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14화 – 오행(五行)제1관 목요관(木曜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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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5권 14화 – 오행(五行)제1관 목요관(木曜關)

오행(五行)제1관 목요관(木曜關)

-소년의 부화(化)

오행에서 목(木)이라고 할 때 그 ‘목’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목을 단순한 ‘나무’라는 ‘형상(形象)’을 지닌 물질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의 가장 작은 한 단면밖에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 이 될 것이다.

오행의 목은 봄을 상징하기도 하고, 인간의 본질적 성(性)인 ‘인(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가장 전체적인 성질은 ‘생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산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끊이지 않는 생명의 연속적인 활동이 아닐까?

식물의 열매를 보라. 그 열매는 식후 후식이나 간식거리가 되어 인간의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자연이 친절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만일 그런 생각을 지닌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이 자연계의 지존인 줄 착각하는 오만무도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임이 분명하다). 열매란 종을 번성시키고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씨, 즉 자손을 퍼트리기 위한 식물의 자궁인 것이다.

나무가 잎사귀로 햇살을 받고 뿌리로 물과 영양을 흡수하여, 그 생명의 편린들을 모아 결실(結實)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모아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 어냄으로써 어떤 가치를 이어나가는 행위의 총칭을 우리는 비로소 생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던 것을 모으고 하나로 ‘연결하는 행위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쉽게 말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이 야말로 생산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율령자의 정점인 ‘천율령’은 면면부절(綿綿不絶)한 이 ‘연속성’이야말로 오행의 ‘목’을 가장 잘 나타낸 속성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속성을 체현하기 위해 그들은 아주 전위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이어달리기, 경공계주(輕功繼走)였다.

경공계주라는 이 독특한 시합방식이 제시되었을 때 맨 처음 나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럼 안 싸웁니까?”

그에 대한 답은 이랬다.

“싸우잖나?”

“예? 안 싸우잖습니까?”라고 반문했더니…….”

“계주 역시 승패를 다투는 투쟁(鬪爭)의 한 방편이네. 그러니 싸우는 것이긴 마찬가지지. 설마 꼭 도검권각을 휘두르며 남을 상처 입히는 것만이 ‘투(鬪)’라고 생 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 청년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당장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정말 의외로군… 달리기 같은 간단한 걸로 승자를 결정한다니 말일세.”

장홍이 신음하며 말했다.

이번 대회는 그가 알던 과거의 화산규약지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변덕스런 바람 같은 이 대회가 과연 앞으로 어느 목표를 향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는 그의 짐작 범위 내에 들어 있지 않았다.

“과연 간단할까? 의외로 어려울지도 몰라, 이번 관문!”

비류연은 장홍의 섣부른 단정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렵다고?”

“그래, 이곳 화산은 오악 중에서도 가장 험하기로 유명하다며? 실제로 이 천무봉만 봐도 여기저기가 울퉁불퉁한 암석투성이에 절벽 천지지. 그런 화산 전체를 이 용한 이어달리기라고!”

그렇다. 이번 목요관은 화산오봉의 정상 전체를 아홉 개의 구간을 나누어 달리는 방식이었다. 달리는 진로는 자유, 굳이 주어진 길을 따라 달릴 필요는 없다. 능력 만 된다면 나무 위를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든 절벽 사이를 날아다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 선수가 모여 있는 곳은 율령자 측이 결정한다.

그 점이 비류연은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그냥 장거리를 달리고자 한다면 자신의 능력에 맞게 체력을 보존하고 내공을 아끼면 돼. 그러면 시간은 좀 걸릴지 몰라도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지. 반 대로 단거리를 짧은 시간 내에 주파하고자 한다면 비축된 체력과 내공을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방출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런데 지금 이 경공계주는 장거리를 달리 면서도 단거리 때처럼 빨리 달리지 않으면 안 돼. 게다가 달려야 하는 장소는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화산의 다섯 봉우리 절대 간단한 일은 아닐걸? 예감이긴 하 지만 아마 적어도 1박2일은 소요되는 시합일 거야. 즉…….”

“밤에도… 달려야만 한다는 거군.”

장홍의 침음성을 삼키는 대답에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난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밤길 조심하라고 손에 횃불을 쥐어줄 만큼 친절하다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거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장홍도 동의하는 바였다.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답지 않게 너무 옳은 소리만을 해서 좀 혼란스럽고 당황했지만 아마 이건 같은 7조인 윤준호와 이진설도 동의하는 바일 것이다 – 다시 생각해보니 과연 비류연의 말대로였다. 그의 견해에 반박할 곳은 없었다.

장홍은 자신이 이 관문을 얕본 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이 목요관을 쉽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을 수 없겠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장홍이 물었다. 어느새 비류연의 의견을 중시해서 듣고 있는 자신을 그는 자각하고 있을까?

다만 그런 행위가 다수의 맹렬한 반대와 강대한 저항을 부를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음… 우선 순번(順番)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비류연이 말했다.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이라 불릴 만큼 화산의 경관은 빼어나다. 특히나 이런 가을이면 온 산이 붉고 노랗게 날염(捺染)된 화려한 옷을 걸친다. 구름의 평원을 뚫 고 솟은, 검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깎아지른 높은 봉우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웅장함을 몸 전체로 느끼게 해준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빼어나고 수 려한 경관을 보기 위해 사계절에 나누어 먼 길을 움직여 여기까지 오는 것이다(물론 이런 호사스런 행차는 주머니가 넉넉한 부호들이나 가능하지 평범한 일반인들 은 불가능할 것이다).

모처럼의 화산이었다. 사문을 떠난 지 이 년 만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천무봉이 아니라 사문 화산파가 있는 옥녀봉이었다. 하지만 윤준호에게는 이런 거침없이 휘둘러진 신의 붓에 의해 창조된 듯한 자연경관을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자연의 오묘함과 광활함을, 저물녘의 고즈넉함을, 구름의 평원을 물들 이는 황혼을, 나뭇잎과 나뭇잎을 타고 꽃을 희롱하며 불어오는 뺨을 스치는 바람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화산은 그의 곁을 주마등처럼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고 있었다. 잠깐 앞에 있다 싶으면 벌써 옆이고, 옆인가 싶으면 벌써 저 뒤로 가버리고 만다. 멈춰 서서 다소곳 이 그를 기다려주는 법은 결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전속력으로 화산을 주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왼발과 오른발이 앞을 다투어 화산의 대지를 박찼다. 서로가 대지를 놓고 질투 경합이라도 벌이는지 두 발이 동시에 땅에 닿는 일은 없었다.

‘달린다’고 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힘든 일이 될 수 있는지 그 한계에 대해 그는 지속적인 체험을 통해 계속해서 새롭게 발견해나가고 있었다. 지식의 탐구에 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이번 발견에 대한 대가는 격렬하게 맥동하는 심장이 파열하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공기가 모자란 폐가 참지 못하고 입 밖 으로 튀어나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의 숨막힘,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근육통을 골고루 겪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몰이꾼에게 몰린 여우처럼 쫓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역시 추월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넷이나 있었다.

“알겠지? 사람을 앞지르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아. 그렇게 무리할 필요도 없고. 다만 자신의 순위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해줘! 그것으로 충분해. 그러니 무리는 하지 마.”

옆에서 그 밥맛없는 위지천이 과연 저런 얼뜨기를 믿어도 될까? 포기하라고.’하는 등의 몇 마디 말로 그에게 모멸감을 심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밥 맛 검객을 무시하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저런 소인배의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린 널 믿는다. 지금까지 네가 헤쳐온 사선은 결코 평이한 곳이 아니었어. 좀더 자신을 믿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야말 로 너를 믿는 우리들에 대한 배신이야. 우리는 네가 신의를 아는 남자라고 믿고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아직도 그의 어깨를 단단하게 쥐어주었던 장홍의 듬직하고 따뜻한 손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그것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신뢰였 다.

언제나 ‘왕따’였던 그를 믿고 지탱해주는 소중한 이들이었다. 때문에 그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좀더 적극적이 되지 않으면!’

순위 유지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매사에 너무 소극적이었다. 자신을 믿지 못했다. 언제나 놀림만을 당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믿어주고 받 쳐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봐서라도 좀더 자신을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화를 앞둔 새가 껍질을 부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껍질은 세계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없이 강하면서도 한없이 약한 세계,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를 부수지 않으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없다. 필사적인 새의 부리가 한 점을 집요하게 노렸고, 그것은 결국 금의 시작점을 만들었다. 이 최초의 작용점을 중심으로 껍질이 방사선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뭐? 빨리 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끝이 말려 올라가는 비류연의 반문에 윤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조언을 들었으면 해서…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어서…….

말끝을 흐리며 윤준호가 말했다. 비류연에게 감히 조언씩이나 들으려 하다니 장홍이나 효룡이 알았으면 잘도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수 있구나 하며 뜯어말렸을 일이었다. 무슨 용기로 이 비상식의 결정체라 할 만한 녀석의 조언을 따른단 말인가!

그러나…..

“음, 조언을 듣고 싶다면 장소를 제대로 찾아왔다고 할 수 있지! 이제 봤더니 너도 꽤 안목이 있잖아?”

매우 만족한 얼굴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는 것이 윤준호의 인생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름에도 그는 자신의 척추뼈를 긍정의 방향으로 움직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빨리 달릴 수 있지요?”

여전히 동기에게 존댓말을 쓰는(잘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다.) 그를 향해 비류연은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너 뭔가 잊고 있는 것 아냐?”

“잊다니요?”

“이번 목요관은 빨리 달려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래 달려야 한다고!”

그제야 윤준호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화, 확실히 그렇군요.”

짧은 거리가 아니다. 무슨 생각인지 아홉 개로 나눠진 구간은 그 길이가 들쭉날쭉 제멋대로였다. 나예린의 말로는 적재적소에 얼마나 적절한 인재를 배치할 수 있 는가를 보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견해에 동의를 표시했고, 그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맡은 곳은 화산오봉 중 가운데 봉우리 인 옥녀봉이었다.

“너 예전에 화산에 살았다며?”

“살았다기보다 화산파 제자였습니다만……?

“였습니다? 그럼 지금은 아냐?

“아, 아뇨! 지금도 당연히 화산파 제자죠.”

“자, 그럼 결정!”

그렇게 정신없이 결정된 순번이었다. 옥녀봉 입구에서 옥녀봉 정상까지 – 그래도 아홉 개의 구간 중 가장 짧은 구간이었다 그곳에 있는 가장 길고 험한 거리를 달 려야만 하는 마지막 주자인 비류연 – 그가 달려야 할 거리는 옥녀봉 정상에서 천무봉 정상까지였다. 그것도 밤에 달려야 하는 에게 계주봉을 전해주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사실 자신이 속한 7조는 이 순번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조에 하필이면 그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빙백봉 나예린에 미친 사나이들의 모임, 비류연을 증오 하다 못해 찢어발기고 싶어 안달이 난 집단, 빙봉영화수호대의 대주 선풍검룡 위지천이란 남자가.

“이봐 류연,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떨떠름한 얼굴을 한 장홍이 귀엣말로 속삭였다.

“글쎄.

“글쎄라니, 그런 무책임한 말을! 자네를 잡아먹으러 온 게 아닐까?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꼭 아편 중독자 같군그래. 저기 봐, 저기! 눈에 핏발이 서 있 는 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아마, 류연 자네가 일장 안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잖아? 이 의외의 본인의 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거야.”

옆에서 효룡이 끼어들었다. 그 역시 7조였다.

“룡, 자네의 말… 일리가 있구먼! 확 납득이 가버렸어! 그러니깐 약물 복용 때문은 아니었단 이야기로군.”

장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류연, 어떻게 된 건가? 난 사실 자네의 장담대로 되어서 무척이나 놀라고 있던 차였네. 자네는 물론이고, 나 또한 이 소저와 같은 조가 되어서 놀란 참이었다네. 아, 물론 너무 그 문제로 오해는 하지 말고…….”

붙여도 안 될 말을 굳이 하나 더 붙이는 효룡이었다.

조 추첨 당시 비류연이 앞으로의 조 편성을 이미 벌어진 일인 것처럼 장담했을 때도 긴가민가하기만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말대로 되었다. 비류연은 나예린과 같은 조가 되었고, 자신은 이진설과 같은 조가 되었다. 물론 이 네 사람 다 같은 조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신기한 체험이었다. 혹시 같은 조가 되 지 않았으면 무슨 변명을 하려고 했느냐고 물어보자 그런 건 이미 실패를 전제한 사고이기 때문에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친구였다. “부작용 같은 건가…….”

나직한 목소리로 효룡이 물었다. 원하는 사람과 한 조가 되기 위해 확률을 조작한 –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 대가를 지불한 건지도 몰랐다.

“그건 아냐!”

비류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사실…….”

“사실?”

“음… 사실 난 같은 조가 되고 싶은 사람 쪽에만 의식을 집중했거든. 이런 건 집중 대상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 너무 커지면 힘이 분산되니 효과도 적거든. 성공 확률도 떨어지고…….”

“그래서?”

“그래서 나머지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눈곱만큼도 말이야.”

“흐음…,

“그래서?”

“아마 나머지 사람들은 무작위의 법칙에 의해 뽑혔을 거야. 아니면 저 녀석도 비슷한 걸 빌었거나.”

“그렇다는 이야기는…….”

비류연이 하늘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신의 장난이라는 것이지. 아니면 어떤 망할 ‘존재’의 농간이거나!”

“뭐야, 그건……!”

장홍과 효룡이 동시에 대답했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잘해나갈 수 있을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장홍이 말했다.

“글쎄…….”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거 영 불안하구먼…”

장홍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뇌까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뭐, 걱정마!”

비류연의 말에 효룡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잘도 그런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제일 문제되는 건 자네라고. 게다가 이 경공계주의 순번 정하기조차 제대로 될지….

“걱정 말라니깐!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든.”

“어떻게!”

장홍과 효룡이 언성을 높여 반문했다. 그러자 비류연이 손가락을 하나 올리며 말했다.

“단 한마디만 있으면 돼!”

“한마디?”

“응, 그녀의 한마디!”

비류연의 손가락 끝은 나예린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보더니 검지로 자신의 턱 쪽을 가리키며 약간 갸우뚱한 얼굴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류연이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으며 손을 장난스레 흔들었 다. 그녀는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고, 그걸 지켜본 위지천은 뭔가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과연!”

장홍과 효룡, 두 사람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탄성을 터트렸다. 저거라면 효과가 확실했다.

윤준호가 맡은 구간이 짧다는 것은 아홉 개의 구간 중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짧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게다가 평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길 이었다. 엄청난 체력과 진기가 소모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화산에서 생활한 그가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윤준호는 순순히 시인했다.

“하지만 이제 걱정은 무용! 이 몸의 조언대로만 하면 틀림없다고! 그 점에 있어서 다행히도 넌 매우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비류연이 말했다.

“어떻게…요?”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윤준호의 몸이 자연스레 앞으로 쏠렸다. 과도한 자신감 – 그 근거는 좀 불확실하지만 이 발생시키는 기이한 인력이 그를 끌어당기는 듯했 다.

“그건 말이지……?”

천지탄생의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한 어조로 비류연이 나직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소곤소곤! 쑥덕쑥덕! 솰라솰라……!”

“오오! 과연! 음음! 헤에…….”

비류연의 말을 듣는 윤준호의 표정이 사계절의 화산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산과 하나가 된다!”

자신이 좇아야 할 목표를 바라보며 윤준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공의 기본은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해서, 최소한의 진기로 최대한의 속도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몸을 한없이 한계에 가깝도록 가볍게 만 드는 거야! 이렇게 말이야!”

두 손을 하늘 위로 활짝 펴며 비류연이 말했다. 하지만 윤준호가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떻게요?”

그가 보기에는 단지 팔의 위치가 변한 것뿐이었다. 당연히 그런 건 변화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러니깐 이렇게!”

다시 한번 비류연이 만세라도 부르듯 두 손을 활짝 폈다. 그러나 윤준호의 인식체계에서는 전과 동일했다.

“…. .???”

멀뚱한 그 모습에 비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알았어. 직접 체험시켜주지. 그 편이 빠를 테니.”

아무래도 아직은 일렀던 모양이다. 그래서 좀더 직접적인 정보전달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자, 가만히 서 있을 테니 한번 가볍게 밀어봐!”

윤준호가 그 말대로 비류연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밀었다고는 해도 팔꿈치를 구부렸다가 천천히 핀 정도였다. 하지만……

“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요술 같은 일이었다. 그 가볍고 작은 동작에도 비류연의 몸이 발꿈치를 한데 붙인 채 아무런 저항 없이 일장이나 뒤로 밀려났던 것이다. 마 치 허공중에 투명한 빙판이라도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그에게 갑자기 괴력이 생겨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이 소심쟁이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끝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항이 없어!”

약간 있었지만 극미(極微)해서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종이배를 민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비류연의 움직임은 밀려났다기보다는 미 끄러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했다.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제 확실히 알겠지?”

하지만 윤준호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약간의 수고를 더 하기로 결정했다.

“왜 사람의 몸이 물에 뜬다고 생각해?”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람 몸의 구 할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야. 물과 거의 성질이 같기 때문에 뜨기 쉬운 상태라는 것이지. 거기에 물보다 가벼운 폐의 공기가 더해져 인간의 몸이 뜨게 되는 거야. 그리고 팔 다리를 저으면 물속을 헤엄칠 수 있지. 경공도 같은 이치야.”

비류연의 말은 보이지 않는 밧줄이 되어 그의 정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세상은 모두 기(氣)의 응집과 분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두가 기야. 너와 나는 물론이고 이 세상 전부 기라 할 수 있지! 이(理)에 따라 움직이는 기(氣), 그것이 바로 이 존재계야.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은 다만 밀도 차의 영향일 뿐이지.”

비류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달린다고 하는 것은, 경공을 발휘한다는 것은 기의 바닷속을 헤엄치는 행위랑 동일한 거야. 하지만 인간의 몸은 일단 대기보다 밀도가 크지. 때문에 밀도와 ‘속 성’이 더 가까운 땅에게 끌리지. 이 둘 사이에 끌어당김의 힘, 즉 인력이 작용하는 거야. 하지만 무인은 그래서는 안 되지. 우리는 대기 중에 흩어져 있는 기를 호흡 을 통해 몸 안으로 끌어당기고,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존·관리해 몸 안의 밀도를, 그 성질을, 속성을 보다 더 대기에 가깝게, 기의 근원적 존재 상태에 가깝게 만 드는 거야. 기의 바다를 헤엄치기 위해 몸을 보다 기화시킬 필요가 있어. 이것이 바로 경공 공부의 가장 기본이자 제1요결이지. 다들 이것을 제대로 배우고는 있 어. 다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까먹고 있는 듯하지만 말이야. 이유를 몰라도 나름대로 효과는 있으니깐 그다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 는 대지의 속박, 인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어.”

단호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윤준호는 정신없이 그 현기 가득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류연이 한 말치고는 비상할 정도로 현기가 가득한 가르침이었다. 그는 본능을 통해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화(同化)할 필요가 있는 거야!”

“동화?”

동화, 별개의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뜻한다.

“둘의 속성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좋아! 그만큼 저항이 줄어들거든.”

“그러니 준호 네가 해야 할일을 이제 알겠지? 네가 해야 되는 것은 단 하나뿐이야!”

“하나?”

“그래, 이 화산과 하나가 되는 거야!”

잠시 윤준호는 비류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그것을 곱씹어보고 나서야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부로 직접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그, 그게 가능할까?”

“에휴…, 또 그 자진 한계짓기냐? 이제 질릴 만도 하지 않냐? 슬슬 그 재미없는 세계에서 깨고 나오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평생 발전할 수 없어!”

“미, 미안..

윤준호가 사과했다.

“그 사과는 나한테 할 게 아니라 너 스스로에게 해야 되는 게 아닐까?”

“미, 미안…….”

어디선가 끙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남의 껍질을 대신 깨줄 수는 없다.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옆사람은 다만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은 무익한 참 견이었다. 심한 경우 유해해질 수까지 있는.

“기를 한가득 받아들인 후 화산과 하나가 된다고 상상해봐. 화산을 네 안에 들이마시는 거야. 자신을 잊고, 무아의 상태에서 자연과 이 화산과 하나가 되는 거지. 그럼 작은 바람에도 호수의 물결이 움직이듯 너의 몸도 작은 미풍을 타고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어때 쉽지?”

간단하다니 어디가? 그것은 눈이 팽팽 돌아갈 만큼 엄청나게 어려운 주문이었다.

처음에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 친구는 말했다.

“자신의 한계를 자꾸만 한정지으면 더 이상 그 위로는 절대 갈 수 없어! 그렇게 네가 결정하는 순간 그것이 너의 한계가 돼버리지. 스스로에게 제약을 가하지 마. 아직 그 끝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깐.”

바람을 가르는 몸은 가볍고, 정신은 푸른 하늘만큼이나 맑았다. 이곳은 내가 자라난 고향. 나무 한 그루 한그루, 돌 하나 하나… 주위의 모든 것이 눈에 익었다. 2 년 만의 화산이지만 고향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지금이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비류연의 말이 지금은 이해될 것 같았 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윤준호는 마침내 자신의 이해를 체현해보기로 결정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에 한해 그것을 이룰 수 있다. 믿음이란 그것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자기 선언이 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것 을 자신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다.

“남아로서의 의지를 걸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월해보이겠어!”

마침내 껍질이 부서지고 새가 부화했다.

윤준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삶의 빛을 향해 기어나온 이래 처음으로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혼의 화로에 의지의 풀무질이 가해지자 본연의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지? 저건?”

마하령은 기겁했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녀의 뒤에서 다가와 옆을 지나 앞으로 나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바람인가 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그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 뒤에서 부는 바람이라니……. 그러 나 그녀는 그것이 곧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건방지게 철옥잠 마하령을 추월한 것이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씩이나 감히 그녀의 앞을 달린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전에 그녀의 앞을 달리고 있던 사람은 마검익 추명이라는 작자였다. 하 지만 그것은 본인의 무능이라기보다 그녀가 속한 2조 자체의 무능이라고 봐야 옳았다. 엄청나게 멀었던 거리 차를 여기까지 줄인 것은 바로 마하령 자신의 능력이 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뒤에 달리는 것과 추월당한 까닭에 뒤에서밖에 달릴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른 별개 차원의 문제였다.

“감히…….”

그녀는 먼저 불같이 분노하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방심의 허(虛)에 의외성의 기습을 당한 그녀는 노하기에 앞서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방금 자신을 추월했던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건 무슨 농담이지?”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비류연이란 말종에 대해 이를 갈고 있다보니 자연히 눈에 함께 들어온 인간이었다. ‘덤’이 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인간, 화산지진아 윤준호였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녀석에게 추월당하면 가문 대대로 망신, 조상님께 얼굴을 들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마하령은 더욱더 진기를 불사르며 속도를 높였다.

“가벼워! 몸이 깃털보다 가벼워!”

자아를 속박하던 무거운 족쇄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몸이 한없이 가벼웠다.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화살처럼 그는 빠르게 달렸다. 마치 새 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오만가지 관념으로 감금되고 속박되고 짓눌려져 있던 자아가 개방되는 그 감각은 그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어떤 희열보다도 벅찬 느낌 이었다.

지금까지 이토록 자신에게 충실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미혹(迷惑)의 잠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눈을 감고 인생을 걷고 있는 동안 얼마나 스 스로를 기만하고, 외면하고, 홀대하며 살아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외면하고 무시했던 나 자신을 좀더 아끼고 사랑해주자. 그런 의지가 전신의 기맥 을 통해 신경의 뿌리까지 다다랐다. 넘치는 듯한 충만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 의지가 너무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새는 이제 막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부화했을 뿐이었고, 신세계를 비상하기에는 그 날개가 아직 약했다.

“다행히 무사히 진행되는 것 같군요. 염 노사님!”

은설란이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화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염도가 별호임에도 그녀는 그것을 이름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본명을 직접 입에 올리는 것보다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상이나 특별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신호가 올라오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무소식은 희소식을 의미했다. 직접 화산지회에 참가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이렇게 지 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

염도가 대답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짤막한 한마디를 신음처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 이어달리기라니……. 독특하고 개성적이긴 하지만 별 위험이 없는 시합이라 안심했어요.”

확실히 도검권각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했다. 하지만 염도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일세.”

“그 말씀은?”

염도가 시선을 돌려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끊임없이 분노와 울분이 소용돌이치던 그 야수 같던 눈빛도 지금은 깊이가 생길 정도로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최근 몇 년 들어 어떤 악연과 얽히고 난 이후로 별 별 고생을 다한 탓인지도 몰랐다. 본인도 참 성질 많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때문에 과거보다 훨씬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은 소저, 사고는 자연이 일으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일으키는 거라네.”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그 환경에 대처하는 것도 모두 사람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고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힌 ‘관계의 일그러짐(왜곡)’에서 발생한다. 올바른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날 리 없다. 만일 문제가 일어났다 해도 그들은 합심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이곳에 얽힌 인간관 계의 왜곡율은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듣고 보니 충분히 납득이 갔다. 지금 이곳 화산에 얽힌 인간관계는 비정상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언제 문제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이다.

“확신할 수야 없지. 하지만 세상에는 반칙이란 자신이 벌린 비합법적인 행위가 발각되는 건 조심성 없는 우행(愚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족속들도 있으니깐 말이 야!”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세상에는 ‘정정당당’이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가장 멀고 지루한 어리석은 여정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존재한다. 그런 자들 은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는 어기고 들키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역사 이래로 그들이 항상 소수보다 다수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에 있 어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때때로 어처구니없는 규칙들도 많지만. 적어도 이런 시합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도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정론임에도 세상 에는 얄궂게도 당연한 것을 당연한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것은 우매한 대중이 만들어낸 최악의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방심은 금물.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지!”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신중해지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본성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변화였다.

“아무 일 없이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글쎄…, 워낙 적이 많은 위인이라……. 무슨 일이든 이제껏 한번도 조용히 끝내본 적이 없다는 게 자랑인 녀석이거든!”

“조용한 게 죄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그 녀석, 아마 평온의 신에게 잔뜩 미움받고 있을 거야, 분명!”

묘하게 확신에 찬 어조로 염도가 말했다.

“모용 공자하고는 정반대네요. 그 사람은 규칙을 어기면 하늘이라도 무너지는 것처럼 행동하잖아요? 그런 면이 귀엽기는 하지만.. 참 많이 대조되는 두 사람 이에요, 쿡쿡!”

전혀 성질이 상반된 두 사람인데 같이 어울려 있는 것을 보면 참 신비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비류연이란 한 인간이 가진 매력인지도 몰랐다.

“귀여워? 그 딱딱하고 퍼석퍼석하기만 한 마른 호떡 같은 녀석이? 호오?”

말꼬리를 길게 올리며 수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은설란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가로저었다.

“아, 아니… 전… 그냥…. 그게… 저…….”

당황이 눈에 보였다.

“흐…음?”

염도는 여전히 짓궂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은설란을 골려먹었다.

“아이 참! 그게 아니라… 그……?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럼 그 녀석이 싫어? 뭐 규범과 예의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녀석이니 싫어해도 할 수 없지.”

한스럽다는 목소리 – 변조되었을 것이 분명한 – 로 염도가 말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은 모용휘에 대한 무한한 동정 – 조작되었을 것이 명백한 – 으로 가득했다. “아, 아뇨! 싫은 건 절대 아니에요, 절대로!”

대답한 은설란은 자신도 놀랄 만큼 큰 목소리였다.

“싫지 않다?”

은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거네!”

갑자기 단정해버린다. ‘어, 어째서!’라고 반문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니, 그게 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지만… 구해주기도 했지만… 등에 업혀보기도 했지만.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변론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제 이것은 염도의 뇌리 속에서 기정사실로 확정되어 기억창고에 보관될 것이 분명했다. 은설란 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듯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껏 한번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갑자기 그의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바른생활 휘도 그 사람이랑 얽히고 나서 많이 변했지.”

“그 사람?”

“평온의 신에게 미움받고 있는 사람!”

“아아! 그 사람!”

그제야 은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랑 만난 이후로 지금은 그나마 여유가 많이 생긴 거야. 옛날엔 훨씬 더 지독했지.”

“어머 정말요?”

염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래도 숨구멍이 좀 트였다고 할 수 있지. 옛날에는 가죽 끈으로 자신의 목을 꽉꽉 졸라매는 듯한 모습이었거든.”

왠지 그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어 웃음이 나왔다.

“그 녀석이 얽히면 다 그래. 아무리 평범한 것도 조용하게 끝나지가 않거든. 꼭 뭔가가 생겨나고 말지. 지루하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적당히’를 몰라서 항상 문제였다.

무당산 때도 그랬고, 환마동 때도 역시 그랬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볼 때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니, 불러들이고 있다는 쪽이 옳을 것

이다. 그의 존재는 자의든 타의든 주변의 관계에 왜곡을 발생시킨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함께 휩쓸려 날아가는 수가 있으니 주변사람들도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 었다.

“과연 이번에는 조용히 끝날 수 있을까…….”

염도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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