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10화 – 깨어난 은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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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10화 – 깨어난 은설란

깨어난 은설란

“…설…란..”

“…언…니!”

“…은…소…저!”

“은…소저……!”

기묘한 부유감 속에서 은설란은 떠다니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꿈속에 있는지 현실 속에 있는지조차 그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기묘묘하게도 그 목소리 중에 자신의 원출신인 곳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목소리들 은 하나같이 자신이 조사관의 신분으로 간, 원래대로라면 결코 친해질 수 없는 곳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긴 어딜까…….?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주위는 온통 어두컴컴한 암흑으로 덮여 있어 천지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하늘과 땅이 있 는지조차 의심스런 공간에 그녀는 내팽개쳐져 있었다. 몸이 배의 닻이라도 된 양 끝없는 심연의 늪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나는 눈뜨지 못하는 걸까?’

갑자기 눈앞에 갈효봉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잃었을 때의 절망스러웠던 비통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으면 행복할까?”

여기서 다시 눈을 뜨더라도 그녀는 또다시 그가 곁에 없는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그것이 오히려 더 행복할지도 몰라.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절대공허의 상실감을 두 번 다시 맛보지 않아도 되니깐 말이야.’

그것은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그래, 그게 오히려 더 편안할지도 몰라…….’

그녀가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내맡기며 천천히 눈을 감은 바로 그때였다.

“은…소…저!”

어둠의 안개를 헤치고 심연의 늪을 지나 그녀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부르던 여러 개의 목소리 중에서도 가장 애타게 부르짖던 그 목소 리였다.

항상 깔끔하고 단정하고 예의바르고 모든 일에 열심인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 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또 다른 모습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필사적이었던 그 마음. 잊어서는 안 될 그 마음.

‘…지킨다 …지킨다 …그녀 …목숨…….”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휘……..?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늘은 가을 하늘답게 높고 청명했다. 태양은 눈부신 빛의 파편을 뿌리며 대지의 생기를 북돋우고, 푸른 하늘에서 날아온 바람은 시원하게 춤을 추며 계절을 잊은 채 피어 있는 신비로운 붉은 매화나무 가지들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한가해 보이는 오후였다.

“응?”

제일 먼저 그 기척을 알아챈 이는 홍매곡 안을 유유자적 거닐던 비류연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것을 느낀 이는 나예린이었다. 그녀는 우연인지 몰라도 그의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함께 산책을 거니는 부도덕한 행위로 뭇 사내들의 복장을 뒤집어놓는 비양심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가까 이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비류연과 나예린에게는 각각 다른 일행도 있었고.

그 기운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 위치는 바로 홍매곡의 입구.

나예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홍매곡의 입구를 지나 곡내로 들어오고 있는 한 사람의 기운이 그녀의 눈에 인식되었던 것이다. 저절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은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뭘까? 이 감각은?”

믿겨지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저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닐 수 있다니…….

오싹!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안색은 곧 쓰러질 사람처럼 창백하다.

피가 식는 듯한 오한과 함께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순간 망막 앞에 어둠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혼돈이 소용돌이치는 암흑의 심연으로부터 기어나온 수천 마리의 사갈(蛇)들이 자신의 정신을 어둡게 휘감는 것만 같았다.

가슴 깊은 곳을 자극하는 불길한 검은 그림자. 그것은 너무나도 깊디깊은 어두운 암흑 저편에 숨겨져 있어 그 정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알지 못해도 몸이 떨려왔다. 무엇인가가, 의식 수준에서 인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스윽!

비류연의 눈이 순간 태양을 품은 듯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는 기운을 내뿜으며 곡내로 진입한 한 존재의 길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섰 다. 그가 놀란 것은 나예린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 느낌! 확실히 기억에 있다!’

갑자기 가슴의 상처가 불에 덴 듯 화끈해졌다.

‘설마 그놈인가??

괴상야릇한 은형술 덕분에 얼굴은 직접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때로는 눈으로 본 것보다 마음으로 본 것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문 다.

하지만 그놈이 이곳엔 왜?”

아무리 강호정세에 어두운 비류연이지만 상식까지 정신의 한구석에 암매장해놓은 것은 아니었다(다른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적도 사람인데 미쳤다고 자신의 대갈통을 범의 아가리에 ‘나 잡수쇼!’ 하고 집어넣겠는가! 만일 그놈이 맞는다면 여긴 그놈에게 있어서 적진의 한복판인 것이다.

‘내 착각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

그는 이 가정을 이내 부정해버렸다. 아무리 같은 사문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같은 기를 내뿜을 수는 없다.

‘쳇, 은 소저가 기억만 멀쩡했어도…….?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기대였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게 하는 미녀의 검고 우미한 속눈썹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듯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그림같이 반듯한 눈썹이 움찔거린다. 그 리고 마침내 수많은 비밀이 담긴 검은 호수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정신을 잃고 있던 은설란이 마침내 눈을 뜬 것이다.

“정신이 들어요, 은 소저?”

“여…, 여기는?”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공주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은 소저, 여기는 화산규약지회가 열리는 천무봉 홍매곡입니다. 이곳은 거기 안에 위치한 의무실이고요. 정신이 들어서 다행입니다.”

비류연의 차례를 가로챈 모용휘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써 감추고는 있지만 처절할 만큼 고뇌했던 초췌한 흔적이 완전히 씻겨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천무봉.. ༡”

게다가 화산규약지회가 열리는 홍매곡이라니?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인과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몽중을 정처 없이 헤매 고 있는 것인가?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자신이 있던 곳은 화음현의…….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어머, 모용 공자! 그 상처는?”

모용휘를 향해 시선을 돌린 은설란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를 감싸고 있는 하얀 붕대들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아, 별거 아닙니다. 수련을 과하게 하다가 입은 상처입니다. …미숙함의 증거지요.”

모용휘가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쓰라린 진심이었다.

“모용 공자께서 수련중에 상처를 입다니 희한한 일이군요.”

지독하다는 소리를 때때로(?) 들을 정도로 매사에 철저한 그인지라 항상 자기관리에 확실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수련중에 상처를 입다니. 그녀가 알던 모용 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업고 탈출하다 어둠 속의 괴인에게 당한 상처였지만 정신을 잃고 있던 그녀로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모용휘는 모용휘대로 자신의 약함과 미숙함 때문에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욱더 괴로워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 상처의 고통에 비하면 살가죽에 입은 상처 따위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은설란은 그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었지만 내색하지는 않기로 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아요? 납치당했던 것 말이에요.”

아직도 어리둥절 우왕좌왕하는 그녀를 보고 비류연이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눈을 뜨자마자 그것부터 물었어야 정상이었던 것이다.

“아!”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었는지 기억해냈다.

“기억났어요?”

“네,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요.”

그녀는 마치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이야기라도 되는 양 대답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점점 더 어제의 일이 선명하게 뇌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만일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여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모 골이 송연해졌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도 않고 타 소속의 사람을 구하러 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풍매객잔에 간 이유가 뭐였죠?”

“네, 어디요?”

그녀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려 혼란스러워 그러겠거니 하며 비류연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풍.매.객.잔.이요!”

“아, 맞아요! 풍매객잔! 중원표국이 묵는다는 그곳 말이죠! 확실히 거기에 갔었어요.”

“중원표국?”

갑자기 사람들을 밀치며 장홍이 끼어들었다.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에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한노에게 들었어요. 그곳에 중원표국 사람들이 묵고 있다고.”

“흐흠…….”

장홍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아직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지만 그의 직감은 그 단서를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지쌍살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이미 그들의 배후로 추정되는 천겁의 그림자가 바로 턱밑까지 그 세력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로서는 한 자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 간 이유는 뭐였죠?”

비류연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분명히 누군가를 보고 그의 뒤를 밟아…, 악!”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터뜨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했던 것이다.

““꺅! 언니!”

“은 소저!”

“왜 그래요?”

“무슨 일인가?”

여기저기서 걱정 섞인 염려가 터져나왔다. 특히나 모용휘는 심장이 덜컹거리는 충격을 맛보고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악, 하악, 하악…….”

한참을 숨을 고른 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찡그려졌던 미간을 펼 수 있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 뒤를 밟을 정도라면 분명 제가 아는 중요한 인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 부분의 기억이 도둑이라도 맞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부분을 되살리려고 노력할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어떤 장 애물로 인해 그 부분으로 통하는 기억의 길목이 꽉 막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기억에 수작을 걸었어!”

기묘하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탐색하던 비류연이 말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설마……!”

염도와 모용휘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고는 동시에 외쳤다.

“심령금제(心靈禁制)!”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 바로 그것이지.”

“어, 어떤 놈이 그런 끔찍한 짓을…….”

심령금제, 그것은 사람의 정신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안겨줄 수도 있는 엄청나게 위험한 수법이다. 게다가 실패의 확률도 무지막지하게 높아 강호에서는 암묵적으 로 금기시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백치가 되거나 미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천만하고 잔혹무도한 수법을 이런 가녀린 미녀에게 사용하다니……. 천참만륙(千斬萬戮)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럴 만한 잡놈이 저쪽에 하나 있지요.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 놈이 개입한 게 틀림없습니다. 어제도 직접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이로써 그 잡놈들과 부딪친 것도 두 번째로군요.”

뿌드득!

어금니를 으스러지도록 깨물며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효룡이 말했다.

“천지쌍살!”

중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확실히 쌍살 중 천살의 최고 비술인 초혼섭령대법(招魂攝靈大法)이 지닌 공능(功能)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것은 시술자에게 제대로 펼쳐졌을 경우 시술자의 정신을 시전자가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희대의 사공(邪功)인 것이다.

“그놈이 형에 이어서… 은 소저까지…….”

연인 남녀 모두가 한 사람에게 정신적 약탈을 당하다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어제 그놈을 만났을 때 오체분시했어야 하는 건데……. 시간만 충분했다면…….”

효룡이 이를 빠드득 갈며 씹어뱉듯 말했다. 어제 그들을 눈앞에 두고도 생사결(生死結)하지 못한 이유는 불리한 세 때문도 있었지만, 일조점검 시간을 맞추기 위 해 서둘러 움직인 탓도 컸던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그들을 잘근잘근 씹어 먹지 못한 게 생각만 해도 분하고 원통한 모양이다.

“다음에 만나면 가장 참혹한 죽음을 선사해주겠어!”

모용휘가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맹세했다. 이 청년이 이 정도로 증오를 불태우는 일은 무척이나 드문 편이었다.

“그놈들에게는 먼저 선약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친구!”

효룡이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금 손 안에 든 한때 끊어졌던 녹색 머리띠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뢰쌍마에 의해 끊어졌던 것이 이진설의 정성 에 의해 감쪽같이 수선되었다. 완벽한 솜씨라고는 할 수 없어도 한 땀 한 땀에 어린 그 정성만은 바느질에 문외한인 그라 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효룡은 제정신이 든 지금에도 여전히 머리를 묶지 않고 산발한 채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는 편이 그의 얼굴을 쉽게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절대 저쪽 편에 얼굴을 들켜서는 안 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저주스런 원수들을 쓰러뜨리기 전에는 왠지 형의 유품인 이 녹색 머리띠를 해서는 안 될 듯한 기분도 들었다.

‘천지쌍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둘에 대한 원한과 증오라면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증오에 눈이 먼 채 과한 욕심을 부려 우정에 금이 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네의 몫도 남겨주겠네!”

“고맙네!”

친구의 깊은 배려에 모용휘는 솔직히 감사를 표시했다.

“이상하네…….”

비류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아까 전부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모용휘가 되물었다.

“입단속을 하려면 훨씬 손쉬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굳이 심령금제라는 난해하고도 복잡한 방법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거지.”

여기서 훨씬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용휘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자네는 그럼 은 소저가 살인멸구(殺人滅口)의 희생자가 되었어야 옳다는 이야기인가?”

저 얌전한(?) 친구가 저런 격한 반응을 보이다니! 중인들이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엊저녁부터 이성을 누군가에게 빌려줬는지 그답지 않게 매사에 지나 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흥분하기는! 물론 그런 생각 품은 적은 없어. 이런 미녀를 잃는다는 것은 대우주적 손실이지!”

무림강호만으로는 성이 안 차는 모양이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

흥분을 가라앉힌 모용휘가 사과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비류연은 그와 그녀의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자신이 조금 전 취한 행동이 지나쳤다는 데는 그도 이의가 없 었다.

“가설은 두 가지. 그녀를 죽여서는 안 될 이유가 있든가 아니면 반했든가!”

“뭐라고?”

반하다니?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말이란 말인가.

“저 정도 미녀라면 누가 반해도 이상하지 않지. 역시 저런 미녀를 죽인다는 것은 대우주의 막대한 손실이니깐 말일세. 대우주의 의지를 거스르는 짓이라 할 수 있 지.”

그다운 주장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어.”

“그게 뭐죠?”

“그녀가 알려져서는 안 될, 그리니까 저쪽에서는 절대로 알려주고 싶지 않은 뭔가를 보거나 알아냈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자는 은 소저가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누군가로 추측되는 사람―지금은 물론 기억이 금제되어 기억하진 못하지만ᅳ을 쫓아갔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했으니까. 아마 그 사람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 아낼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렇게 친한 사람은 아닐 거야. 서로 알지만 거리를 두는 인물임에 틀림없어!”

비류연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게 장담하는 근거는 뭔가, 류연?”

장홍이 반문하자 비류연이 망설임 없이 대답해주었다.

“그녀가 그를 본 즉시 따라 들어가지 않고 남의 이목이 없는 야음(夜陰)을 틈타 그가 있는 곳으로 몰래 접근했으니깐!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었다면 보통 그런 일은 하지 않을걸? 상당한 직위에 있는 사람이 틀림없었을 거야. 이렇게 무림인들이 복작대는 그 거리에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비류연의 이번 추론은 그가 내놓은 것치고 지나치게 타당한 것이라 중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막무가내의 화신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는 것은 경이를 넘어 우주의 신비라 할 만하다고 주작단원들은 한결같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조심해야 되겠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장홍이 입을 열었다.

“뭘?”

“만일 적이 우리가 짐작하는 ‘그들’이라면 이 정도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지!”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은 장홍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굳이 직접적인 단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름의 불길함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큼 집요했다. 그들은 지난 백 년 동안 암중으로 무림을 괴롭혀온 어둠의 권속들이었다.

‘천겁의 그림자를 조심해라!’

효룡의 머릿속에 형이 남긴 마지막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길함이라는 뱀이 목덜미에 똬리를 튼 채 검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록 이곳이 화산규약지회가 열리는 무림의 비처인 천무봉 안이기는 하나 방심은 금물이라는 게 내 생각일세.”

“…….”

장홍이 자신의 의견을 신중하게 피력하자 모두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내겠어!’

두 번의 실수는 없다. 난 더욱더 강해진다. 어제와 같은 치욕은 두 번 다시 사양이다. 모용휘는 남몰래 마음속으로 맹서(盟誓)했다.

“자자, 너무 오래 떠들었다. 아직 그녀는 환자다. 금제가 걸린 상태에서 억지로 기억시키려 해봤자 부작용만 심해질 뿐이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그만 쉬게 해주어 라.”

염도가 오랜만에 노사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중인들은 자신들이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오랜 시간을 끌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가자!”

염도가 앞장서서 문 밖으로 걸어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려는 그를 향해 은설란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사님!”

염도는 오른손을 훌쩍 들어 보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별거 아니네. 게다가 난 들러리였을 뿐이고! 대신 자네를 위해 애쓴 저기 있는 젊은 친구에게 입맞춤이라도 해주라고! 특히나 자네를 지키려다 온몸에 붕대를 칭 칭 두른 멍청이에게 말이야. 아마 목 빠지게 기대하고 있을 걸세, 하하하하!”

“노사님!”

노사의 짓궂은 농담에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개진 모용휘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염도는 이미 문을 나선 이후였다.

“모용 공자!”

은설란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모용휘를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감긴 새하얀 붕대 위로 점점이 배어나와 있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면 저 상처가…….

갑자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하고 솟아올랐다.

“저…….”

은설란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녀의 의도는 실패했다.

“저, 저는 그럼 이만!”

모용휘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이 후다닥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자리를 피할 때 그가 선보인 경공은 정말 독보적인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더 이상은 이곳에 있을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모용 공자!”

뒤늦게 그녀가 소리 높여 그를 불러봤지만 들릴 턱이 없었다.

“쯧쯧쯧! 강호의 이름 높은 후기지수이자 검성의 후계자인 그도 미녀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는 모양이로군. 칠절신검이란 별호가 아깝네, 아까워!”

이제는 텅 비어버린 빈 자리를 바라보며 장홍이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아마 칠절(絶)에 여자(女)는 포함되어 있지 않나보지!”

“거참 쓸모없는 칠절이로구만!”

자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저리도 손쉽게 차버리다니……. 아직도 수련이 한참이나 부족한 게 분명했다.

“쟤가 그렇지 뭐! 괜히 ‘모용 순진남’이겠어!

장홍과 함께 한참이나 모용휘를 가지고 놀던 비류연이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바른생활 청년 모용휘에게 별명이 하나 더 붙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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