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12화 – 마천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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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12화 – 마천칠걸

마천칠걸

이때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그 눈은 대공자가 곡 입구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사내의 부리부리한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 이 눈동자의 주인이 서 있는 곳은 두 사람이 격돌한 돌풍의 진원지로부터 삼십여 장이나 떨 어진 곳에 위치한, 십여 장은 족히 될 듯한 삼나무 위였다. 매화나무가 무성한 홍매곡에서 몇 그루 안 되는 삼나무였다.

그는 뾰족하게 솟은 이 아름드리나무의 가장 꼭대기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팔짱을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높이가 높이인 만큼 옷자락이 펄럭거릴 정도 로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도 바늘 끝 같은 곳에 선 그의 신형은 탄탄한 대지 위에라도 디디고 선 것처럼 안정감이 넘쳤다. 사내는 위에 소매가 없고 몸 에 착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단단히 단련된 강철 같은 신체로부터 칼날같이 삼엄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그리고 그의 등뒤에는 칠흑처럼 검 고 무척이나 특이하게 생긴 거대한 기형병기가 걸려 있었다.

“주군께서 오셨다.”

그의 화강암처럼 굳게 다문 입이 열리자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군의 길을 막는 자는 죽는다.”

감정의 편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 마치 생명이 없는 자가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처벌감이군. 교훈이라도 내려줄까?”

다른 목소리가 바로 밑의 나뭇가지에서 들려왔다. 그는 탄탄하게 생긴 채찍 끝에 달린 검날을 이리저리 장난스럽게 가지고 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본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무뚝뚝한 남자 말고도 여섯 개의 그림자가 더 있었다.

“주군의 허락 없이 괜찮을까?”

나머지 여섯 중 하나가 물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신중한 모양이었다.

“재주가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 아니면 죽음뿐이지.”

한 사람의 생명을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생사를 주관하는 권리가 모두 자신들의 손에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젊은 나이에 아깝네!”

이런 삭막한 일행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간드러진 목소리가 울렸다. 여자도 끼어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겠습니까?”

팔짱을 낀 채 착 달라붙는 흑의무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의 위치가 이들 일곱 중에서 제일 높은 모양이었다.

“주군의 앞을 가로막은 자다. 주군의 앞을 가로막는 자를 처단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 주군께서도 허락하실 거다.”

그의 충성심은 절대라고 봐도 좋았다. 암묵적인 동의가 돌아왔다.

사내가 등뒤에서 거대한 ‘그것’을 꺼내들어 손에 쥐었다. 거대한 묵검날을 중동에서부터 구부려놓은 듯한 모양이었는데, 좌우대칭으로 가운데서부터 좌우로 뻗어 갈수록 점점 더 날이 가늘어졌다. 사람 인(人)자를 조금 더 넓게 벌려놓은 듯한 독특한 무기였다. 앞뒤 모두 칼날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내가 잡은 그곳만은 날이 달 려 있지 않았다. 투척 무기로, 던졌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묘용이 있는 회선인(回旋刃: 부메랑과 비슷한 무기)의 일종이었다. 사내는 이것을 흑응익(黑鷹 翼)이라고 불렀다.

“하압!”

사내가 몸 안의 진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우드득, 사내의 솥뚜껑만한 거친 손이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검은 날개를 움켜쥔다. 손등에 검붉은 핏줄이 툭툭 튀어나온다. 뼈가 어그러질 듯하다.

투둑, 거대한 기형병기를 든 사내의 어깨 근육이 잔뜩 부풀어올랐다. 어깨부터 팔뚝으로 이어지는 모든 부분에서 핏줄이 고무줄처럼 불끈불끈 치솟아오른다. “오랜만에 볼 수 있겠군! 일걸의 절기인 ‘흑풍난무(黑風亂舞)’!”

창을 든 옆의 동료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핫!”

짧고 우렁찬 기합과 함께 ‘흑응익’이 거칠게 회전하며 날아올랐다.

콰콰콰콰콰!

쾌속하고 파괴적인 기동을 시작한 그 검은 그림자 뒤로 거친 파공음이 뒤따랐다. 전쟁터를 누비는 전차의 바퀴보다 더 격렬한 회전으로 바람을 휘감으며 그것은 날았다.

이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동시에 일곱 개의 그림자가 삼나무 꼭대기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쒜에에에엑!

대기를 거칠게 휘감으며 그것은 날아왔다.

잔상을 남기며 매미 날개소리 같은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며 그것은 대기를 유린했다.

“뭐지?”

가장 먼저 그 날카로운 살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은 나예린이었다. 그 살의는 맹렬한 속도로 한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 약속이라도 한 듯 정확하게 서 있는 비류연은 대공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터라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했다.

“위험해요!”

그러나 날아온 ‘그것’이 그녀의 말보다 더 빨랐다.

쉐에에엑!

거대한 검은 바퀴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인정사정없이 비류연의 몸을 대지와 함께 좌우로 양분했다.

콰과과콱!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대지가 파이며 자갈이 날리고 큰 상처 같은 고랑이 파였다.

“꺄아아악!”

나예린과 함께 멀리서 지켜보던 이진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눈에는 비류연이 두 쪽으로 찢겨나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괜찮다!”

오히려 나예린은 그녀보다 훨씬 냉정한 편이었다. 두 쪽으로 갈라졌던 비류연의 신형이 공기 중에서 안개처럼 흐트러졌다. 당연히 튀었어야 할 피도 보이지 않았 다.

“잔상(殘像)?”

그제야 이진설은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지금 실력으로는 눈부시게 빠른 비류연의 이동을 따라잡기에 모자란 감이 있었다.

허깨비처럼 사라졌던 비류연은 애초에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삼장 정도 떨어진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콰콰콰콰!

비류연을 양단했던(비록 허상이긴 했지만) 그 검은 바퀴는 힘이 남아도는지 몇 개의 암석과 잡목들을 인정사정없이 두 동강 내고 나서야 맹렬했던 회전력이 조금 감소하는 듯했다.

이진설은 파괴의 난봉꾼이라고 불러 마땅할 그것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무기며 수법이었다. 어떤 무기가 저런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움과 함께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무기가 저렇.

그러나 나예린을 향한 그녀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했다.

한껏 위력이 감소된 검은 날개는 발톱을 세운 매처럼 허공을 맴돌더니 대공자 쪽으로 그 발톱을 돌렸다. 힘은 현저히 감소되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상태였다. 그때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그녀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쏘아진 화살처럼 무척이나 쾌속한 경공이었다. 그자는 대공자의 오장 앞에서 도약하여 허공에서 신속 하게 몸을 뒤집더니 마치 그를 지키기라도 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휘리리리릭!

검은 매가 빨려들어가듯 그자의 손에 잡혔다.

탁!

아무리 위력이 감소했다 해도 그 여력이 완전히 해소된 게 아닐 텐데도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고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철벽과도 같이 굳건한 태도였다.

“누굴까요?”

그러나 그녀는 그 대답을 들을 짬을 얻지 못했다.

쉬에에에엑!

다시 한번 대기가 꿰뚫리는 바람 소리가 곡내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조금 전에 울려퍼졌던 거칠고 파괴적인 소리와는 다르게 날카롭고 예리하고 가늘었다.

“이, 이번엔 또 뭐, 뭐야!”

이진설은 마치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도 되는 양 기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 파공음의 목표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

던 것이다. 슈와!

퍽!

창이 비류연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으며 땅에 박혔다. 창이 만들어낸 와선의 소용돌이가 비류연의 신형을 휘감으며 허공에 흐트러뜨렸다.

“꺄약!”

이진설이 또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아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시야로는 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또다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비류연의 신형이 안개처럼 공기중에 흩어졌다. 이번에도 역시 잔상이었다.

스윽!

비류연이 일장 정도 떨어진 아래쪽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슈왁!

다시 그의 신형이 나타난 지점에 또다시 정밀한 공격이 가해졌다.

스륵!퍽!

그러나 이번에도 비류연의 움직임이 반 박자 빨랐다. 조금 더 아래쪽에 그 신형이 나타났다.

쉐엑!

어김없이 그 자리에도 위력적인 속도의 창이 투척되었다.

스륵! 퍽! 스륵! 퍽! 스륵! 퍽! 스륵! 퍽!

이진설은 숨을 죽인 채 가슴을 졸이며 이 숨막히는 공방을 바라보았다. 마치 생명을 걸고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창이 하나하나 날아오며 파공음이 들릴 때면 마치 자신의 심장이 관통당하는 듯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겨낸 모양인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힐끔 시선을 돌려 자신이 그 소매를 꽉 붙잡고 있는 나예린을 바라보았지만, 얼핏 본 그녀의 눈은 심연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비류연이 바람처럼 신속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창은 정확히 그가 나타난 곳에 있던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비류연의 움직임이 반박자 빨랐던 탓에 모두 허상만을 꿰뚫은 채 땅에 박혔다.

비록 빗맞히기는 했지만 놀랍도록 예리한 안력이었다. 미꾸라지보다 더 미끄럽고 날다람쥐보다 더 날래다는 비류연의 몸놀림을 이 정도까지 쫓아올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술래잡기는 처음 이후로 다섯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제 끝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 다시 그것이 날아왔다.

쉐에에에에에엑!

“조심!”

가슴을 졸이며 바라보던 이진설과 다르게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예린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이번 것이 일으키는 소리는 이전의 여섯 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 비하면 앞의 여섯 번은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쾅!

뇌탄이라도 터진 듯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 여파로 창을 중심으로 거센 돌풍이 파문처럼 주위를 휩쓸었다. 충격파 때문이었다. 나예린과 이진설의 옷자락 이 그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이진설은 그 거친 바람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나예린은 어떤 흔들림도 없이 시선을 비류연에게 고정해두고 있었다.

“어, 어디 갔지?”

잠시 뒤 눈을 뜬 이진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류연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있을 때도 그 움직임을 쫓지 못했는데 눈을 감 고서야 어떻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 일격은 그 안에 휘말려 가루가 됐다 해도 쉽게 믿을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더욱 주위를 둘러보며 비류연을 찾으려 애썼다.

그때 대공자 앞에 또 한 사내가 내려섰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훤칠하게 생긴 청의 사내였는데 아무래도 창을 던진 장본인인 것 같아 결코 호감이 가지는 않았 다.

마지막 창이 꽂힌 자리에는 직경이 일장은 족히 될 듯한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 위에 흙만 덮으면 훌륭한 무덤이 될 것 같은 그 모양이 소녀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서, 설마!”

이진설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나예린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같은 눈동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채였다. 그녀의 석류처럼 붉은 입술은 굳게 다 물어져 있었다. 그녀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는 게 이 소녀로서는 더 무서웠다.

그때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나예린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반대로 두 번째로 나타난 청의 사내의 눈빛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이를 악물고 있는 듯했다.

스으으윽! 턱!

거대한 충격파를 몰고 온 창대 위에 한 사람의 인영이 깃털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바로 비류연이었다.

창이 날아온 횟수는 모두 일곱 번! 대지에 꽂힌 창은 북두칠성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창을 그렇게 던진 것은 아니었다. 비류연이 칠성의 방위를 밟 아 움직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창의 차례는 끝났지만 그 다음 대기 순번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또?”

이진설의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공격은 집요할 정도였다. 목숨을 반드시 취할 작정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일 이유가 없 었다.

쉬리리리릭!촤라라라락!

공기가 이리저리 헤집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였다.

이번에는 채찍이었다. 그것도 그 끝에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이 달린 그런 채찍이었다. 그 쾌속함은 공기를 찢고 바람을 희롱할 정도였다. 허공에서 일순간에 수십 번씩 변화하니 현란함에 현혹되지 않고 그 움직임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았다. 채찍의 끝에 달린 검날이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독기를 내뿜는다.

촤악! 촤악! 촤악!

대기를 매질하며 채찍이 떨어졌다. 비류연은 봉황무의 신법을 밟으며 이리저리 신형을 옮겨 그것을 일일이 피해냈다. 다음에 내리쳐질 방향이 어딘지 이미 예측이 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독사같이 집요한 채찍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근성 있는 독사인 것일까? 채찍은 집요한 기동을 하며 비류연의 숨통을 노렸다. 다시 한번 비류연이 신형 을 위로 띄우며 그것을 피해냈다. 채찍 끝에 달린 검날이 땅을 파고들었다. 보통의 채찍이라면 여기서 움직임이 봉쇄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묵빛 검편은 그렇 게 무르지 않았다.

콰쿠쿠쿠쿠!

땅을 파고든 채찍이 꿈틀꿈틀거리더니 단숨에 땅을 뒤엎었다. 이런 장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채찍답지 않은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흙먼지 가 자욱이 일어나며 비류연의 신형을 감추었다.

그제야 이진설과 나예린은 채찍을 휘두른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검붉은 무복을 걸친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는데, 눈이 가늘게 좌우로 찢어진 것이 마치 뱀눈처 럼 사이해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뱀눈 사내의 오른쪽 손목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먼지가 걷히자 그 이유가 밝혀졌다. 비류연의 발이 어느 샌가 뱀눈 사내의 채찍 끝에 달린 검날을 찍어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채찍을 당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곧 자신이 밟고 있던 독사의 흉폭스런 혓바닥을 놓아줄 수밖 에 없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공격이 그의 목숨을 노려왔던 것이다.

“도대체 몇 놈인 거야?”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어쨌든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한지라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달려오는 살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채찍의 봉쇄가 풀린 뱀눈 사내 역시 앞의 두 사람 옆으로 뛰어가 나란히 섰다.

쉬리리리릭!

무척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긁으며 날아왔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저 수법은!”

함께 끌려나와 있었던ᅳ본인 주장에 의하면ᅳ장홍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앞의 세 공격은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네 번째 공격을 가한 장본인은 누군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수법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직접 맞닥뜨려본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저 요검에 찢겨나갔던 등짝이 비만 오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설마 저들이 바로 그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류연, 조심하게! 그자의 수법은 매우 잔인하다네!”

장홍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교독검편(蛇毒劍鞭)!

독사의 아가리처럼 날카롭고 잔인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그러나 그것은 채찍이되 채찍이 아닌 물건이었다. 그것은 짧게 잘려진 검편(劍片) 수십 개를 특수한 끈 으로 꿰어 붙인 듯한 모양으로, 일종의 검편들을 이어 만든 무기라 할 수 있었다. 특이한 만큼 익히기가 어렵지만,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웬만한 것들은 단숨에 쓸어 버릴 수 있는 무척이나 잔인하고 흉폭한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공격 방향을 짐작하기 힘들고 변화가 무쌍하며 예측을 불허한다. 파괴력 또한 만만치 않으니

정면 공격은 절대 금물이었다. 독을 품은 구렁이의 똬리에 휘감기면 그것으로 끝장인 것이다.

‘그때보다 수법이 한층 더 무섭고 잔인해졌구나!’

십 년 전 그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공격이 연이어지며 비류연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는 무척이나 어렸는데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 도로 위풍당당한 풍채다.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가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종종 생각하 고 있던 터였다.

그는 세 번의 연이은 공격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쓸데없이 애꿎은 자연경물만 망가뜨리자 슬슬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독룡처럼 공중을 휘젓고 다니던 검편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파르르 떨렸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새하얀 기운이 마치 뱀 무리처럼 검편을 감쌌다.

“헉! 위험해!”

장홍은 저것이 무엇의 전조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십 년의 세월로도 잊을 수 없었던 수법. 백 마리 뱀이 용도 물어 죽인다는 이름을 지닌 무시무시한 기술.

사교검(劍) 비식(백사교룡살(百蛇蛇龍)

마침내 그의 등짝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겨준 기술이 폭출되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무수한 살기의 회오리가 비류연을 휘감았다. 이번만큼은 그도 속수무책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친구의 대응은 실로 기민했다. 봉황무(鳳凰舞) 오의(奧義) 봉익비상(鳳翼飛上)의 수법으로 그는 세 번의 측면이동과 네 번에 걸친 상승이동을 통해 잔폭한 뱀의 아가리를 빠져나갔던 것이다. 뱀과 미꾸라지의 싸움은 미꾸라지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촤라라라락!

똬리를 풀었던 독사가 다시 원상태로 몸을 꼬았다.

사교검의 주인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앞의 세 사람 옆에 나란히 섰다.

“조심하게! 아직 셋이 더 남았네!”

장홍이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이들이 누군지 알아챘던 것이다.

휘리리리리릭!

장홍의 경고대로 상대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이이이이잉!

이번에는 뭔가 무거운 것이 허공을 갈랐다. 귀를 쫑긋거리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매우 묵직한 무게를 지닌 파괴적인 무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엔 또 뭘까??

위압감보다는 이제 호기심이 더 앞서는 비류연이었다.

‘저놈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이자들은 뭘까? 아직 셋이 더 남았다고??

이 연환공격(連環攻擊)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의 공격에 맥없이 당해 줄 수 없다고 그는 결론 내렸다.

이번에 날아온 무기는 일견에도 묵직해 보이는 추가 달린 쇠사슬이었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졌음에도 마치 생물처럼 기민했다. 어느새 다가온 갈색 무복의 사내가 보였다. 머리에는 백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두 눈은 호목을 연상케 하고 수염이 무척 거칠게 난 사내였다.

‘어라? 저건!’

비류연의 시선이 사내의 왼손으로 쏠렸다. 사내는 오른손을 민첩하게 움직이며 쇠사슬을 마치 요술처럼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었는데 그의 왼손에는 날이 시퍼렇 게 선 낫 철겸(鐵鎌)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사슬의 다른 한 끝은 그 낫의 자루 밑에 달린 고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비류연으로서는 처음 보는 무기였다. 그것이 저 ‘왜(倭)’라는 작은 섬나라 무사들이 사용하는 사슬낫이라는 무기임을 그는 알 수 없었다. 무기가 무엇인지는 중요 하지 않았다. 물론 알면 편하긴 하지만 비류연에게는 해당사항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저들의 무기는 대부분 긴 간격을 가지는 장거리용 무기였다. 하지만 거리나 속도, 변환에 있어 비뢰도보다 더 빠르고, 더 변화무쌍하고, 더 넓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비뢰문의 자존심이었다. 사부도 자신 있게 말했다.

‘어떤 장거리 무기도 우리 비뢰도의 움직임을 능가할 수 없다. 장거리 무기가 지닐 수 있는 그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그 무기의 거리와 간격을 읽어내는 것뿐이다. 공격방향이야 공기의 떨림과 직감으로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속도는 두말할 것도 없다. 비뢰도의 속도 에 익숙해지면 웬만한 것들은 그냥 굼벵이 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비류연은 앞의 네 공격을 생각 이상으로 수월하게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번째 사내에게는 또 다른 비장의 수법이 하나 있었다. 사슬의 모든 움직임을 수월하게 피해내면서 다소 방심하고 있던 비류연에게 그것은 의외의 복병이었다.

쉬익! 쉑!

좌수 철겸이 쾌속한 움직임으로 휘둘러지자 십자의 검기, 아니 겸기(氣)가 비류연을 향해 날아갔다. 이에 발맞춰 등뒤를 노리며 날아오던 사슬추가 어찌 된 조 화인지 부르르 떨리며 일곱 가닥의 분영(分影)을 그려냈다.

쐐쐐쐐쐐쐐쐐쐐엑!

비록 양손에 쥐고 있지만 한쪽을 제대로 다루기에도 벅찬 기문병기를 가지고 좌우 동시에 조화를 부리다니 놀라운 실력이었다.

앞에는 십자인의 겸기, 뒤에는 일곱 가닥 사슬추의 연쇄공격!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순간 비류연의 황금빛 시야가 다시 한번 열렸다. 그 안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비류연이 취한 방법은 정말 무식했다. 그는 그 자리에 붙박인 채 허리를 직각으로 뉘였다. 그리고 등판이 지면과 수평이 됨과 동시에 오른발을 이용해 날아 오던 십자겸기를 힘차게 차올렸다.

팡!

거의 자살행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이 행동이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그것도 즉효였다. 날아오던 십자인이 물수제비처럼 방향을 바꾸어 그의 가슴 저 위편을 쓸 고 지나갔다. 강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무모한 행위였다. 동시에 지면과 수평으로 뉘여 있는 그의 왼쪽 어깨가 비스듬히 들렸다.

쐐애애액!

그러자 그곳으로 첫 번째 사슬추가 지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오른쪽 어깨 위로 두 번째 추가 지나갔다. 비류연과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비류연이 왼손을 내리며 오른쪽 어깨를 들어올렸다.

쐐애애애액!

이번에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들려진 오른쪽 어깨 밑으로 세 번째 추영(鎚影)이, 반대로 내려진 왼쪽 어깨 위쪽으로 네 번째 추가 지나갔다. 그러나 다섯 번째 는 비류연의 대갈통을 정면으로 노리고 있어 어깨의 이동만으로는 그것을 피하기가 불가능했다.

비류연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살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현재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다섯 번째 추는 그의 뒷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 게 지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의 머리는 수박 깨지듯 산산조각났을 것이다.

쐐애액! 쐐애액!

여섯 번째 사슬추는 지면에 붙박여 있는 그의 왼쪽 다리를 노렸다. 비류연은 오른쪽을 축으로 왼쪽다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 다음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그 문제 의 오른쪽 정강이를 향해 마지막 일곱 번째 추가 날아왔다. 이미 들어올린 좌각을 내리고 다시 우각을 들어올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일곱 번째 추가 그의 우측 정강이를 박살내려는 순간 비류연은 또 한 번의 멋진 몸놀림을 선보였다. 그는 그냥 망설임 없이 우측 다리도 들어올려버렸다. 대신 그 는 양손을 이용해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바닥을 가볍게 밀어 몸을 뒤집은 뒤 아주 사뿐하게 일어섰다. 사슬추의 칠 연속공격은 십자인과 마찬가지로 모 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말로 설명하기에는 무척이나 긴 동작이었지만 이 세 가지 동작이 이루어진 시간은 일반인의 눈에는 불과 눈 한 번 깜빡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 안 비류연이 이 모든 동작을 가뿐하게 해낸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공격을 받아놓고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끝?”

이미 대공자 앞에 가서 선 사슬낫의 사내를 향해 비류연이 놀리듯 말했다. 사내의 우락부락한 얼굴은 꽤나 보기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윽!

그때 섭섭한 말 하지 말라는 듯 여섯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 공격은 요란무쌍하고 난폭파괴적이었던 앞의 다섯 공격과는 다르게 아주 조용하고 은밀했다. 허 공 중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얇고 가느다란 꼬챙이 같은 검은 비류연의 측신側쪽을 노리며 허깨비처럼 홀연히 나타났는데 어떠한 소리도 기척도 사전에 감지 되지 않았다. 흡사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검이었다. 그것은 무인의 검이 아니었다. 암살자의 검이었다. 그것도 특급 암살자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런 검이었다.

어지간한 수련을 거친 무인이라도 이런 의외의 일격에는 고기산적처럼 허파를 꿰뚫리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비류연은 달랐다. 암습은 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게 사문의 지론이었다. 그러므로 암습 따위에 당하는 것은 약한 자보다 더 약한 자라는 의미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게 사부의 말이었다. 그러니 암습 따위에 당하는 불명예를 입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단련도 충분히 받았다. 그는 수년에 걸쳐 사부의 예고 없는 암습으로부터 몸을 지켜내야만 했던 것이다.

초반에는 사부로부터 마구 희롱당하면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그 암습을 방비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벌어온 돈을 몽땅 삥 뜯기는 일도 번 번이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착취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술값이 부족한 날, 그날은 어김없이 사부의 암습이 있었다. 분명 자신이 암중 으로 추가수당, 업무 외 수당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돈을 지켜야만 했다. 이대로 계속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공에 매진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부에게 애걸복걸해봤자 효과도 없거니와 오히려 자존심만 상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방법은 오직 하나, 당하지 않을 만한 실력을 일신에 갖추는 것뿐이었다. 그가 사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게 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였다. 사부의 무자비한 암습에 비하면 이런 공격 따위는 날카롭기는 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류연은 일격필살을 노린 검을 종이 한 장 차로 배 위로 흘려보내며 곧바 로 허공 중에 몸을 숨긴 암살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런 지형지물 없이도 공기 중에 몸을 숨기는 그 은형술(隱形術)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것이었지만 비류연의 열린 눈에 걸리면 그 실체 따위는 금방 폭로되고 만다. 공기 저편에서 상대가 흠칫 놀라는 기색이 전해졌다. 그가 숨어 있는 것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짚어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류연이 손가락을 쭉 뻗었다. 그러자 상대는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하고 은신을 푼 다음 대공자 앞에 가서 나란히 섰다. 그는 스스로 암살자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얼굴을 검은 복면으로 가린 채 전신에 흑의경장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옷은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매듭이나 주름이 없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 하나 남았네!”

장홍이 신이 나서 외쳤다. 이들 일곱의 연환공격을 멀쩡히 받아낸다는 것은 천무학관의 사기를 높이고 반대로 마천각의 콧대를 뭉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터 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공격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교태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 실린 사나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수바늘이 알록달록한 오색 색실들을 달고 날아들었다. 마치 가지각색으로 물든 오색의 비처럼 보였다. 여인의 손에서 아름다운 문양들을 만들어내는 수 예 바늘에 서린 것치고는 너무나 매서운 살기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앞의 여섯 공격에 비하면 그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비류연은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자적한 태도로 오색 바늘비를 피했다. 앞의 여섯 명이 발휘했던 집요함은 보이지 않는 그런 공격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비류연으로서는 맥 빠지는 결과 가 아닐 수 없었다.

붉은 그림자가 도약하더니 대공자 앞으로 나비처럼 날아가 깃털처럼 사뿐히 섰다. 이 마지막 공격을 펼친 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풍만한 몸매가 두드러지게 강 조되는 붉은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서 있는 것만으로도 교태가 넘쳐흘렀다. 반면 얼굴은 다 보여주기 아깝다는 듯 연분홍빛 면사로 가렸지만, 그 드러난 두 눈 동자에서는 사내를 유혹하는 빛이 면면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강렬한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그녀의 최강공격은 조금 전의 투침수법이 아니라 바로 이 눈 빛 그 자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어떤 사내라도 그 눈빛을 받으면 뼈가 흐물흐물해지리라. 그것은 그러기 위해 훈련된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비류연은 어떨까? 나예린이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비류연은 덤덤하게 그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피하거나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받아넘기고 있었다. 솔직히 나예린으로서도 의외였다.

대공자를 호위하듯 둘러싼 일곱 명의 시선이 일제히 비류연을 향했다. 비류연은 건방진 자세로 그 시선들을 태연히 받아넘겼다.

그러자 이들 일곱 명은 아무런 감정 표현도 하지 않은 채 대공자를 향해 뒤로 돌아섰다. 그들에게는 그와 드잡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공자님!”

일곱 명이 일제히 공수(拱手)하며 깍듯이 인사했다. 대공자는 가볍게 끄덕이는 것만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저자가 바로 그 비밀에 싸인 실력자 대공자 비인가?”

장홍은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정보는 겹겹이 비밀로 둘러싸여 있어 한정된 몇 가지 정보 이외에는 그 실체를 알기가 어려 웠다. 오죽하면 이름 석자 대신 ‘비(秘)’라고 불리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하나하나가 구룡칠봉에 맞먹는 실력을 지닌 자들이 저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다니……. 마치 주인을 영접하는 하인들 같은 태도 였다.

“저 일곱, 소문은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그의 예리한 눈썰미는 저들 일곱의 태도에서 잠재적으로 풍겨나오는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의 기운을 놓치지 않고 감지해내고 있었다.

“대공자 비, 확실히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로군.’

장홍은 조용히 속으로 경계심을 발동시켰다.

조금 전까지의 살벌하고 어지러웠던 소란과는 정반대의 정적이 잠시 동안 주변을 장악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들 여덟 명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해 집중되었다. 아직 도 이들은 대공자 비에 대한 예를 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비류연의 눈에 좋게 비춰졌을 리가 만무했다.

짝짝짝짝!

그들 일곱의 등뒤에서 난데없이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이들 일곱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뒤를 향해 돌아갔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성질이라도 돋우고 싶은 건지 비류연은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재미있는 한 편의 경극이라도 관람한 관객 같은 태도였다. 상대의 복장을 효 과적으로 뒤집는 그런 행동이었다.

“재미있는 놀이였어요. 그런데 더 보여줄 것이 아직 남아 있나요?”

조금 전에 있었던 일련의 연환공격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 밑천이 다 떨어졌으면 얌전히 퇴장하라는 소리 같았다.

“발만 빠른 쥐새끼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검극편을 든 적흑색 무복의 사내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들 일곱 중 유일하게 무기가 봉쇄당하는 가장 큰 수모를 겪었기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말이 험한 아저씨로군요. 쯧쯧쯧! 세치 혀는 자멸의 씨앗이라는 옛 격언도 알지 못하다니 불쌍한 사람이로군요.”

비류연의 머릿속에 든 계산첩에 사내의 얼굴이 기록되었다.

“너의 발이 빠르고 몸놀림이 영활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번 공격에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느냐?”

창을 던졌던 두 번째 사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처 받았던 자존심은 이미 회복된 뒤였다. 아직 그들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이번에는 용케 피했다. 칭찬은 해주마. 하지만 다음에도 피할 수 있을까?”

이들은 아무래도 비류연에게 있는 건 빠른 발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비류연이 혀를 차며 딱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상대의 기량을 읽는 것도 실력! 읽어낸 기량을 제압하는 것 또한 실력!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은 오직 패자만이 할 수 있는 변명! 승자에게 구차한 말은 필요 치 않지요. 승자는 어떤 경우에도 승자일 뿐이니깐.”

그의 말은 청산유수와도 같이 도도했고, 또한 칼날처럼 날카롭고 인정사정없었다. 하지만 이 청산유수는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팍팍 입히는 묘용이 있었다. “이놈이 감히!”

그러나 이들의 즐겁고 피가 튈 정도로 발랄한 대화는 안타깝게도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한 여인의 등장 때문이었다.

“대공자!”

비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나예린 옆에서 은설란이 놀란 얼굴로 외쳤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무심하던 눈이 크게 떠졌다. 덕분에 감정이 메말라 있던 그의 목소리에도 감정의 편린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란(阿蘭)… 소저…….”

처음으로 대공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크게 흐트러졌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접한 돌발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왜 이곳에? 그리고 그전에 가지고 있던 의문은 납득이 되었다. 그토록 찾았는데도 종족이 묘연해 이상하게 여기던 터였다. 설마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가 놀 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처치는 과연 제대로 되었나?”

대공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급선무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한 번의 처치만으로는 금제가 완벽하다고 확신하기가 힘듭니다. 최소한 한 번은 더 이중으로 금제를 가해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어제 그녀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부하들이 무능하면 언제나 윗사람이 고생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무능해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능력껏 부릴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오랜만이군요, 대공자!”

다시 안정을 되찾아 원상태로 돌아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무정한 시선이 천천히 은설란을 향해 움직였다.

은설란은 이제 몇몇 금지를 제외하고는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통행의 자유를 허락받아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당장 천무봉을 내려가지 않고 당 분간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도 덤으로 받아놓은 터였다. 모든 것이 다 화음현에서 만났던 노인 덕분이었다. 그 노인이 힘써주지 않았다면 아마 당장 내쫓겼으 리라. 하지만 그 노인의 말에는 큰 힘이 있었는지 노인이 중간에서 몇 마디 해주자 별다른 무리 없이 이곳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심심함에 못 이겨 끼리끼리 밖으 로 나간 이들을 원망하던 그녀로서는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허락을 득해놓은 상태라 마음은 무척 가벼웠다. 조금 전에도 별 생각 없이 산책을 즐기기 위해 임시 숙소를 나섰던 터였다. 천무학관도들이 머무는 숙소에 가 보자 이미 나예린과 이진설은 나가고 없었다. 그녀들이 곡구 쪽에 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는 그 둘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산책은 역시 혼자보 다는 여럿이 하는 게 더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곡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 소란이 일어났다.

번천지복하는 굉음과 흉험한 살기가 한 지점에서 급격하게 소용돌이쳤다. 이십여 장 이상 동떨어져 있던 그녀에게도 그 난폭한 기운은 충분히 느껴졌다. 누가 감히 이런 곳에서 저런 소동을 일으킨단 말인가? 보통 배짱이 아니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이곳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고 있든가……. 그녀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러나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의아스런 만남이었다. “악!”

갑자기 머리가 깨어질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귀가 윙윙거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긴 현상이었다.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그녀의 몸이 휘청 거렸다. 그녀는 그로 인해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아직도 휴식이 더 필요한 건가??

심령금제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 었다. 그런 연후에야 그녀는 겨우 그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3년 만인가요?”

“정확히는 2년 10개월 만이오!”

대공자 비가 그녀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녀의 질문에 그는 간신히 천살의 처치가 일단 완벽함을 깨닫고 안심할 수 있었다. 만일 기억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면……. 당장 그녀의 존재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가 세우고 추진하고 있는 계획은 전면수정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제나 각을 떠나지 않던 분이 이곳엔 어쩐 연유로?”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그녀의 뇌리 한구석을 잠식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이번 참가자 중에 당신의 이름은 올라와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만?”

그는 그녀의 질문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오히려 되물었다.

“좀… 사정이 있어서요.”

자세한 자초지종은 생략한 채 그녀가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도 어찌 된 영문인지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데다가 상당 부분이 진실을 말해주기 곤란 한 것들로만 잔뜩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왠지 조금 전부터 알 수 없는 기운이 스멀스멀 머리로 올라와 정신을 갉아먹으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놀랍군요, 당신이 직접 나서다니……. 그런데 아직 그 이유는 듣지 못한 듯하군요.”

은설란의 놀라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칠팔 년 동안을 심산유곡에 몸을 위탁한 은자처럼 마천각 내에서 두문불출하던 사람이었다. 이번 화산지회에도 참가할 의사 가 전혀 없는 듯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참가를 종용했지만 그는 언제나 극구 사양했다. 그것은 겸양과는 달랐다. 그 사양의 이유가 실력부족 때문이 아니라 는 것을 은설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십 년 전의 그 사건…….’

그 사건은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마천각의 노사들과 장로들이 끈질기게 설득하고 회유해도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이었 다. 솔직히 의외였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의 파도 속에서 고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공자는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한 번쯤 이런 대회에서 우승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우승! 그는 그 어렵다는 화산규약지회의 우승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 태도는 여러 사람의 가슴에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나서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절대강자의 위 엄이라 부를 만한 기도 때문이었다.

‘그래, 저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할지도 몰라…….’

오히려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도 있었다.

하긴 그라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십 년 전 그 사람과 과연 동일인이라는 게 맞기는 맞는지 보면 볼 수록 놀랍기만 했다.

“그때는 그렇게 쾌활하고 명랑했었는데…….

그의 십 년 전 과거를 그녀는 누구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의미가 없소.”

대공자는 단칼에 그녀의 추억을 부정했다.

“그렇군요, 그건 이제 과거의 추억에 불과할 뿐이로군요. 결코 돌아오지 않는……..”

그때 곁에 있던 님은 이제 없는 것이다.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녀를 주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 하에 2년 10개월 만에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

“자네의 이름은?”

대공자 비가 꽤나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고 있던 비류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상대의 이름을 묻다니……. 측근들이 알면 아마 놀라 두세 번은 연속해서 까무러쳤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 비류연이 감격해주어야 할 의무는 절대 없었다.

“존성대명(尊姓大名)이겠지요.”

“지금 뭐라고 했나?”

“문자가 좀 어려웠나요? 존·성·대·명!”

물론 대공자가 문자를 못 알아들어 반문한 것은 아니었다.

“허어?”

이쯤 되면 대공자 비도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발칙한 놈! 죽고 싶어 용을 쓰는구나!”

채찍을 든 사내가 분노하며 외쳤다. 당장이라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 불같은 기세를 대공자가 저지했다.

“그만둬라! 됐다!”

그는 하늘을 찌르는 시건방짐에 대한 훈계보다 자신의 호기심을 우선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 묻는 것조차 황감한 자네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상대를 인식하려 하다니 대공자 비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비록 차가운 비아냥거림이 담긴 말이었지만 비류연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그런

사소한 것에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큰 그림을 놓치기 십상이다. 

“비·류·연!”

짧고 간단하고 또박또박하게 대답해주었다. 이 괴짜 청년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대는 데 거리낌이 없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주변에 반대 의견도 많겠지만…).

‘비류연??”

무정히 빛나던 두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번뜩였다. 확실히 들은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극히 최근, 바로 그제 오장도 채 안 되는 거리를 격해 들은 이름이었 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닌 자가 행한 짓은 그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호오? 자네가…….”

무의식중에 그가 오른손 주먹을 꽉 말아쥔다. 그날 놓친 먹잇감이 지금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얼거림은 너무 미약해 상대의 귀에까지 전달되 지는 못했다. 비류연이 되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아니, 없네! 하지만 그 이름 기억해두지!”

그의 앞을 둘러싼 일곱 명에게서 흠칫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관심을 표명한 게 뜻밖인 모양이다.

“그건 아주 훌륭한 태도로군요. 권장사항이에요!”

비류연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댁의 이름은 뭐죠? 남의 이름을 알아갔으면 자신의 이름도 내놓아야 하는 게 예법 아닌가요?”

그로서는 당연한 요구이자 권리였다. 그러나 그의 권리는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묵살되고 말았다.

“넌 아직 이분의 성함을 알 자격이 없다.”

검은 날개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회선인을 등에 찬 남자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에 금칠이라도 해놨나? 아니면 남들에게 알리기 부끄러운 이름이라도 돼요? 철수라든가 영희라든가?”

누가 들으면 길길이 날뛸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다. 그게 그의 무서운 점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분을 모욕하면 넌 죽는다!”

검은 날개의 남자가 다시 한번 말했다.

“자신 있으면 언제든지.”

그런 협박에 기죽으면 그건 이미 비류연이 아니었다. 그건 그의 탈을 쓴 다른 생물임이 분명하다.

츠츠츠츠츠츠츠!

다시 이들 사이 공간에 농후한 살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공기가 일촉즉발의 상태로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됐다! 그만 가자!”

대공자가 그들 일곱을 제지했다.

“하지만…, 대공자님!”

이들은 지금 당장 결판을 내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한 번 내려진 이상 절대가 되어야 했다. “비류연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은 소저를 봐서 이만 용서해주겠다. 가자!”

대공자가 먼저 움직이자 그제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마천칠걸도 뒤따라 움직였다. 아직 불만이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음, 근거 희박한 은혜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데…….”

비류연은 끝까지 발칙했다.

“오늘 구사일생한 줄 알아라!”

“죽다 살았구나!”

그들은 마지막 한마디를 쏘아붙여주는 걸 잊지 않았다.

은설란은 멍한 눈으로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잘나신 분들은 싫단 말이야……..”

비류연이 짧게 투덜거렸다.

“괜찮아요, 류연?”

나예린이 물었다. 질문하는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런 안부를 물어보았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보시는 대로 말짱해요!”

가벼운 손짓으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건 그렇고…….”

비류연이 시선을 돌려 멀어져가는 대공자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곱 명의 남녀가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다. 임금을 섬기는 시종 시녀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다양하고 성대한 인사라 어떻게 화답해야 할지 고민이군요.”

가려진 머리카락 뒤에서 별의 창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그 눈을 눈치 챈 사람은 나예린 정도뿐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인과응보, 자업자득은 언제나 그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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