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15화 – 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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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15화 – 긴 밤!

긴 밤!

은빛으로 반짝이는 별의 성좌가 화산(華山)이 이고 있는 밤하늘의 어둠을 찬연하게 수놓았다. 그 백열광의 어우러짐이 일으키는 아름다움은 감탄성을 자아낼 만큼 황홀한 것이었지만, 대자연의 아름 다움도 나예린에게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순백의 봉황!

별빛을 장식처럼 두르고 나예린은 조용히 서 있었다.

틀어올린 검은 머리칼은 밤의 빛깔보다 더욱 짙었고 그 위로 윤기가 흘렀다. 별빛과 달빛이 앞 다투어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땅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밤의 성좌, 그 중심을 이루는 북극성의 별빛이 그녀에게로 흡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밤의 한가운데서 오직 나예린 혼자만이 빛나고 있는 듯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세상과 그녀의 존재 자체를 격리하려는 듯한 거리감과 차가움이었다.

그녀의 신비스런 두 눈동자에서는 무심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회색으로 덧칠해진 무채색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예린은 시선을 돌려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저인 독고령이 보이고, 이진설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효룡도 보였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상상도 못했던 일이 지금은 가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예린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 무리의 중심에 비류연이 있었다.

오늘로 이곳 홍매곡에 온 지 이틀째가 되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사람들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몇몇 집단으로 나뉘어 끼리끼리 모였다. 물론 마천각과 천무학관의 사람들은 엄격하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들 사이에 화합과 공존이란 아주아주 멀고 먼 이야기였다. 어제도 보자마자 시비가 붙지 않았던가. 아직 그 앙금이 완전히 풀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로 호시 탐탐 그 앙금을 털어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지극히 비평화적이고 무대화(無對話)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흑과 백, 정과 사. 그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두 가지 색밖에 없었다. 흑과 백이 섞인 회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색이었다. 더욱이 그 회색이 은빛으로 빛나 길 바란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이상론이었다.

인간의 자아는 8세가 되면 기초 부분이 고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20년 이상 주입시켜 온 상식을 하루아침에 파괴하고 새로운 상식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무리한 요 구일 것이다.

일석점검이 끝난 이후의 시간은 무얼 하든지 자유였다. 위쪽에서는 흑도와 백도의 젊은이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글게 모여앉아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지만, 지금 이 상태로 보자면 싸움이나 안 나면 기적이었다.

지금 그들이 묵고 있는 곳은 임시로 배정된 숙소라고 했다. 그것은 곧 다른 식으로 숙소가 바뀔 거라는 것을 암시했다.

회의노인은 어찌 된 일인지 이 홍매곡에 들어선 이후 보이질 않았다. 비류연은 그 사실에 대해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비류연의 주위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장홍, 효룡, 이진설, 독고령, 모용휘, 남궁상, 진령.. 그리고 나예린. 모용휘가 이곳에 끼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 라운 일이었다. 아마 이진설이 조르지 않았으면 혼자서 자기 수련에 몰두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모용휘는 물론이고 여기 모여 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것이 기나긴 밤의 시작이 될 줄은 이때까지만 해도 티끌만큼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바람이 혈향을 머금고 있군요.”

비류연이 모닥불을 한번 들쑤시며 말했다. 불티가 떨어지는 꽃잎처럼 날렸다. 내용이 심상치 않음에도 ‘어라? 바람이 차네.’ 정도의 어투였다.

자연 사람들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그러나 그는 태평스럽기만 했다.

“산의 밤은 차죠. 손님께서는 여기 와서 불이라도 쬐시지요.”

그러자 다섯여 장 떨어진 풀숲이 들썩거렸다. 긴장감이 일순간에 높아졌다. 비류연이 지적하기 전까지 아무도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겨우 5장의 거 리에서 그들의 이목을 피한다는 것은 평범한 실력으로는 불가능했다.

비류연은 여전히 태평했다.

부스럭!

작게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노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팔뚝과 허벅지, 다리,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고 수십 개의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지에 난 상처들 중에 치명상은 없는 것 같았다. 가장 심한 것은 배 쪽의 상처였다. 왼손으로 복부를

움켜잡고 있었는데 그 틈 사이로 피가 심하게 흘러내렸다. 비릿한 혈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안색은 시체처럼 파리했지만 두 눈만은 횃불처럼 밝게 타오르고 있었 다.

“노인장께서는!”

가장 먼저 노인을 알아본 것은 나예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울림의 의미를 알아챈 비류연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야밤에 등산이라니 좋은 취미네요. 그런데 마차는 어디다 두셨나요?”

산을 오르는 데 하루가 걸렸다. 십여 명의 추적자를 뿌리치는데 밤을 모두 소비하고 다시 낮을 소비했다.

이미 부상당한 상태에서 맞닥뜨렸는지라 그도 멀쩡하지는 못했지만 십여 마리의 사냥개들은 더더욱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사지와 어깨에 입힌 상처의 대가로 그 들은 모든 생명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인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기다시피해서 이곳 홍매곡까지 올라온 것이다. 초인적인 의지력이라 할 만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바로 은설란의 마부 한노였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장 먼저 다급한 음성을 토한 이가 모용휘라는 점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그가 이런 일에 – 물론 다급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은 지금까 지 계속되어 온 그의 행동방식으로 미루어보아 무척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본인도 당황스러웠으리라.

“은 소저께서 납치당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노가 다시 한번 설명했다. 한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피가 흘러나오는 노인의 복부와 사지를 향했다. 갑자기 끔찍한 최악의 상황이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올라 몇몇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누구의 소행이죠?”

이 중에서 가장 침착한 것은 의외로 경조부박(방정맞고 경박하다)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비류연이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한노는 솔직히 대답했다.

“잡혀간 곳은요?”

“풍매객잔입니다.”

“어, 풍매객잔이라면…”

윤준호는 풍매객잔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거기에는..

“중원표국의 표행이 머물고 있는 곳이지요!”

한노가 윤준호를 대신해 대답했다.

툭툭!

다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방울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꿈쩍도 않고 반듯하게 서 있었다. 말 붙이기도 힘든 그런 분위 기였다.

“흐흠…….”

중원표국이라면 비류연도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 꽤 시끄러웠으니깐.

“호오? 그럼 할아버지께선 그 중원표국을 의심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중원표국이라고 하면 중원제일표국으로 더욱 유명한 정도제일표국!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남궁상이 반론을 펼쳤다.

“냄비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보죠.”

그제야 한노는 자신이 겪은 자초지종을 소상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밤이 시작되었다.

술시초(戌時初 : 약 1900시경) 화산 천무봉 홍매곡

“설마 구하러 갈 생각인 건 아니겠지?”

“응?”

장홍의 물음에 비류연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무슨 문제라도? ”

“후우, 설마 했는데 아무래도 진짜로 구하러 갈 생각인 것 같군.”

한숨 섞인 말에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인의 생명은 무거운 법이지!”

그럼 미인이 아닌 생명은? 하고 물어보려다가 장홍은 그만 두었다.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비류연이 다시 한번 물었다.

“몰라서 묻나? 화산규약지회 참가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곳 홍매곡을 벗어날 수 없네. 그것이 규칙이라구. 자네도 어제 함께 듣지 않았나!’ 

장홍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천무봉에 오른 이상 화산규약지회가 끝날 때까지 외부와의 접촉은 일절 금합니다. 참가자 분들은 이점을 명심하시고 천무봉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 금기를 어긴 이에게는 응분의 대가가 돌아갈 것입니다. 일조점검은 묘시정(卯時正 : 약 0600시), 일석점검은 유시정(酉時正 : 약 1800시경)입니다. 인 원 점검에 이상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들은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화산지회 참가자들은 함부로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를 어길 시에는 응분의 알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는 게 바로 운영자 측의 입장이었다. 최악의 경우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은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특별한 일? 이것보다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있나? 미인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네. 특별한 일 중에서도 초특급으로 특별한 일이라 할 수 있지. 내 말이 틀렸나?” 물론 비류연의 말에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미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그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고 있었다.

유구무언! 장홍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항상 긴급 상황 발생시의 예외는 인정되어야 하는 법! “

22

비류연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야밤에 산을 오르내리는 것 하나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할 생각인 모양이다.

“정 내키지 않으면 따라오지 않아도 돼! 미인의 생명과 친구와의 우정 따위는 일신의 안위보다 중요치 않다는데 내가 어찌 강요를 할 수 있겠는가!”

“약삭빠른 녀석!”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장홍의 투덜거림에 비류연이 씨익 웃었다.

“예린! 나와 함께 가주겠어요?”

장홍에게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비류연이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진지한 모습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일을 주제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놀랍게도 나예린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위험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죠.”

그 대답에 독고령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의 사매를 바라보았다.

변했어!

그것만은 확실했다. 친구라니. 그것도 흑도의 인물을.

친구!

나예린이 어느 순간부터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이었다.

““나도 간다! ”

독고령이 선언했다.

“사저?”

나예린이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독안(獨眼)의 봉황은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이런 식의 행동을 결코 좋아하는 성격이 아 니었다.

“아름다운 꽃을 늑대들 무리에 혼자 놔둘 수는 없지. 나의 검이 너를 보호할 것이다.”

독고령이 자신의 애검을 검집째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저도 갈래요! “

갑자기 떼를 쓰며 튀어나온 이는 바로 이진설이었다. 이 말에는 다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아! 우리는 놀러가는 게 아니다. 이 일은 위험한 일! 어리고 미숙한 너를 데려갈 수는 없다.”

독고령이 충고조로 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이 아가씨도 고집이란 게 있었다. 이진설은 눈을 똑바로 뜨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다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 다.

“물론 저도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란 언니가 좋아요. 란 언니가 위험에 빠졌다니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발목을 잡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게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안 데려간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쫓아갈 거예요.”

당돌한 녀석.

그녀가 저렇게 말한 이상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독고령은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사저,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요.”

“하지만…….”

못마땅한 시선으로 독고령은 이진설을 바라봤다. 진설은 두근거리는 기대에 가득 찬 눈망울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 다람쥐 같았다. 말괄량이 녀석.

자신도 사매도 이 녀석에게는 너무 약해서 탈이다. 한숨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그래, 함께 가자꾸나!”

마지못한 대답.

“와아아아아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첫눈 맞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그 경쾌 발랄한 모습에 독고령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하겠지!

비류연은 되도록이면 자신이 나서지 않고 남을 시킨다는 주의였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가 아니라 차도요리지계(借刀料理之計 : 남의 손에 든 칼로 요리 를 한다)라고나 할까……. 꼭 필요하지 않은 일에 방정맞게 나서는 것은 엄청난 낭비라는 게 평소 그의 생각이었다.

“궁상아!

“네, 대사형!”

“노학이는 어디 있냐?”

“저녁 먹고 자고 있지 않을까요?”

“벌써?’

“거지는 밥 먹고 바로 자야 된다고 하던데요. 먹은 밥이 아까워서요.”

거지는 역시 거지, 개방은 역시 개방이었다. 개방 방도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불러와!’”

비류연은 딱 한마디만 했다.

남궁상이 얼른 숙소를 향해 뛰어갔다. 노학은 이제부터 수면을 통해 보전해두었던 음식물을 다른 일에 소모해야 할 것이다.

“그럼 나도 가볼까!”

비류연이 향한 곳은 염도와 빙검이 묵고 있는 숙소 방향이었다.

드디어 필요한 인원이 모두 모였다.

이 중에서 남궁상과 진령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죄 하나만으로 이 일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 옆에 필요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온 노학의 모습 이 보였다. 윤준호도 있었다. 그는 마을 지리를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인재였다. 소심한 그답지 않게 상당한 용기를 낸 것으로 보였다.

이들 중 가장 놀라운 사람은 단연 염도였다. 이 붉은 머리칼 거구의 중년사내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비류연이 느닷없이 염도를 끌고 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비류연이 왜 자살행위를 사람 허락도 없이 저질렀는지 의아해 했다. 그리고 모든 계획이 분쇄됐다고 생각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서슴없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비류연이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소태 씹은 얼굴이 선뜻 승낙한 사람의 얼굴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 염도는 놀랍게도 정말로 그들과 함께 행동할 뜻을 표한 것이다. 처음에 농담인 줄 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시각은?”

“술시초와 술시정 사이입니다.”

비류연이 묻자 남궁상이 대답했다.

사람들은 왜 남궁상이 후배인 비류연에게 깍듯한 존댓말을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존댓말을 쓰는 것은 진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사이에는 남들이 모르는 끈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행복한 그런 종류의 진실일지도 몰랐다.

“흐음, 술시초라…….”

이제 여섯 시진도 채 남지 않았다.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비류연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좋아!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돌아오면 되겠지!”

어디 산책이라도 나가는 말투였다. 과연 이 일의 어려움을 알고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드는 한노였다.

“움직일 수 있나요? ”

“물론!”

비류연의 질문에 한노가 선뜻 대답했다.

“노인장이 무리는 안 하시는 게 좋아요.”

“난 멀쩡하오!”

거센 반발이 돌아왔다. 그러나 사지에서 땅바닥으로 아까운 피들을 뚝뚝 쏟아붓고 있는 모습으로는 설득력이 없었다.

노인네의 객기는 무모할 정도였다.

“그건 할아버지 주장이시구요!”

그 순간 비류연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바밧!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한노의 수혈을 짚었다.

“무, 무슨…….

그러나 노인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무너졌다. 남궁상이 재빨리 뒤에서 노인을 부축해 땅바닥에 뉘여 놓았다.

“전 짐은 들고 가지 않는 주의라서요.”

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술시정(戌 : 약 2000시경) 화산 천무봉 한 공터

천무봉에는 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그들이 세 개의 관문을 뚫고 올라온 길이며 다른 하나는 이곳에 물품을 반입하기 위해 인력을 투입해 닦아놓은 대로였다. 이 길은 화산파와 각 맹에서 차출되어 온 인원들이 몇 조씩 짝을 이루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조용히 이곳을 빠져 나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찾기로 했다. 은밀하지만 대신 험했다.

‘과연 그런 곳을 이용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인가?’

모두의 머리 속에 똑같이 박혀 있는 하나의 의문이었다.

여인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연이었다. 그녀는 단지 남들이 쉬는 시간에 쉬지 않고 조금 더 열심히 노력을 경주했을 뿐이었다. 출중한 미모, 완벽한 몸매, 빼어난 무공.

그러나 그녀는 자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물론 그 노력은 사람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펼쳐졌다.

그녀 정도로 완벽한 여성이라면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을 정도임에도 그녀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가래로 긁을 정도로 많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도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그날 하나의 접촉이 있었다. 그 접촉은 후일 그녀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여인은 너울거리는 불꽃의 강렬한 색깔이 좋았다. 그래서 붉은색 옷을 즐겨 입었다. 한 마리 불새처럼 그녀의 몸은 항상 진홍의 비단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녀의 검에 대한 탐구심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또한 그녀의 검법은 흑도 후기지수 중 여중제일이라 칭해지고 있었다.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흑도사화 중 으뜸이라 불리는 사중화 은설란조차도 그녀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진홍(眞紅)의 검희(劍姬) 석류(石榴霞)!

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런 호칭을 듣는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알 수 없는 우월감에 들뜰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비류연 일행의 하산 경로에 있었던 것은 역시나 우연인 게 틀림없었다.

“누구냐!”

낭랑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이 뽑히며 붉은 장포가 펄럭였다. 그 기세에 달려오던 비류연 일행이 멈추었다.

‘이런!’

이것은 석류하로서도 비류연 일행으로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돌발상황. 이런 변수는 항상 일을 꼬이게 한다. [어떻게 할까요? 1

염도가 전음을 보내왔다.

“당신들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류연이 짧게 신호를 보냈다.

선수필승(必勝)!

이럴 때는 재빠른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그 신호를 받고 염도가 질풍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무척이나 빨랐다.

물론 석류하는 자신의 검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검기(劍技)를 소유한 사람도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검은 최강은 아니었지만, 평범하지는 않았다. 보다 정확히 표 현하자면 비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항상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검집에서 언제든지 발출될 수 있는 날카로운 검처럼!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저 사람들은?!?

그녀는 저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어제 그들이 홍매곡에 들어오는 것을 그녀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 거의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는 사람도 있었다. 칠절신검 모용휘. 그는 마천각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소문으로만 듣고 실물을 보지 못했었는데 어제 이후 그 얼굴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빙백봉 나예린! 그녀를 향해 집중되는 남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석류하도 느낄 수 있었다. 벌써부터 마천각 남자들 사이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예린에 대한 추종자들은 마천각 내에도 음성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천무학관과 교류를 가졌던 소수의 사람들을 주축으로 해서 이루어진 추종자들이었다. 요즘은 상당히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도 언뜻 들은 듯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검후(劍后)! 그분의 제자! 그것만은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운 일이었다. 이 부분만은 질투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검후 이옥상은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

염도(刀) 곽영희!

천하오검수의 일좌인 빙검 관철수와 천하오대도객의 일좌인 염도 곽영희는 흑백을 막론하고 유명인사였다. 그녀로서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는 검을 익힌 사람으로서 빙검에게 더 시선이 가기는 했지만 염도는 개성이 너무나 독특하게 두드러진 사람이라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적염, 적미, 적발의 붉은색 일색!

두 사람의 옷만 놓고 본다면 부녀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얼굴을 보면 금방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두 사람 다 눈에 확 띄는 붉은색 비단으로 온몸 을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오해를 사도 억울할 건 없을 것이다.

염도에 대한 솔직한 첫 감상은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한 자루의 칼 같은 빙검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 별로 강하지 않아 보이던 염도의 신형이 순간 눈앞에서 희끗했다. 그녀의 반응은 좀 늦었다.

그녀가 놓쳤던 염도의 움직임을 다시 감지한 것은 그가 자신의 석 자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석류하가 황급히 검을 휘둘러 염도의 진로를 막아섰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염도의 진로를 막아서는 것보다 염도가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빨랐다. 너 무 멀리 있어도 사람을 벨 수 없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도 사람을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그러나 석류하는 그냥 당하지 않았다. 비어 있던 왼팔로 등 뒤의 단검을 뽑아 역수로 재빠르게 베어 들어갔다. 붉은 어금니가 살광을 토하며 허공을 갈랐다. 턱!

그러나 염도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도 수월하게 그 수를 막아냈다. 그녀의 좌수 주먹이 염도의 마디 굵은 손에 의해 완전히 포장되었다.

“미안! “

파바바박!

때를 놓치지 않고 염도가 재빠르게 석류하의 전신혈도를 짚었다.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며 상대를 향해 겨누고 있던 우수의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염도가 왼손으로 재빨리 그 검을 잡아 그녀의 검집을 향해 던졌다. 스르릉!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검이 검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단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압완료(制壓完了)!

더없이 깨끗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혈마저 제압당했기에 석류하는 눈만 깜빡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노, 당황, 황당.

거센 충격에 석류하는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끄응…….”

염도는 인상을 팍팍 구겼다. 엉겁결에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을 안고 있었지만 그다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일단 제압은 했지만 그 뒤처리가 문제였다. 나중에 고자질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그냥 여기 놓고 갈까?”

자신이 저질러놓고도 염도는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나무라는 말투.

너무한다는 듯 비류연이 염도를 쏘아보았다.

“밤의 산이 얼마나 추운 줄 알아요? 우리 사부가 말씀하시길 미인은 찬 데 두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

천벌 받을 짓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기세였다.

“그럼……?”

“메고 가죠!”

점혈당해 있던 석류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류연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게다가 일단 함께 가면 공범이 되잖아요. 죄는 공유하면 공유할수록 공유한 사람들의 입을 무겁게 만드는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죠.”

비류연의 입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그러면 고자질하기도 곤란해지겠죠!’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왔던 것이다.

그것은 다들 석류하의 일로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였다. 이진설은 문득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동료인가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지금 제압된 석류하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일행 모두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비류연, 예린 언니, 독고 언니, 남궁 공자, 진령 언니, 염도 노사, 노학, 모용 공자, 장흥, 윤준호, 그리고 자신 이진설. 손가락으로 하나씩 되짚어 봐도 빠진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머리 꼭대기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오싹해졌다.

‘히이익! 서, 설마 귀신?’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전율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아직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소녀였다. 소녀치고 귀신을 선호하는 이는 없다.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기피하고 꺼려한다. 이진설도 마찬가지였다. 확실 히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이 장소가 귀신출몰에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갑자기 소피가 심하게 마려웠다.

‘요, 용기를 내! 진설!’

스스로를 열심히 격려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착각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등 뒤에서 어른거리는 묵직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혀가 굳은 듯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건 무공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는 다른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좀더 많은 용기를 짜낼 필요가 있었다.

“저, 저기요…….?”

이가 떨리며 딱딱 부딪쳤다.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큼이나 작았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이진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는 이진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의문부호로 가득 차 있었다.

“제, 제 드, 등 뒤에 뭐, 뭐가 있나요? ”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진설이 물었다.

약간 이동하는 시선. 그제야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가운 산바람에 날리는 산발한 검은 머리. 펄럭이는 옷자락. 유령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 그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효룡이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그제야 뒤를 돌아본 이진설이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그를 이런 위험하고 중대한 일에 데려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천의무봉한 무모함을 자랑하는 비류연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효룡은 숙소에 떼어놓고 왔었다. 지금쯤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임에도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여기까지 올 때까지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석류하 의 일로 신경을 딴 데 분산시키고 있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정신이 아니라도 몸은 무공을 기억한다는 건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현재 일행에게 짐이 하나 더 생겨났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죠?”

이진설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되돌아가기는 늦었어!”

장홍이 말했다. 게다가 되돌아가서 돌려놓는다 해서 또 따라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귀찮더라도 이제는 이 짐을 업보려니 하고 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지금 고민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앞으로도 잘 따라올 수 있겠지.”

그리하여 마침내 비류연은 결론을 내렸다.

“데려가죠!”

그리고 야밤의 산악질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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