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자의 신위
섬서지부 감찰조사관 안명후가 잿더미 위에 엉덩이를 깐 채 혀를 끌끌 차며 있을 때, 한 명의 사내가 천무봉의 외진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얼음을 깎아놓은 것처럼 수려한 얼굴, 깊이를 알 수 없는 예리하게 빛나는 무정한 두 눈동자, 딱 벌어진 어깨, 패기 넘치는 당당한 발걸음. 전신에 비범함이 넘쳐흐 르는 이 사내는 바로 대공자 비였다. 그가 지금 홀로 걷고 있는 이곳은 얼마 전 비류연을 비롯한 천무학관 대표단들이 걸어간 적이 있는 길로, 바로 세 개의 관문으 로 통하는 그 길이었다.
“젊은이, 이런 황벽(荒僻 : 황량하고 거칠다)한 곳에 무슨 용무인가?”
양팔에 짚고 있는 목발이 유난히 눈에 띄는 노인이 비를 불러세워 물었다. 바로 첫 번째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 비공답운 종쾌였다
“물론 시험을 치러 왔습니다.”
대공자 비가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종쾌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지금 영업시간이 끝난 이후에 음식점의 정문을 두드리는 손님을 바라보는 주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정하게 영업시간 끝났으니 당장 돌아가시오!’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시험이라…, 자네 어디 출신인가?”
“마천각입니다.”
길이라도 잃었나? 아니면 오는 도중에 낙오라도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종쾌도 강호의 풍진 속에 굴러먹은 경력 이 녹록치 않은지라 보는 눈은 제대로 박혀 있었다.
한눈에 척 봐도 풍겨나오는 저 기백과 제어하고 있지만 충실히 갈무리된 역량. 아무리 화산지회에 참가하는 길이 험하다 해도 중도에 낙오할 만한 그런 인물은 아 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이미 두 곳 사람들이 모두 관문을 통과해 올라갔다는 것을 모르나?”
“물론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도 혼자 이곳까지 왔다?!”
종쾌가 의혹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원하는 것이 있어서지요.”
“원하는 것?”
“이곳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지요. 그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말은 즉……?”
바로 맞췄다는 뜻으로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치르고 싶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싶다고?”
종쾌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예!”
대공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종쾌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나? 마천각 제자들은 예전에 이미 이곳을 통과했다네. 자네의 소속이 마천각이기는 하나 그 자리에 동행하지 않았던 자네의 화산지회 참가를 인정해줄 순 없네.”
이런 곳에서 예외를 만들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자 비가 말했다.
“잘못 들으셨군요. 전 시험을 치르겠다고 했지 화산지회에 참가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노골적으로 빛내며 종쾌가 그를 쏘아보았다.
“같은 이야기 아닌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대화를 너무 어려운 방식으로 대화한다면서 노인은 투덜거렸다.
“전혀 다르지요. 전 합법적인 자격으로 시험을 치르겠다는 것이니까요.”
“뭐, 뭐라고!”
“분명 참가자의 입산 기한은 내일까지로 알고 있습니다. 학관에서 추천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정된 시일 안에 시험을 칠 수 있다는 게 원래의 규칙이 아니었
던가요? 꼭 동행이 있을 필요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몰려다니게 된 것 또한 그동안 있어왔던 정체불명의 습격에 대한 고육지책(苦肉之 策)이었던 거 같은데요.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요.”
종쾌가 놀란 시선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자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그도 관문의 문지기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입장인 이상 규칙 정도는 숙지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문서상에 남아 있는 규칙은 그러했던 것이다.
“자네는 지금 자네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것은 일개인 혼자의 힘으로 세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라네. 50여 명이 있었으면서 도 간신히 통과했던 그 관문을 말일세.”
노인의 말로 미루어보아 마천각 대표단들도 이 세 관문 앞에서 무척이나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가 그런 초보적인 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섰을 리가 없다. “올해부터는 그 관문도 바뀌었네. 예전같이 시시한 관문이 아니야. 자네는 그 사실도 알고 있었나?”
“그건 모르고 있었군요.”
대답과는 달리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멸겁삼관(滅劫三關)이라고 하지. 백 년 전 천하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천겁혈신이 남긴 과거의 그림자와 싸워야만 하는 관문이라네.”
그러면서 종쾌는 이 멸겁삼관에 얽힌 전대의 비사를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그에게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노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내의 수려한 얼굴에 나타난 그것은 공포나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아직까지 그런 곳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런데도 자네는 지금 이 시험을 혈혈단신(子子單身) 혼자의 몸으로 치르겠다는 건가?”
“혼자뿐이니 혼자 쳐야지요.”
“허허. 고작 그 이유 때문에? 그럴 바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오는 게 훨씬 이득이었을 텐데?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란 것이 있는 법이지요. 어떤 관문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무엇도 저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방금 전 그 이야기를 들었더니 더더욱 도전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지는군요.”
“허허, 참으로 광오한 젊은이로군. 하나 자네가 범상치 않은 인재라는 것은 노부도 인정하겠네.”
“별말씀을.”
“좋네, 멸겁일관의 시험관 자격으로 자네에게 관문 도전에 임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겠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종쾌는 일개인에 의한 단독돌파, 그것이 가능하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혈기방장한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정중하고 정제된 태도. 종쾌는 아까 전부터 그의 마음 한쪽 구석을 콕콕 자극하는 어떤 위화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 었다.
“이보게, 젊은이. 백 살을 넘긴 노인네의 지나친 참견일지 모르겠지만 충고 하나 해줘도 되겠나?”
“말씀하시지요.”
“젊은이! 자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칼날은 너무나도 비정할 정도로 차갑고, 그 누구의 접근도 거부할 정도로 날카롭군.”
“전 누가 저에게 접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군, 이상해!”
종쾌가 풀리지 않는 의문의 실타래를 한 아름 떠안은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자네의 말이 이상하다는 이야기일세.”
“제가 무슨 무례한 언사라도 행하였습니까?”
억양의 고저는 없지만 여전히 정중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종쾌의 얼굴은 점점 더 미궁 속에 빠진 사람처럼 찌푸려졌다. 백수(白壽)를 넘기고도 정정한 노인이 찌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대공자 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종쾌는 순간 망설였지만 그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속내를 내뱉었다.
“…너무 정중해!”
“그것이 지금 불쾌하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인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내 비록 백 살 넘은 노물이지만 그 정도로 괴팍하진 않다네. 하지만 불쾌하진 않아도 생선가시라도 목에 걸린 것 같은 의아스런 점이 남 아 있긴 하지. 원인불명의 찝찝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니었다. 그처럼 약간 지겨워질 정도까지 오래 살다보면 세월의 연륜 속에서 생성되는 노인 특유의 직감이라는 것이 발달하게 마 련이다. 이 직감은 상당히 적중률이 높기 때문에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상합니까? 예의가 뭔지 모를 정도로 불경스럽다면 모를까 예의 바른 언사가 남의 의혹을 살 만큼 문제시될 일은 아니라고 여겨지는군요.”
여전히 감정의 때가 묻어나오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비가 대답했다. 그러자 종쾌가 정색하며 진지한 얼굴로 지적했다.
“바로 그 점일세! 자네의 정중한 말 속에서 만인을 부려본 자의 위엄이 느껴지네. 자네는 대체 뭘 하는 자인가?”
노인의 질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백전연마된 냉철함으로 온몸을 감싼 청년을 순간 동요시킬 만큼 날카로웠다. 그러나 잔잔한 호수 위에 인 잔물결 같은 동요는 순식간이었다. 곧 청년의 마음은 다시 거울처럼 맑고 깨끗해졌다.
“그저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평범한 마천각 대표단의 한 명일 뿐입니다.”
일말의 신용도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인 게로군. 좋네! 이 늙은이는 단순한 문지기일 뿐 자네의 신분을 물을 자격은 되지 못하네.”
종쾌의 말에 대공자 비가 짧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자네의 실력을 한번 볼까?”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종쾌가 말했다.
“첫 번째 관문인 천간(天劫) 혈신일보(血神步)’, 통과 방법은 방금 말한 그대로일세. 자네 혼자 이 천겁의 그림자를 뚫을 자신이 있는가?”
“노선배께서는 “자네 걸을 수 있는가?’, ‘자네 혹시 숨을 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굳이 답을 하십니까?”
광오할 정도의 자신감. 하지만 그가 말하자 그것은 전혀 자만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극히 지극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대공자도 한 가지 간과한 사실 이 있었다.
“물론일세! 난 확실하게 대답해주네. 다리로는 걷지 못한다고.”
종쾌가 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아차’ 했다.
“그렇군요! 제가 실수를 범했군요.”
그렇다.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종쾌의 두 다리는 백 년 전 잘려나간 채 아직까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신 이렇게 대답해주지. 다리로는 걷지 못하지만 그 대신 손으로는 걸을 수 있다고 말일세. 나의 처지는 이러나 자네가 한 말의 의미는 잘 알겠네. 그럼 무운(武運)을 비네!”
순간 그의 신형이 움직였다. 대공자 비는 말로 하는 대답 대신 직접 몸으로 그 대답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질풍 같은 바람이 불어와 종쾌의 몸을 때렸다.
“이, 이럴 수가…….?
비공답운 종쾌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백수(白壽)를 넘기고도 한참을 더 살았더니 만년에 노안이라도 온 것 아닐까? 솔직히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약관 나이의 젊은이가 보일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아니었다.
‘새, 새를 바, 발판으로 사용하지도 않고 단숨에 저 거리를 뛰어넘다니? 정녕 인간의 능력이란 말인가?’
제일 관문 천겁간은 너무나 어이없게 한 사내의 발걸음에 의해 무릎을 꿇었다. 그가 비조처럼 벼랑을 가를 때 쭈뼛하게 선 솜털과 오싹하게 돋은 오돌토돌한 소름 이 아직도 찌릿한 여운을 남긴 채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세 번이나 신형을 튕기다니. 그것은 허공답보(虛空踏步)라 불러 마땅한 경공의 최상승 경지였다.
그런데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사람은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멸겁이관을 지키고 있던 도제(帝) 용경의도 눈을 접시처럼 크게 뜬 채 놀라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느닷없는 방문객이 남긴 거미줄같이 빽빽한 도흔이 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깊고 선명했으며, 흔적 하나하나에 예리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가, 가공할 도법이다!’
백 년 이상 가슴속에 도를 품고 살아온 그가 타인의 도법을 보고 감탄하기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석처럼 단단하다는 흑요석을 두부처럼 자르는 도기. 아니, 그것은 도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도강(刀刀)임이 틀림없었다.
누에가 실을 뽑듯, 풀려진 실타래처럼 무수한 줄기를 이루며 뻗어가는 도강이라니……. 도제라 불리며 백 년 동안 도의(刀意)에 대해 참고(慘考)했던 그로서도 전 율이 흐를 정도로 무서운 경지였다.
“설마 진짜로 삼 관문까지 단독으로 돌파?”
그렇다면 그것은 초유의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설마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멸겁삼관을 지키던 마지막 보루였던 검치劍
예외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시체처럼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이 사람마저도 동그랗게 부릅뜬 운명도 눈으로 경악해버렸으니 앞의 두 사람도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독한 사검(劍)이로구나!’
검치 섭운명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말라비틀어진 한 송이 야생화를 바라보았다. 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대지로부터 양분을 전달해주는 뿌리와 줄기에서 떨어진 지 족히 수 삼일은 지났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전 한 사내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휘두른 일 검에 줄기부터 베인 이름 없는 꽃이었다.
꽃을 줄기부터 깔끔하게 베는 기술이야 검을 든 자가 조금만 배웠다면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베어진 꽃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고 말라비틀어지게 할 수 있 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연의 생명을 압도할 정도의 지극한 살기, 사내의 검에는 그것이 있었다.
“수라(修羅)의 검인가…….”
일검이 휘둘러진 순간 그의 신경을 자극하던 그 모골 송연한 살기를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라 불러 마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검이 품은 살기는 검치 섭운명이라는 검의 고수를 상대의 검권(劍圈) 밖으로 무의식중에 물러서게 할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이 있었다. 섭운명은 그 살기에 화들짝 놀라서 본능적으로 사내의 간격 밖으로 벗어났던 것이다.
검의 대선배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그 검기에 서린 살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인물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자였다.”
아직도 꽉 쥐어진 손아귀에 찬 축축한 땀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저 젊은 나이에 그런 초절한 공부를 이루는 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검치는 멍한 눈으로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으로 멸겁삼관을 단독 돌파한 대공자 비의 고절한 능력을 확인한 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화산지회에서 번천지복(天天地覆)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저자의 행보를 막기란 쉽지 않겠구나!”
세 사람 모두 이미 그가 우승자라도 된 것처럼 확고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