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14화 – 침투(浸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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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14화 – 침투(浸透)

침투(浸透)

밤은 빛 속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숨기기도 한다. 특히 오늘처럼 달빛이 미약한 밤은 모습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노인과 여인은 온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은 옷을 두르고 있었다. 이런 유의 검은 옷은 숨어 들어가는 자들의 기본 예복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우선 경비가 가장 헐거운 곳으로 향했다. 눈여겨 봐둔 곳이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표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 가장 경비가 삼엄했다. 그 경비를 뚫으 려면 무척 많은 고생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사람의 목표는 표물이 아니었다. 물론 표물의 정체를 알아내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려면 많은 위 험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음습한 곳에 은닉된 부패한 시체처럼 왠지 위험한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담을 넘는 것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은설란은 남의 발목을 잡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녀린 교구(嬌軀)를 고양이처럼 민첩하고 조용하게 움직였다. 얼굴만으로는 흑도사화라고 불릴 수 없다. 그에 상응하는 무공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선택기준이 얼굴만이었다면 흑도사화가 아니라 지금쯤 흑도삼십육화라 고 불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객잔 전체를 중원표국이 빌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안에 안전지대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후원에까지 화톳불을 피워놓고 경비가 서 있는 줄은 짐작치 못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한노가 미 리 주의하라고 경고를 보내지 않았으면 발각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조용히 후원 객실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후원 3층 객실이라고 했던가…….?

한노는 용의주도했다. 그는 낮에 풍매객잔의 점소이 하나에게 돈을 찔러주고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왔던 것이다. 이곳 풍매객잔의 최고 귀빈실은 후원 3층이 라고 했다. 중원표국의 소국주와 몇몇 사람이 그 3층을 통째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그렇다면 그녀가 본 그 사람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풍매객잔 후원 건물의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서 한 여인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려져 알 수 없지만 옷 밖으로 드러난 미끈한 굴곡이 여인임 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뒤이어 같은 복면을 두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벗기면 이 사내가 실은 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은설란과 한노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귀신처럼 홀연하고 밤처럼 은밀했다.

건물의 높이는 3층이었다.

은설란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자신이 직접 올라가 보겠다는 뜻이다. 그러자 한노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서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은설란은 노인의 의사를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연마된 보석처럼 빛나는 두 눈이 그녀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노인은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 녀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다니 드문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어떤 강력한 동기가 부여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생각해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는 아래를 가리킨다. 이곳에 남아 그녀를 보좌하겠다는 뜻이었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은설란의 두 눈에 감사의 빛 이 어렸다.

꾸벅!

그녀는 가볍게 절하고 시선을 들어 자신의 목표 지점을 바라봤다.

‘좋아!’

높이는 3층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리 부담스런 높이는 아니었다. 그녀가 경공을 발휘해 가볍게 뛰어올라 1층 처마 위에 무사히 착지했다. 그러나 깃털이 살포시 내 려앉은 것처럼 소리는 나지 않았다. 조그만 손짓에도 달그락거리던 돌기와도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보며 한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은설란은 1층에 이어 2, 3층 처마도 가볍게 올라갔다. 그리하여 곧 목표 지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밑에서 순찰 돌던 무사들이 혹시나 눈치챌까 봐 몸은 지붕 위에 바싹 갖다댔다. 달빛에 신형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 3층도 역시 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몽땅 뒤지고 다니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다가 위험도 크다.

그녀는 일단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청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녀의 가청대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조용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청명한 저녁 공기를 실어 나르는 소리,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 화톳불이 타오르며 탁탁 불꽃이 튀는 소리, 사박사박 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 달빛이 내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던 밤이 그녀의 귀 안에서 시끌벅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귀에 그녀가 바라던 종류의 소리가 들린 것은.

“준비는? “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한 치의 착오도 용납되지 않는 일. 실수는 있을 수 없다.”

“무, 물론입니다.”

한 사람이 묻고 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나 창문이 모두 닫혀 있는 탓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래서는 내용을 알아도 목소리의 주인은 알아볼 수 없었다. ‘한 번 해볼까?’

물론 위험했지만 그것을 무릅쓸 가치는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가볍게 몸을 움직여 소리가 들리는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는 곧 2층 처마의 들보 중 하 나를 손으로 잡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바퀴 회전했다. 매끄럽고 깨끗한 회전. 마치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곧 3층 처마에 대롱대롱 매 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사뿐히 착지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어긋남이 발생하고 말았다.

달칵!

아주 미약하게 기와가 흔들리는 소리. 은설란은 급히 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그녀가 밟은 기와는 애초에 다른 것과는 달리 들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식은땀이 그녀의 등을 적셨다. 그녀는 석상처럼 몸을 뻣뻣이 굳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전신의 신경을 최대한 예민하게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끌어올려진 모든 감각을 몽땅 쏟아부어 창문 너머를 감시했다.

‘설마 들키지는 않았겠지?’

초조함이 심장을 조여왔다. 갈증 때문에 목이 타는 듯했다.

한참을 주시해 보았지만 창문 너머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발견되지 않았다.

“휴우……..

그제야 그녀는 안심하며 밟고 있던 발을 기와로부터 살짝 떼어냈다. 이번에는 전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화가 들리는 방의 벽에 몸을 붙인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지붕 위에서 들었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잡혔다.

“…하지만 보고에 의하면 이미 수레 하나를 잃었다고 하더군!”

창 밖으로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린다. 부하로 보이는 인물이 바닥에 부복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잘못인 지는 그녀로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설마 그곳에서 느닷없이 산적들이 불화살을 쏘며 나타날 줄은……..

“구차한 변명,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부하의 변명을 잘랐다.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목소리라고 은설란은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의아해 했다. 그가 알던 그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무감정한 목소리였는지 돌이켜본 것이다. 결론은 ‘아니다’였다.

“내가 잘못 안 건가?’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부하인 듯한 사람이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있는 것 같았다.

“며, 면목 없습니다.”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상관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창문 건너에서 엿듣던 그녀로서도 충분히 느 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신뢰보다는 공포로 이루어진 상하관계였다.

“작전 2단계의 진행 상황은? “

다시 무감정한 목소리의 사내가 물었다.

“이미 연락은 완료했습니다. 심어놨던 간세의 신원확인 또한 끝났습니다. 1주일 후 첫 반입분이 옮겨질 것입니다.”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충견처럼 재빠르게 대답한다.

‘반입분? 1주일? 간세?’

이해할 수 없는 말의 편린들이 그녀의 의혹을 자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핵심은 보이지 않았다.

“좋네! 실수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도록! 붉은 꽃이 만개한 화산의 장관을 꼭 보고 싶으니깐 말일세.”

“존명!”

부하가 깊숙이 부복하며 대답했다.

‘붉은 꽃?’

왜 그 말이 그토록 불길한 울림을 내포하고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대화가 끝났다.

탕! 방문 닫히는 소리가 창문 밖에 붙어 있는 그녀의 귀에까지 들렸다. 아마 부하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물러난 모양이었다.

은설란은 지금 심한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목소리만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역시 얼굴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위 험을 감수해야 했다. 만일 그 남자가 그녀가 짐작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무공으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돌아갈까?’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창백한 달빛이 길 잃은 여행자의 길잡이처럼 미약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톡!

톡!

톡!

남자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길에 붉은 점이 하나씩 차례로 찍혀 나갔다. 길바닥에 찍힌 붉은 점도 밤의 어둠 속에 빛나는 창백한 월광 아래서는 단지 검은 점으 로 보일 뿐이었다.

“크윽…, 빨리 알리지 않으면…….?”

너무 방심했다. 상대를 너무 얕잡아 봤다. 걸음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전신의 신경과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복부가 불에 덴 듯 화끈했다.

나무 위에 한 명, 지붕 위에 한 명, 골목 사이에 한 명. 세 명의 추격자는 이미 제거했다. 밤은 그들의 죽음을 은밀히 덮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냥개들이 자신의 피 냄새를 맡으며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인물에게 입은 처음의 상처 때문에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도망치기 위해서는 커다란 대가가 필요했다. 팔뚝과 허벅지에 난 상처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젠장, 조무래기들이…….”

추격자는 전문가들이었다. 단순한 표국의 표사들이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이 어둠 속에 몸 담았던 그는 알 수 있었다. 은설란의 짐작대로 그 곳에는 세인의 눈에 가려진 뒷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곁에 그녀는 없다.

‘천면은신이라 불리던 내가 방심해서 이런 꼴이 되다니……. 꼴좋군.’

상처에서 피가 꾸역꾸역 밀려나왔지만 그의 입가에 맺힌 자조 섞인 쓴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만일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분을 뵐 면목이 서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으로서 그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 이었다.

“빨리 알리지 않으면…..”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 어둠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봉우리가 신월(新月 : 초승달)의 달빛을 받아 창칼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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