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4화 –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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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4화 – 눈을 뜨다

눈을 뜨다

-개안(開眼)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꺼풀이 떨어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밝아진다. 그리고 하늘의 끝을 향해 비상하는 대붕의 시야처럼 점점 더 확장되어간다.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 다.

눈이 떠졌다.

타인이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경험이나 느낌, 그리고 감각을 조악한 언어를 빌려 전달하고자 하는 데는 한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언어 란 가장 불성실한 진리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로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는 어려워도 그런 경지와 그런 사실이 있다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지금 비류연이 체험하고 있는 세계도 바로 그런 ‘불형용(不形容)’의 세계다. 일부의 선택된 자들만이 진입을 허락받는 초인의 경지. 바로 그 경지에 지금 비류연은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은 지금 그런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가 점점 더 광활해지고 심원해진다. 넓고 깊어진 시야를 통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비류연을 향해 밀려든다. 눈이 먼저 열려 이 과도한 정보를 수용하지 못해 미쳐버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정보들을 수용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통찰한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넘어 우주로 뛰어들 것 같고, 고개를 숙이면 무릎 아래로 날아가는 밤 벌레의 날갯짓 횟수까지 보이는 듯하다. 마치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하고,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을 것만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그를 감싸안았다.

상대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는 게 보인다. 모든 것이 정지화상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시선이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그 손끝으로부터 펼쳐질 초식의 투로가 마치 빛나는 별의 궤적처럼 선명하게 빛난다. 미세하게 빛나는 하얀 거미줄의 군무(群舞)가 정지된 세계를 가득 메운다. 상대의 몸속에 내재된 힘이 뻗어나가고자 하는 방향들이 한데 어우러져 화려한 만다라(曼茶羅)를 그린다. 이때 그릇이 작은 일반인의 뇌라면 이 정보를 접하는 것 만으로도 용량초과로 미쳐버릴 위험이 있다.

그 선이 아무리 거미줄같이 세밀하고 빽빽하다 해도 일단 보이게 되면 투로가 예측 가능해진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들과 만나면 이 어지러운 세선들이 무리를 이 루어 자신의 몸을 침범한다. 그럴 경우 이 ‘휘선(線)’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이 필요하다. 보는 것만으로는 현상에 대해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신비스런 만다라 문양이 얼마나 빽빽하고 정밀한가에 따라 상대의 무공 능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순간 그림자는 본능적인 불쾌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치욕스럽게도 사냥꾼에게 노려지는 야생동물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자신이 상대 앞에 발가벗고 선 듯한 적나라한 느낌이 들었다.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치욕을 안겨준 이를 살려두기엔 그 죄가 너무 깊다. 그러므로 저자는 소멸되어야 마땅했다. 이 세계에서!

들어올린 팔을 향해 몰려드는 흉험한 기운. 결코 만만치 않은 압박. 사방을 조여오는 공기. 빛을 잃고 광명에서 어둠으로 달아나는 하늘. 검게 벼려진 암흑의 칼날 이 어둠의 장막을 뚫고 공간을 넘어 살기를 토해냈다.

이번 일초식은 매우매우 위험하니 백성 여러분은 위험반경에서 신속히 대피해주십시오, 라고 고래고래 외치고 있기라도 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비류연의 눈은 어둠을 격해, 덤으로 철의 장벽처럼 버티고 있는 머리카락의 장막마저 뚫고 그 움직임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이윽고 그 손이 정점에 이른 순간! 팟!

폭포수의 물줄기가 백장 단애에서 떨어져내리는 듯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 손이 낙하했다.

스팟스팟스파파파팟! 콰콰콰콰콰……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 같은 굉음이 밤하늘에 울려퍼진다. 밤의 공기가 뒤틀리고 용틀임하며 진동했다. 살기와 날카로운 암경의 파도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칼날 수천 개가 일시에 몰려드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파랑이었다. 그 안에는 인간 하나 따위는 코웃음 치며 분쇄해버릴 듯한 거력이 담겨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빛의 궤적들이 비류연의 몸을 투과하며 무수히 그어져 있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것들이 보였다.

이럴 경우 자살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이 궤적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리한 살기를 품은 죽음의 칼날이 어 김없이 그의 몸뚱이를 난도질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류연은 자살 지망자가 아니었다. 더욱이 타살 선호도도 매우 낮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빛의 궤적 위에서 몸을 미리 빼냈다.

보통 때라면 그걸로 이미 끝났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가 틀렸다.

“흡!”

비류연의 입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기함이 터져나왔다.

‘변화했다!’

빛보다 빠른 속도의 사고를 통해 비류연은 깨달았다. 거미줄처럼 공간 가득히 펼쳐져 있던 광휘의 궤적이 순식간에 그 위치를 바꾼 것이다. 바뀐 그 궤적은 다시 한번 비류연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궤적의 선로를 타고 무수한 살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치 번개가 내달리는 듯한 빠름이었다.

‘젠장’이라고 욕할 틈도 없이 살기의 파도가 그의 몸을 덮쳤다.

시간 부족으로 욕지거리를 생략하고 비류연은 그 죽음의 선로 위에서 신형을 화급히 빼냈다. 그러나 조금 늦은 것 같다. 생각보다 상대의 공격이 쾌속했던 것이 다.

의복이 돌풍에 찢긴 것처럼 너덜해지고 가슴 부위가 순간 화끈해졌다.

없다!

사라졌다!

대공자 비는 어느새 이 공터 안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미 그의 주변은 고요하게 내려앉은 적막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히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수천 수만 번의 단련을 거친 손이 그곳에 있다. 실패를 알지 못했던 무소불위의 권능을 지녔던 손이었다. 

“얕았나…….”

분명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치명상이 아니었다.

‘설마 진짜 살아남을 줄이야…….?

자신의 실패가 납득되지 않는다.

‘도대체 뭐였지? 마지막의 그 움직임은?”

마치 허공에서 연기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소실(消失)되어버렸던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시야 안에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노출되었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나의 오의 중 하나인 <영뢰影천잔>의 수법을 이렇게 짧은 거리에서 맞닥뜨리고도 피해내다니…….’

류연이라고 했던가……. 무의식중에 흘러나왔던 그 이름, 확실히 기억해두었다.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때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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