 가슴 한 켠이 납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화사한 봄빛처럼 어려 있던 미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차가운 겨울의 창백한 백광이 여인의 얼굴 위에 드리워져 싸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다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 하자 여인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며 굳세게 결의의 매듭을 다시 조였다.

“이제 울지 않기로 결심했잖아? 란, 울면 안 돼!

스스로의 맹세와 결의 때문에 그녀는 눈물 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비통했던 상처의 아픔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이 슬픔은 야속하게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노인이 들어왔다.

은설란의 마부이자 보이지 않는 호위역 한노. 그는 그녀의 든든한 보호자이자 충실하고 적절한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의지되는 조언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에 대 한 그녀의 신뢰는 매우 컸다.

노인은 손에 세안물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도 노인은 항상 자신의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필요 없다고 고사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 들의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은설란도 마지못해 그냥 시중을 받고 있었다.

한노가 은설란의 비스듬히 돌려진 옆 얼굴을 바라봤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지만 방금 전의 그림자가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 근심의 빛 이 떠올랐다.

“그나마 주위에 다른 소저들이 있을 때는 밝고 명랑했거늘…….’

혼자 외로이 남아 있다 보니 자연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 애써 굳센 잠금장치를 하고 마음 한 구석 깊숙이 묻어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새록새록 되살아나서 여린 마 음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켜보는 노인은 이 작은 아가씨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망쳐버리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소저!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합니다. 잠시 외출이라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봉행(奉行)하겠습니다.”

창가에 걸터앉아 열린 창문 너머에 펼쳐진 서럽도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던 은설란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둥지를 떠난 그때부터 항상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는 듬직한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애정과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안개 속에 흩어질 듯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걱정을 끼쳐 드리고 말았군요. 죄송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잠시 감상에 빠져 자신의 동행자를 걱정에 빠트렸다는 것을 이 총명한 여인은 눈치 챘던 것이다.

“벼, 별 말씀을요! ”

한노는 세차게 양손을 섞어 흔들었다. 이럴 때면 노인은 언제나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은설란은 금세 자신을 추슬렀다. 빠른 회복. 그만큼 자기 통제가 뛰어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좋은 날씨네요. 화산에서 불어오는 녹음 냄새 짙은 바람도 시원하고요. 친구들의 소식을 함께 전해주지 않아 섭섭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한번 나가 볼까 요?”

“예! 소저. 잘 생각하셨습니다.”

노인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그녀가 거대한 삼거리의 모퉁이를 돌 때였다. 외출할 때부터 어떤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정처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걷고 있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번잡함 속에 묻혀 있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기분전환이 되었다. 그녀는 인파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며 움직였다. 물론 쓸데없는 소동 을 피하기 위해 얼굴의 반은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시선들이 그녀를 향해 쏠린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때 거리 한쪽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자연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쏠렸다.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욕지거리와 함께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무래도 무림인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 이었다. 사건의 진원지를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가 인의 장벽을 둘러치고 있어 은설란은 그 안에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5대 1의 불리한 싸움이었다. 한통속인 듯한 다섯 장한이 한 젊은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욕이 8할 이상 섞인 그들의 말을 몇 마디만 듣고도 은설란은 저 청년이 쓸 데없는 시비에 휘말려 들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아무래도 이 다섯 장한은 어젯밤을 뜨겁게 불태운 기루에 낼 화대가 부족한 가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긴급 조달에 나선 모양이었다.

이들의 악행은 꽤 유명한 듯했다. 모인 군중들 사이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그 중 우두머리가 화산파 1대 제자의 친구의 친구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화산파의 앞 마당인 이 마을에서는 그 정도 신분으로도 텃세를 부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시비에도 청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청년이 조용하면 조용할수 록 다섯 장한의 기세는 점점 더 흉폭해졌다. 청년이 자신들의 위세에 눌려 말도 못할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동정심 따위는 없다. 그들은 항상 저항할 수 없는 자를 핍박하는 것을 즐겨왔던 것이다. 그때 화강암처럼 굳게 닫혀 있던 청년의 입술이 움직였다. 거리가 먼 데다가 시끌벅적한 군중들 덕분에 은설 란은 들을 수 없었지만, 청년의 주위에 있던 구경꾼들은 그 입술의 움직임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쓰레기들!”

청년의 입술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섯 놈팽이들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무시당하는 것도 무척이나 오래간만의 일인 듯했다.

“주거어어!”

햇빛에 칼날이 위협적인 빛을 발했다. 그러나 폭발할 듯 긴장되었던 공기는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정적(靜寂).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강한 전염성을 띠고 퍼져 나갔다.

무슨 일일까? 그러나 가려진 인의 장벽 때문에 은설란은 저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무리가 갈라지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상처 같은 것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옆에 있는 객잔으로 발을 옮 겼다. 덩달아 구경하던 점소이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그를 영접했다. 직각으로 굽혀진 그들의 인사는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은설란은 면사 위로 드러난 눈을 크게 떴다. 저 발걸음, 저 뒷모습.

왠지 그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저 사람은?!”

그녀의 큰 봉목(鳳目)이 흔들렸다.

“소저! 무슨 일이라도?”

은설란의 당황을 읽었는지 한노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소저?”

다시 한번 묻자 그제야 답한다.

“아, 아니에요. 방금 무척 낯이 익은 사람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요.”

“아는 사람이라 하시면.. 혹시 과거에 누구랑 원한이라도 맺은 적이 있으십니까?”

이 아가씨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인간사라는 것에는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다. 

“네에?”

어리둥절한 반문이 되돌아오자 한노는 일단 안심했다.

“그 사람이 여기 있을 리가…….’

어느새 그녀의 발걸음은 그 그림자가 사라진 곳 가까이로 다가서고 있었다. 호기심에 자석처럼 이끌려….

“매화루와 무척 사이가 나쁠 것 같은 곳이로군요.”

“확실히 그렇군요.”

은설란이 올려다본 그곳에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매화루와 쌍벽을 이룰 만큼 호화찬란한 객잔이 화려한 건축미를 뽐내며 서 있었다.

분명 매화루와는 이곳에서 규모와 이윤에서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이는 치열한 경쟁자일 터였다. 두 객잔의 사이가 좋을 가능성은 백에, 아니 만에 하나였다.

은설란은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한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여러 명의 무사들이 꽤 많은 수의 수레를 지키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소저, 이곳은 중원표국의 표사들이 묵고 있는 객잔입니다.”

한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중원표국?’

물론 그곳이 어딘지는 그녀도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중원제일표국, 이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곳. 그러나 그녀가 아는 한 그 사람과 중원표국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그냥 단순한 숙박인가? 아니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의혹의 그림자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사람의 호기심이 때로는 위험을 부른다는 사실을 이때 은설란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정말 저것이 일개 표국의 표사들이 지닐 위용인가?’

날카로운 시선, 엄중한 기상, 함부로 발출되지 않고 갈무리된 기운, 명령에 의한 일사불란함.

찬찬히 시간을 들여 유심히 살펴본 결과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기세의 엄중함 때문에 과연 중원제일표국이라고 감탄하고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 만 그러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걸렸다. 가장 수상쩍은 점은 너무 고수급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서 있는 모습 하나만으로 충분히 짐 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많은 고수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지키고 있는 짐을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불법적인 일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문제를 놓고 조 용히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계속해서 객잔 주위를 돌면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저쪽에선 수상쩍게 여기게 마련이다. 게다가 은설란의 자태는 까마귀 속의 백로처럼, 진흙 속의 연꽃처럼 너무 눈에 띄었다.

표두 한 명이 험상궂은 얼굴로 위압감을 팍팍 풍기며 다가왔다. 은설란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노는 모종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지금 그녀의 곁에 없었다.

“소저?”

뻐기듯 묻는 말에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곳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소이까? 좀 전부터 쭉 지켜봤는데 좀체 이곳을 떠나지 않더이다.”

위압감이 물씬 풍겨나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특별한 볼 일은 없답니다. 잠시 사람을 기다리며 주위를 배회했을 뿐이지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

“헉!”

험상궂던 표두의 얼굴이 순간 봄 햇살에 눈 녹듯 녹아내리며 가면이라도 바꿔쓴 듯 봄날 훈풍으로 뒤바뀌었다. 눈동자가 뭍에 여행 나온 지 사흘은 된 듯한 생선처 럼 풀려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은설란이 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면사를 풀고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던 것이다. 사중화(中花) 은설란의 미소를 정면으로 바라 보며 험상궂은 얼굴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웃음은 지나칠 정도로 약발이 좋았다. 어느 정도냐하면 이 표두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보기에도 은설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지체 높은 집안의 고귀한 영애의 그것이었다. 한낱 무인 나부랭이가 예의도 잊고 집적거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는 않았다.

“이번 표행에서는 일체의 개인 행동을 금한다. 절대 사고치는 일이 없도록! 조그만 사소한 일이라도 엄중하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돈, 여자, 술, 도박. 모든 것에 금욕하라! 먼저 목숨이 아깝다는 전제 하에서! 물론 목숨이 아깝지 않은 용기 넘치는 자들을 만나보는 것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 겠다.”

조금이라도 사고를 치면 나중에 혼백이 달아날 만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는 협박성 다분한 경고였다.

‘쳇! 하지만 이런 미인을 위해서라면 한번쯤 목숨을…….’

집법관대표두 격광은 물론 귀신처럼 무섭지만 눈앞의 선녀가 그 공포를 몰아내주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의 마음이 쓸데없는 용기로 불타올랐다. 남자의 뱀 같은 눈빛에 은설란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남자의 마음 속에서 이성과 욕망이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곧 승부가 가려질 그 찰나였다.

“소오오저어어어!”

거리 저편에서 헐레벌떡 한노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 정도의 고수가 저런 어정쩡한 자세로 뛰어올 리가 없건만. 지금 그의 모습은 정말 먼 곳에서 육십 먹은 노인이 상전을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뛰어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때 사내는 달콤하고 어두운 욕망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가씨. 오, 오래 기, 기다리셨습니다.”

그러고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표두 곡성을 돌아보며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호들갑스럽게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저희 아가씨에게 무,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설마 저희 아가씨께 무슨 터무니없는 일이라도 일어났던 것은 아니겠지요? 이 늙은이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불량배들을 만났다거나, 아가씨의 미모에 눈이 먼 색마가 저희 아가씨에게 집적거리려고 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겠지요, 무사님?”

순간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럴까 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있던 곡성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늙은이 의외로 감이 날카로운지도…….’

마음에 영 안 드는 그 늙은이는 여전히 그의 눈앞에서 한탄을 계속하고 있었다.

“만, 만일 무슨 일이 생기셨다면 나으리께 이 못난 늙은이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요. 흑흑흑, 나으리가 보시는 앞에서 책임 소홀을 이유로 스스로 자결하겠습니 다. 흑흑흑.”

노인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사방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이렇게 되다 보니 주위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는 것도 당연.

일제히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에 표두 곡성도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젊고 예쁜 귀한 댁 처자를 집적거리려 한 색한 – 틀린 평가는 아니지만 – 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 글쎄, 틀린 평가가 아니래두 – 된 것이다.

“무슨 일인가?”

소란스러움을 감지한 표국 사람 중 한 명이 저쪽에서 달려왔다.

“이거 안 좋군! ‘

곡성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자신 때문에 이렇게 소란이 일어난 것을 알면 대표두가 자신을 문책할 것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감봉 한두 달은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표행의 분위기 상 그것보다 더한 처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대표두 격광의 귀신 같은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그는 수레 하나를 잘못 관리한 다섯 명의 표사가 중도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직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사양이었다.

‘제길, 똥 밟았다! ‘

아무래도 재수가 옴 붙었던 모양이다.

“아가씨! 흑흑흑! 정말 아무 일도 없으셨겠지요?”

어느새 면사로 얼굴을 다시 가린, 그래서 곡성으로 하여금 입맛 다시며 아쉬워하게 만든 은설란이 노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자자! 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노! 자자 일어서세요. 사람들이 본답니다.”

다독거리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거의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시피 한 노인이 마지못한 기색으로 옷을 털며 일어났다. 눈물이 범벅이 된 눈이 우락부락한 사내를 향했다.

“이 늙은이가 아가씨를 뫼셔가도 무사님께서는 괜찮으시겠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주변의 정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그, 그러시오.”

“가, 감사합니다. 가시죠, 아가씨.”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숙이며 깍듯이 인사한 노인은 얼른 은설란을 데리고 좌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장내를 빠져 나왔다. 남겨진 곡성은 달려온 동료 표두에게 현 상황을 변명, 얼버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을까…….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구부려져 있던 허리가 어느새 대나무처럼 꼿꼿이 펴지고, 순진하게 눈물을 흘리던 두 눈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기광이 감돌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방금 전까지 그런 식으로 울고 불며 어린애처럼 난리를 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군요!”

한노의 한숨 섞인 말에 은설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면목이 없었다. 한노가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 가던 노인의 몸이 우뚝 멈춰서자 덩달아 여인도 제 자리에 발을 멈추었다.

“감시가 심상치 않습니다. 충분히 조심하시길! “

정중하지만 날카로운 직언이었다. 노인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눈이 지금 숫돌 위에서 날카롭게 연마된 창날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은설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곤경에서 구해준 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별말씀을요, 아가씨!”

노인의 얼굴은 어느새 다시 힘없고 순진한 마부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노인과 여인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노인은 듣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은설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직 그녀의 의혹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오늘 밤은 별이 밝을 것 같군요.”

“…….”

노인은 묵묵부답, 대답이 없다. 은설란은 개의치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노인은 살짝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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