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3권 19화 – 효룡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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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3권 19화 – 효룡의 각성

효룡의 각성

축시말(丑時末 : 약 0300시경)화평장 후원

사람은 누구나 착각을 할 수 있다.

염도는 사람이다. 고로 염도도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염도는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착각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비류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쪽으로 시선 을 보내봤다.

다들 그 두 노인을 보더니 흠칫하며 굳었다.

비류연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나예린도 동의하고 있었다. 모용휘도 동의했다. 그날 무당산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다. 일이 귀찮아져버렸다.

‘우라질! 왜 저 늙은이들이 이곳에 있는 거야!’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독고령과 석류하, 노학과 오개만이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황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여기에…….”

두 노인의 목소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복면 따위를 하고 있었지만 틀림없었다.

음주 전에 가볍게 운동이나 해볼까 하던 가벼웠던 마음은 이미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없었다. 대신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두 노인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악몽이 현현(顯現)했다.

매일 밤 그들을 괴롭혀 오던 악몽이 지금 두 노인의 눈앞에 실체를 가지고 나타나 있었다.

살의, 분노, 공포, 혼란, 두려움.

수만 가지 상념이 두 사람의 머리를 엉클어 놓았다. 병장기를 꼬나든 수십 명의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돌격하라고 외쳐야 할까, 아니면 다들 도망가라고 외쳐야 할까…….

하지만 이곳에는 그분이 있었다.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날 무당산에서 살아 돌아온 쌍살대 대원이 있었던가?’

두 노인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대답은 ‘전무(全無)’였다.

초점 없는 효룡의 망막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은 그가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너무나 선명하게 그 의 망막과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 그림자.

두근, 두근, 두근!

그 순간 효룡의 심장이 급속도로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이 점점 더 크고 빨라졌다.

‘아룡, 아룡, 아룡……..”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가 그가 잠들어 있던 심연 속에 울려퍼졌다.

형!

순간 그의 뇌리 속에 그날 무당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웃음, 그 웃음을 향해 내려쳐진 검, 죽음, 그리고 피!

그 죽음을 가져온 검 주인의 얼굴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랑!

그 순간 효룡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껍질이 깨어졌다.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또 하나의 효룡이 눈을 떴다. 망막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벗겨지며 시야가 밝아졌 다. 그의 목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천지쌍사아아아아아알!! 형의 원수!”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효룡은 쌍검을 뽑아들고 쌍살 중 천살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십 개의 도검이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치 않았다. 그의 시선에

는 오직 천지쌍살, 이 둘의 모습만 비쳐지고 있었다. 

“저런 미친!

염도의 입에서 상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진설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과 검이 비명을 지르며 맹렬히 부딪쳤다.

효룡의 단독 돌격은 확실히 무모했다. 하지만 의외성이 있었다. 게다가 분노로 불타오르는 그의 검은 상상 이상의 거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상상 이상의 거력에 밀려 천살이 연신 뒷걸음질쳤다. 천살의 뒤를 받치고 있던 수하들이 우르르 좌우로 비켜나며 길을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지 살은 거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돌발적이고 저돌적일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천살은 오 장이나 연신 뒤로 물러나고서야 신형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효룡은 검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쌍검을 교차시켜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 나 천살은 왼손 하나만으로 그 힘을 버티어냈다.

둘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자 효룡의 움직임은 적진 한가운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도검을 번뜩이는 이리떼들에게 포위당해 잡혀먹기 딱 알맞은 이상적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효룡!”

이진설이 쌍검을 빼들며 달려간다.

“설아!”

독고령이 다급하게 외치며 그 뒤를 쫓는다. 그 뒤를 또 누군가가 이으려고 하자 염도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대갈성!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앞서 간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에게는 앞의 세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짝!

염도의 오른손이 효룡의 뺨에 작열했다.

이진설의 짧은 경호성과 함께 효룡의 고개가 한쪽으로 심하게 돌아갔다. 그의 입가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이진설이 달려가려 했지만 그런 그녀를 뒤에서 독고령이 제지했다.

“그딴 무모한 돌격! 누구에게 배웠어? 죽고 싶어 환장했냐?”

염도가 대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무리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지만 목숨까지 내던지고 덤벼들다니…….

“누구 허락 맡고 달려들었냐? 그딴 식의 싸움 누구에게 배웠어?”

염도의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든 말든, 적들이 포위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지켜보던 이진설은 이제 거의 울상이 되어 있 었다.

“지금 너의 무책임한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험 속에 몰아넣었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

“넌 지금 진설이를 죽일 뻔했어!”

그 순간 효룡이 고개를 번쩍 들어 염도를 쳐다보았다.

“그, 그건…….?”

그러나 염도의 눈빛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왜? 아니라고 말하고 싶냐? 억지라고 생각하냐?”

“아, 아닙니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왜? 이제 인생이 권태롭냐? 공허해? 더 이상 살기 싫어? 번거롭지 않게 이 몸이 죽여주랴?

“노, 노사님!’

곁에서 지켜보던 이진설이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풀이 죽은 채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효룡을 보는 것이 안쓰러운 모양이다.

“…죄, 죄송합니다.”

푹 수그린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효룡이 대답했다. 그때 그의 어깨를 짚는 묵직한 손이 있었다.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그 손의 주인은 바로 염도였다. 조금 전 보여주

었던 격렬함은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는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염도의 입에서 조용하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좀 차가워졌냐?”

왼쪽 뺨에 손을 갖다대고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던 효룡이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풀이 팍 죽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염도의 거친 손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마치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걸 축하한다.”

“가, 감사합니다.”

목이 메어왔다.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를 바라보는 이진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빌어먹을 불타는 개차반 놈아! 집에서 아궁이에 불이나 땔 일이지 이곳엔 웬일이냐!

뚱보 노인 지살이 외쳤다.

“어, 어떻게 알았지?”

염도가 어리둥절해 하며 반문했다. 폭언을 들은 것보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 더 황당한 모양이었다.

“누굴 해태 눈으로 아느냐! 그렇게 남들 눈에 확 띄는 피칠갑을 해놓고도 겨우 복면 하나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냐!

지살이 다시 한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뭐 확실히!

구출대 전원이 내심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의 붉은 머리칼은 이런 야밤의 횃불 속에서도 사람들 눈에 확 띄었다. 게다가 옷은 여전히 붉은색 일색, 붉은 허리띠에 찬 도마저도 중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날렵한 모습에 손잡이를 포함하여 도집 전체가 붉었다.

“쳇, 깜빡했군!”

염도가 발각의 원인이 된 죄인의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별 수 없지 하는 그런 태도였다.

“먼저 가라!”

염도가 말했다.

“하지만…….”

“가라! 어차피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빚쟁이들이 끈질긴 것 같아서 말이야!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 몰라서 가라고 하는 거다.”

말은 모용휘를 향해서 했지만 그의 시선은 천지쌍살 두 노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라! 그리고 개방 서악분타에서 우리들을 기다려라! 만일 오지 않으면 화산파로 몸을 피해라!]

모용휘의 고막 속으로 염도의 전음이 울렸다.

“노사님!

모용휘의 시선이 염도를 향했다.

“뭐 그냥 만일이다, 만일! 물론 내가 저딴 늙은이에게 질 리가 없지 않느냐? 2전 1무 1승이다. 이번에도 물론 지지 않는다!”

염도가 태연하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외쳤다.

“뭘 꾸물거리냐! 어서 가라! 그리고 반드시 지켜라!”

“예!”

염도가 홍염을 들어올렸다. 화령신공을 운용하자 그의 애도가 불꽃으로 변해 거칠게 타올랐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홍염을 중심으로 뻗어 나왔다.

“뛰어!”

일렁이는 불꽃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불꽃의 해일이 우측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을 덮쳤다. 불티가 날리고 비명이 터져 나오며 불꽃의 벽으로 둘러싸인 길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뚫린 불꽃의 통로 한가운데로 은설란을 업은 모용휘가 신형을 날렸다.

무사히 모용휘가 몸을 빼는 것을 보고서야 염도는 돌아섰다. 그러고는 비류연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이러면 되는 겁니까?]

비류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 일언반구 추가되는 말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에잇, 상관 말자! 염도는 그렇게 결심하며 시선을 다시 천지쌍살에게로 향했다. 이쪽이 훨씬 더 간단명료한 사고가 가능하다.

“자! 그럼 이쪽도 묵은 빚을 청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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