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15화 – 마지막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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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5권 15화 – 마지막의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

마지막 주자 중 가장 먼저 출발하는 영예를 안은 사람은 대공자 비였다. 그가 1조의 마지막 주자였다. 그에게 봉을 건네준 사람은 마검익 추명이었다.그는 그의 주인만큼이나 무뚝뚝한 얼굴로 증표를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비 역시 감정이 몽땅 사라진 듯 무정한 얼굴로 달려나갔다.

두 번째로 출발한 것은 2조 용천명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계주봉(이걸 상대에게 직접 넘겨줘야 한다.)을 넘겨주는 분한 얼굴의 마하령에게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달려나갔다. 세 번째는 구정회의 무절 삼절검 비천룡(飛天龍) 청흔이었다. 그는 5조였는데, 그에게 봉을 넘겨준 사람은 같은 회의 문절 지룡(智龍) 백무영이었다. 네 번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만 남들이 그가 바로 마천각의 성전외검 ‘안낙긴’이라고 수군대는 이야기를 들었다. 화음현 안목품평회장에 올라온 이름을 본 적 이 있었다. 경쟁자였다. 그와 함께 이름이 올라가 있던 오비완은 얄궂게도 같은 7조였다. 그래도 그는 의외로 괜찮은 사내였다. 그 얼굴, 그 덩치에 동물을 좋아하는 무척 특이한 인간이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가 출발했다. 이들은 둘 다 본 적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마천칠걸인지 칠칠인지 뭔지 하는 무리에 속한 인간들이었다.

‘잘도 이런 인간을 마지막 주자로 내세울 생각을 했군.’

몇 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조에 속한 인간들의 정신상태를 해부해보고 싶었다. 아마 정상은 아니리라. 이들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그 주인은 안타깝게도 이 마지막 구간에서 맨 처음으로 출발해버렸다. 과연 이 정도로 충실하게 훈련된 개가 주인을 물려고 할까……. 이빨을 세워 다른 사 람의 다리나 물어뜯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다못해 ‘맹견주의’라는 표시라도 달아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저 멀리서 일곱 번째 주자가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뒤로 맹렬하게 추격해오는 여덟 번째 인간이 보였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앞서 왔던 넷과는 무척 비교되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에게 계주봉을 전달해줄 윤준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옥녀봉의 정상은 이미 황혼으로 붉게 물들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류연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묵묵히 기다렸다.

중도에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규칙상 이곳 마지막 출발선에서 삼장 이상 떨어지면 감점이었다. 이미 열 명이 이곳을 출발했다. 열 한 개 조였으므로 그는 이곳에 남은 마지막 한 사람이었다.

“흥, 그 녀석은 오지 않아! 기다려도 소용없을걸?”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외친 사람은 철옥잠 마하령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비류연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기?”

비류연의 반문에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 아마 윤준호란 이름이었지? 화산의 저능아로 유명한? 아까 아주 성대하게 옥녀봉을 굴러내려 가던데? 아마 지금쯤 옥녀봉 입구에 도착해 있지 않을까? 오호호호호호!”

즐거워 죽겠다는 듯 마하령이 소리 높여 웃었다. 잠시 침묵하던 비류연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당신이 그랬나?”

낮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순간 마하령은 심장이 주저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이 일순간 경직됐다. 북풍에서 뽑은 차가운 실로 엮은 그물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얼어붙었던 것이 다. 차가운 얼음의 창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한 것만 같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아, 아니! 내, 내가… 그런 비겁한 짓을 할 것 같아? 이 천, 천하의 철옥잠 마하령이!”

혀마저 얼어붙었는지 말이 띄엄띄엄 나왔다. 그녀의 본능이 그녀의 의지에 반하여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비류연에 대한 증오가 더욱 끓어올랐다. 하지 만 지금의 그녀는 화내는 것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를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녀의 본능이 시끄럽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비류연이란 놈은 뭐하는 작자란 말인가? 왜 천하의 철옥잠 마하령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안 되느냔 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비류연은 그녀의 얼굴이 다채롭게 변화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묵묵히 옥녀봉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니 이건 이것대로 또 화가 났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비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 지금 출발해도 꼴찌인 자신의 순위를 재확인할 수 있을 뿐이야.”

“……”

이번에도 비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마치 공기라도 되는 양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 녀석은 오지 않아! 포기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비류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그 녀석은 온다!”

그가 산 구릉의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절뚝절뚝거리며 필사적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 거짓말!”

마하령의 입에서 부정을 통해 긍정을 재확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헤에헤엑헤헥, 헤헤…, 제가… 좀 늦었죠?”

몸의 이곳저곳 모두가 엉망진창이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먼지에 더럽혀져 있었다. 머리도 밀짚인형처럼 부스스하다. 여기저기 긁혀서 생긴 찰과상들이 보 였다. 심하게 구른 것이 분명했다. 다리도 다쳤는지 절뚝절뚝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성한 곳이 없을 텐데도 억지로 웃으며 계주봉을 내밀었다.

“헤헤…, 항상… 난… 항상 이렇다니깐…….”

웃고 있는 윤준호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졌다. 억지로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미 눈물의 홍수는 안와의 제방을 넘고 있었다.

“부… 분해요, 내가 좀더 제대로 달렸다면, 좀더 강했다면……. 그 녀석들의 암수 따위에 바보같이 당해버리고…….”

“그 녀석들?”

“그 왜… 마… 마천칠걸이라는…….

‘호오, 그렇게 나오셨단 말이지??

비류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여전히 오열하며 분함에 몸을 떨고 있는 윤준호의 얼굴을 비류연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묵묵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 .?!””

윤준호가 얼굴을 들어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앞머리에 가려져 입만 보이는 그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윤준호로부터 계주봉을 받아든 비류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 넌 틀렸어!”

“헤헤… 여, 역시 난 틀려먹은 걸까요?”

이제 더 이상 흘러나올 눈물도 없었다. 그러자 비류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넌 아까 자신이 늦었다고 말했지? 아냐, 넌 늦지 않았어. 딱 좋을 때 온 거야. 고수가 하수랑 맞바둑 두는 거 봤냐? 몇 점 정도는 깔게 해줘야 체면이 서지 않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네가 늦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부터 내가 증명해주지.”

“류, 류연…….”

그가 알던 그 비류연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이종(異種)의 존재 같았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왠지 힘이 솟았다.

“부, 부탁합니다!”

윤준호가 반듯한 자세로 포권지례를 취하며 힘차게 외쳤다. 좀 전의 풀죽은 모습은 이미 그의 전신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자 비류연도 포권으로 답하며 의지 가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맡겨두라고, 친구!”

이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복수의 신이 방문하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이거나 잠시 맡아줘!”

그렇게 말하며 비류연은 다리에 차고 있던 두 개의 묵룡환을 풀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손에 있는 것까지 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다리를 움직여본다. 장난이라도 치는 듯하다.

“오래간만에 푸니까 가볍고 좋은걸.”

마음속에 길이 그려진다. 정신이 그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감을 통해 자연이 느껴졌다. 비류연의 눈빛이 빛나는 순간, 그의 몸이 사라졌다. 질풍 같은 움직임이었다.

윤준호는 멍한 눈으로 그가 사라진 궤적을 쫓았다. 그러고는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폐부에 저장된 공기를 몽땅 쥐어짜낼 기세로 외쳤다. “반드시 이겨줘. ……! 친구!”

멀리서 비류연이 손을 흔들어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둘, 칠련창 종리추와 사갈검편 도추운이 그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지금은 천무봉이라 더 자주 불리는 낙안봉을 막 오를 때였다.

해가 검은 지평선 아래로 그 몸을 숨긴 지는 이미 오래였다. 지금은 음(陰)이 지배하는 밤의 영역이었고, 그들은 미약한 별과 달에 의지한 채 달리고 있었다. 그는 귀신처럼 느닷없이 나타났고, 빠르게 접근했다. 종리추는 안력을 돋워 힐끗 고개를 돌렸고, 어둠을 꿰뚫은 다음 그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자는 친절하게도 5장 거리 안까지 바싹 다가와 밤의 그림자 때문에 흐릿해질 수 있는 얼굴의 윤곽을 보다 확인하기 쉽도록 해주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괜한 친절이었고, 고로 전혀 고맙지 않았다.

자신들 일곱의 공격을 미꾸라지처럼 피해낸 자, 바로 비류연이란 인간이었다.

“여, 안녕!”

비류연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 둘은 그 인사를 무시했다. 뒤에서 ‘인사성이 바르지 못하구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렇게 원하는 답례를 해주기로 했다. 그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겠지만.

종리추와 도추운은 서로 마주보았고, 지금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전략적 제휴가 보다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백짓장을 맞들 때뿐만이 아니다.

“떨어져라!”

그들은 비류연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내딛는 발로 암석을 바스러뜨렸고 손을 휘둘러 나무를 쓰러뜨렸다.

부서진 돌이 가파른 경사를 굴러 비류연의 얼굴을 압박했고, 부러진 나무들이 울타리가 되어 발길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요리조리 흔들고 허리를 이 리저리 뒤틀며 돌 세례를 피해냈고, 쓰러지는 나무들을 발판 삼아 그 위를 달렸다. 그의 몸은 굴러오는 돌을 피할 만큼 충분히 유연했고, 쓰러지는 나무가 걸리적거 리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고 가벼웠다. 그것만으로도 종리추와 도추운에게는 충분한 위협이었다.

“끈질기군! 어떡하겠나, 추?”

“공자의 앞길을 막는 자를 용서할 수는 없지.”

이대로는 곧 따라잡힐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경공 속도도 범인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를 텐데 비류연의 속도는 그들을 훨씬 상회했다. 무서운 속도였다.

설마 대공자가 이런 놈에게 추월당할 리는 없지만 화근은 미리 제거해두는 게 좋았다.

“지금은 밤. 밤에 산을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 종종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거든!”

종리추의 말에 도추운은 눈에서 기광을 번뜩이며 허리춤에 있는 검편의 손잡이를 잡았다. 종리추가 등에 걸려 있던 일곱 개의 창 중 하나를 끌러내는 것이 보였 다.

그들은 다시 눈을 마주쳤고, 시선으로 적정 시기를 교환한 뒤 다시 타협했다. 무언의 신호를 통해 두 사람이 의식이 연결되는 순간, 두 개의 입에서 하나의 말이 동 시에 터져나왔다.

“죽어라!”

마천칠걸 중 두 명을 개떡으로 만든 비류연은 또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는 바람을 밟고, 높은 구릉을 넘고, 높다란 절벽을 뛰어내렸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천 험의 지형도 그의 발 아래에서 새로운 지름길을 만들어내야 했다.

차례차례로 5명을 제치고 이들은 자신이 추월당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 2명에게 인과응보의 선물을 안겨준 그는 또다시 비천룡 청흔의 입에 짤막한 경호 성을 발설하게 만들었다.

“어?”

청흔이 이변을 감지했을 때 이미 비류연의 몸은 저 멀리 멀어진 이후였고, 잠시 후 그는 몇 번 안면을 익힌 사람을 시야 안에 둘 수 있었다. 바로 구룡 중 최고의 실 력자라는 구정회주 용천명이었다.

“누구지?”

용천명은 자신의 지각 범위 안에 새로운 존재가 끼어들었음을 감지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뒤에 있던 존재는 청흔이었다. 물론 청흔은 구정회의 인물이었지만 이런 시합에서 일부러 져주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용천명도 그런 꼴 사나운 일을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전력을 다했는 데도 이길 수 없을 때만 회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청흔은 전력을 다 해 쫓아왔고,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떨어뜨리려 애썼다. 물론 그 사이 유일하게 자신을 앞서고 있는 사내 대공자 비를 쫓아가는 것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대공자 비.

상상 이상으로 놀라운 자였다. 옥녀봉에서 출발한 이래 계속해서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했지만 추월 가능 범위 내로 근접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가 더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좁혀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거리 유지에 힘을 쓰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식을 다시 한번 자신의 배후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청흔과 자신 사이의 공간에 새로운 존재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누군가가 구정회의 무 절을 추월했다는 이야기였다. 청흔의 그 비상한 속력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용천명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러나 더 많은 신경을 쓰기란 불가능했다. 자신의 속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가 점점 더 그것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며 압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바람이 자신의 배후에서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최후의 승부수를 위해 저장해두고 있던 진기의 일부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 을 이용해 속력을 배가시켰다.

“이제 떨어졌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헉!’ 하고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그것은 자신이 안심한 사이 그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용천명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고, 의외의 존재를 그곳에서 발견했다.

‘비류연!’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천명은 어떻게든 비류연을 떨어뜨려보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충만한 단전의 화로에 든 진기를 불살라 근육에 힘을 불어넣으며 밤의 중간을 한줄기 유성처럼 갈 랐다.

하지만 비류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용천명이 속도를 두 배 높이면 자신도 그 두 배를 높였고, 세 배를 높이면 세 배를 높였다.

용천명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등에 붙은 이 찰거머리를 떼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일 그러지 못하면 회주로서의 체면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계주 봉을 건네준 마하령에게 무슨 험한 소리를 들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묘책을 짜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 다.

그가 선택한 건 일부러 비류연의 승부욕을 자극해 험한 지형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지형이 거칠고 험난해지면 그만큼 고역을 치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 지만 그것은 패착이었다. 고역을 치른 것은 오히려 용천명 자신이었다. 비류연은 천년 묵은 원숭이조차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만큼 날렵한 동작으로 솟아난 암벽과 암벽, 계곡과 계곡 사이를 발에 날개가 달린 게 아닐까 의심 갈 정도의 속도로 날아 넘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머리 바로 위를!

마침내 비류연이 용천명을 추월한 것이다.

“앞으로 남은 것은 단 한 사람!’

비류연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돌로 이루어진 구릉 너머로 달이 뜨고, 함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산 정상의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횃불, 결승점이었다.

“이런!”

깜박 잊고 있었다. 비류연답지 않은 실책이었다. 용천명과의 대결에 너무 신경을 쓰는 바람에 남은 거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멀었고, 결승점은 비에게 너무 가까웠다. 비류연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비는 조금만 더 가면 결승점에 도착할 것이다. 이쯤 되면 방심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전혀 그런 기색도 없이 최고의 속도로 자신의 영광을 향해 날아갔다.

점점 더 함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마천각 소속의 인물들에서 터져나온 것이었지만 비류연은 그 사실을 눈치 챌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는 윤준호와 철석같이 약속한 게 있었고, 일단 약속을 한 이상 그것을 지켜야만 했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벌써 상대는 결승점이 지척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빠르다 해도 도저히 무리였다.

‘무리? 내가? 불가능??

그런 생각은 지금껏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지금 내가 미쳤나? 준호 녀석에게 자신의 한계를 짓지 말라고 했으면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해?”

갑자기 정신이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스스로 자신의 정의를 배반한 꼴이 된다. 스스로도 믿어주질 않는 자신을 누가 믿어준단 말인가? 자신을 포기하는 자는 가장 먼저 하늘에 버림받고 만다.

믿어라! 나를 믿어라! 그동안 쌓아왔던 땀과 길러왔던 힘을 믿어라. 넌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다.

너에게 불가능은 없다. 너의 육체는 아직 한계를 넘지 않았다. 너의 몸으로 무한을 구현하라. 믿어라! 믿어라!

나는 바람보다 빠르다. 나는 빛보다 빠르다. 나의 의지는 시간을 제압한다.

나의 몸은 빛보다 빠르게 시간을 가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저편에 ‘지금’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나(我)’ 이다!

그 순간,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세계가 일그러진 것인지, 자신의 감각이 일그러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변화가 찾

아왔다는 것이다.

‘뭐… 뭐지 이 감각은?”

순간 비류연은 자신의 몸이 가장 미세한 존재 단위로 분해, 전이(轉移)되는 것 같은 강렬한 감각을 느꼈다.

“이것은 무엇?”

형용할 수 없는 감각 속에서 그는 미세하게 나눠진 자신의 존재가 저편의 한 점을 향해 빨려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것은 빛과 시간과 별을 빨아들이 는 칠흑의 소용돌이 같은 흡입력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빛과 시간이 그와 함께 그 일점을 향해 빨려들어갔다.

빛과 소리가 사라지고 정적(靜寂)이 찾아왔다.

이윽고 거대한 함성이 화산에 울려퍼졌다.

“아깝게 됐네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나예린이 위로했다.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비류연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상심하지 말아요, 류연! 그런 모습 어울리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봤다. 어둠침침한 곳에 앉아 있는 것은 궁상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확실히 나답지 않을지도…….”

그래도 화는 잘 가라앉지 않는다.

“난 분명히 이겼어요. 그 바보 같은 심판관들이…….”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순간적으로 앞질러 들어왔다는 것을. 하지만 심판관들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서술일 것이다. 그 소실된 인지의 순간에 두 사람 모두 결승점을 통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저히 쫓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이 함께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심판관들이 당황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몇몇 율령자들의 갑 을논박을 시작으로 긴 토의가 이루어졌다. 문제는 누구도 제대로 그 도달 순간을 포착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었고, 그 때문에 토의는 열기를 더하며 길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판정이 나왔다.

비와 비류연, 모두 공동 1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진실이 아닌 타협으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판정이 나왔을 때 비류연은 율령자에 앞서 또 다른 당사자에게 먼저 질문했다.

“이름이 비라고 했던가? 당신은 어때?”

“뭐?”

“이 시합의 승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있는 거지. 뭔가 할말은 없나?”

잠시 입을 닫고 사고(思考)의 수레바퀴를 머릿속으로 몇 바퀴 돌린 다음 대공자 비는 말했다.

…난 심판관들의 판정에 승복한다.”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망설임의 잔재가 약간이라고는 하나 의식의 심층구조 서너 단계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부당하다 해도?”

다시 비류연이 질문했고, 비가 대답했다.

“부당하다 해도.”

모든 감정이 침묵한 목소리였다. 비류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일지라도?”

비는 정적의 대리석 위에 무언의 끌로 침묵을 조각했다.

“난 심판관의 판정에 승복한다. 불만은 없다.”

다시 자신이 조각한 침묵의 상을 망치로 깨부순 비가 처음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이번에는 비류연이 침묵의 사원을 지을 차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원을 지을 생각이 전혀 없었나보다.

“그래? 좀더 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당신의 자존심도 겨우 그 정도인 것 같군. 좋아, 당신이 정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다고 해주지. 당신의 마음 이 얼마만큼 이 일을 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늘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걸? 그래도 좋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평생 오늘의 패배감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라고!”

냉정함이 푸르스름하게 빛을 발하는 싸늘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분한 비의 뇌리 속에 그대로 새겨져 한동안 그의 귀를 떠나지 않는 메아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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