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18화 – 멸성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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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5권 18화 – 멸성대 등장

멸성대 등장

-신위

객잔은 거지들의 걸식행위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전략 지점이다. 이곳을 빼놓고는 감히 걸식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필수경로인 셈이다.

이곳을 어떻게 공략하느냐에 따라 거지 생활의 빛깔이 정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객잔에서 요리하다 남은 부산물이라도 얻는 날이면 그날 그 거지의 인생은 단숨에 밝은 도홧빛으로 물든다. 반면 덩치 크고, 뚝심 좋고, 주 먹 매운 어깨에게 걸렸다가는 그날 이후 며칠, 혹은 몇 주 동안은 그 생활이 칙칙한 잿빛으로 변해 우울해진다.

그럼에도 거지들의 객잔 공략 시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늘상 있는 일이다. 그래서 객잔에 그 거지가 나타났을 때 손님 중에 그 존재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주인 두칠을 빼면 말이다.

“야, 이눔아! 귀가 먹었냐? 빨리 냉큼 꺼지지 못해? 아니면 우리 화음객잔이 자랑하는 삼대 별미에도 뒤지지 않는 이 두칠 어르신네의 돌주먹 맛을 한번 보여줄 까?”

두칠이 솥뚜껑만한 주먹을 빙빙 돌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거지는 걸식을 위한 철면의 무심함을 익혔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지 마시고 나으리! 이 불쌍한 거지를 위해 밥 한 숟갈만 적선해주십쇼!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 잘못하면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습니다요!” 기름때가 덕지덕지 앉은 머리카락과 꾀죄죄한 얼굴의 거지가 구구절절한 목소리로 애걸하며 말했다. 지병이라도 있는지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움직이 는 것조차 무척 힘겨워 보여 더욱 동정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칠이 삼십 년 장사를 하며 상대한 거지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약간 과장하면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해도 무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지겹고 지루하 고 우아하지 못한 싸움이었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타협하며 그는 이 밥장사를 꾸려왔던 것이다. 단순한 심리공격에 넘어갈 만큼 그는 녹록하지 않았다.

“고런 얕은 수작에 이 두칠 어르신네가 넘어갈 것 같으냐? 빨리 꺼져! 경을 치기 전에!”

손님이 드글드글할 때라면 기분이 좋아서라도 밥 한 덩이 던져줄 수 있겠지만 오늘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주먹으로는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몽둥 이를 들고 휘둘렀다. 거지는 발을 엇갈라 두 번 뒤로 빼며 아슬아슬하게 그의 몽둥이질을 피했다.

“음? 저건!”

그것을 본 임덕성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발의 움직임에서 어떤 법칙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이하게도 개방의 것이 아니었다. 비척거리는 몸 을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도 타구봉이 아니라 헝겊으로 둘둘 말린 막대기였다.

화가 난 두칠이 씨근대며 소리쳤다.

“어쭈, 이놈이 피해? 기다려라! 내 네놈의 그 다리몽둥이를…….”

그때 퀭 하던 거지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위험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거지는 두칠을 향해 급히 쌍장(掌)을 내밀었다.

‘둥!’하는 북 치는 소리가 객잔주인의 두툼한 가슴팍에서 울려퍼짐과 동시에 신형이 뒤로 일장 가까이 부웅 날라갔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주인만이 아니었다. 쌍 장을 쳐낸 거지 역시 그 반동인지 뒤로 일장 가까이 밀려나 있었다.

“컥! 이… 거지새끼가 감히 사람을…….?

온갖 욕설과 다양한 저주의 말들로 구성될 예정이었던 두칠의 발작적 언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히이이이익!”

두칠의 입에서 혼비백산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묵빛 비수!

보기만 해도 불길함이 넘치는 한 자루의 검은 비수가 그가 방금 전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자루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거지의 소매는 예리하게 갈라져 있었고, 그 틈으로 드러난 팔뚝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진 것이 언뜻 보였다. 비수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인 듯한 그곳에서 한줄 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제야 영문을 알아차린 두칠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 은공! 밥은 얼마든지…….”

거지가 한순간에 은공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지만 어째 그 보은이란 내용이 매우 신통치 않다.

그러나 지금 그 거지에게는 걸식해서 배를 채울 만한 여유도 없는 듯했다. 비굴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 전체에 기백 서린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저

히 동일인이라고 봐주기 힘든 변모였다. 철컹! 쾅!

갑자기 아무런 낌새도 없이 객잔의 정문이 닫혔다.

쾅쾅쾅쾅!

그 다음 차례로 사방을 향해 활짝 열려 있던 도합 열두 개의 객잔창문이 일, 이층 모두 일제히 닫혔다. 그러나 낮이라 생각 이상으로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귀, 귀신이다!”

두칠이 기겁하며 외쳤다.

이 귀신은 시간관념도 없단 말인가! 벌건 대낮에 웬 귀신질이란 말인가! 욕지거리가 샘물 솟듯 튀어나왔다.

“심령현상일까요?”

모경이 얼굴에 경계의 빛을 띠며 묻는 바람에 임덕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을 입의 번거로움까지 무릅쓰며 말해야만 했다.

“당연히 인간의 소행이지!”

그 말대로였다.

“상당히 수고를 끼치는군!”

나직하지만 객잔 전체를 진동시키는 힘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이층 난간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큭, 덜미를 잡힌 건가…….”

거지가 신음하며 말했다. 들은 기억이 있는 목소리다. 아니,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저 목소리를 피해 이곳까지 달아났던 것이다.

그는 전신을 빛 샐 틈 없는 칠흑의 천으로 온몸을 둘렀는데 불청객답게 얼굴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둠을 벗삼아, 밤이슬을 맞으며 사는 어 둠의 종복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추적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친 것은 장한 일이나 이제 술래잡기는 그만 끝내야겠소! 이 몸도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 너무 놀이에 열중하면 윗사람에게 책잡 히고 만다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상당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 혼자서 과연 가능할까?”

거지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기폭환의 부작용은 상당할 것이오만?”

흑의인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그의 몸이 누더기 아래서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우리의 정보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소. 게다가 그런 건 별로 큰 비밀도 아니지 않소?”

흑의인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하지만 난 아직 잡힌 게 아냐! 그렇게 호락호락 잡혀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것이다!”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기백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신념에 생명을 건 자들에게서 종종 느껴지곤 하는 모습이었다.

“어머, 사나이라면 의당 그래야죠!”

이런 상황에서도 맛의 음미를 멈추지 않고 있던 중년여인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전혀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젓가락도 그대로 든 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범죄에 가까운 태연함을 보이다니……. 흑의인의 눈은 자연스럽게 중년여인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시선을 눈치 챈 여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냥 지나가던 밥 먹는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자, 그럼 하던 용건이나 끝내세요. 호호호호!”

이런 살벌한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구김살도 없는 환한 미소였다.

그렇게 말하고는 여인은 계속해서 음식을 먹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두 노인도 무사태평한 태도로 술을 홀짝이며 젓가락을 놀렸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든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흑의복면인은 이 무신경한 태도에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신색을 회복했다.

“뭐, 그런 여유도 지금뿐일 거요. 다른 분들도 살려둘 생각은 없으니깐. 누구도 살아서 이 객잔을 나갈 수 없을 겁니다.”

“너무 호언장담하는 것 아닌가? 겨우 당신 혼자서?”

가짜 거지가 이를 갈며 외쳤다.

“너무 성급한 결론? 소생은 혼자 왔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번도 없소만?”

그의 신호와 동시에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온 것처럼 일층과 이층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흑의복면인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온몸을 어둠의 색깔로 감싸고 있었다. 불길함이란 추상(抽象)의 관념이 그 속성(屬性)을 발휘하기 위해 인간의 형상(形象)을 갖춘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복면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눈은 그들의 본성을 대변하듯 무생물처럼 무감정했다.

“제길,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것을!”

자신을 포위한 흑의복면들을 둘러보면서 거지는 이를 갈았다. 압도적인 열세였다.

상황은 최악, 기사회생을 바라는 것조차 요원해 보였다.

“같이 갈 친구가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거요!”

지휘자 흑의복면인의 손에서 어떤 것이 휘익 던져졌다.

툭!

데구르르르르!

피륙이 상접한 거지의 발치께까지 열심히 굴러서 도착한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수급이었다. 목 아래를 잃어버린 수급의 두 눈은 한이 맺힌 듯 비통하게 부릅떠 져 있었다.

그것을 본 거지의 홀쭉하고 지저분한 입가는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고 두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알아보시겠소?”

물론 알고 있는 얼굴, 알고 있는 사람, 알고 있는 부하였다.

“개, 개코!”

비틀린 입술 사이로 비통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수급의 주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 동고동락하던 부하 개코 왕견이었다.

“바보 자식! 언젠가 반드시 외상값을 갚고야 말겠노라고 큰소리친 주제에…….”

거지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아직 남아 있는 나머지 두 개도 보시겠소? 정천맹 섬서지부 특급 감찰조사관 구척철심안 안명후 나으리?”

겨울 밤바다에 부는 싸늘한 해풍처럼 무심한 목소리로 복면인이 말했다.

“으아아아악! 사, 살인이다!”

두칠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밖으로 도망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 저런 잔인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여인은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다지 놀란 기색은 없는 듯했다. 일행인 두 노인 역시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조용한 시선으로 사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두목, 좀 위험한 것 같습니다만? 몸을 빼는 게 어떨까요?”

모경이 귀엣말로 속삭였다. 무림맹 소속 감찰조사관까지 연루된 이야기라면 얽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이미 얼떨결에 얽혀버리고 말았지만). 상황이 더 나빠 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게 좋았다.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시끄럽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갈 수 있겠냐?”

“그럼 설마 도와줄 생각입니까?”

손가락으로 거지 몰골의 안명후를 가리키며 물었다.

“미쳤냐? 우리가 정천맹의 인물을 왜 도와줘야 하는데? 무슨 의리로?”

“확실히 그렇죠.”

정천맹은 그들 녹림칠십이채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만에 하나 그곳 소속 감찰조사관을 도와준다는 것은 전 녹림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럼?”

“그렇다고 이 정도 일로 벌벌 떨며 꽁지를 빼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냐? 고렇겐 못해!”

임덕성이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외쳤다.

“겨,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럼 다른 이유가 뭐가 있냐? 내 체면보다 중요한 게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으냐?”

그런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하고 허접한 이유를 가지고 이런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그르치다니……. 억울하지만 힘이 약하다보니 항의할 수도 없었다. 상사가 무식하면 아랫사람이 고생이라더니 자기가 꼭 그 꼴이었다.

“아무래도 그 체면이란 것 때문에 오늘 고생이 훤히 열린 것 같습니다요?”

빈정거리는 투로 모경이 말했다.

“뿔뿔히 흩어져 거지 흉내에 구걸이라도 하고 있으면 찾지 못할 줄 알았나? 우리 ‘멸성대’의 힘을 너무 얕본 것 같군.”

멸성대라는 이름이 나온 대목에서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의 몸이 잠시 꿈틀거렸다.

“천무삼성이라 할지라도 우리 손에 걸리면 죽음을 피해 가지 못한다. 우린 그런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졌으니깐. 하물며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이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인데 안됐소, 안 감찰. 여기서 죽어줘야겠소!”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긴 이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이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 무서워라! 들으셨어요? 천무삼성도 당해내지 못한데요.”

무인에게 검이 생명이듯 자신에게는 젓가락이 생명이라는 듯 여전히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중년여인이 ‘어머나 깜짝이야!’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 노인을 향해 정말 놀랍지 않아요!’하며 경탄성을 터뜨렸다. 말의 내용에 비해 전혀 긴장감 없는 목소리였다.

물론 여인의 일행 두 사람도 그 이야기를 확실히 들었다. 그것은 스쳐지나갈 수 없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청의 노인에게 있어 그것은 정말이지 그냥 듣고 있기에는 배꼽이 아파서 계속 들어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푸, 푸풋……. 더, 더 이상은 안 돼…….?”

청의 노인의 배꼽을 간질이던 그 근질거림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것은 홍수처럼 인내의 둑을 부수고 폭소가 되어 외부를 향해 터져나왔다.

“푸하하하하하하! 크헤헤헤헤헤헤헤! 낄낄낄낄!”

청의 노인의 앙천대소에 바늘 끝 같은 긴장이 단숨에 무너졌다. 지진이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게 만드는 노인답지 않게 패기 넘치는 웃음 이었다.

“이거야 원, 더 이상 가소로워서 들어줄 수가 없구먼!”

작은 체구의 노인이 쭈욱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뭐냐, 늙은이? 죽고 싶나?”

조금 전까지 가면처럼 유지하던 가식적인 예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협박에 노인은 쩨쩨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차피 다 죽일 생각 아닌가?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노인의 말은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증거인멸은 무엇보다도 최우선의 미덕이자 철칙이었다.

“잘 아시는군! 그럼 기다리시오! 곧 죽여드릴 테니!”

비정함이 넘쳐흐르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청의 노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천무삼성 뭐 어쩌고 어째? 푸헤헤헤헤!”

“그게 그렇게 우습나?”

“우습냐고? 당연히 우습지!”

벽력성 같은 일갈과 함께 순간 청의 노인의 몸에서 태산 같은 기백이 뿜어져나왔다. 장내를 일순간에 압도하는 거대한 기였다.

“이, 이런 존재감이!”

흑의복면인 사마흔은 기겁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압력이었다. 저 작은 체구의 노인에게서 뿜어져나온 기세라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거대함 이었다. 장내 모든 곳에 노인의 존재가 물샐 틈 없이 꽉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

청의 노인의 입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흐흐흐흐흐, 쫄따구들이 입만 살아가지고 나불대다니! 흥, 네놈 같은 졸자들은 이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해!”

노인은 자신의 귓구멍을 후비고 있던 둘째손가락을 장난처럼 내보이며 말했다.

“다, 당신이 뭐기에?”

떨리는 목소리로 사마흔이 물었다.

“네놈들에게 가르쳐줄 만큼 이름값이 폭락하지는 않았다. 몽땅 덤벼라! 충분히 귀여워해주마!”

정말 패기만만한 용력이었다.

“허허 이것 참! 다 늙어서 그렇게까지 열을 내다니……. 자넨 아직도 청춘인 모양이네.”

백의 노인의 말에 중년여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청춘도 좋지만 너무 화내는 건 몸에 좋지 않아요. 애송이들을 상대로 점잖지 못하잖아요! 그냥 좋은 말로 돌려보내세요.” 여인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럼 말로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오?”

“말 안 듣는 아이에게는 맴매밖에 없겠죠.”

중년여인의 망설임 없는 말에 부르르 흑의복면인의 몸이 한차례 떨렸다.

아무리 점잖은 살인기계 사마흔이라도 더 이상은 인내의 한계였다.

“다 같이 죽여라!”

분노한 사마흔이 외쳤다.

그것은 확실히 대실수였다.

청의 노인이 손가락 하나를 운운했을 때 사마흔은 그것이 단지 비유적인 상징성을 지닌 말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희귀한 말도 아니었다. 그것은 허세를 부릴 때 무 림인들 사이에서 종종 단골로 사용되는 말이었으니깐. 하지만 설마 그것이 직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된,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청의 노인은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해 팔꿈치를 지나 손목을 넘어 손금의 그물을 헤치고 도달한 마지막 지점인 다섯 손가락 중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이층 우측에 있는 복면인 하나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조금 전 후비다 만 귀지의 잔재가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며 검지가락을 가볍게 돌렸다. 장난스런 움직임이었지만 그 반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응? 어, 어, 어?”

“저게 무슨 미친 짓거리지?”라며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복면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검지가락이 빙글빙글 나선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인 것에 의해 발생 한 보이지 않는 기류의 흐름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생각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 이게…….”

그러나 복면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청의 노인이 검지로 크게 한번 원호를 그렸던 것이다.

“으아악!”

지명 당한 복면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상하가 반전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쾅!’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복면인의 머리가 바닥과 조우했다. 두 발로 서는 법은 배웠어도 머리통 하나만으로 서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한 대가를 치르 고 만 것이다.

두칠은 끔찍한 상상에 무의식적으로 현장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둘 중 하나는 가루가 났음직한 큼직한 소리였다. 마룻바닥에 스며든 피를 닦으려면 아무래도 허리가 휠 정도로 청소에 정진해야 될 듯했다.

“이, 이럴 수가…”

“흑의복면인반전두부작살사건’이라 임시 명명된 사고지점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던 사마흔으로서도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하 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방금 전 벌어진 의문의 사태가 저 청의 노인의 검지가 움직인 것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다시 청의 노인의 검지가락이 이층을 향했다. 이번에는 좌측 끝에 있는 복면인이었다. 선례가 있었기에 그 복면인은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노인의 검지는 원호를 그리고…….

쾅!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가 객잔 내에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방비를 하려고 했을 텐데도 속수무책이었다.

“하나하나 잡으려니 귀찮군!”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손을 쭉 뻗었다. 여전히 펴진 손가락은 양쪽 다 검지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끓는 가마솥을 국자로 젓듯이 이리저리 휙휙 젓는다.

“어, 어, 어, 어…….”

여기저기서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무리도 아니었다. 노인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항거할 수 없는 흐름이 허공 중에 생겨나고 있었다. 그 흐름은 장마철 의 거친 강물살보다도 거대하고 면면부절 유장했다. 때로는 파도 치고, 때로는 너울지며,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자연의 거대한 힘을 눈앞에 둔 것 같 았다.

그 거대한 흐름에 복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마치 해류에 휩쓸려 표류하는 공주(空舟)처럼..

“설마… 이 기(技)는…….”

그제야 사마흔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니, 잊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 그런 가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이 오직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 대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의의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것은 표류무상기?”

표류무상도법이 펼쳐지기 전에 반드시 따른다는 독특한 기류, 기의 흐름. 그 흐름에 대한 속박이야말로 표류무상도법의 진정한 힘인 것이다. “용케도 알아보는구나!”

나름대로 칭찬인 모양이지만 사마흔의 귀에는 이미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노인의 정체를 알아낸 순간 그의 사고는 그 충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마비되고 말았던 것이다.

“도성… 하후식…….”

표류무상기로 장내의 전 기류를 자유자재로 휘저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강호무림에서도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강호를 정처 없이 주유하며, 지 난 수년 동안 소식이 묘연했던 그가 왜 이런 허름한 객잔에서 식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바로 지금 이 시간에!

그래도 사마흔의 충격회복은 빨랐다. 그는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

“만근검익진(萬斤劍翼陣)을 펼쳐라!”

그러자 일, 이층에 있던 흑의인들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앞사람의 등에 왼손을 대고 한손에 검을 든 채 날개 모양으로 모여들었다.

“발동(發動)!”

기합과 동시에 우지끈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흑의인들의 발이 마룻바닥에 방사상으로 어지럽게 펼쳐진 그물을 만들어냈다.

“음? 음? 음? 어라?”

도성에게 이것은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한곳에 뭉친 흑의복면인의 무리가 감히 자신의 검지가 펼치는 조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 다름없이 그의 검지 는 원을 그리며 회전했지만 그들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합심해서 그 검지가 발생시키는 기류의 움직임에 저항하고 있었다. “흐음…, 단체 천근추란 건가?”

이변의 원인을 파악한 도성이 뇌까렸다. 사마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개개인의 천근추 공력을 하나로 묶어 엄청난 무게를 만들어내는 철벽의 합력진이오. 여기에 표류무상기는 통하지 않소!”

그가 이끄는 멸성대 삼 개 조는 원래 도성 하후식의 봉쇄를 담당하기 위해 특별 사육된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통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조용한 목소리로 도성이 반문했다. 이 정도에 곤란을 겪을 거라면 애초에 도성이라 불리지도 못했다.

“모래는 아무리 뭉쳐도 모래, 결코 굳센 바위가 될 수는 없는 법. 꽤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하지만 놀이는 끝이다.”

도성이 마음을 검지의 끝에 집중시키면서 손가락과 어깨를 크게 휘둘렀다. 검지의 끝에 모인 그의 마음이 내면의 한 점을 향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몰려 들었다.

내재된 우주가 영혼의 축을 중심으로 거대한 회전을 일으키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표류무상기(漂流無相氣) 오의(義)

나선용권풍(螺旋龍港風)

손목의 튕김과 동시에 그 검지 끝으로부터 발생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 이층의 흑의인들을 차례로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은 축소형 재해나 다름없이 위력적이 고 무차별적이었다. 이 나선으로 소용돌이치는 용권풍은 사람도 주위의 기물도 상관치 않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휩쓸고 지나갔다.

사마흔이 자랑하던 멸성대의 만근검익진은 이 한 수에 의해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버렸다.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이, 이럴 수가……. 검익진이 이처럼 허무하게 부서지다니…….’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마흔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살상력은 적어 –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 분명했다. 부상자는 많았지만 사망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심 자부하던 비장의 수 하나가 너무나 간단하게 박 살났기에 그의 당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도 방금 전 객잔 내부에 불어닥친 소형 회오리바람의 영향으로 전신의 여기저기가 기물들에 두들겨 맞고 찢겨져 장 난이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경지를 목도하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 왔다. 더 이상 도성을 맞상대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해봤자 무모한 발버둥 에 불과할 것이 뻔했다.

사마흔은 즉시 차선책을 선택했다.

[이… 이대로 그냥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저기 저 여자를 인질로 잡아라!]

그는 즉시 전음으로 일층에 배치되어 있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유는 물론 이 아귀를 연상케 하는 식성을 보유한 그녀가 셋 중 가장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젊어 보인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의 부하들이 즉시 명령실행에 들어갔다.

쉬익!

매서운 검이 중년여인의 뒷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청의 노인과 백의 노인은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헛수고란 걸 알면서 굳이 힘을 낭비하는 것은 지독히 비경제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능력은 단지 ‘인지를 초월한 무한의 먹성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 끼악!”

가볍게 건성으로 비명을 지른 중년여인은 고개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 기습의 검을 흘려보내더니 그것도 모자라 들고 있던 젓가락(음식이 나온 이후 그녀는 이것 을 놓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을 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찔러들어오는 검신의 끝부분을 잡아챘다.

우뚝!

주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검이 우뚝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 명을 벨 듯 살기등등했던 기세가 겨우 여인의 나무젓가락 하나에 의해 온데간데없이 사라 진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검의 주인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고는 임무중에 졸다가 꿈을 꾸다니 시말서감이라고 생각했다. 요 며칠 추적 때문에 잠을 못 잔 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겪고 있는 이것은 현실이었다.

여인이 복면인의 눈앞에 검지를 하나 꺼내들었다. 사내는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흠칫했지만, 그가 상상했던 끔찍하고 잔인하고 참혹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 다.

다만 눈앞에서 갖다댄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을 뿐이었다.

“쯧쯧쯧, 나쁜 어린이로군요. 기습은 나쁜 아이나 하는 짓이에요! 게다가 그런 오명을 무릅쓰고 한 기습이 실패라니…, 더욱더 최악이네요.”

“이, 이익!”

사내는 검을 빼내기 위해 이리저리 온갖 용을 써보았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재확인일 뿐이었다. 아무리 내공을 쏟아부어 밀고 당기고 흔들 어도 그것은 바위에라도 꽂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습니다!”

쉬이이이익!

여인의 말과 동시에 젓가락이 집고 있던 검신으로부터 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기습에 더해 식사 방해까지! 기습은 용서해도 이 점은 용서할 수가 없군요.”

챙강!

여인이 젓가락을 쥔 섬섬옥수에 살짝 힘을 주자 모루와 불꽃 위에서 천 번을 단련했던 사내의 검은 과자처럼 너무나 어이없이 분질러져버렸다.

젓가락에 집힌 검편을 바라보던 여인이 애석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건 못 먹는 거네요!”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라는 누구의 말을 무시한 채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목을 튕기는 가벼운 동작으로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검편을 날려보냈 다.

피이이이잉!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검편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선회하며 날아갔다.

“크아아아아아악!”

각기 다른 음계를 지닌 네 개의 비명이 검편이 지나간 은빛 궤적으로부터 순차대로 터져나왔다.

용무를 끝낸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어향육사 위에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아아, 이것 참! 소란은 원하는 바가 아닌 것을…….”

백의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른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이렇게 아이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은 품위를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되오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백의 노인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가볍게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냥 까딱까딱 가벼워 보이는 동작이다. 전혀 힘겨워 보이지도 않는다. 눈에 확 띄는 화려한 검기도 없었다. 펼쳐진 별의 바다를 보는 것 같다는 그 명성 높은 검기 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간단하고 단조로울 뿐이었다. 멋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흑의인들이 지닌 어떤 날카로운 도검도 그의 나뭇가지를 이겨내지 못했다. 토막 나기는커녕 흠집 하나도 나지 않았다.

한 번도 맞부딪히지 않은 채 끝장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볍게 휘둘러지는 노인의 나뭇가지가 복면인들의 이마와 머리를 때릴 때마다 그들은 밀짚인형 처럼 픽픽 쓰러졌다. 죽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 실력차면 저항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끈질겼다.

“피는 보고 싶지 않군.”

백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가볍게 나뭇가지, ‘은하’를 휘둘렀다. 마음의 검이 사방을 향해 무한한 조화를 부리며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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