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10화 – 종막 – 폭풍 속의 비가(悲歌)
종막 – 폭풍 속의 비가(悲歌)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몽환의 신기루(蜃氣樓)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만이 동굴의 회색빛 벽에 음산 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독고령은 오열했다. 텅빈 마음이 창칼로 도려내어진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비명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이 소리 없는 비통 속에서 하염없이 흘러나 와 땅바닥을 적셨다.
그는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기약 없는 약속만이 남았다. 그녀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를 찾아나서려 해도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기다림은 상상을 초월한 인내가 필 요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드디어… 드디어…….”
왔다!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은명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서찰을 든 떨리는 두 손에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다.
“은명…….?”
손에 든 서찰을 꼭 움켜쥐고 소중하게 품에 안으며 독고령이 뇌까렸다.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바보, 일 년 만의 첫 소식이라니 엄청 지각이잖아!”
만나면 그 게으름에 핀잔을 주든지 항의를 하든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결심을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독고령을 나예린이 급히 붙잡았다. 평소에도 항상 활기가 넘치는 그녀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확실히 지나쳤다. 뒤쫓아오는 시간에게 살해라도 당할까봐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언니!”
시간이란 이름의 흉악범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독고령을 나예린이 급히 붙잡았다. 그러기 위해서 나예린은 날뛰는 야생마를 진정시킬 만큼의 수고 를 들여야만 했다.
“무슨 일이지, 사매? 나 지금 바쁘거든!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독고령은 안달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시퍼렇게 날 선 식칼을 손에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허둥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몸부 림 속에서 나예린은 어떤 필사의 의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은 나예린은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힘껏 이 시간에 쫓기는 하얀 야생마의 옷자락을 고삐 대신 붙잡았 다. 그 강한 손길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사매……?”
이 단호한 의지 표현을 접한 독고령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나예린이 이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은 지난 수년 간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언니, 오늘은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조용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왜?”
“그냥요.”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나예린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무척이나 궁색한 것이었다. 점점 더 사매답지 않은 태도에 독고령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이라고? 이상한 말을 다 하는구나! 뭘 불안해 하는 거니? 요즘은 해적들이 나오는 일도 없지 않니?”
일 년 전, 남해의 대해적 편목왕 도곡의 죽음과 그가 이끄는 해적단 검은 해풍의 붕괴라는 대사건이 발생한 이후 이곳 앞바다에 출몰하던 해적들의 출현 빈도는 눈 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사건 이후 보타암을 건드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검은 해풍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이곳은 사건다운 사건 하나 없 이 지루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래도… 뭔가 불길해요. 오늘은 나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부탁이에요, 사자!”
나예린의 목소리에는 어떤 절실함이 느껴졌다. 보통 때라면 군소리 없이 그 말에 따랐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 매우 절박했기 때문에 그럴 만한 여유가 없 었다.
“미안, 걱정 끼쳐서! 하지만 걱정마! 나도 벌써 날개 석 장이라고! 그러니 안심해!”
독고령은 어린 동생의 작은 양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애써 미소지어 보임으로써 자신의 사매를 진정시켰다.
독고령의 눈동자에서 소용돌이치는 결의를 읽은 나예린은 더 이상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그럼 조심하세요! 제발요!”
황혼녘부터 이상하게 불안감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심장 위에 바위가 얹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독고령이 보기에도 이렇게 불안해 하는 나예린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안심시켜줘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걱정 마! 금방 주변만 둘러보고 올 테니깐!”
되도록 각 내에 머물러 나이 어린 사매를 안심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은명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그것에 훨씬 앞서고 있었다. 넘쳐흐르는 감정의 파도는 이성의 둑으로 저지하기에는 이미 그 파고(波高)가 너무 높았다.
“이런 날씨에…….”
밤하늘은 밤보다 더 어두운 먹구름에 가려 별도 달도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았고, 바람은 대기를 할퀴듯 사납게 불어닥치고 있 었다. 여기저기가 폭풍의 위험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독고령의 결심은 확고했다.
‘미안, 사매! 하지만 오늘 밤엔 꼭 나가봐야 해!’
그로부터 일 년, 마침내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독고 사자!”
어린 사매의 작은 손을 뿌리치고 마침내 독고령은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열어젖힌 문을 통해 바람이 위잉 용트림을 하듯 거세게 불어닥쳤다. 천근추라도 발휘해 힘주고 서 있지 않으면 나예린 같은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는 저만치 뒤로 날려버릴 정도로 거센 강풍이었다.
“언니…….”
점점 멀어지는 독고령의 뒷모습을 나예린은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나운 바람이 그녀의 전신을 때렸다. 바람은 점진적으로 자신의 흉폭함을 고양시키며 창문과 입구를 요란스레 두들겨팼다. 하늘을 빈틈없이 메운 불길한 검은 먹구름이 그녀의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을 텐데…….?”
이 터질 듯한 가슴의 고동이 그저 자신의 지나친 강박관념이길 그녀는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번쩍!
먹장구름이 두껍게 드리운 하늘에 창백한 뇌광이 번뜩였다.
콰르르르릉!
귀청을 찢는 천둥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고인 웅덩이 위에 동심원의 파문을 그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사매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까??
몇 번이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그녀의 머릿속은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운명은 비극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나운 폭풍을 동반한 폭우가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며 하늘에서부터 떨어져내렸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대신 슬퍼해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하늘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슬퍼해줄 수는 있어도 막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잔인한 하늘이었다.
덜덜덜!
허투로 만들고, 제멋대로 날이 빠진, 제대로 갈지도 않은 검을 제자들에게 지급할 검각이 아니었다. 자랑해도 좋을 만큼,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검은 날카로 웠다. 검의 주인 역시 손질을 소홀히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예기 충만한 보검이 지금은 난폭한 바람에 괴롭힘당하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검을 중단세로 겨누고 있는 독고령의 얼굴은 지금 눈물로 범벅이었다. 항상 밝고 활기찬 생명의 빛이 넘치던 그 보석은 지금 절망과 공포와 비통함으로 인해 빛이 바래 있었다. 애절한 모습이었다.
행복했던 꿈이 한순간에 저 어둠의 나락 깊은 곳에 서식하는 악몽이 되었다.
“제발, 제발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요!”
산산조각 부서진 심장을 강제로 비틀어 쥐어짜낸 절규가 터져나왔다.
저벅, 저벅!
그러나 그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지금 잿빛 석회로 빚어놓은 듯 어떤 감정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울먹거리며 외친다. 그것은 거절이나 거부가 아닌 간절한 소망이 담긴 애원이었다.
“은…명!”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마음이 달군 송곳에 난자당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정확하고 규칙적이지만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는 사자(死者)의 발걸음이었다. 그가 일보를 내딛을 때마다 그녀는 도망치듯 일보 뒤로 뒷걸음질쳤다.
독고령은 무서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이 악몽의 한가운데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뒷걸음질치는 것뿐이었다. 이토록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수많은 검기를 보고 배우고 익혔지만, 백기러기의 날개가 두 장에서 세 장이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사랑했던 님이다. 첫사랑이었고, 첫 남자였다. 향 한 대가 타기 전만 해도 두근거림에 상기된 뺨을 하고, 고동치는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가 새어나가 지나 않을까, 상대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만났던 님이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그 거짓말 같은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 거짓말 같은 한마디로 모든 감정을 증오와 미움으로 돌리기에는 지난 일 년 간 키워왔던 연심이 너무 컸던 것이 다.
“왜… 어째서…….”
굳게 다물어져 있던 사내의 입이 천근이라도 되는 듯 무겁게 움직였다.
“이것이 나의… 숙명이기 때문이오.”
유리구슬을 박아놓은 듯 무감정했던 사내의 두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당신의 눈이 필요해!
처음에는 질 나쁜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농담보다도 지독한 진실이었다.
등을 타고 습기찬 동굴벽에서 냉기가 전해져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일정한 속도로 인형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독고령이 검을 쥔 손의 악력을 더욱 높이며 외쳤다.
“진짜… 찌르겠어요.”
그러나 은명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여전히 그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여전히 그의 몸은 무방비 상태였다. 네가 죽인다면 곱게 죽어주겠다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차마 검을 찌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끝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세차게 떨리고 있 었다.
“비겁해요, 당신은 너무 비겁해요. 나의 눈이 필요하다면서, 내 목숨이 필요하다면서 왜 그런 죽을 듯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거죠?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 는 거냐고요? 악당이면 악당답게 좀더 야비하고 사악한 얼굴을 해보라고요. 그래서는… 그래서는… 도저히 찌를 수가 없잖아요.”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이자 하소연이었다. 은명은 이 절절한 마음의 울림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지척 이었다.
쿡!
검극이 그의 복부에 닿았다. 독고령도 그것을 감지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든다.
이제는 멈추겠지… 발걸음을 멈추면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이런 심한 장난해서 미안하다며 그가 웃으면서 사과해주기를 바랐다. 그럼 모든 것을 용 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독고령이 피할 사이도 없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일은 일어났다. 그녀의 눈이 경악에 물든 채 가늘게 경련했다. 검끝이 복부에 닿은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 명은 한 발짝 더 성큼 앞으로 더 내딛었던 것이다.
푸욱!
그의 몸이 도검불침의 금강불괴지체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판명되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봉이 두 치가량 복부 안으로 파고들며 내장을 헤집었다.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뿐만 아니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모하게 또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푸확!
마침내 복부를 관통한 검이 그의 등을 뚫고 선혈에 물든,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앞에서만 흐르던 피가 이제는 뒤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미친 짓이었다. 말도 안 되게 미친 짓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미친 짓을 실행한 사람은? 더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는 찢어발겨진 신경과 제멋대로 거칠어진 간헐적인 호흡 때문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기 힘들어 보였다. 고통의 파도가 전신의 신경을 난도질하며 유린할 텐데 도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초인적인 인내력이라 할 만한 능력이었다. 다만 그의 눈에 담긴 슬픔의 빛만이 더욱 짙어졌을 뿐이었다.
“왜.. .? 왜…? 왜에에에!”
독고령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나쁜 꿈에서 깨어날 방도가 없었다.
“대가… 이 상처는 대가야! 그동안 쌓았던 추억의 파편을 부수는 데 대한 대가. 그리고 나에게 남은 당신에 대한 마지막 상념, 이 상처가 영원히 사라지는 일은 없
겠지. 그리고 나는 이 상처를 볼 때마다 당신을 생각하게 되겠지. 당신이 눈의 아픔을 떠올릴 때마다 날 생각하듯이…….”
그의 목소리는 좀 전과는 다르게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일 년 전 그녀가 사랑하던 이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들은 마지막 목소리이기도 했다.
“만일 다음에 다시 만나도 나는 이미 내가 아니겠지. 잘 있어요, 내 사랑! 내가 사랑했던 님이여!”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그녀의 좌안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탈색되어갔다. 복부에 박힌 검을 뽑아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로 인해 그녀 의 안면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싫어어어어어어!”
파삭!
인두로 불에 지진 듯한 고통과 함께, 달구어진 인두가 뇌 속을 유린하는 느낌과 동시에 필설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이 어둠과 같이 찾아왔다.
“꺄아아아아아아악!”
폭우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 굉음을 뚫고 한 동굴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피투성이가 된 사내의 손 위에 눈알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주인의 몸을 벗어난 그 눈알에는 더 이상 과거의 밤바다처럼 아련하던 그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은…명…….?”
정신을 잃은 독고령의 몸이 벼락을 맞은 탑처럼 우르르 무너졌다.
이날 이후, 그녀의 왼쪽 눈이 열리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