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스스로 자신의 정의를 배반한 꼴이 된다.
스스로도 믿어주질 않는 자신을 누가 믿어준단 말인가?
자신을 포기하는 자는 가장 먼저 하늘에 버림받고 만다.
믿어라! 나를 믿어라!
그동안 쌓아왔던 땀과 길러왔던 힘을 믿어라.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난에게 불가능은 없다.
나는 바람보다 빠르다. 나는 빛보다 빠르다.
나의 몸은 빛보다 빠르게 시간을 가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저편에 ‘지금’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나’이다!
그 순간,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삼종삼금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을 일곱 번 놓아주었다가 일곱 번 다시 잡다.
“크아아아악!”
또 하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리는 소리가 일풍(風)의 고막을 때렸다. 단속적으로 울려퍼지던 단말마의 잔떨림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눈물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시야조차도 공포로 점철된 이 절망적인 상황을 감춰주지는 못했다. 눈알을 뽑고 고막을 찢는 편이 차라리 행복 할지도 몰랐다.
속수무책(束手無策)!
이보다 더 현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이것으로 도대체 몇 번째일까?
서른…? 마흔…? 아니면… 쉰?
세는 것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세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이제는 백에서 하나만 빼주면 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간단한 역산(逆算)이지만 그 안에 든 생명의 무게는 감당 키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전의(戰意)라는 사치스런 감정은 이미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탁월한 효능으로 전의를 불태워주던 증오와 분노도 미증유의 공포 앞에서는 한 톨의 작은 먼 지보다도 무의미했다. 검끝은 지면을 향하고, 시선은 하늘을 향한다.
저벅 저벅!
사신의 발걸음에 낙엽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일풍의 귀에는 마치 영혼의 잎새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시시각각 죽음의 신이 다가오는데도 그는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아흔아홉 명의 희생을 대가로 그는 마침내 저항의 무의미함을 깨달았 던 것이다.
‘눈이 마주쳤다??
스걱!
무릎 아래쪽이 불로 지진 듯 화끈해졌다.
66741″
비명마저 끊고 신음마저 삼켜버리게 만드는 미증유의 고통이 무릎을 기점으로 사지(四肢)와 전신을 향해 내달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육신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는 작동하지 않았다. 작동은커녕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스르륵.
일풍의 몸이 대지 위로 무너졌다.
철퍽.
남자는 자신의 피 위에 몸을 뉘였다.
사내가 마지막이었다. 그는 최후의 대적자였다. 이 남자를 끝으로 이제 대지 위에 두 발로 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이곳에 지옥의 풍경을 조성한 조 경사, 은빛 가면의 사신을 제외하고는…….
‘그’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수십 구의 시체가 대지 여기저기에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다. 사지가 성하게 붙어 있는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떨어져나간 육체의 절단면에서 꾸역꾸역 흘 러나오는 붉은 피가 한데 모여 수십 개의 지류를 거느린 거대한 강이 되었다.
후각을 마비시키는 농밀한 피비린내,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어오르게 하는 널브러진 내장 조각들. 마치 지옥을 현세에 옮겨놓은 듯 처참하고 참혹한 광경 이었다. 그러나 은가면 뒤에 감추어진 그의 두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의 파편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수없이 보아왔고, 수없이 만들어왔던 광경이었다. 새삼 하나 가 더 추가된다 해서 특별할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이 수라도도, 지금 밟고 서 있는 이 지옥의 풍경도 그에게는 그저 무의미하고 따분한 일상일 뿐이었다.
“인간…, 인간이… 아냐……! 인간이…….”
널브러진 시체더미 사이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며 신음을 토해낸다. 피웅덩이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피가 엉겨붙은 머리가 눈을 찔렀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두 개의 다리 무릎 아래는 완전히 휑하게 비어 있다. 일풍이었다.
“저자는…, 저자는… 진정 악마의 화신이란 말인가…….”
보이지 않는 신기루라도 쫓는 듯, 허공이라도 움켜쥐려는 듯 남자는 그자, 곧 이 사태의 주범인 자를 향해 힘겹게 오른손을 뻗어본다.
“쿨럭!”
한 바가지의 선혈이 일풍의 입을 통해 외부로 쏟아져나왔다. 퀭한 두 눈은 이미 혈관이 파열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새빨갛게 충혈된 상태다. 귀신의 눈도 이보 다 더 처절할 수는 없으리라.
“부인…, 취야…….”
오른쪽 손목에 감겨 있는 부적 주머니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십 년 전, 대를 이어 사문에 입문한 아들이 자랑스럽게 활짝 웃으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그러면서 아들은 실없는 소리도 한마디 잊지 않았다.
“아버님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우리 무당파의 부적은 효력이 끝내줍니다. 태상노군과 장삼봉(張三峰) 태시조님’의 영험이 반드시 아버님의 생명을 지켜줄 겁니 다.”
지금은 장성해 젊은 인재들 사이에서도 검재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아들이었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10살배기 귀염둥이일 뿐이었다.
“취야…….”
그로부터 십 년…, 그동안 수많은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주며 그 영험함을 자랑했건만. 아무래도 이 부적의 효력에는 유통 기한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한에 한정이 있는 줄 알았으면 여분으로 하나 더 사달라고 조를 걸 그랬나…….?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맺히고, 넘쳐흐른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진다.
파르르르르!
비통한 울분에 뻗고 있던 오른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그 손은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에 흙범벅, 피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다.
“이… 괴물 같은 놈…….”
과도한 출혈 탓에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눈에 비친 상이 돌 던진 호수면처럼 흔들렸다.
스스로 정의롭다면, 스스로가 바르고 올곧다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 생각했다.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나 안일했다.
정의가 없는 힘의 행사는 폭력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정의 또한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역부족(不足)!
그 말이, 그 사실이 지금 그렇게 원통할 수가 없었다.
“이 앞은… 이 앞으로는… 절대 보내줄 수…….”
저 멀리 보이는, 영원히 뒤를 쫓아도 움켜쥘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그자의 얼굴이 잠시 이쪽을 향했다. 강대한 힘의 주인…….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을까? 순간 ‘그’의 손이 잠시 흔들렸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빛이 점멸했다.
팟!
미간에 느껴지는 화끈한 감촉과 동시에 칠흑 같은 어둠이 그를 덮쳤다.
‘취야…, 부디 검의 지존(至尊)이 되어라…….’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는 마지막 염원을 불어넣어 하늘로 올려보냈다.
툭!
둔탁한 울림과 동시에 상처투성이의 고깃덩이 하나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그 안에 생명은 남아 있지 않았다.
쩌억!
비단 주머니가 갈라지며 산산조각 난 노란 종잇조각이 무정한 바람에 날려 허공중에 흩어졌다.
백인대를 결성해 철궤를 지키던 낙안봉(落雁峯) 최후의 저지선, 무당검객 무적검 공손일풍의 최후였다.
“오는가!”
낙안봉봉우리 한곳에 불쑥 돋아난 암석 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를 주시하고 있던 미청년이 나직이 뇌까렸다. 조용한, 하지만 각오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여자인가, 아니면 남자인가?
백옥을 깎아놓은 듯한 가녀린 얼굴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수에 잠긴 검은 눈동자, 가느다란 허리, 길고 얄따란 팔과 섬세한 손가락……. 날렵하다기보다는 연약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언뜻 훑어봐서는 열이면 열, 여자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파리 한 마리나 제대로 죽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무척이나 약해 보이는 인상인지라 그의 허리에 매인 한 자루의 청색 검과 적색 도가 무척이나 어색했다. 그러나 장식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갈무리된 그 신 기(神氣)가 범상치 않았다.
이 수려한 용모의 청년은 적홍색 불꽃과 청백색의 얼음이 한데 뒤섞인 듯한 특이한 색상의 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은 청옥(靑
玉)을 갈아 얼음 위에 뿌린 것처럼 신비스런 은청색이었다.
미청년의 등뒤에는 당당한 풍채를 지닌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서 있었는데 흑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하는 머리칼을 지닌 그의 눈에는 사자의 용맹함이, 전신에는 들 끓는 투기가 끊임없이 샘솟고 있었다.
무척이나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때가 왔군!”
흑사자를 연상시키는 청년의 말에는 강한 의지와 과거의 맹세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눈이 다시 산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미청년의 가녀린 어깨를 향했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약해 보이는 등. 하지만 저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겉모습에 속 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만행이리니……. 저 약해빠진 겉모습에 속아 까불대다 큰 대가를 치른 이들이 얼마나 되던가? 계산 불가능이 된 건 이 미 오래전, 강가의 모래알을 세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아마 구대문파의 장문인 아홉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맹의 바보들은 그걸 모른다. 아마 안다 해도 눈과 귀를 틀어막고 인정 하려 들지 않으리라.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놈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뭐? 자신들은 항상 강호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데 그런 궤변 믿을 수 있을까보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다니…….”
노력은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놈들은 안전한 곳에 앉아 몇몇 추종자들이 보내주는 광기에 안주하며 입과 혀로만 강호의 미래를 떠든다.
그 바보들 때문에 강호가 지금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이다.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저 연약해 보이는 등의 주인에 비하면 그놈들은 쓰레기다. 구더기보다 못한 존재 인 것이다.
“괴롭군!”
씁쓸한 고소를 감추지 않은 얼굴로 린이 뇌까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산 아래에 고정된 채였다.
“괴로워? 뭐가 말인가?”
입에 풀잎 하나를 잘근잘근 문 채 흑사자 혁이 되물었다.
린의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말일세! 자신을 과대포장할 수 없다는 게 이번만큼은 무척이나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신을 직시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약한 태도는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사나운 맹수의 눈을 지닌 청년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흥, 현실도피 능력 따위 가지고 있어봤자 어따 쓰겠나! 미몽의 안개에 휩싸인 채 착각 속에 살아봤자 냉엄한 현실은 변하지 않아!”
싸늘할 정도로 가차없는 독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후후, 미안하군. 내 사과함세!”
린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비굴한 기색은 없었다.
혁 또한 애초부터 그것이 빈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조가 너무나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의 화를 부추긴 것이다.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 용기 있는 자만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벽을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거라네.”
이 세상에는 벽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수두룩 빽빽하다는 것을 이 미장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과장되게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구, 에구… 무림의 미래라.. 그 무게가 어지간해야지 말일세. 신경통, 요통, 어깨 관절염이 동시에 찾아올까 저어되는군!” 그 너스레에 혁도 고개를 꾸벅 끄덕였다.
“동감일세! 정사가 힘을 모아 만든 세 관문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통과하다니……. 역시 괴물은 괴물인가…….?
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쳇, 우리 차례가 오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부질없는 기원이었던 모양이야. 젠장!”
아직 수백 장은 족히 떨어져 있을 ‘그’의 존재감을 온몸의 피부가 들썩이고 일어날 정도로 확연히 감응(感應)할 수 있었다.
“확실히 자기 자신의 능력을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괴롭군. 특히 그 능력이 상대에 미치지 못함을 알아버릴 때는 말이야!”
혁도 그것이 비하가 아닌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진실 앞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세! 자신의 분수를 알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신념을 걸고 싸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 기일세! 그전에는 용기가 아니라 ‘무모’이자 ‘만용’일 따름이지.”
그 만용이란 것을 부리지 않기 위해, 그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한 지난 일 년. 마침내 그 비장의 성과를 선보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 년이라…, 길었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영겁처럼 기나긴 시간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자네… 잊지 않았군.”
한참을 침묵하던 혁의 입이 다시 열렸다. 린의 검은 눈동자에 칼날 같은 기광이 번뜩였다.
“물론! 그 치욕스런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뇌를 도려내 차가운 얼음물 속에 헹구는 것만으로 그 기억을 지울 수가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리하고 싶을 정도라네! 그 기억을, 그 치욕을 지울 수만 있다면 말일세!”
둘도 없는 호적수이자 생명을 나눈 전우이기도 한 두 사람의 눈이 한 지점에서 마주쳤다. 아직도 그들은 가슴속에 불꽃의 낙인처럼 선명하게 찍힌 그때의 치욕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년 전.
삼백 명의 적들에게 포위당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잔향처럼 남아 있는 그때의 공포가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되살아났다.
이 년 전…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 입가에 흐르는 선혈, 여기저기 찢어진 옷, 그 밑에 보이는 푸르고 붉은 상처. 거짓말로라도 멀쩡하다 할 수 없는 두 청년을 ‘그는 지긋한 눈빛으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그’의 상의 가슴팍은 대각선으로 길게 갈라져 있었는데 그 안으로 언뜻 얇고 가느다란 붉은 선이 보였다.
‘그’의 오른손 손가락 하나가 붉은 선 위를 감별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훑고 지나간다. 은가면 밑으로 드러난 그의 입꼬리 한쪽이 천천히 위로 말려올라갔다.
“믿겨지지 않는군! 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침몰 직전의 폐선이나 다름없는 강호에 아직도 그만한 인재가 남아 있었나?”
‘그’는 분노하기보다 유쾌해 하고 있는 듯했다. 깊디깊은 무저갱에서 발원하여 무수한 반향을 일으키며 올라온 듯한 독특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피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또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잘 배웠군, 잘 배웠어! 너희들의 실력과 잠재력은 지금까 지 내가 만나왔던 어떤 무인들보다도 뛰어나다!”
‘그’로서는 최대의 찬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가 만나왔다는 무인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은 그의 휘하에 들어간 이를 제 외하고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곧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상대에게 칭찬 따위를 들어봤자 조롱 이상으로 인식되지도 않 는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금생의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이 기쁨, 자손 대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빌어먹을!”
철그렁!
철쇄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죽여라!”
사자 같은 눈을 부라리며 혁이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늘어뜨린 그의 두 손에 들린, 핏빛 도신을 지닌 쌍도는 수많은 피를 부르던 마도(魔刀) 굉천도(轟天 刀)였지만 지금은 그 흉포함을 잃고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의 몸은 지옥의 야수처럼 두꺼운 묵빛 쇠사슬로 팔방 여덟 가닥으로 칭칭 휘감겨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군. 포승(捕繩)만으로는 자네들의 움직임을 봉할 자신이 없어서 말일세!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썼네. 좀 무겁고 불편하더라도 참아주기 바라네!”
‘그가 친절하게도 양해를 구했다. 가지고 노는 건가……. 혁은 어금니를 으드득 씹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과 함께 사로잡히고 만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 다.
“미안하네, 린! 자네가 만들어준 기회를 살리지 못했네! 실패야!”
깊은 후회가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저자의 몸에 상처를 입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는 있네! 게다가 잘못은 나의 미숙함에 있네. 내가 좀더 제대로 된 기회를 만들어주었다면.. 생명을 걸지 못했던 나의 못남이야!”
린도 혁보다 나은 점은 없었다. 신비로울 정도로 독특했던 적청 혼성의 무복도 지금은 너덜너덜해져 거적때기보다 더 나을 게 없었다. 하지만 낭패한 그 모습도 그 의 수려함을 완전히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미청년의 눈은 아직도 격렬한 투쟁 의지로 끝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의지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쇠사슬에 전신이 속박된 작금에도 그는 좌검 빙루(氷淚)와 우도 홍염(焰)만은 꽉 움켜쥔 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의지 표현인지도 모른다.
‘분하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러나 다음번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기회였다. 너무 자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도 못했다. 린은 자신의 입술을 짓씹으며 분루를 삼켰다. ‘그때 복부를 향해 날아오는 일격을 피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받아냈더라면… 그랬다면 그 일격이 내 내장을 헤집는 동안 혁이 좀더 확실한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 르는데…….”
그러나 가정만으로는 현재를 바꿀 수 없다. 지나간 시간은 신의 입김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졌다. 완패였다.
패자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 하지만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어깨에 걸린 희망이 자신들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진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
다. 그러나 이미 발버둥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함께 왔던 정예 기습 별동대 백 명이 모두 죽고, 지금 남은 것은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전우들의 시체를 밟고, 삼백 자루의 도산검림에 포위당 한 채 그 삼백 명을 합친 것보다 무서운 존재와 맞닥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생로를 찾는 것은 구차하고 무의미할 뿐이었다.
스윽!
그때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려 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죽음과 피를 주관하는 사신에게도 가끔 호기심이란 생소한 감정이 드문드문 나타나곤 하는 모양이다.
“너…….”
그가 궁금한 것은 딱 하나였다.
“여자냐?”
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귀도 틀어막고 싶었지만 손이 요 모양인지라 아쉽게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곧 천붕지열(天崩地裂)할 듯한 소리가 터져나 왔다.
맹수의 포효보다도 더 사나운 외침이었다.
“갈(曷)! 여, 여자라니! 난 남자요! 보고도 모르시오? 당신의 눈은 장식품이오? 내가 어딜 봐서 여자로 보인단 말이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린이 고함쳤다. 혁은 고막이 얼얼했다.
‘쩝, 이럴 줄 알고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건데…….’
그러나 그는 그렇게 아쉬워할 찰나의 시간조차도 누릴 수 없었다. 사지가 속박된 것도 잊은 채 린은 ‘그’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어어어!”
철그렁! 철그렁! 촤라라락!
린을 봉쇄하는 여섯 가닥의 쇠사슬을 들고 있던 수하 여섯 명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지이이익!
제동하기 위해 저항한 발이 지면을 파고들어가 깊은 고랑이 패였다. 저 연약해 보이는 몸에서 뿜어져나온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역시 남자였나? 그건… 좀 아깝군!”
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하마터면 처한 처지도 잊고 그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고 불길한 것이었다. 만일 동의했다가는 저승길이 꽤나 고달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 시력이 멀쩡한 사람 눈에도 모든 면에 걸쳐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잠시 자신의 처지도 잊고 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또 어떻단 말이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신은 여자라 해서 사정 봐주는 법이 없다고 알고 있소. 빨리 죽이시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 겨우 그 정도 도발에 마음의 평정을 잃다니. 그러고도 무인이라 할 수 있겠나? 검을 익히는 가장 기본적인 요결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그… 그건..
린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변했다.
부동심(不動心)!
검을 수련하는 사람 중 이 요결을 모르는 이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이 사이에 존재하는 천지지간(天地之間)의 차이를 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는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 정도를 키워내느라고 무림도 많이 고생했겠군. 마지막 비장의 한수로 너희들을 내보낸 것 같은데 실패했으니 어쩌지?”
그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맹의 늙은 너구리들이 아닌 최대의 난적인 ‘그’라는 것은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흠…, 이 일을 어쩌면 좋다지?”
‘그’가 매우 곤란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죽음의 선고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 자는 아직 그 둘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혁이 발끈했다.
“빌어먹을! 모욕은 받지 않겠다. 빨리 죽여라. 뭐가 그리 솰라솰라 말이 많으냐!”
죽음은 감내할 수 있어도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희롱당하느니 깨끗이 죽는 게 나았다.
“성질 한번 급하구나. 그러니 채 다 익지도 않은 반숙(半熟) 무인인 채로 무모하게 덤벼들지. 그렇게 죽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다만 빠르 고 느림만이 그 사이에 존재할 뿐……. 현재 너희들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심판관은 나다. 내가 생존을 택하면 죽으려 해도 살 것이요, 말살을 택한다면 살려 해도 죽을 것이다.”
이게 정말 그 피의 악명을 떨치는 그 혈신(神)의 모습이란 말인가? 직접 대면하고 보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좀더 우락부락하고 온몸이 상처로 덮여 있는, 전
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피에 굶주린 야수와 같은 그런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그것이 혁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백은(銀)의 가면(假面)과 그 안에서 빛나는 무시무시하게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눈동자뿐. “그렇게 죽고 싶은가?”
그가 오른손을 들자 그 손끝으로부터 눈부신 백광이 뿜어져나왔다. 수강의 일종인 듯했다.
“죽여라!”
더 이상 구차해지기는 싫었다. 혁과 린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휘익!
백은의 가면 밑에 자리한 입이 미소를 그림과 동시에 그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화라라라락!
혁과 린, 두 사람의 머리가 질풍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그들의 몸을 봉쇄하고 있던 철쇄가 썩은 새끼줄처럼 토막토막 잘려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 다.
잠시 후 혁과 린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한순간 어리둥절해 하던 그 둘은 이윽고 자신의 몸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그제야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철쇄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악몽 같은 쇠사슬도 그의 손 아래에서는 수수깡보다도 못한 듯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힘인가…….’
은은한 묵빛이 도는 저 광택으로 미루어보아 이 철쇄들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묵강(墨鋼)으로 만든 것이리라. 어린애 손사래 같은 동작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과연 ‘하늘의 겁난’이라 불리며 살아 있는 육신의 몸으로 공포와 죽음의 대명사가 된 존재다웠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오?”
혁은 다시 찾은, 아니 다시 돌려받은 자유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저 약간의 변덕일 뿐이다. 이번 기습은 안타까웠다. 기습의 생명은 속도, 그리고 은밀함에 있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개개인의 무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좀더 안개처럼 은밀한 가운데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도록 해라. 이번처럼 쉽게 발각돼서야 흥이 깨지고 말지! 어렵사리 얻은 장난감인 데 쉽게 부술 수야 없지 않겠나?”
그는 웃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웃음. 악마가 미소를 짓는다면 저런 웃음이리라. 혁과 린은 오한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술래잡기를 하자. 칠종칠금이라 했던가? 아마 제갈공명의 고사였지? 앞으로 나는 너희들을 세 번 놓아줄 것이다. 싫어도 할 수 없다. 나는 승자고 너희는 패자다. 고금을 막론하고 규칙은 승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규칙을 정하는 것은 나다. 패자는 승자가 정한 규칙에 반할 수 없다. 세 번 놓아주는 동안 발버둥치고 또 발버둥쳐봐라. 세 번 놓아줬는데 세 번 다 잡히면 그때 너희들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
“주군! 주군의 생명을 노린 자들입니다. 그냥 보내셔서는 안 됩니다.”
포위망을 유지하던 무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이 삼백 포위망을 지휘하고 있던 암뢰대 대장 암뢰(暗雷)였다. 혁과 린, 두 사람을 쏘아보는 그의 눈에는 원독의 빛 이 가득하다. 길게 사선으로 새겨진 도흔. 아직도 타는 듯한 고통이 그의 전신을 엄습하고 있었다. 마치 불에 지져진 듯한 참격(斬擊)의 흔적. 바로 린의 우도 홍염이 남긴 작품이었다.
“항명은 듣지 않겠다, 암뢰! 내가 누구냐?”
그 위엄서린 눈빛을 받은 암뢰는 즉시 그 자리에 오체복지했다.
“강호의 법이자 신이십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 법을 거역하고자 하느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군!”
장내가 싸늘해지면서 침묵에 휩싸였다. 더 이상의 항명 역시 나오지 않았다. 이들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뭔지를 잘 알았다.
“가라! 발버둥치는 자여! 다음에 만났을 때는 좀더 나를 즐겁게 해주기를 기대하겠다.”
자결하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지만 두 사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직은…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짊어진 책무가 남아 있었다.
“우릴 놓아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기대하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이 마지막 목소리를 두 사람은 마음속에 새기고 결코 잊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내 영혼과 생명을 불사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 입에서 이 일에 대해 후회하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말리라!’
두 사람은 하늘에 두고 그렇게 맹세했다.
어처구니없는 우스개 농지거리일지도 모르지만 자신들을 단련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천겁혈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 술래잡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이렇게까지 강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으리라. 왜 냐하면 그들은 이미 이 년 전에 한번 죽은 목숨이었기에.
적의 값싼 동정으로 연명한 목숨이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다. 아까울 것은 없었다.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살이 짓물러지고 뼈가 깎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고진감래하며 수행을 쌓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날씨가 더워도 추워도, 맑아도 흐려도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었다.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적이 있었다.
강하게, 더욱 더 강하게!
눈앞에 거대한 벽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벽을 넘지 못하면 치욕 속에서 죽을 뿐이었다. 다른 도리? 제2의 선택?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그 벽만 을 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생명을 건 대가로 마침내 한 가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보게, 린(璘)!”
낙안봉 정상,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난 혁이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태극신협(太極神俠) 혁월린, 통칭 린.
훤칠한 키에 눈부시게 빛나는 은청색 머리카락이 눈에 확 띄는 미장부. 그러나 그의 어깨와 등뒤에서 뿜어져나오는 기백과 풍채는 미숙한 자에게서나 심심찮게 발 견되곤 하는 얄팍한 ‘겉멋이 결코 아니었다.
“응? 왜 그러나?”
린은 대답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그는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의 그 미모로 인해 많은 오해와 사건을 불러일으켰던 전적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 앞에서는 어떤 특정 단어를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지금은 그래도 많이 누그러진 편이다).
“그건… 완성했나?”
흑사자의 조심스런 물음에 린이라 불린 청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산 아래를 주시하고 있는 두 눈은 허공에 못박히기라도 한 듯 단단히 한 지점을 향 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힘이 존재했다. 잠시 저항에 부딪쳤던 그 힘은 마지막 방해물을 가볍게 제거하고 유유자적하게 이쪽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다급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간신히! 아슬아슬했지. 혁, 자네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되묻는다. 흑사자를 연상케 하는 청년 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일세. 그걸 완성하지 못하면 승산이란 있을 수 없고,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걸? 이미 죽은 목숨 아닌가? 개죽음이지. 살려고 발버둥쳤더니 불가능해 보 이던 것들도 가능해지더군. 흐흐흐,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벌레들…인가…….”
혁이라 불린 청년의 목소리에는 자조의 빛이 가득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걸 완성함으로써 우린 겨우 일 할의 승률을 손에 넣은 것일세!”
이 일 할에 무림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이다.
“일 할이라……. 전무보다는 대략 희망적인 관측이로구먼. 전 무림의 운명을 등에 지고 싸워야 하다니……. 허리에 너무 부담 가서 못쓰겠어. 두 번 다시 하고 싶 지 않은 싸움이야. 게다가 맹의 바보들은 우리의 이런 노고를 전혀 몰라주겠지!”
“전적으로 동감일세! 하지만 그 바보님들이 몰라준다 해도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 아닌가! 그 사람들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세상에는 신뢰할 만한 가치도 있지만 절대 맹신해서는 안 되는 무가치한 것도 있다.
“건곤일월합벽.”
יין
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드디어 해냈군, 린!”
혁의 목소리는 채 가시지 않은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간당간당했지!”
“드디어 ‘미몽(迷夢)의 벽(壁)’을 뛰어넘은 건가? 축하하네! 이런 때라서 미안하지만 말이야.”
사신의 음험흉악한 손짓에 생명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피를 머금은 대지가 오열하고, 대기가 비명을 지른다. 짙은 혈향이 산에 부는 바람을 좀먹고 있었다. 확실히 좋은 때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혁,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린이 말했다.
“뭔가?”
이 친구가 부탁이란 말을 입에 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만일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죽고 자네가 살아남는다면 나의 깨달음과 ‘나의 마지막 오의’가 끊기지 않도록 해주게! 오늘 이 자리에서 패한다면 ‘그것’조차도 그 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긴 하네만 내 마지막 심득을 소실시키고 싶지는 않네.”
혁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시끄러워! 재수없는 소리 ‘하덜덜’ 말게! 적을 말살하고 내가 살아남을 때야말로 진정한 승리야. 그 외에는 무참한 패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사납게 내뱉었지만 속으로는 혁도 그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반대의 경우 역시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자신이 죽고 린이 살아남았을 경우, 자 신의 ‘최종오의(最終奧義)’를 후대에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친구뿐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벽을 뛰어넘은 자만이 벽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벽을 넘지 못한 자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우물 밖을 이야기해도 이해시킬 수 있 을 리가 만무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비전(秘傳)’의 단절을 막기 위해서는 함께 장벽 너머의 세계를 본,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 다고 인정하고 있는 눈앞의 친구가 필요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엄청 재수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말일세.. 남자 주제에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말도 없이 수줍음 타기에 알기만 하고 절대 가까 이 지내진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는데 말이야……. 뭐, 지금도 그때보다 더 재수 있어진 건 아니지만…….
과거에 대한 혁의 고백은 신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린도 지지 않았다. 경쟁심에라도 불탄 걸까?
“누가 할 소리! 후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머리카락은 꼭 닭피 뒤집어쓴 것처럼 검붉은 데다가 인상은 산도적처럼 우락부락한 게 머릿속에 근육만 꽉 찬 열혈 바보로만 보였지.”
훗, 하고 웃으며 린이 말했다. 조금 전의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능글능글한 목소리였다.
“뭐라고? 감히 본좌에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품었단 말인가? 어허, 시건방지구나.”
“사돈 남 말 하기는! 수줍다니? 자넨 눈이 삐었나?”
그때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두 사람이 지금은 서로에게 생명을 의탁한 둘도 없는 전우가 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처럼 인상을 일그러뜨렸던 두 사람의 얼굴은 ‘픽’ 하는 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하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과거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만한, 그리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생명과 명예와 긍지를 맡긴 전우 였다.
“맹세하세.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남는다 해도 절대 두 비전의 맥이 끊기지 않게 하겠다고! 그리고 나머지 사람의 몫까지 강호의 미래를 위해 힘쓰겠다고! 개 인이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전 무림을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혁월린, 그는 일신의 안위보다도 전 무림의 안녕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 드높은 의기 앞에는 거칠기만 한 갈중혁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나의 애도 굉천도와 내 몸에 흐르는 붉은 피에 걸고 맹세하지!”
혁이 호기롭게 외치며 이에 호응했다.
두 사람은 맹약의 증표로 서로의 오의(義)가 적힌 두루마리 형태의 비급을 교환했다. 자신의 긍지이자 생명이나 다름없는 무공비급을 교환했다는 것은 친구에 게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이윽고 혁이 맹세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바다가 넘치고 강물이 말라도 내 생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이 약속은 지켜질 것이네! 명왕(冥王)의 권세도 이 맹 세를 깨뜨리지는 못할 것일세!”
“고맙네, 친구!”
둘은 진정한 친구였다.
쓸쓸한 눈으로 달을 바라보며 노인은 한숨을 지었다. 허름한 회의를 걸친 그 사람은 바로 혁 노야였다. 흑사자의 갈기 같던 머리카락도 지금은 잿빛으로 바뀌었고, 하나뿐인 영혼의 친우는 지금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치사한 친구 같으니라고. 남한테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자기 혼자 도망가다니……?”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수(哀愁)가 어려 있었다.
“혼자 짊어질 만한 게 아녀.”
무림의 미래. 그것은 감히 양(量)으로 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망할 친구 같으니라고…….”
그 짐을 나눠 질 수 있었던 유일한 지기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 사실이 그의 공백을 더 크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골칫덩어리 유품도 두 개씩이나! 크으으으, 귀찮은 유언 하나에 골 썩이는 유품이 둘이라……. 정말 밑지는 장사가 아닐 수 없구먼!”
입으로는 연신 투덜투덜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그리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노인은 다시 기운을 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달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려온다.
밝은 밤이다.
아직 할일은 잔뜩 남아 있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갈 수밖에 없다.
“자! 그럼 친구 녀석과의 약속을 지키러 가볼까! 분명… 저쪽이었지?”
한곳으로 방향을 잡은 노인은 망설이지 않고 그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음…, 그 빨강 파랑 두 녀석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이놈도 저놈도 난감무쌍한 녀석들뿐이다. 정말 곤란한 사질(師姪)들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휘도 가을 밤하늘에 걸린 만월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의 호수 위에서 일렁이는 창백한 둥근 달의 형상은 때때로 사람의 어두운 심연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은 단지 마음의 약함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 뿐일까?
숨기고 싶은, 잊어버리고 싶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순간이 월광의 거울을 통해 투영된다.
어둠 너머의 존재를 확신도 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친구에게 맡기고 등을 돌리다니……. 아무리 은설란을 구한다는 명목이 있었다 해도 그는 아직 자신을 완전히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전혀 승산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비류연의 몸 안에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 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 어둠 너머의 존재는 너무나 강대했다. 비류연에게 뒤를 맡긴 그것이 도박이었음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만일 그가 살아 돌 아오지 않았다면? 모용휘는 아마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그는 이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게 하고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한 수치심. 만일 비류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신도 은설란도 그날 그들을 덮은 달빛이 생애 마지막 달빛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들의 두 눈동자에 여명(黎明) 이 담겨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석양은 물론이고…..
은설란을 지킬 수 없었다. 친구를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그러고도 무슨 백도 제일의 검재인가?”
비참했다. 허탈했다.
“이대로는 안 돼! 더욱 강해져야만 해!’
달빛의 거울이 과거의 그때로 자신을 끌고 간다. 그때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은설란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시 달빛이 미끄러지는 그녀의 얼굴은 뽀얀 백진주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련한 마음에 숨이 막혀왔었다. 그때의 그 느낌을 모용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모용휘는 자신이 바라보는 하늘과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 두고 맹세했다.
“난 강해진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모용휘는 달을 향해 힘차게 소리쳤다.
짝짝짝짝!
그때 아무도 없어야 옳을 그의 등뒤에서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것은 느닷없이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누구냐?”라고 외쳐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의가 깍듯한 이 청년은 그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다.
관목들의 그림자 사이로 한 사람의 인영이 걸어나왔다. 안력을 돋우자 그 형체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 인영은 놀랍게도 노인이었다. 게다가 보통 노인이 아니었 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정천이 손자 하나는 잘 두었군. 사내라면 응당 그 정도 의기는 있어야지!”
유쾌한 목소리로 모용휘를 격찬한 불청객은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혁 노야라고 소개했던 정체불명의 노인. 이 노인을 상대할 때면 얼음 같은 빙검도, 불같은 염도도 깍듯한 공경의 자세로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고 했으니 필시 내력이 있는 고인이 분명했다.
“아, 노 선배님이셨군요.”
언제나 예의바른 모용휘가 서둘러 포권하며 예를 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치밀어올랐다.
이 노인이 이 야심한 시각에 이 한적한 곳까지 웬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정천이라니? 이 부분에서는 아무리 예의바른 모용휘라도 약간의 불쾌감과 황당함을 동시
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맥상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하늘처럼 존경해 마지않는 조부 모용정천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했다. 천무삼성의 한 명인 검성을 어린애 부르듯 하다니? 그런데
도 노인은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 노인의 정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곳까지 어인 일로……?”
모용휘가 물었다. 그러나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질문에 다 대답이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자네는 한 인간의 몸으로 음양이기를 동시에 다루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질문에 대한 질문. 그러나 둘 사이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었다.
모용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가능하겠지요, 일단은!”
““일단은’이라……. 호오? 이유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노인이 되물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분이 계셨으니까요!”
백 년 전, 인간의 육신을 입고도 음양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그 힘으로 무림을 위기에서 구한 구성(星) 무신(武神) 태극신군(太極神君) 혁월린. 그러나 이후 그것을 체현하는 데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존재는 본질에 선행하는 법. 고금을 통틀어 무신 혁월린이 유일하다 해도 그 역시 인간의 몸인 이상 음양이기의 합일이 가능함을 직접 증명해준 것이나 다 름없었다.
“자네의 말도 어느 관점에서는 정답이로군. 하지만 노부가 원하는 답은 아닐세!”
“그럼?”
“자네 혹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 들어봤나?”
“어디 다녀오십니까, 노야?”
어슬렁어슬렁 숙소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혁중을 향해 염도가 물었다. 그도 아직 잠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라, 빨강 머리? 자네 아직 안 자고 있었나?”
그 별명을 입에 담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같이 날뛰었겠지만 이 노인에게만은 아무리 불타는 개차반 염도라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예, 잠이 안 와서 잠시 달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에게 그런 풍류가 있었나? 좀 믿겨지지 않는구먼.”
노인이 너무나 솔직하게 말했다. 염도는 조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야심한 밤에 외출을..
ܕ܂
“잠시 산책 좀 다녀왔네. 구애(求愛)를 할 일이 있었거든.”
“구애…라뇨?”
염도는 표정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그래, 구애! 근데… 차였네!”
염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퇴짜 맞은 겁니까?”
노인이 아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인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즐거워 죽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바로 그렇다네. 자신 있었는데 말이야, 보기 좋게 퇴짜 맞아버렸다네. 으하하하하.”
달빛에 물든 홍매곡에 한 노인의 유쾌한 홍소가 울려퍼졌다.
“왜 웃는 거지??
퇴짜 맞았다고 말하는 노인이 왜 저렇게 유쾌해 하는 건지 염도로서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염도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한동안 그 옆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