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4권 8화 – 잿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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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4권 8화 – 잿더미

잿더미

“쳇, 이미 늦었나!”

•구척철심안 안명후는 혀를 차며 주위의 경물(景物)들을 둘러보았다.

황량하다. 공허하다. 그리고 시커멓다.

지금 그가 이 풍경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깡그리 재가 되어 사방에 흩날리고 있는데 그가 그 이상 어떤 감정을 더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 그가 공허함 이외에도 느끼는 감정이 하나 더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안 감찰관님, 각 방들을 모조리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나온 게 없습니다.”

방이라고 해봤자 시커멓게 탄 대들보와 토벽 몇 개만 간신히 남아 있는 흔적일 뿐이다. 달려온 부관 이명의 보고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분 통이 터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하긴 그렇게 시원요란스럽게 싸그리 타버렸으니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전소된 장원의 애꿎은 잔해를 발로 차며 그는 투덜거렸다.

정천맹 섬서지부 특급 감찰조사관! 그것이 바로 그가 지닌 직함이었다.

“쳇, 지부에서 ‘특급 급쾌’의 붉은 서신을 받고 뭣 빠지게 달려왔건만 이미 늦었다는 건가…….

한 마리의 전서응이 날아듦과 동시에 울려퍼진 비상소집 종! 그가 섬서지부에 배치된 이후 처음 날아든 ‘적홍첩(赤紅帖)’이었다.

급히 부대를 편성해 밤을 도와 달려왔건만 그가 본 것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화마(火魔)의 불길과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우왕좌왕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수백 명의 인간 군상들뿐이었다. 그들로서는 손가락 빨며 불구경이나 하면서 헛물만 켜는 게 고작이었다.

현장은 너무나 깨끗하고 대담하게 홀라당 타버리고 그 위에 남은 건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넓게 퍼질러진 잿더미뿐이었다.

‘서신을 받자마자 가장 빠른 쾌속마만을 골라 바꿔 타며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이미 드러난 꼬리는 가차없이 잘라버린다는 건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고 신속한 판단력이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를 본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전서응으로 정기적인 연락은 가능했지만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통로나 비밀 창고 같은 것도 아직 찾지 못했나?”

“탐색조가 지금 건물 전체를 이 잡듯 뒤지고 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결과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대장님께서 나서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내 차례까지 돌아오는 건가?”

얼굴에 싫은 티가 역력했다.

“송구스럽습니다.”

부관이 재빨리 사과한다. 그들의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다면 상관까지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인 터였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미안해 하면 튕긴 사람이 오히려 무안 해져버린다.

“됐네, 됐어! 무림맹의 녹을 먹는 이상 밥값을 해야겠지. 사실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깐 말일세. 하지만 다음에는 내 차례까지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 도 유능한 부하들을 데리고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거든!”

“면목 없습니다.”

안명후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섬서성 관할 감찰조사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어떤 특수한 능력 덕분이었다. 그 능력이야말로 그의 존재 가치 그 자체 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어디 한번 밥값을 해볼까나…….”

그가 허리춤에서 꺼낸 것은 굵기가 손가락 하나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철봉이었다. 그러나…….

팟!

촤라라라락!

그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그것은 이미 봉이 아니라 길이가 ‘구척’에 달하는 기다란 철침’으로 변해 있었다.

“자, 어디 한번 가볼까!”

그는 유람이라도 하듯 거닐며 철침을 땅속에 찔러 넣었다.

슉! 슈욱! 푹! 푹!

마치 솜뭉치라도 찌르는 듯 철침이 땅을 파고들었다. 바닥이 물컹물컹한 늪지대라 할지라도 이렇게 쉽게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자갈 부스러기에… 모래인가……. 이 근처는 별거 없구만.”

부관 이명이 그 뒤를 따르며 눈을 빛냈다.

구척철침영시탐사법(九尺鐵針靈視探査法)

지관(地

언제 봐도 놀라운 기술이라고 이명은 감탄했다. 단지 철침을 찔러 넣는 것만이 아니다. 찔러 넣었다 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상관은 자신이 밟고 있는 밑에 무엇이 있는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훤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명후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철침 끝에 달린 눈 같다 해서 ‘구척철심안(九鐵審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아홉 척 길이의 묵빛 철 침이야말로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해준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정천맹에 자리잡지 않았다면 누구보다 훌륭한(?) 전문 도굴꾼이 되었을 것이라는 게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일 만큼 그의 능력은 빼어났다. 슝슝슝!

안명후의 구척철침 앞에 속수무책인 것은 흙으로 다져진 지면만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그을려져 있던 돌로 만들어진 벽들도 검은 철침이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말랑 말랑한 두부라도 되는 양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볍게 구멍이 슝슝 뚫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멍 주위에 미세하게라도 금이 간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는 이 일들이 마치 아무런 힘도 들일 필요 없는 것처럼 손쉬워 보였다. 그의 공력이 얼마나 고절(高絶)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척철침영시탐사법(九尺鐵針靈視探査法)

석투관石透

돌로 된 벽이나 바닥을 뚫고 지나가 그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술이었다.

“이거 완전히 기관장치의 소굴이었구만!”

철침 하나로 돌들을 꿰뚫어보던 안명후는 여기저기에서 그 잔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방화가 혼란을 도왔다 해도 그 많던 인원이 개방과 맹의 이목을 속이고 모조리 잠적할 수는 없었을 터! 분명 어딘가에 흔적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온 현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일어난 지 이제 겨우 사흘째였다. 보고서에 적힌 그 인원들이 전부 증거까지 인멸하고 몸을 숨기기에는 필시 시간이 부족했을 터! 아직 찾아내지 못한 비밀통로가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그 통로가 아직까지 뚫려 있을 거라는 안이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용의주도한 놈들에게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바란다는 것은 과욕이라는 것을 그 는 경험상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보다는 다른 곳에서부터 엉켜진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보고에 의하면 뭔가 대용량의 화물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다고 한다. 아직 그 내용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고는 어 딘가로 이동되었고…….”

그 화물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지금 그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라고 그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땅을 갈아엎고 건물을 모조리 때려 부수는 일이 있더라도 찾아내게! 이대로는 면목이 서지 않아!”

“알겠습니다.”

“중원표국을 한번 조사해봐야 하나? 하지만 역시 뒤가 구린 물건을 여봐란 듯이 운반해오지는 않았겠지.”

가장 골치 아픈 것은 표국과 의뢰인 간에 맺어지는 상호비밀보장계약이었다. 의뢰인이 원할 경우에만 특별히 추가되는 계약이지만 이 정도로 뒤가 구린 물건이면 당연히 체결했을 것이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 간에 표국에 있어 비밀보장 계약을 한 의뢰인과 표물에 대한 신용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무림맹의 권위를 앞 세운다 해도 쉽사리 들려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그 중원표국이라면 더 말해서 무엇 하랴.

“골치 아프구만…..”

강호제일 표국으로 이름 드높은 중원표국. 녹록한 상대일 리가 없었다.

틱!

안명후가 그 감촉을 느낀 것은 철침을 들고 약 반 시진째 사방팔방을 후비고 다니고 있을 때였다. 구척침을 통해 희미하게 전달되어온 그것은 무척이나 순간적인

감촉이었다. 하지만 오랜 단련을 통해 기민해져 있던 그의 감각은 그 짧고 미세한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 구척철침이 박혀 있는 곳은 이 장원의 옛날 창고터로부터 약 오장 정도 떨어진 으슥한 풀숲이었다. 짜릿한 전율이 그의 척추를 타고 정수리를 향해 내달렸다. 이 정도 감이면 틀림없다 해도 좋았다. “찾았다!”

안명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개폐장치는 친절하게도 망가져 있었다. 부하들을 동원해 거의 반 시진 동안 삽질을 한 다음에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부는 모두 거대한 석재를 쌓아 만든 석실이었다. 솜씨가 정교한 것이 평범한 장인의 솜씨가 아니었다.

“뭐! 예상한 대로군!”

기대했던 대로 석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안이 넓었다. 이제 이 텅 빈 석실 안에 그들이 남겨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개코를 불러오게!”

그가 명령했다.

그는 무척 키가 작은 왜소한 체구의 사람이었다. 반면 그 자그마한 얼굴에 비해 코가 무척이나 크고 길었다. 콧구멍도 남들의 세 배는 족히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 는 이름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사내가 되었다.

“어떤가, 개코? 좋은 냄새라도 맡았나?”

코를 벌름벌름거리며 석실 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개코 왕견에게 안명후가 재촉하듯 물었다.

킁킁킁!

상관의 질문을 개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후각이 발달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청각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안명후는 더 이상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상관의 말이 귓구멍에 박히지 않을 정도로 지금 그가 어떤 냄새에 집중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명후는 정천맹 섬서지부에서 누구보다도 그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를 믿기 때문에 항상 유용하게 부릴 수 있었다. 개코 또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상관이 싫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안명후가 가는 곳에는 항상 개코 왕견이 따라붙었다.

먼지 한 올 남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남기고 간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물에 배어 있는 냄새……. 이 개코라 불리는 남자는 보통 사람의 후각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냄새까지 잡아내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즉 냄새까지 모조리 지워냈다고 생각하는 장소에서도 그는 미량으로 남겨진 냄새의 흔적을 찾아낸다.

“…….”

“뭔가?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보게!”

다시 한번 재촉한다.

“감찰관님! 요즘 정말 그 유화기방의 고 총관이 너무 돈을 밝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만 보면 잡아먹으려 듭니다그려.”

조사를 하다 말고 내뱉은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안명후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번에 깨달았다. 요컨대 외상값이 밀려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능구렁이가…….?

보통이라면 근무태도 불량이나 상관명령 불복종으로 치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웃어넘겼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한 터라 이 정도 얍삽한 짓 쯤은 그냥 웃어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오직 두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였다.

“알았네, 알았어! 그러기에 내가 매향(梅香)이 품 좀 작작 찾으라 하지 않았던가! 구리 동전 한 문까지 몽땅 털어다 바칠 셈인가?”

“헤헤헤…, 죄송하게 됐습니다!”

개코가 실없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그가 지금 금전부족에 직면한 주요한 이유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향이 중 한 명 때문인 모양이 었다. 매향이라 하면 기방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애칭 중 하나였다.

“자네의 공적을 알려 상여금을 받도록 해주겠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보게!”

“감찰관님만 믿겠습니다, 헤헤헤!”

“아따, 빨랑빨랑 이야기해보게. 내가 안달복달하다가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러나?”

그제야 왕견은 자신이 살펴본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실없이 쪼개던 그의 눈에도 어느새 예리한 안광이 도사리고 있었다.

“독특한 냄새가 납니다.”

순간 안명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호오? 그것 참 흥미 있는 소식이로군. 무슨 냄새인가?”

독특하지 않았다면 평소 행동대로 무슨 냄새인지를 먼저 말했을 것이다. 이만큼 뜸을 들인다는 것은 분명 뭔가 있기는 있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뒤처리가 완벽해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일단 ‘그’ 냄새가 곳곳에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

그러자 개코가 다가와 그의 귀에 뭐라고 속닥거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뭔가? 그 냄새야 어디서나 나는 것 아닌가?”

그 정도 가지고 호들갑을 떨다니! 별로 탐탁치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개코의 표정은 진지 그 자체였다.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는 전문가의 긍지가 가득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실망의 잔재가 이 말 한마디를 기화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반인들이 쓰는 물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순도가 높은 것 같습니다.”

“흐흠…….”

순도가 높다. 그것은 그만큼 그 물품이 고급품이며, 또한 제조하기도 구하기도 어렵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마리가 부족했다.

“그것 말고는 없나?”

“이건 확신할 수 없지만…….”

“뭔가? 뭐든지 망설이지 말고 말해보게!”

“사실은..

개코가 다시 한번 그의 귓가로 바짝 다가가더니 뭔가를 소곤거렸다. 남들이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될 만큼 비밀스런 이야기라도 있는 걸까? 소곤대는 그의 이야기를 듣던 안명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게 사실인가?”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이 정도 수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격동이 얼굴에 떠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이야기를 들었음을 뜻한다.

“아마도 틀림없을 겁니다.”

“그것은 아무리 대단한 세가라 해도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그러니 더욱 수상한 것이겠지요.”

“그런 위험천만한 물건이 왜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이곳을 가득 채울 정도의 양이라니……. 이 녀석들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그러나 그 관측이 가장 가능성이 낮은 것이었다.

“역시 능구렁이 돈 귀신들을 조사해봐야 하나…….”

하지만 중원표국이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님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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