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수
“이, 이럴 수가…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임덕성이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제멋대로기만 한 무법자에게도 경이를 느끼는 감각은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 도대체 저 두 사람의 정체는 뭐지?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기세도 느끼지 못했거늘……. 게다가 그 셋 중 한 사람이 도성님이라니…….”
그의 우락부락한 입은 그 큼직한 턱이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떡 벌어져 있었다. 도성 하후식이라는 이름이 그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게 제가 은거고인들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나 두목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입을 떡 벌린 모경이 그것 보란 듯 외쳤다. 약간의 우월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의혹도 아무 때나 품을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의혹도 고민도 사고의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행위다. 시야가 좁아지면 여유가 사라지고, 여유가 사라진 두뇌 는 딱딱하게 경질된다. 돌처럼 굳어버린 머리로 제대로 된 사고 활동이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다.
모경의 밉살스런 말에 약간 열이 받고 울컥해지자 마비가 풀리며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비로소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야, 모가야?”
“왜 그러십니까, 두목님?”
“다 좋은데 저 녀석들 왜 우리한텐 공격을 하지 않는 거지?”
불청객들은 여인 하나와 노인 둘로 이루어진 일행만을 집중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시선 한번 던져주지 않았다. 때문에 곤란한 일은 당하지 않게 되어 편했 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무시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역시… 우리가 너무 약해 보여서가 아닐까요?”
“약해? 우리가? 아니, 내가? 이 녹림왕 임덕성이?”
이런 순간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냐는 듯한 반문이었지만 모경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힘든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한번 생각해보십쇼. 호랑이 세 마리가 동시에 날뛰는데 옆에 있는 늑대 나부랭이들까지 신경 쓸 여가가 있겠습니까? 호랑 이 퇴치를 먼저 하는 게 순서겠죠.”
늑대 나부랭이가 누굴 뜻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모경으로서는 늑대 대신 ‘개’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는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평소 같았으면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렇게 존재감 없는 존재였던가……. 그 사실을 납득해버린 자신에 대 해 임덕성은 우울해지고 말았다.
“우리도… 끼어들까?”
녹림의 왕이 자신의 허리에 걸린 도를 투박한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무시당하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손이 근질근질거려 참을 수 없는 것이 다.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해나 되지 않을까요?”
모경이 냉정하게 말했다.
“저분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저분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심어드렸다가는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만…….”
“역시 그럴까…….”
그답지 않은 소심한 반문에 기다렸다는 듯 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든 마음만 먹으면 녹림칠십이채를 깡그리 괴멸시킬 수도 있는 분들이니까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귀찮으셨는지 그런 마음을 품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계 시지만 말입니다.”
저걸 보고 있자니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귀찮음이 녹림도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이때 밥 잘 먹는 아줌마의 강함을 뼈저리게 느낀 멸성대는 전술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세 사람은 포기한다. 역부족이다. 안명후만을 노려! 그의 말살을 최우선으로 하라!]
사마흔은 전음을 이용해 진작 내렸어야 할 명령을 부하들에게 시달했다. 목격자의 말살을 포기하고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안명후의 입을 막는 것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복면인들이 집중적으로 안명후의 목숨을 노리며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전법을 바꾸어도 소용이 없었다. 전술 전환도 압도적인 전력차 아래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여전히 검지가락을 빙빙 돌리고, 나무막대기로 툭툭 때리고, 젓가락을 휙휙 저으며 복면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검성의 빼어난 검기는 여전하시군요. 아니, 오히려 더욱더 완벽해지셨군요! 심즉검(心卽劍) 검즉심(劍卽心)에 만류귀종(萬流歸終)이라……. 이제 전 따라가지 못하겠는걸요? 호호호호.”
중년여인은 휘두르던 젓가락을 멈추지 않은 채 웃으며 한담을 시작했다. 젓가락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새하얀 서리 같은 기운이 그 끝을 통해 뿜어져나왔다. 서 리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허허, 별 과찬의 말씀을! 검후께 그런 소리를 들으면 이 필부의 공부가 부끄러워지지 않소이까. 이건 그저 이번에 새로 구한 검인 이 ‘은하(銀河)’의 성능이 좋은 탓이겠지요.”
어디서나 주울 수 있는 나뭇가지를 들고 그런 말을 해봤자 별 설득력이 없었다.
다시 몇 번 그 소문 ‘안’난 명검 ‘은하’를 휘두르자 다시 몇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나자빠졌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다시 일어나는 자는 없었다.
“이렇게 함께 싸우는 것도 오래간만이로군요! 그때가 참 그리워요. 당시에는 참으로 두려웠는데……..”
여인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떠오른다.
“참으로 그리우면서도 두려웠던 때였지요.”
백의 노인도 그때를 생각하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정오의 차를 마시며 한담이라도 나누는 듯 느긋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다른 곳은 신의 철퇴에 얻어맞은 듯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 이보게 부조장! 지,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사마흔의 물음에 부조장 이개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화,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검…성… 검…후…라고…….”
마침내 사마흔은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있던 방해자 세 명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보를 알고 있다 해서 무엇이 개선된단 말인가?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재앙 중에 재앙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저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여 있단 말인가……?”
그는 당장이라도 실핏줄이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이 괴물 셋의 면모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도성 하후식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나무막대기를 장난처럼 휘 두르며 자신의 부하들을 못 쓰게 만들고 있는 검성 모용정천에, 젓가락을 먹는 데 이용하지 않고 사람 잡는 데 이용하는 검후 이옥상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힘을 지닌 존재들인, 현 강호에 군림하는 세 명의 절대자 천무삼성. 살아 있는 전설이 셋이 지금 한 자리에 모 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멸성대 스물두 개 대대를 모두 끌고 오지 않으면 승산이 없었다. 삼성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들 스물두 개 대대가 전원 투입될 예정으로 그들은 단련받아 왔던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필요할까?’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부족해. 스물두 개 대대로도 턱없이 부족해! 이런 괴물들을 상대로…….’
“이건 반칙이야!”
사마흔의 마음은 항의의 외침이 되어 터져나왔다.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 다음에 취할 행동은 간단했다. 선택은 단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퇴각, 퇴각이다! 이대로는 전멸할 뿐이다.”
즉시 퇴거명령이 떨어졌다.
“임무 불이행입니다만?”
부조장 이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책임은 내가 지겠네. 자네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작전을 계속한다 해서 이 임무를 성공하리라 보는가?”
이 남자에게도 직위에 걸맞은 상황 판단력과 분별력은 있었다.
“없겠죠!”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이개가 대답했다. 평소 자신의 상사에게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안명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검성과 도성과 검후가 각각 세 변의 꼭짓점 끝을 점하고 있는 삼각형의 정중앙이었다. 현재 정신을 잃고 있는 그에게 그곳은 지금 세 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일이 결정에 반대하지 말게!”
사마흔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게 제 일이니까요.”
부조장 이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대대로 부조장이란 직위는 조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건 알겠지만 괜히 사람 열 받게 하는 어조였다.
돌아가면(이쪽도 돌아갈 수 있다면) 두고 보자는 상냥한 눈빛을 부조장에게 보내고는 즉시 퇴각명령을 내렸다. 세 사람의 정체를 안 이후 투기가 눈에 띄게 줄어 들고 있었기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당장 명령에 복종했다.
“어마, 어마! 도망치게 둘 수는 없지요.”
검후 이옥상이 자리에 앉은 채(그녀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대한 이후 그 자리에 일어선 적이 한번도 없었다) 가볍게 사방을 향해 젓가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복면 인들이 도망갈 통로가 단숨에 봉쇄되어버렸다.
“자, 그럼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나눠볼까요? 우선 집이 어딘가부터!”
면사의 밑으로 드러난 검후의 입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렸다. 관음보살의 미소라 불리는 자비로운 미소였다. 하지만 이들 멸성대에게는 지옥 나찰녀의 그것보다도 더 무섭고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더 이상 길은 없는가…….’
눈을 질끈 감으며 사마흔은 생각했다. 여기서 그가 택해야 할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기계였다. 붙잡힌 기계는 쓸모가 없다. 그리고 불필요해진 기계는 즉시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의 심령 깊숙한 곳에 새겨진 절대적인 명령이 었다. 이 명령을 수행하는 데 망설임 같은 불필요한 감정은 주입되어 있지 않았다.
“천겁혈세 혈신재림!”
구호를 주문처럼 외침과 동시에 사마흔은 어금니에 깨물고 있던 독약을 깨물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그 독이 맹수도 단숨에 즉사시킬 수 있는 맹독임에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확인사살을 했다.
“이, 이런!”
이변을 눈치 챈 도성 하후식이 기함을 토하며 중지시켜려 했지만 이미 사마흔은 검을 자신의 심장에 찔러넣고 있었다.
푸확!
그의 등을 통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목숨을,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목숨을 헌신짝처럼 가볍게 버리다니! 바보 같은 것들!”
도성 하후식은 정말로 화내고 있었다. 그는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인 ‘살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쉽게 내팽개치고 포기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그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주위를 빙 둘러봐도 살아 있는 복면인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손을 쓰든 동료의 손을 빌리든 그들은 광적으로 죽음에 집착했다. 대규모의 집단 자살이 벌어 진 것이다.
“진정하게.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세뇌된 살인기계일세! 다른 어둠의 종속자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지속적인 반복교육과 최면에 의해 그들의 심층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는 이 명령을 제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세.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 아닌가?”
조용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로 검성은 도성을 진정시켰다. 경전을 낭송하는 듯한 고요한 목소리였다.
“미안하군! 잠시 흥분해버렸네! 아직도 나의 수행은 멀었군. 천겁 일당인 줄 알았으면 미리 방비했을 텐데…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 서 막지 못하다니…….”
자책의 기운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게 바로 가장 도성다운 모습인 거지요. 전 그런 면이 너무 좋은 걸요!”
황혼녘의 노을처럼 아늑한 미소를 머금으며 검후가 말했다.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헤헤, 그런가? 이 누이가 그렇게 말해준다면야…….”
백세를 초월한 지 오래인 노인이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옥상의 그 말이 무척 기뻤던 모양이다.
도성은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죽음이 감도는 정경을 바라보며 나직이 뇌까렸다.
“천겁의 그림자가 다시 강호에 드리워지려 하는가…….”
그의 주름진 눈가가 약간 어두워졌다.
“그분의 예감이 아무래도 적중한 것 같네.”
검성이 심원한 눈빛을 한 채 말했다. 그 역시 이 사건이 근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실마리가 끊겨버리고 말았군요.”
검후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증거인멸을 막지 못한 탓이었다.
“반혼술을 쓸 수 없는 이상 죽은 자에게 증언을 듣는 것은 포기해야겠지.”
도성은 무척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검후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거지복장을 한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안명후가 있었다.
얄궂게도 그를 주저앉히고 이렇게 넋 나간 표정을 짓게 만든 원흉은 멸성대의 흉험한 도검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의 정체였다.
“두목, 어떡하죠? 가서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임덕성 역시 녹림왕이란 별호로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기는 했지만 천무삼성에 비하면 그 이름의 휘도(輝度)는 명월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도 시기나 질투의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무림인치고 천겁혈세의 구세주인 천무삼성을 존경하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임덕성 역시도 무인인 이상 직업과 출신을 초월해 경외하고 있었다.
“음…, 역시 인사라도 드려야 할까? 유명하지만 쉽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은 아니지.”
헤벌쭉한 얼굴로 임덕성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기쁜 것이다. 존경하는 무인을 만나게 되어서.
그 어디에도 녹림의 절대자 녹림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 다른 부하들이 없어서 그나마 위엄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예방된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 이었다.
“음음, 역시 아무리 몰랐다고는 하지만 ‘노망난 노친네들이라고 망발한 것에 대해서는 세 분께…, 읍, 으읍!”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경의 입은 임덕성의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에 의해 급히 틀어막혔다. 그는 도깨비처럼 부리부리한 눈에 살기를 담아 자신의 매 부를 노려보았다.
“그 일을 내뱉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
창백한 얼굴로 임덕성이 속삭였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그의 백짓장 같은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잔뜩 굳어 있었다. 그 두 개의 호목에 서린 의지는 매우 명쾌했 다.
“읍읍읍…….”
모경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증거인멸의 희생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털썩!
안명후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넙죽 엎드렸다.
“무림맹 소속 섬서지부 특별감찰관 안명후가 천무삼성(天武三聖) 세 분의 존안을 뵙습니다.”
“이런, 이런… 역시 들켰나…….”
이 정도로 소란을 떨어놨는데 정체가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조용하게 화산으로 향한다는 계획은 아무래도 물거품이 된 듯했다.
“일이 일인지라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 게다가 천겁이 연루된 일이 아닌가!”
검성은 그 일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검후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달콤한 미주의 향기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미소는 보는 자의 마음까지도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었다.
“구해주신 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진심을 담아 안명후가 말했다. 그는 죽음의 우물 밑바닥에서 건져올려진 것이다. 그 두레박의 줄을 끌어올려준 것은 황송하게도 무림에서 가장 명망 높은 세 명의 기인이었다.
“어려울 때는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야죠.”
“자넨 무슨 일로 저런 악도들에게 쫓기고 있었나? 자네의 지위가 평범하지 않은 것을 보아 필시 곡절이 있겠군그래.”
도성의 말에 안명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저희 감찰조 일행들 중에는 아무래도 저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도 세 분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개코처럼 수급만 바닥에 쓸쓸히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섬뜩했다.
“자네는 대체 무슨 일로 쫓기고 있었나? 저 추적자들 또한 모두가 하나같이 놀라운 실력자들이던데?”
그 놀라운 실력자들을 어린애 데리고 놀듯 논 사람이 할말은 아닌 듯했다. 감격에 들떠 있던 안명후의 눈빛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렇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도성이 반문했다.
“지금 천무봉에서 화산규약지회가 열리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일세, 우리도 지금 그걸 구경하러 가는 길이라네. 그러다 여기서 자네를 만난 거고.”
“아, 참 그렇군요. 제가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천무삼성의 참관은 화산지회의 매회 정해진 공식일정이었지요.”
그것은 참가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화산지회가 왜?”
도성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성질이 좀 급한 성격인 듯했다.
“그것은 바로…….”
그러나 안명후는 그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털썩!
무너지는 그의 몸을 도성이 급히 잡아 부축했다.
“이보게, 안 감찰! 정신 차리게! 안 감찰!”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명후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뺨을 찰싹찰싹 때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무슨 일이죠?”
“이걸 보게!”
검성이 기절한 안명후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조금 전 비수가 스치고 지나갔던 상처 부분이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독인가!”
이 반응에서는 그 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지효성 독인 듯하네. 서서히 몸 안을 침식해 들어가는 독이지.”
“당했나…….”
도성이 침음성을 흘리며 뇌까렸다. 좀더 주의를 쏟았으면 좋았을 것을.. 애초에 온몸을 검은색으로 칭칭 휘감고 얼굴에 신선한 인상을 주도록 복면까지 한 놈 들이 정당한 수단만을 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희박한 경우는 기대하지 않는 쪽이 현명했다. 그런데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해도 과거에 발생한 일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는 건가……. 그들은 꼭 이 사람을 저승행 길동무로 데려갈 작정인가?”
“방심했군! 크윽, 천무삼성이란 이름이 부끄럽구먼.”
“아직 독이 완전히 퍼진 것은 아니에요. 맥이 약하기는 하지만 죽지는 않았어요.”
“지효성 독이니깐 그나마 효과가 천천히 발휘되는 것이지.”
“할 수 없지! 다시 살리는 수밖에!”
천무삼성이 일제히 장심을 가져다대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몸 안을 잠식하고 있는 독소를 내공의 힘으로 밖으로 분출시키기 위해서였다.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마저 하지 못하면 안명후 자신도 죽어서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원통함을 이 세상에 남겨서는 안 된 다.
“천무삼성 셋이 힘을 합하면… 죽어가는 혼도 되돌릴 수 있다고 얕보지 말란 말이야!”
주변 사방에 기의 폭풍이 몰아칠 정도의 거대한 진기를 불어넣으면서도 말을 지껄이다니.. 그러고도 내공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보면 괴물은 괴물이었다. 세 사람의 대해 같은 내공이 안명후의 몸 안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기맥을 종횡무진 누비기 시작했다. 점점 더 세맥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독기들의 진행을 막고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부정한 것을 태우는 신성한 불처럼 세 사람의 내공이 안명후의 몸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떠질 것 같지 않던 안명후의 눈이 다시 한번 떠졌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위… 위험……. 위… 위험……..”
그 말만을 마치고 안명후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보게, 일어나게! 무슨 일인가? 무엇이 위험하다는 건가?”
도성 하후식이 영혼이라도 뒤흔들 듯한 큰소리로 외쳤다.
“자넨 아직 끝내지 못한 말이 있을 걸세! 속시원하게 그 말을 끝내고 죽게! 그래야 여한이 없을 것 아닌가!”
도성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가 안명후의 영혼에 닿았는지 다시 그가 눈을 떴다. 세 사람은 더욱 강하게 내공을 불어넣었다.
“으… 음모… 화…화산… 위… 위험…… 요…용…여…….”
마지막 말을 최후까지 잇지 못하고 안명후의 고개가 떨어졌다. 탈진한 것이다. 하지만 기력과 원정이 극심하게 손상된 듯 당분간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잘 가게!”
도성 하후식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감겨진 두 눈에서 비통한 눈물이라도 흐를 듯했다.
“아직 죽지 않았어요.”
옆에서 검후가 정정했다.
“일단 이 자리에서 옮겨야겠군요.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이대로는 안심할 수 없겠어요. 아무래도 독뿐만 아니라 단전도 꽤나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더군요. 아까 이 야기를 듣자 하니 기폭환을 복용했다고 하던데…….”
“기폭환을…….?”
검성이 낮게 신음성을 터뜨렸다. 그들도 그게 어떤 효과와 어떤 부작용을 발생시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무지막지한 물건까지 써가며 여기까지 필사적으로 도주해왔다는 것이군.”
“아무래도 사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어떡하죠?”
“일단 의원에게 보이도록 합시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게 우선인 것 같소. 신체에 잔여하고 있는 찌꺼기도 완전히 해독해야 할 필요가 있고…….”
우선은 그가 정신을 차려야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옮기죠?”
바로 그때였다. 옆에서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저… 그 일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세 사람의 고개가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자넨 또 누군가?”
의아한 얼굴로 도성이 물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인상이 더러운 놈들이었다. “헤헤헤헤…….”
옆에 멀뚱히 서 있던 임덕성과 모경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헤프게 웃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체력도 튼튼하고 말도 아주 잘 듣습니다. 그러니 부디 꼭 이 친구를 짐꾼으로 삼아주십시오.” 쟁반 위에 수급을 진상하는 듯한 태도로 한 손으로 모경을 가리키면서 임덕성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제, 제가요?”
모경이 뜨악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이 나이에 내가 하랴?”
임덕성의 비딱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힘이 빠져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한다.
쫄따구는 이래서 항상 고생인 것이다.
검성은 고개를 돌려 화산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직접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화산에 도착해 있었다.
“도대체 화산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한 번 싹을 틔운 불안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별일 없으면 좋으련만….”
직감이긴 했지만 이번 화산지회는 왠지 평범하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기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