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삼성(三聖) 편
-여로(旅路)
“여정을 떠나기에 좋은 날씨로구나.”
눈부실 정도로 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날씨였다.
“아버님, 검은… 안 가져가십니까?”
노인이 외출할 때 일신상에서 검을 떼어놓은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그의 의문은 정당했다.
청수한 용모를 지닌 중년인의 물음에 새하얀 학창의를 걸친 노인은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허허허, 이미 내 마음속에 검이 있는데 그 무겁기만 하고 거추장스러운 걸 굳이 들고 갈 필요가 있겠느냐? 이거 하나면 족하다.”
그러면서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할, 할아버님! 그, 그것은……!”
중년인과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아버님, 백세를 넘긴 지 얼마나 되셨다고 벌써 노망나셨습니까? 아직 오 십 년도 채 안 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지 않은 것은 평소 노인에 대해 품고 있던 존경의 염(念)이 신앙에 가까웠던 탓이다. 그럼에도 청년은 신성모독을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이 집어든 것은 아무렇게나 쳐낸 나뭇가지 하나였다.
노인은 나뭇가지를 들고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윽고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무게도 적당하고, 길이도 적당하고, 모양도 적당한 것 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다 한 가지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음에 생각이 미쳤다.
“흠…, 이름이 있어야겠구나. 이제부터 ‘은하(銀河)’라 하도록 하자.”
불쏘시개 정도로나 쓰일 별 볼일 없던 나뭇가지의 인생(人生), 아니 ‘지생(枝生)’에 있어서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거창한 이름이었다. 무척이나 호강이 아닐 수 없 었다. 나뭇가지 주제에 언제 이만큼 막무가내일 정도로 황당하고 거창한 이름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 하지만… 할아버님, 그것은 검이 아닙니다.”
그러자 노인은 갸우뚱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이상한 소릴 다 하는구나! 검이 아니라니… 그럼 검이란 무엇이더냐?”
“그, 그것은…….”
막상 대답하려 하니 말문이 막혀버렸다. 검에 대한 지식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이 청년으로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재료가 철(鐵)로 만들어지면 검이더냐?”
노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금으로 만들어졌든 은으로 만들어졌든 성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검은 검이었다.
“그럼 길이가 삼척이고 폭이 이 촌이면 검이더냐?”
다시 노인이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길이가 삼 척이든 사 척이든, 폭이 일 촌이든 삼촌이든 그런 건 검의 정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검, 중검, 대검이라는 개념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손잡이가 가죽이든 어피(魚皮)로 되어 있든, 쇠로 되어 있든, 나무로 되어 있든 상관이 없겠구나. 그렇지?”
“물론입니다, 할아버님!”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철로 만든, 길이 삼척에 폭이 일 촌, 손잡이는 어피로 되어 있는 쇠붙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재료도 형태도 검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과연 검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그럼 너는 무엇을 검이라 부르겠느냐?”
청년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노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나 형태는 그 사물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는 하나 그것은 표면일 뿐 본질이라 할 수 없다. 그 재료나 형태만으로 어떤 사물을 정의할 수 없다면 그 목적과 기 능에 좀더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목적과 기능이라 하시면..
“사물에 대한 정의는 사회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정의의 대부분은 그 목적과 기능이 지닌 기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그렇다면 검의 기호는 무엇이겠느냐?” 청년은 자세를 바로하고 조용히 가르침을 기다렸다.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검이란 베고 찌르는 물건이다. 일부에서는 여러가지 주술적 의미를 지닌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무인에게 검이란 냉정하게 볼 때 베고 찌르는 것으로, 사람을 살상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도구를 말한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물체를 베거나 찌르는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검인 것이다. 베고 가르고 찌르는 것이야 말로 검의 본분, 검의 본성인 거지.”
청년은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그렇다면 그 형태나 재료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나뭇가지라도 노부가 이것으로 물체를 베고 찌를 수 있다면 이미 훌륭 한 검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이다.”
노인이 나뭇가지를 가볍게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삼장 너머쯤에 떨어져 정교한 세공을 뽐내고 있던 화려하고 고풍스런 석등 하나가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 절단면은 거울을 보는 듯 소름끼치도록 매끄러웠다.
“흡!”
청년과 중년인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청년은 그 신기에 새삼 놀란 것이지만 중년인은 다른 의미에서 경악한 것이었다. 노인의 아들이자 청년의 아버지인 그는 현재 말을 잊을 정도로 기겁해 있었지만 그의 이상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애로운 눈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어떠냐? 이런데도 너는 아직도 이것을 검이라 하지 못하겠느냐?”
“아닙니다. 할아버님의 손에 그것이 들려 있는 이상, 당신께서 그것을 검이라 명명하신 이상 그것은 이미 훌륭한 하나의 신검(神劍)입니다.”
존경과 경애를 소리에 담아 청년이 대답했다. 이 노인의 손에 들린 이상 그것이 무엇이든 별 볼일 없는 종이쪼가리든, 다 떨어진 천 조각이든, 풀잎이든 갈대든 상 관없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운, 지나치게 잘 드는 명검인 것이다.
“감사드리거라!”
다시 신색을 회복한 중년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청년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깊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할아버님!”
“됐다. 별것도 아닌 것을. 예가 너무 지나쳐 받는 사람이 불편하구나.”
노인이 웃으며 과례를 물렸다. 이 조손지간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년인이 노인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그런데 아버님!”
노인의 시선이 아들을 향했다.
“응? 왜 그러느냐?”
“이런 말씀 꼭 드려야만 될는지 송구스러워 망설였습니다만…….”
중년인은 용건을 꺼내기가 아주 힘겹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이 말을 내뱉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아달라는 뜻 같았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부할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냐? 아비와 자식 간에 대화를 나누는데 어려울 게 무에 있겠느냐? 말해보거라!”
어떤 이상 징후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아버님의 말씀을 받자와 기탄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결의마저 느껴지는 그 말에 노인은 ‘음,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아버님께서 보여주신 검기는 역시나 더없이 훌륭한 것이라 그 고절한 경지에 이 아들은 언제나처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론이 수상할 정도로 길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마음씨 좋은 노인도 약간 경계의 빛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커흠!’ 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헛기침소리가 울려퍼 졌다.
맹인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만들기 위한 공양미 삼백 석 때문에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는 이국 처녀 심모 양의 예를 본받아 효심을 발휘하여, 이 건에 대한 언급을 여기에서 그만두고 덮어둘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가솔들을 이끄는 가주로서의 막중한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힘겹게, 비통한 마음 으로 진실을 전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척 좋은데 말입니다… 아버님께서 너무나 깨끗하게 절단하신, 그 운남 대리석을 깎아 만든 당나라 양식의 석등 말입니다…….”
‘컥!’ 하는 표정이 노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쩐지 절단면이 너무 지나치게 매끄럽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 비싼 거냐?”
떨떠름한 얼굴로 노인이 반문했다. 좀 전에 손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던 신기 넘치던 얼굴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아들은 진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는 신념과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아래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요!”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려는 의도일까? 부담감이 가중되길 바라기라도 하듯 또박또박 힘주어 대답했다.
“커흠… 그, 그건… 미안하게 됐다…….”
노인의 입에서 연신 헛기침이 터져나왔다. 속에 켕기는 게 있으면 아무리 이런 초고수라도 당당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음부턴 부디 주의해주시길!”
중년인의 태도는 좋게 보면 공평무사, 나쁘게 보면 냉혈무정이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감히 뭐라 토를 달지 않았다. 혈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만사를 공평무사 하고 냉정하게 처리하라고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노인 자신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믿고 따르는 사상을 아들이 고스란히 행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아비라 는 지위를 이용해 억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가 가장 혐오하는 행위 중에 하나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정의를 뒤집어엎는 번복행위이기도 했다. 그래서는 낯부끄 러워 하늘도 제대로 올려다볼 수 없게 된다.
“그, 그럼 다녀오마. 오랜만에 친구들이나 만나야겠다. 다들 오랜만의 나들이인데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자, 그럼!”
불편한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듯 노인은 서둘러 몸을 뺐다.
“다녀오십시오, 아버님.”
“다녀오십시오, 할아버님.”
등뒤에서 아들과 손자의 배웅인사가 이어졌지만 노인은 손만 한번 가볍게 흔들어보였을 뿐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아들의 느낌에 중년인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재회가 아니시냐! 즐거우실 만도 하시겠지!”
“삼대 거물회동이군요.”
“그래, 그 세 분이 만나면 강호무림도 내일 당장 전복시킬 수 있을 거다.”
“가능하죠!”
청년이 너무나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뭐, 동창회 수준이겠지. 무림정복은 아마 귀찮아서 안 하실 게다.”
“확실히!”
아버지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는 아들은 당장 납득했다.
보고서를 읽어내려가는 사영뇌 치사한의 얼굴은 크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게 사실인가?”
당연히 사실일 것이다. 이런 중대한 사실을 거짓으로 보고할 만큼 멍청한 부하는 둔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물은 것은 재차 확인할 만큼 사안이 중대했 던 탓이었다.
“예, 군사! 아무래도 꼬리를 잡힌 것 같습니다.”
‘특일급 극비 보고서를 가져온 장본인인 사마흔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증거는 화평장과 함께 재가 되었을 터! 그 존재를 알아채고 거기까지 역추적해올 수 있을 만한 흔적은 남기지 않았을 텐데?”
기둥뿌리까지 재가 되는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전에 분명히 받았던 것이다.
“설마 그때의 ‘사고’가 놈들 귀에 들어갔나?”
주위 군영의 병사들까지 진압을 위해 동원될 정도로 요란법석을 떨었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운반할 때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바보 같은 놈들!”
최악의 경우 연결선을 끊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하게 그들이나 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디 개인가?”
치사한이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무림맹인 것 같습니다.”
“쳇, 백도의 개들이……. 이번 놈들은 제법 냄새를 잘 맡는 견종들이로군! 어디까지 냄새를 맡은 것 같나?”
“아직 우리의 존재까지는 밝혀내지 못한 듯싶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지 모릅니다.”
치시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숙고에 들어갔다. 사마흔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몇 명인가?”
개들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다.
“모두 열여덟 명입니다.”
“우두머리는?”
“구척철심안(九尺鐵審眼)입니다.”
“그 도굴꾼 녀석이……. 근데 그놈이 그렇게 유능했나?”
도굴꾼은 그자에게 악감정이 있는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하용 단골손님이었다. 그 존재는 정보로야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명성은 업무능력보다는 특이한 그만의 능력에 기인한 바가 더 컸다.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를 잡을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우연도 능력 중 하나였다.
“얌전히 도굴이나 하고 있었으면 목숨이나 부지했을 것을!”
치사한이 이를 갈며 말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선택은 하나뿐이다. 전원 말살시킨다. ‘멸성대(滅聖)’의 사용을 허가한다. 2개 대대를 주지!”
‘멸성대’라는 말에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이 사내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멸성대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2개 대대씩이나!”
사내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건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이었다.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애초에 멸성대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런 조무래기를 상대하기 위해 육성한 조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 정도는 반 개 대대만 나서도 충분했다.
그러나 치사한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 그 살인기계들을 보낸다. 이번 기회에 얼마나 제대로 훈련됐는지 확인해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분의 허가도 없이 그들을 쓴다는 것은.”
그 부분이 이 사내 사마흔을 껄끄럽게 만드는 모양이다. 사실 그건 치사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건은 그의 독단에 월권까지 겹쳐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급해 하고 있었다.
“그분의 재가를 받을 시간 여유는 없다. 이기는 게 아니라 한 집단을 완전히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배 이상의 힘이 필요한 법. 압도적인 힘으로 단숨에 정리한다! 이번 작전이 제대로 성공하면 그들을 쓸 일도 없을 터. 총력을 쏟아 완벽을 기하도록.”
그만큼 이번 작전은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사마흔이 대답했다.
“은밀히 처리하게. 이 실수가 만일 공자께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목이 서늘해진다. 두려움 때문인지 치사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그는 나직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못 다한 말을 끝맺었다. “나는 물론이고 자네도 아마 무사하지 못할 것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치사한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힘차게 외쳤다.
“용(龍燃)’의 존재는 아직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그것에 대해 알려 하는 모든 존재를 말살시켜라. 그것이 자네의 역할, 자네의 사명일 것이다. 가라! 천겁 의 검, 천참마검 사마흔이여!”
“명을 받겠습니다!”
동시에 그의 존재는 방 안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헉, 헉, 헉!”
목이 갈라지는 것 같은 갈증, 터질 듯이 고통스런 폐, 당장이라도 뼈와 살이 분리될 듯한 다리……. 그냥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 다.
“허억허억허억!”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은 게 오히려 신기했다. 그래도 안명후는 단전의 내공을 있는 대로 전부 뽑아올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칫, 들켜버리다니! 헉, 헉!”
후회막급이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답지 않은 실수를!”
그러나 이미 배는 나루를 떠난 이후였다. 후회는 살아남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대장님, 이 잡일은 우짠다죠? 헤엑헤엑!”
옆에 바싹 붙어 달리던 개코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엉덩이에 연기 나기는 개코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의 코가 너무 성능이 좋았던 게 문제였다.
최대한 은밀하게 추적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상대의 이목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영민했다.
“제길, 아직 내막조차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는데!”
내막이라도 완전히 파악했더라면 이보다는 덜 억울했을 것이다.
“대장, 헥헥! 어떡할깝쇼, 헥헥? 아직도 따라옵니다요, 헥헥!”
개코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숨은 이미 턱밑까지 차오른 듯 매우 힘겨워 보였다. 벌써 3일째였다. 추적은 3일 밤 3일 낮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월의 운행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데만 몰두했다. 사냥개도 그들만큼 끈질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돌아가면(만일 돌아갈 수 있을 때 이야기지만) 궁지에 몰린 인간의 도주 한계 체력에 대한 보고서나 새로 써야겠군.”
3일 밤낮 동안 직접 인체실험도 했으니 자료는 충분했다. 그래, 만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젠장, 그놈들은 잠도 안 자냐?”
음모의 수원(水原)에 닿기도 전에 그들은 장애에 부딪치고 말았다.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흑의복면인들. 그놈들은 정말 악마처럼 무서운 자들이었다. 이십 명이었던 부하들 중에 남아 있는 건 단 일곱 명. 그들도 지금은 사방으로 흩어져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포기해도 좋잖아! 더 이상 못 달린다고!”
안명후가 어금니를 갈며 외쳤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아직 발은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달리기를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던 것이다.
사방으로부터 살기의 그물이 그의 전신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몰이꾼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몰이당하는 사슴의 심정이 이러할까?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몸은 이미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흥건했다.
“헥헥! 아이고, 대장님! 이제는 더 이상 못 달리겠습니다요, 헤엑, 헤엑!”
숨을 헐떡거리며 개코가 우는 소리를 했다. 그의 숨은 곧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안색도 염한 시체처럼 창백한 게 곧바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최악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점점 풀려가고 있었다. 경공의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져 곧 굼벵이한테도 추월당할 것만 같았다.
“바보 자식! 지금 멈추면 죽어! 달리다가 숨이 넘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 어차피 달려도 죽고 멈춰도 죽는다면 조금이라도 더 달아나란 말이야!”
악에 받친 목소리로 안명후가 외쳤다.
“히익 히익, 임마! 너 때문에 고함지르다가 나까지 숨이 차고 있잖아!”
안명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의 호흡 역시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다. 자신의 몸도 이제는 한계였다.
‘역시 그 수단밖에 없는 건가…….?
위험한 것을 알지만,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이대로 달리다 게거품 물고 쓰러진 채 추적자에게 잡혀 개죽음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안명후가 개코와 약간 거리를 두고 달려오는 부하 두 명을 향해 외쳤다.
“별수없다. 모두 ‘기폭환(氣爆丸)’을 복용한다!”
“기, 기폭환을 말입니까?”
“그래! 이제 육체는 한계다. 더 이상 달아날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아! 체력도 진기도 모두 바닥, 그 수밖에는 없어!”
기사회생의 수단임에도 껄끄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그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무리도 아니겠지! 나 자신부터가 이렇게 찝찝한 것을…….’
기폭환은 말 그대로 몸 안의 진기가 고갈된 육체에 남겨진 잠력을 격발시키는 약으로, 단전의 우물이 바닥났을 때라도 그것을 복용하면 단기적으로나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비약(秘藥)이다. 하지만 그 힘은 생명을 깎고 짜내어 강제로 순간의 힘을 발휘시키는 약이라 사용 후 엄청난 부작용이 따르고, 최 악의 경우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약이었다. 때문에 이 양날의 검은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면 함부로 쓰지 않는 비장의 수였다.
“울 엄마가 불량식품은 먹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개코가 투덜거리면서 품에서 밀봉된 나무갑에 들어 있는 ‘기폭환을 꺼내들었다. 방수밀봉처리가 되어 있어서 우천시나 물속에서도 끄떡없는 물건이었다. 안명후 와 나머지 두 명도 경공 전개를 멈추지 않은 채 그것을 꺼내들고 엄밀한 밀봉을 벗겨냈다. 단환은 그 위험성을 경고라도 하듯 피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애교도
없는 녀석이라고 개코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럼!”
네 명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복용했다. 그 맛은 무척이나 썼고 냄새 역시 강력했다. ‘큭, 좋은 약은 입에 쓰 다지만 나쁜 약까지 이렇게 쓸 필요는 없잖아!’라고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나중에 돌아가면 – 역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지만 – 기폭환의 맛에 대한 개선책을 요망 하는 탄원서를 상부에 올려야겠다고 안명후는 결심했다. 아무래도 현장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듯했다.
“이거 만든 놈들은 어떤 맛인지 짐작도 못할 거야. 이래서 책상물림 녀석들은 틀려먹었다니깐.”
쓸데없는 데까지 트집을 잡아 투덜거린다. 하지만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의 취향이 미식 부분에 있어서 특히나 까다로워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쓸데없는 불평이라도 늘어놓고 있지 않으면 지금 느끼고 있는 절망감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필사적인 것이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긴급시 복용하는 약이 일반 보약처럼 그 효과가 느리면 말이 되지 않는다.
약은 복용과 동시에 순식간에 분해되고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다음 순간 단전으로부터 엄청난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헉!”
그 노도같이 밀려오는 힘의 물결에 안명후는 기함을 터뜨렸다. 텅 비었던 단전 속이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기의 소용돌이였다.
“효, 효과 하나는 끝내주는군!”
즉시 호흡이 안정되고 땀이 멎었다. 쌓였던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고 천 근 만 근 같던 사지에 활력이 넘쳐흘러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독약에 가까운 약이지만 지금 이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명약보다도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맛이 더럽게 없었던 것은 관대하게 잊어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우린 흩어진다. 우리의 사명을 잊지 마라. 우리의 사명은 적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이 정보를 꼭 맹에 전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대장님!”
가서 써야 할 불평불만 서류도 많았다. 대부분이 기각되어 휴지통에 들어갈 게 분명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책상에 앉아 실실 얼굴을 쪼개며 기각되고 외 면당할 게 당연한 불평불만을 일필휘지로 갈겨쓰며 일상을 음미한다는 게 중요했다.
‘빌어먹을! 반드시 상신소 여관(官)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상신서를 한아름 듬뿍 안겨주고 말리라!’
그 여관이 그 일로 인해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해도 그는 기쁘게 웃어줄 수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라! 살아서 화산에서 만나자! 어떤 모습으로, 어떤 형태로, 어떤 비굴한 모습으로 변해도 살아남아라.”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비장함은 곧 사라지고 웃음이 떠올랐다. 넘치는 활력이 그들에게 잠깐의 여유를 찾아준 것이다.
“야, 개코! 살아서 만나자! 살아서 외상값 갚아야지!”
느닷없는 빚 독촉에 개코가 웃었다.
“물론입죠. 대장도 살아남으쇼. 등쳐먹을 사람이 한 사람은 필요항께 말이오. 근데 이런 때까지 외상값 타령입니까? 그거 꼭 받아야 하는 거요?”
“물론이지. 이 세상에 외상값 남겨두고 죽으면 저승 가서 찝찝해!”
안명후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 각오해! 살아남아서 이자까지 쳐서 반드시 다 받아낼 테니깐!”
“혹독하네요! 대장에게 외상값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겠구먼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개코의 너스레에 안명후가 땀에 젖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넌 내 외상값 갚고 죽을 운명이야! 멋대로 죽지 말라고!”
“어, 치사하게 대장님꺼만! 나에게도 은자 석 냥 빚진 것 있는데!”
뒤에 따라오던 부관 이명이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나, 나도, 나도! 난 은장 두 냥! 석 달 전에 확실히 빌려줬다고!”
이번엔 부부장 오정이 끼어들었다. 개코를 바라보는 안명후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너 도대체 몇 사람에게 얼마나 빚진 거냐?”
“헤헤!”
속도가 종전보다 세 배 이상 빨라진 개코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바보처럼 웃었다. 제대로 셀 수 없다는 표시였다.
안명후는 그 모습에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탓일까? 이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도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감상적인 기분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여기서 흩어진다! 집결 장소는 모두 알고 있겠지?”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운을!”
네 사람의 동지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들 네 명 모두가 다시 이렇게 마주보고 웃는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도 그들은 웃었다.
그것이 사선으로 향하는 전우에 대한 예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