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1화 – 헤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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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1화 – 헤매는 자

대붕의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아느냐?

소년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높이 날아야만 멀리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붕의 날개가 필요하다!

내가 너에게 그 날개를 주겠다. 날아올라라!

가로막힌 산을 넘지 못하면 그 다음 세상을 볼 수 없고,

구름 위를 뚫고 날아오를 날개가 없으면 그 위의 세상을 볼 수 없다.

대붕의 날개로 날갯짓해 세상 만물을 꿰뚫어보고 포용하는 눈을 가져라.

그것이 홀황경으로 가는 길목이자 지름길이다!

헤매는 자

– 수색(搜索)

심야(深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고 있는 게 당연한 시각.

깨어 있을 사람은 침입자에 대비해 성벽을 경계하는 초병(哨兵)이나 남의 집 값나가는 보물들에 눈독 들이는 양상군자(梁上君子) 도둑님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목표물의 목숨을 쉽고 간단하게 감쪽같이 가져갈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살수 나부랭이들뿐일 것이다. 아마도…….

깊은 밤, 퇴적되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갈수록 짙어지는 칠흑의 어둠 속에서 적막 또한 점점 더 무게를 더해간다. 들리는 것은 오직 귓가를 울리는 나뭇잎 밟히는 바스락 소리뿐.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 이 밤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먹물 같은 어둠에 물든 구름이 달을 희롱하는 가운데 사내는 걸었다.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은청색 무복과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언 듯한 청은색 머리 카락, 그리고 그 밑에 자리한 차갑게 빛나는 한성(寒) 같은 두 개의 눈동자. 귀신이라 해도 쉬이 믿을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사내가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이미 길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험로. 산세는 칼로 깎아놓기라도 한 듯 험하기 그지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이 밤이 가기도 전에 염라대왕님을 배알할 수 있을 것이다. 야생동물이라 할지라도 이 길을 걸을라치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 분명했다. “꼴…….?

찬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나직한 뇌까림이 새어나온다.

“…사납군!”

자조와 불만과 비아냥이 한데 뒤엉킨 목소리. 청은발의 사내는 저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져서 견딜 수 없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로군! 어찌하여 내가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달빛 탓인지 사내의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차가운 빛을 발했다. 동시에 얼음 결정 같은 두 개의 눈동자에도 살의가 일렁였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달 빛 탓인지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냉막해 보였다.

그는 강호의 추앙받는 검호(劍豪)로서 ‘천하오검수’의 일인이자 천무학관의 존경받는 총노사라는 영예로운 신분을 동시에 소유한 강호의 명숙(名宿)이지만, 안타 깝게도 염도(焰刀)라는 성질머리가 지랄 맞은 ‘웬수’의 숙적이자 비류연이라는 출신 성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관 애송이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가 지닌 여러 개 의 직함과 신분은 물과 기름처럼 무척이나 상충되는 것이었지만, 더욱 비통한 사실은 그것이 모두 진실이라는 점이었다. 이 특이한 신분의 소유자는 바로 빙검(氷 劍)이었다.

빙검은 미약한 신월을 등불 삼아 야심한 산길을 뒤지듯 걷고 있었다. 횃불은 위치가 들통 날 가능성이 충분한 관계로 사용이 불가능하다. 이곳은 전 무림의 요지 (要地)인만큼 항상 주위 사방을 지키는 파수(把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의 한복판이었지만, 검과 함께 단련된 그의 안력은 하늘에 걸린 미약한 등불만으로도 두터운 어둠의 장막을 꿰뚫 어볼 수 있었다. 물론 얼마간의 불편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지만…….

염도가 ‘사부’와 함께 가고 그는 남겨졌다. 하지만 좋아하긴 일렀다. 대신 그에게는 맡겨진 일이 있었던 것이다.

“후우…….”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신세가 끈 떨어진 연처럼 처량하기만 했다.

“천하오검수의 일좌라는 자가 하는 일이 겨우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이런 험산을 이 잡듯 뒤지는 것이라니…….”

한탄하고 탄식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이곳은 천무봉. 예전에 낙안봉(落雁峯)이라 불렸던 이 봉우리는 지세가 험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많기로 유명한 만큼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눈 깜짝할 새다.

그는 기괴하게 뻗은 나뭇가지의 그림자 사이로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는 달을 다시 한번 올려다본다. 작고 희미하고 미약하다.

“이런 야밤에 저렇게 불성실한 등불만을 의지해 과연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요, 소림사에서 까까머리 찾기가 아닌가. 확률은 지극히 희박했다.

‘혹시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 찾아봐주세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걸까? 그자의 마음은 예측불허의 혼돈 그 자체여서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 그것 말씀이지요!”

빙검은 조금 전 있었던 한 인물과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 인물은 바로 이 산에서 지난 100년 동안 대회의 운영 및 관리를 맡아온 율령집행자(律令執行 者)’, 통칭 ‘율령자’라 불리는 화산규약지회의 관리운영자들 중 하나였다.

“없다고 해! 제발 없다고 해!’

빙검은 껄끄러운 마음으로 질문하면서도 몇 번이나 이 말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염원은 하늘에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확실히 있긴 있답니다. 이 정도로 험한 봉우리쯤 되면 한둘은 있게 마련이지요.”

빙검은 크게 낙담했다. 그러고는 크게 책망했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살인멸구하지 못한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모른다면 모르되 이미 알게 되었으니 스스로의 신 의를 배반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정도로 고지식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제가 그것을 본 지도 벌써 서른 해가 넘었군요.”

갑자기 아련한 과거가 떠오르는지 노인의 시간이 30년 전으로 급작스레 역행했다. 몇몇 노친네들이 발생시키는 저 시간의 역류에 휘말리면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다. 빙검은 그 급류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만 했다.

이 늙은 관리인이 삼십 년 전, 나름대로 젊었을 때 직무를 유기하고 술을 마시기 위해 몰래 산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한 것과 지금 그의 용건과는 수백만 광년의 거 리 차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론이 나오려면 그는 한참이나 이곳에 우두커니 붙박인 채 저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할 게 너무나도 분명했다.

더구나 그는 맞장구가 좀체 몸에 맞지 않는 사내였다. 무뚝뚝하기로 따지자면 따를 자가 드물다는 평을 괜히 얻었겠는가.

이 역행하는 시간의 급류를 한시바삐 탈출해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근 십 년 만에 만난 청중을 노인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노인이 산을 빠져나가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밤의 거리를 지나 현내 제일의 주루인 아무개 주루로 들어가 그곳에서 제일 비싼 아무개 술을 가장 비 싼 안주인 아무개와 함께 시켜먹는 대목에 이르고 있었다. 빙검은 마침내 급류 탈출을 포기하고 석상처럼 묵묵히 서서 이야기의 물결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 지만 청중의 무성의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의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제가 그것과 만난 것은 고주망태가 된 채 비칠비칠 겁도 없이 야밤의 천무봉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지요. 제정신 멀쩡히 박힌 상태에서도 야간산행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데 만취한 상태라면 그 무모함이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아마 분명히 길을 잃고 헤맸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 그것이 제 눈앞에 나타 났지요.”

마침내 본론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빙검이 슬슬 지겨워져서 딴 생각에 골몰해 있을 무렵이었다. 멀쩡하던 초도 벌써 한 뼘이나 녹아내린 뒤였다.

그곳이 어딘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 관리인이 부탁치도 않은 지형지리를 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시시콜콜 자세하게 들려준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게다가 흥이 돋았는지 돌부리 하나까 지 세세히도 들려준다. 그도 밤새 익숙하지 않은 산속에서 헤매다가 미아로 전락하고 싶은 바람은 전혀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망막에 새겨넣을 듯 자세히 눈여겨보았 다.

“확실히 이 부근이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손가락으로 자신이 그려놓은 지형의 한 지점을 짚으며 물어오는 질문에 빙검은 대답할 말이 궁했다.

“아… 아! 벼, 별일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나 위험이 될지 모를 요소들은 미리미리 점검해두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관도들도 방심하면 안 되니깐 말 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지요!”

진실하고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변명거리를 내뱉고 있자니 스스로가 그자처럼 가증스럽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아아, 그러셨군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무사에게 방심은 용납할 수 없는 죄지요.”

상대가 쉽게 납득해준 게 천만다행이었다.

벌써 수십 년 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사람이다. 이 험준한 천무봉도 그에게 있어서는 제집 앞마당에 불과할 뿐. 그러니 그런 그가 있다고 하면 확실히 있을 것 이다. 지금 빙검에게는 그것만이 지금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무사에게 방심은 용납할 수 없는 죄지요!’

노인의 마지막 말이 현혹의 메아리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울려댄다. 떠올리기조차 치욕스런 과거가 심연의 밑바닥에서 다시 기어올라와 그 음습한 자태를 드러냈다. 빙검의 얼굴이 소태를 씹은 것마냥 찌푸려졌다.

‘하하하, 내가 이겼죠? 그럼 첫 번째 조건을 말하겠어요! 불만 없죠??

앞머리를 가린 한 인간의 미소 짓는 얼굴이 떠오른다. 무척 얄밉게 생긴 얼굴이다. 빙검의 당겨진 안면 근육이 더욱더 괴로움에 꿈틀거린다. 달빛에 반사된 청은빛 머리카락이 은은한 빛을 발한다.

“무사에게 있어 방심은 곧 죄!’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왜 그때 방심했던 걸까? 유죄(有罪)…였다! 변명의 여지없는!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뼈아픈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도 그 죗값의 일환..

정말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실 빙검은 그때의 그 일을 여태껏 수십 번이나 돌이켜보았다. 매번 그를 괴롭히는 수치와 모멸을 참으며!

그러나 납득이 갔던 적은 한번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순간 그가 자신의 인지(認知)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지각할 수 없다면 그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다시 그가 자신의 인지 속에 등장했을 때 자신은 속수무책이었다.

무력(無力)…했다.

“그때의 그 기분 나쁜 위화감이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후우…, 누굴 탓하리요! 무인에게 있어 방심은 중죄! 모든 것은 나의 방심이 부른 화!”

또다시 마음이 착잡해지고 만다.

“젠장, 이젠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달도 오늘은 얇고 가는데다 치사하리만큼 쪼잔한 빛을 뿌리고 있어 험난한 지형 위에 펼쳐진 울창한 산림을 헤치며 걷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쓸모없 는 달빛을 욕하며 그는 뚜벅뚜벅 다시 산길을 헤쳐나가기 시작한다.

‘차라리 염도에게 이 일을 떠맡기고 내가 따라갈걸.’

그 편이 훨씬 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쯤 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을 게 틀림없는―빙검은 확신하고 있었다― 염도가 더욱 괘씸히 여겨졌다.

“불꽃덩이, 그 자식은 지금쯤 아이들이랑 편하게 밤나들이나 하고 있는 중이겠군!”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가슴속에서 불꽃이 솟아오른다. 항상 빙정(情) 같은 마음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도 그 러했지만,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촘촘히 박힌 그 화상만 떠올리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마음의 수련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짜증과 분통이 얼음 을 깨고 터져나오는 것이다.

바스락!

그때 어둠으로 채색된 수풀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기민한 귀가 움찔 반응한다. 빙검은 눈을 빛내며 그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만일 그곳에 있 는 것이 그가 찾는 것이라며 그는 더 이상 찬 이슬을 맞으며 산을 뒤집고 다닐 필요 없이, 금방 끝내고 쉴 수 있기에 움직이는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빨랐다.

밤의 묵빛에 동화된 가지가 그의 은청색 무복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씨양! 이건 또 뭐야!”

이때 염도는 빙검에게 책망 받을 만큼 퍽이나 좋은 상황에 처해 있는 중은 결코 아니었다.

호목(虎目)처럼 부리부리한 염도의 눈동자가 사방을 매섭게 훑고 지나갔다. 삼십여 명의 칼잡이들이 염도와 그가 이끄는 일행들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경보 가 울리자 여기저기에서 벌컥벌컥 문이 열리며 우르르 뛰쳐나온 놈들이었다. 개중에는 꽤나 요란스레 담벼락을 휙휙 넘어온 자들도 있었다.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놈들…, 단단히 훈련된 자들이다!”

어지간한 훈련으로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 정도까지 신속하고 정연한 대응이 가능할 리 없다. 문자 그대로 뼈를 깎는 반복훈련이 몸에 배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이 정도면 기강과 군율이 엄정한 군대의 병사들 같지 않은가! 누가 있어 이런 자들을 소리 소문도 없이 훈련시켰단 말인가?”

사방을 둘러싼 적들이 그물에 걸린 고기를 몰 듯 주위를 옥죄어왔다.

뭐, 포위압박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덤으로 사면초가까지. 정말 친절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 아닌가. 그러나 막간을 이용해 이런 빌어먹을 정도로 희귀한 체험을 선사해주신 천지신명께 감사의 인사를 드릴 짬도 없었다.

염도의 생각은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들은 잘 훈련된 자들답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포위망이 좁혀지자 이유를 불문곡직하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문 답무용이란 건가?

“망할!”

홍염을 움켜쥐며 염도는 입안 가득 씹고 있던 욕지거리를 요란스레 내뱉었다.

“그놈의 얼음땡이는 지금쯤 산 위에서 두 다리 뻗고 편히 쉬고 있겠지! 망할 놈!”

언제나 고생은 자신의 몫인 것만 같아 분하다.

아드득!

어금니를 으스러지게 깨문다.

절대 자신들은 닮은꼴이 아님은 물론이요, 얼음과 불처럼 섞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이었지만 역시 동문은 동문. 의외의 곳에서 비슷한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목매다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리라. 이 점을 인정하는 건 그들의 눈에 흙이 들어가는 그날까지도 아마 없을 것이다.

“돌파해라!”

염도의 일성에 구출대 전원이 포위망의 정면을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이 일제돌격의 누구보다 선두에 선 자는 바로 다름 아닌 염도였다.

“비이~켜!”

열불 나는데 때마침 잘됐다! 이 화강암처럼 거친 빨강머리 아저씨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손속에 사정 따위가 들어갈 리 만무했다.

진홍십칠염(眞紅炎) 검염기(劍焰氣)

염격(擊) 삼극련화(三極練火)

일도가 대지를 가르자 동시에 세 명의 적이 불꽃에 휩싸였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불꽃과 함께 장렬히 폭발한다.

“이 얼음땡이 자식아! 네놈이 그러고도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을 것 같으냐아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요,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염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는 기뻐하고 찬양해야 마땅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찾는 건 너희들이 아니다! 안타깝구나.”

빙검이 조용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정말 진심으로 좋게좋게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사납기 그지없는 야성의 그것이었다. 크르르르르!

빙검의 좋은 말에도 그를 포위한 늑대들의 무리는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재수가 없었다. 뭔가의 기척을 느끼고 달려왔는데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십 마리는 족히 되는 군집을 이루고 있는 늑대의 아가리였다.

“이런이런, 얌전히 돌려보내주지 않을 참인가?”

야생에 물든 눈은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빙검은 그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야식거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스르릉!

빙검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검집에서 빙루를 뽑아들었다. 달빛이 검신을 타고 부서지며 서릿발같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다. 달무리처럼 하얀 안개가 검극 으로부터 피어올라 어두운 산자락 위에 깔린다. 그를 포위하고 있는 늑대들도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하고는 움찔거렸다.

“무익한 살생은 좋아하지 않는다. 물러나라!”

차가운 한기가 한밤중 가을 산에 겨울을 불러왔다.

크르르르르르! 크아앙!

그러나 상대도 머릿수를 믿는지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야 할 시간에 자지 못하고 강제로 깨게 된 이후로 계속 요 모양 요 꼴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숙면을 방해받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자야 할 시간에 자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누가 나 몰래 내 불행이라도 빌고 있는 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답을 내놓는 빙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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