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 천지쌍살!
“저자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효룡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형님의 원수! 아무에게도 넘겨줄 수 없었다.
이 싸움은 나의 싸움! 내가 책임져야 할 싸움이다! ‘
이 싸움의 매듭을 지을 사람은 바로 자신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효룡은 생각하고 있었다.
“너 혼자 두 마리 다 독차지하려고 하면 안 되지. 욕심이 지나쳐!”
돌아보니 염도가 홍염을 뽑아들고 있었다.
화르르르!
단지 서 있을 뿐인데도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홍염의 붉은 도신에서 불꽃이 날름거린다.
붉다! 천지쌍살을 바라보는 염도의 두 눈동자는 지금 불꽃에 휩싸인 홍옥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마치 지옥의 귀신같이 흉폭한 모습이었다.
“빚쟁이는 너 혼자만이 아냐! 나도 아직 받아야 할 빚이 남아 있지!’
내뱉는 목소리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 같다.
“도와주마!”
지금 효룡에게 가장 든든한 우군 중 한 명이 생겨났다.
효룡과 염도가 나란히 천지쌍살을 향해 걸어갔다. 쌍살의 손짓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하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마침내 두 사람과 쌍살이 마주섰다.
“뚱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나? 이제 웬만하면 무덤 속에 들어갈 때도 되지 않았나?”
염도의 말을 들은 지살의 투실한 얼굴에 혈관이 불끈불끈 튀어올랐다. 살 속에 파묻힌 두 눈에서 독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닥쳐라, 이 개차반 놈아! 찾아갈 수고를 덜어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그 수고를 참작해 최고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지살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염도가 발끈하려는 그때 뒤편에서 목소리 하나가 날아왔다. 비류연이었다.
“은혜를 모르는 뚱보 할아버지로군요.”
“은혜? 무슨 은혜 따위가 있단 말이냐?”
지살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비류연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으니 돼지도 형님 하고 부를 그 몸무게도 줄었을 거 아닙니까. 몸무게가 줄어들면 자연히 몸도 가벼워지고 건 강에도 도움이 되지요. 그런데도 은혜가 아니라고 할 건가요?”
비류연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지살의 염장을 후벼파는 이야기였다.
“이… 이… 이놈이! “
피가 머리통에 쏠려 벌겋게 변한 지살은 분통이 터져 숨이 넘어가려 했다. 염도가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 맞다 맞아! 뚱땡이 살도 빼주고, 나도 모르는 새에 좋은 일 많이 했었군! 상이라도 받아야겠는걸. 크하하하하!’
그가 웃자 구출대 모두가 함께 따라 웃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살의 눈에 핏발이 바짝 섰다. 그의 얼굴은 이제라도 금방 폭발할 화산같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빗자루를 뒤집어쓴 꼬마야! 넌 왜 이곳에 내려오지 않느냐? 무서우냐?”
이곳에 온 이후 한번도 비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천살이 나직하지만 귀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두 눈은 원한과 독기로 가득했다. 매일 밤 자신을 악 몽에 시달리게 한 그 원인이 저기 있었다. 어찌 증오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살의 도발을 비류연은 코웃음 한 방으로 날려버렸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단계라는 게 있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빌어먹을 정도로 광오한 꼬마 놈이구나, 넌! “
천살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별말씀을! 지금 여기서 보아하니 2대 2로 사람 수도 딱 맞네요. 여기서 굳이 끼어들어서 비겁자 소리 듣고 싶지는 않네요. 게다가 다 늙은 노인네 둘이서 저 두 사람을 상대해 이길 수 있을지나 걱정이네요. 허리도 아플 텐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비류연은 자신의 마음 씀씀이에 스스로 감탄하며 말했다. 언제나 늘 생각하는 거지만 자신은 너무 무른 것 같았다. 이렇게 나약해서야 이 험난한 현실을 어찌 살아 갈 수 있겠는가! 반성, 반성!
비류연이 잠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어 자아성찰에 여념이 없을 바로 그때였다.
휘리리리리릭!
요사스런 빛을 흘리는 검 하나가 팽이처럼 회전하며 그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이 찰나지간에 비류연의 시선은 천살의 왼손을 확인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들려 있던 요검 한 자루가 비어 있었다.
키이이이이이익!
회전하는 검으로부터 기괴한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천살의 독문검법인 초혼귀령검법 중 절초인 회령참혼(廻靈斬魂)이었다. 붕검에 속하는 천살의 검법답지 않게 압박하는 힘은 적은 대신 빨랐다.
귀곡성을 뿌리며 살의를 빛내는 검이 비류연의 목을 날려버리기 바로 직전이었다.
파샥!
그때 기괴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응?”
“엥?”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뭘 봤는지는 머리 속에 안개가 깔린 듯 선명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 실한 것은 굉장히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비류연을 향해 날아오던 천살의 요검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마, 말도 안 돼!’
접시만하게 떠진 천살의 두 눈은 좀처럼 닫힐 줄을 몰랐다. 그는 방금 전 비류연의 행동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그의 머리 속에서 조금 전 상황이 천천히 재현되 기 시작했다.
일단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참을 수없는 분노, 그리고 증오였다. 염도와 또 한 명의 애송이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에 잡히는 것은 오로지 악몽의 원흉뿐이었다.
요검 귀곡을 던졌다. 회전하며 날아갔다. 완벽한 한 수! 그때 원흉의 오른손이 스르륵 들어올려졌다. 그의 손목에서 뭔가 검고 칙칙한 빛을 내는 무엇인가가 빛났 다.
그러고는 그걸 그대로 냅다 내려쳤다. 마치 파리라도 때려잡는 듯한 시늉이었다. 그리고 그 냅다 후려갈긴 손에 그의 일초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파훼 되고 말았다. 볼도 꼬집어보고, 허벅지도 바늘로 한번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술처럼 사라진 자신의 애검 귀곡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해답을 가르쳐준 것은 다른 이가 아닌 비류연이었다.
“어라?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데 있었네…….”
잃어버린 장난감이라도 찾은 듯한 말투. 비류연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그의 발치였다. 구출대의 시선이 모두 그쪽을 향해 쏠렸다. 그들의 지대가 쌍살이 서 있 는 곳보다 높아 쌍살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바닥은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검 한 자루가 자루만 남겨놓은 채 돌바닥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우연의 일 치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작위성 넘치는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떻게?’라는 그 수단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깊 게 생각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거참…, 언제 이런 데 처박혀 있었지?”
슈욱!
허리를 숙여 검자루를 잡은 비류연은 한 손으로 돌덩이 속에 박혀 있는 검을 너무도 수월하게 뽑아냈다. 옆에서 보기에는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 다.
검을 뽑아낸 비류연은 감정이라도 하듯 검신을 스윽 훑어보았다. 검신은 불길한 검은 빛을 띠고 있었는데 석괴에 푹 담갔다가 꺼냈는데도 검날에는 상한 부분이 없었다.
“꽤 좋은 검이군요.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뭐 그것도 개성이 될 수 있죠. 팔면 꽤 좋은 값을 받겠어요! 흐흠…….?”
그때 비류연의 손에 잡혀 있던 요검 귀곡의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비류연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요검은 요검이군요. 아마 주인이 아닌 자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겠죠.”
지켜보던 석류하가 말했다. 비류연이 다시 한번 귀곡의 검신을 바라봤다. 귀곡은 여전히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한탄하는 것 같았다.
“호오, 그런 건가요? 참으로 충성스런 자식이네요. 그렇다면 상을 주어야겠죠?”
비류연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귀곡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검신을 냅다 발로 밟았다.
쾅!
순간 바닥이 들썩거렸다. 남궁상을 비롯한 그 외의 사람들은 발바닥을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적도 아군도 어이없는 표 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피륙으로 이루어진 발로 바닥을 밟는데 어찌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단 말인가? 거인의 거대한 쇠망치가 산을 때려 부수는 듯한 굉음이었다. 바닥에 깔려 있 던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이 피어올랐다.
다시 한번 요검 귀곡을 들어올린 비류연의 입에는 여전히 언제나처럼 한결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생각보다는 맥이 없군요! 시시하게!”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 귀곡은 더 이상 떨지 않고 있었다. 천살 이외에는 누구의 손에도 복종하지 않은 요검 귀곡이 한 사내의 손길에 굴종한 것이다.
“저, 저런 개같이 무식한 놈이!”
천살은 이 어처구니없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저, 저놈은 도대체 몇 번이나 날 놀래켜야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단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저놈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그의 악몽은 여전히 그를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 천살의 몸에서 자욱한 살기가 독사처럼 꿈틀거리 며 뿜어져 나왔다.
“재미가 없으니 이제 돌려주죠.”
휘익!
비류연이 가볍게 던지다 귀곡이 천살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천살이 하나 남은 왼손에 쥐고 있던 검집을 쭉 내뻗었다.
챠랑! 스르르릉!
검명음과 함께 귀곡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검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
기함을 토한 것은 천살이었다. 귀곡에 실린 묵직한 무게감이 그의 왼팔을 거세게 강타했던 것이다.
천살의 왼팔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의지가 천살을 움직였다. 급히 내력을 끌어올린 천살은 서둘러 자신의 왼팔을 밀어내는 힘에 저항했다.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챠르르르르릉!
검집과 검집에 꽂힌 귀곡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요동쳤다. 잠시 후 풍랑이 가라앉은 듯 검이 조용해졌고 붉으락푸르락해졌던 천살의 신색 또한 원상태로 돌아 갔다. 그의 왼팔은 검집에 검을 납검한 채 비류연을 향해 다시 쭉 뻗어 있었다.
두고 보자!
비류연을 씹어먹지 못해 안달이 난 목소리로 천살이 외쳤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비류연을 향해 독기어린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석류하는 놀란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비류연? 그런 이름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흘끗 천지쌍살을 향했다. 아까 저들의 정체를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사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 목숨을 걸 각오까지 했었던 것이다. 반면 이 들은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태연했다. 겁을 상실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성이 마비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말 태연자약했다.
저 잔혹무도하다는 흉명을 지닌 천지쌍살에게 함부로 마구 대하는 저 사내를 보고도, 그리고 방금 전 공방을 보고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만 이상한 건가?’
정말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자, 여흥이 끝났으면 슬슬 시작해 볼까? 이제는 솔직히 기다리기 지루하다고! ”
염도가 말했다. 그 말에 효룡이 다시 쌍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명을 재촉하는군, 빨강머리 개차반!”
지살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살기가 넘실거리는 소름끼치는 말투였다.
“흥, 오늘에야말로 그 비계 덩어리를 지글지글 구워 통구이로 만들어주마! ”
“형의 원수, 이 악적들! 너희들은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애송이가 까부는구나! 너 따위 애송이에게는 볼 일이 없다.”
비류연에게서 겨우 시선을 거둔 천살이 외쳤다.
“그건 내 검이 말해줄 것이다.” 효룡도 지지 않았다.
“흥, 우리들이 한쪽 팔을 잃었다고 얕잡아보는 모양인데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인지 가르쳐주마. 우리가 그동안 놀고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놈들을 다시 만 나면 보여주려고 준비한 게 있지!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왼팔만 남은 천살이 오른팔만 남은 지살의 왼편에 섰다. 그제야 그들은 양팔이 있는 한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천살의 왼손에는 요검 귀곡이, 지살의 오른손에는 명왕도가 들려 있었다.
천살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악몽 속에서 지낸 시간… 길었다. 그리고 그 시간도 오늘로 끝이다.”
“누구 맘대로! ”
염도가 외쳤다.
“우린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다.”
쌍살이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합격진?!
나예린이 외쳤다.
지금 천지쌍살은 둘이 한 몸인 것처럼 검과 도를 종횡무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린 듯 두 사람의 공격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정확했다. 게다가 검로(劍路)와 도로(刀路)가 엇갈리는 일도 없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한 몸이었던 것처럼 효룡과 염도를 압박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천 번은 족히 연습해 몸에 익혀놓은 것 같은 움직임이로군요.”
“흐흠…….”
나예린의 계속되는 말에 비류연의 시선이 아래의 격전장을 향했다. 검과 도의 불꽃과 혈광이 한데 어우러져 현란한 빛의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저 빛깔의 춤사위 안은 죽음이 미소 짓는 생사의 간두였다.
“크윽!”
쉴 새 없는 쌍살의 연환공격에 계속 밀리기만 하던 염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천지쌍살이 호흡을 딱딱 맞추어 정밀하게 숨쉴 틈도 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반면, 반복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효룡과 염도의 합격은 어딘지 어색하고 빈틈이 많았다.
애초에 이 둘은 쌍살을 너무 얕봤다. 예전에는 독불장군이었던 쌍살이었지만 그 일 이후로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죽인 채 절치부심하여 합격술을 수련했던 것이다. 무거운 천살의 검과 빠른 지살의 도가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승화시켜 그들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천살의 검이 염도의 도를 막고, 지살의 도가 효룡의 검을 봉쇄했다. 공수가 순식간에 교차되며 검과 도의 파도가 효룡과 염도 두 사람을 덮쳐왔다.
“도와주지 않나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격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비류연에게 석류하가 물었다.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도 확실히 아군 두 사람이 불리했던 것이다. “어? 내가 왜요?”
비류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자기들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내가 일부러 나서서 도와줄 필요는 없죠. 게다가 저들과는 청산할 빚도 없구요.”
“저들은 당신에게 받을 빚이 있는 것 같은데요? “
조금 전 천살의 행동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거야 저들 주장이구요.”
내가 받을 빚만 챙기면 된다는 그런 태도였다. 비류연의 대답에 석류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척 보기에도 아군인 두 사람이 불리하지 않나요?”
“저 정도에 죽을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 정도 바보 제자는 필요도 없구요.”
“제자라뇨?”
그러나 그녀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화끈한 열기가 아래쪽 격전장에서 터져 나왔던 것이다. 쾅!
굉음과 함께 염도의 도에서 붉은 불꽃의 우산이 펼쳐졌다. 염도의 독문도법인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 중에서도 매우 위력적인 방어 초식이었다.
“아름다워!”
진홍의검희라고까지 불리는, 붉은색을 즐기는 그녀의 눈에는 염도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 색 도기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비쳐졌다.
염도의 이 일초에 쌍살의 공격이 잠시 주춤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효룡이 쌍검을 휘둘러갔다. 그의 검 끝에서 혈광이 번뜩였다. 한 번 기세를 놓친 쌍살은 이번 에는 염도와 효룡의 합공에 밀리기 시작했다.
휘두르면 막고, 막으면 흘린다. 틈이 보이면 찌르고, 찌르면 다시 막는다.
공격과 방어, 수세와 공세! 공격과 방어, 다시 공격, 공격, 다시 방어, 방어!
공세와 수세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공방!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챙챙! 챙챙!
밤하늘의 고요를 깨는 칼 울림만이 낭랑하게 한 장원의 후원에서 울려퍼졌다. 모두들 넋을 잃은 채 이들 넷의 공방을 바라보았다. 달도 별도 숨을 죽인 채 이 싸움 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응?”
그것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감지되었다.
비류연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우측 하늘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불쾌한 무엇인가가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누구지?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저 눈앞에 보이는 천지쌍살을 한 무더기 모아놓은 것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위험하다! ‘
그쪽은 모용휘가 은설란을 데리고 도피한 곳이었다.
“멈춰요!”
비류연이 한 번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소매로부터 두 개의 은빛 섬광이 어둠을 갈랐다.
챙! 챙!
그 중 하나는 천살의 검을, 나머지 하나는 지살의 도를 튕겨냈다. 제삼의 개입에 의해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쌍살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접전을 벌이던 염도와 효룡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말렸나? 조금만 더 있으면 저 악적들을 작살낼 수 있는데. 그들의 눈은 그렇 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사람들을 이끌고 정문으로 몸을 빼내요!]
[아니, 갑자기 왜?]
[그럴 필요가 있으니깐요.]
염도의 표정이 더욱 못마땅해졌다.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저 두 늙은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말입니까?]
그게 가장 불만인 모양이다.
[그래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깐요.]
염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방금 비류연의 계획을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제안인 척 꾸며서. 예상대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건 안 됩니다. 저자들을 눈앞에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역시 가장 큰 불만은 효룡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난 뭐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아느냐?”
“그럼 왜?”
저렇게 물으면 대답할 말이 궁하다. 할 수 없이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묻지 마라, 다친다! 지금 또 다른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 있어. 이곳에서 발목을 잡혀 시간을 너무 소비하면 안 돼! 강산이 있는 한 땔 나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복수의 기회는 다시 온다.”
“크으윽!”
효룡은 입술을 꽉 깨물며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축 처진 그 어깨를 염도가 두드려주었다.
“준비됐어?”
비류연이 물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순간 그의 손에서 두 개의 비환이 은빛 꼬리를 그리며 쌍살을 향해 날아갔다. 쌍살이 얼른 검과 도를 들어 날아 들어온 비환을 막았다. 그 안에 실린 엄청난 내력에 그들의 손아귀가 찢어질 듯 부르르 떨었다. 되돌아온 비환을 회수하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 생명, 며칠 더 맡겨두죠! 빚을 받을 당사자가 처리할 때까지 목에 때나 벗기며 기다리라구요.”
그의 말에 천지쌍살은 얼어붙은 듯 말을 잃었고 잠시 틈이 생겼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염도를 선두로 한 구출대가 탈출구를 열었다. 매서운 검기와 사나운 도기가 사방을 휘저었다. 검기와 도기의 해일에 휩싸인 적들이 우수수 쓰 러졌다.
그들은 정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며 탈출로를 열었다.
“류연? “
나예린의 시선이 비류연을 찾았다. 그녀의 시야에 그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비류연은 일행과 함께 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그곳은 모용휘가 달려간 바로 그 길이었다.
모용휘는 달렸다. 은설란을 업고 달리는 데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런 나약한 수련은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은설란의 숨결이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적들의 대부분은 비류연과 염도가 있는 후원에 모두 몰려 있던 터라 그의 앞길을 막는 자는 거의 없었다. 다른 곳을 방비하기 위해 남겨진 무사 몇 명이 그의 앞길 을 가로막았지만 번뜩이는 섬광 속에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될 뿐이었다.
그때였다.
“멈춰라!”
그 목소리는 밤의 무게가 묻어 있는 듯한 무척 낮은 저음이었다.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갑고 섬뜩한 기운이 그의 목을 노리며 날아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헉!”
모용휘는 거의 무의식중에 검을 들어 자신의 앞을 방어했다.
까앙!
자연스럽게 모용휘가 멈춰섰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밤의 장막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암흑의 저편에 그것이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만은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구냐?”
모용휘가 외쳤다. 아직도 방금 전 일격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손아귀가 떨리고 있었다.
“너의 목숨을 가져갈 자!”
소름끼치게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둠의 저편에 그것이 있었다.
그 손은 백옥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의 흰 손. 마치 밤의 그늘 속에 남겨진 신월의 한 조각 같았다. 흑과 백의 극명한 대비. 때문에 더욱더 기괴했고, 공 포감마저 조성하고 있었다.
그 손아귀에 모용휘는 사로잡혔다. 손의 주인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다섯 개의 하얀 손가락 끝에서 무형의 거미줄이 올올이 생성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의 덩어리가 공기 중에 떠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다!’
그의 정신 한구석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빨랐다. 은설란을 업은 채로는 도망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멈춰선 모용휘는 은설란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검을 들고 그 앞을 방패처럼, 벽처럼 막아섰다.
바람이 가는 길을 멈추고, 별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어둠이 눈을 떴다. 어둠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저편은 이 세계의 지평을 넘어선 공간처럼 보이지 않지만 전신에 펼쳐진 피부와 감각기관을 통해, 미세 감각수용기관과 제육감에 의해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저 너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가운데 하얀 손이 있었다.
손이 스르륵 하늘 높이 들렸다.
밤하늘의 어둠을 한 손에 움켜쥐는 듯한 모습.
오싹한 소름이 모용휘의 신경과 본능을 맹렬히 자극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경고였다.
순간 하얀 손이 떨어졌다.
단월인(月刀)
대지를 자르고 달빛을 가르는 듯한 일격, 그러나 어둠에 파묻힌 탓인지 모용휘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검고 어두운 무엇인가가 살아 있는 뱀처럼 그를 덮쳐온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영혼을 짓누르는 압력이 느껴졌다. 모용휘는 필사적으로 검을 들어 눈이 아닌 본능에 의지해 검을 휘둘렀다.
쾅!
팟팟팟팟!
상대의 일격을 완전히 흘려버리지 못했는지 옷이 뜯어져 나가며 그의 몸 곳곳에서 피가 튀었다. 하마터면 모용휘는 들고 있는 검을 놓칠 뻔했다.
무형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부딪쳐 왔고, 그 무게감과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를 검 한 자루로 틀어막은 듯한 느낌이었다. 손아귀가 얼얼했다. 손바닥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꾸욱!
모용휘는 이를 악물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 사발의 선지피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내장이 진탕되는 것이 너무나도 뼈저 리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았다!”
기척만 느껴졌을 뿐 보이지 않았다. 오직 육감에 의지해 전력을 다해 휘둘렀을 뿐이었다. 반복된 수련에 의해 체득(體得)된 조건반사! 그것이 그를 살렸다. 찌릿찌릿!
모용휘는 자신의 검을 거쳐 손과 손목, 그리고 팔의 근육과 신경에 전달되는 전율과 충격을 통해 보이지 않는 칼날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자는 나보다 강하다!’
어둠 속의 그림자에 동화되어 있는 그러나 그 존재만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 상대의 다음 일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보장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처음 접해 보는 알 수 없는 기운. 특이한 것은 심신을 억누르는 지독한 압박감과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에 반해 전혀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럼에도 모용휘는 이처럼 죽음을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살기를 자유자재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나 따위를 죽이는데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일까?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다시 한번 압력이 증가했다. 달빛도 닿지 않는 어둠의 건너편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존재. 무시무시한 기운. 아직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지의 기운이었다.
“다음 일격은 막을 수 없어!”
그것은 절망적인 예측이었다.
“빌어먹을!”
항상 바르고 고운 말만 쓰던 모용휘의 입에서 잘못된 언어나, 예의에 어긋난 말, 혹은 욕이나 비속어를 쓴다는 것은 그에게 이제까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거 친 상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스로 내뱉고도 모용휘 자신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은 소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은설란의 숨결과 그 존재와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그녀의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여기서 자신이 패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해! …설령 내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모용휘는 검을 굳게 쥐고 맹세했다.
여기서 밀리면 그 피해는 곧 은설란의 피해, 최악의 경우 죽음으로까지 귀결될 수 있었다. 즉 절대로 패해서는 안 되는 대결인 것이다.
모용휘는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분명히 어둠 속에서 살의어린 이빨을 번뜩이는 야수가 있었다. 그 야수의 이빨을 봉쇄해야만 했다.
모용휘는 오른발을 살짝 앞으로 내밀어 8할의 무게를 실었다.
스윽!
그의 검이 천천히 떠올라 완전한 중앙에 머물렀다.
완전한 중앙. 그것은 그의 신체 전체의 중앙을 가르는 임독양맥을 기준으로 신장을 지름으로 하여 원으로 그렸을 때 가장 중앙에 위치하는 곳이었다.
할아버지 검성으로부터 받은 그의 애검 검신의 중심이 신체 정중앙에 머무름에 따라 그의 몸에 산재되어 있던 빈틈이 완전히 사라졌다.
검성 모용정천이 창안하고 그의 손자에게 전수해준 독특한 방어법.
자신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모든 거리에 대해 똑같은 거리를 똑같은 시간에 움직일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방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며 전해준 것이었다. 이것은 그를 가장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극(極)의 자세였다.
그는 지금 공(功)을 버리고 수(守)를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둠의 저편에 떠 있는 하얀 손에서 흠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순간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마치 가볍게 감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모용휘의 대비가 상당히 의 외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얀 손 역시 물러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재미있군!”
또다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모용휘는 전신의 신경을 바짝 조였다.
어둠 저편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었다.
일격으로 자신의 방어를 깨고, 자신의 생명을 취할 일격필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을, 상대를 앞에 두고 처음으로 자신감이 엷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모용휘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 격통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꾸짖고 반성하고 다시 추슬렀다.
이 상황에서 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자신이 피하면 은설란이 죽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
모용휘의 눈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하얀 손이 움직였다.
스윽!
어둠을 넘어 차가운 살의가 다가왔다. 차갑다. 살벌하다. 그러나 역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목이다!
모용휘는 검을 살짝 앞으로 뻗었다.
까앙!
맑은 쇠 울림이 울려퍼졌다. 아직 모용휘의 목은 그의 몸 위에 무사히 달려 있었다. 첫 번째 격돌은 모용휘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그 에게 다가왔던 무형의 칼날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 이후였다.
‘역시 보이지 않았어!’
상대의 수를 알아내지 못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진다. 그리고 그럴수록 은설란은 더욱더 위험해진다.
다시 무형의 칼날이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아까보다 그 기척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심장!
모용휘가 살짝 검을 틀어 그 궤적을 막았다.
카앙!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모용휘의 검이 살짝 중앙을 벗어나는 순간 그 틈을 비집고 또 다른 예기가 덮쳐왔던 것이다. 빠르다!
검을 고정시킨 채 순간적으로 몸을 틀었다. 왼쪽 팔뚝에 화끈거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러나 다행히 심장은 무사했다.
슉슉슉!
상대는 모용휘에게 쉴 틈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는 세 개의 무형인이 시간차를 두고 날아왔다. 그러자 모용휘의 검도 분신술을 아는 것처럼 셋으로 분 리되어 각자의 위협을 방어한다. 방금 전의 실수를 거울삼았는지 훨씬 원숙한 방어였다. 그러나 허벅지를 베이고 말았다. 은설란을 향해 날아가던 기운을 억지로 막 다가 입은 상처였다.
슈슈슈슈슈슈슈슉!
다시 어둠으로부터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형체가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검기가 모용휘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보고 막을 수 있겠네 하고 좋아할 수는 없 었다. 반칙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당연했다. 갑자기 세 번의 연속 공격 다음에 십여 개의 검기가 살의 어린 이빨을 번뜩이며 그의 전신을 난자하기 위해 날아왔던 것이다.
“합!”
기합과 함께 모용휘의 검이 별빛을 뿌렸다. 유성우 같은 검기가 검극을 통해 뿜어져 나오며 그의 주위를 감쌌다. 둥근 막이 형성되며 방패처럼 위협에 저항했다. 검막(劍幕)이었다.
“헉헉!”
식은땀이 그의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벌써부터 호흡이 가빠오고 있었다. 한 수 한 수를 막는 데 막대한 심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모용휘의 꼴은 지금 말이 아니었 다. 방금 전 하얀 손의 맹공이 놀랍게도 자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방어초식 중 하나인 검막을 잡아 찢고 그를 향해 쇄도했던 것이다.
다급한 경호성을 터트리며 몸을 피했지만 의외였던만큼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지 여기저기가 베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치명상을 피했다는 것과 은설란도 무사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분하지만 저 하얀 손의 주인이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어둠 속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법이군. 다음의 한 수도 막아봐라! 막으면 살려주겠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신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모용휘는 상대가 자신을 살려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은 곧 다음 한 수에 전력을 다해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하얀 손의 주인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의 죽음뿐이었다.
‘다음 한 수를 막아낼 힘이 지금의 내게 있는가?’
모용휘는 냉정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찢어진 손아귀, 거칠어진 호흡, 치명적이진 않지만 신체에 부담을 안겨주는 자잘한 상처들, 그리고 지켜야 할 상 대까지!
목숨을 도외시하고 양패구상의 각오로 달려들어도 승패의 행방은 암울했다. 그러나 은설란을 지켜야만 하는 자신의 입장으로서는 행동반경이 극도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그의 검이 은설란의 보호가 불가능한 권역으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그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시공간적 거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 다. 그녀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싸움의 진정한 목표였던 것이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봉인된 마지막 기술이!’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위험한 도박이었다. 불완전한 초식, 완전하지 못한 습득. 동귀어진에 가까운 무모한 방법이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저자와 같이 죽으면 은설란을 대피시켜 줄 사람도 없지 않은가. 그의 사명은 저자와 함께 죽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은설란을 안전하게 대 피시키는 것이었다. 그때 구원의 손길 하나가 뻗쳐왔다.
“선수교체를 해도 될까요?”
이 격전의 한복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
모용휘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비뢰도』 1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