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2화 – 봉황의 잃어버린 왼쪽 눈 : 1막 1장 적시(適時)

랜덤 이미지

비뢰도 15권 2화 – 봉황의 잃어버린 왼쪽 눈 : 1막 1장 적시(適時)

봉황의 잃어버린 왼쪽 눈

-독안봉 독고령 편

1막 1장

적시(適時)

이진설은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뭇 소녀 검객들의 우상이자 칠봉의 일인이며 자신이 존경하는 큰언니인 독고령이 이른 아침부터 검술지도를 자청하 고 나섰던 것이다.

독고령과의 일대일 특강.

평상시라면 꿈도 꿔보지 못할 특혜였다. 독고령은 칠봉 중에서도 아주 차갑고 사납기로 유명했지만 이 소녀의 생각은 틀렸다. 겉으로는 무척이나 사납고 냉혹해 보였지만 그 내면은 아주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잘 믿으려 들지 않겠지만 이진설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단, 때때로 너무 엄격한 것만 빼고…….

감출 수 없는 좌안의 검은 안대. 그 내력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외눈의 봉황, 독안봉(獨眼鳳) 독고령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알겠니? 장검이든 단검이든 쌍검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절정의 고수라면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검으로 만들 수 있지. 그런 사람들 앞에 서 검의 길고 짧음, 날카로움이나 단단함, 그리고 개수를 따져봤자 무의미할 뿐이야. 요는 어떻게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때, 즉 ‘적시(適 時)’를 간파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읽어낼 만한 ‘시야(視野)’를 지니지 못하면 백전백패할 뿐이다. 이것이 선행된 연후에야 자신의 실력을 변수로 한 상대의 ‘허점을 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닷없이 검을 찔러온다. 가벼운 한수처럼 보이는 찌르기였으나 그 속도나 방향이 실로 시기적절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이진 설은 잠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우검을 이용해 그 일격을 받아넘겼다. 그러고는 비어 있는 좌검을 이용해 반격을 기도했다.

독고령은 자신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빈틈투성이였다. 방심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진설은 결심했다.

저 완벽주의자에게 한방 먹여줄 기회란 흔치 않았다. 저 방심상태야말로 틀림없는 절호의 호기. 분명 놀라며 칭찬해줄 것이다. 자신을 보는 눈도 달라지리라. ‘좋았어!’

한 마리 나비처럼 우아하게 몸을 돌린 그녀의 손에서 절기인 쌍접난무(雙蝶亂舞)가 펼쳐지려는 찰나! “헉!”

정지한 시간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녀는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기도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꺅! 어… 어느새!”

보이기는커녕 낌새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왼쪽 어깻죽지 아래에서 어느 틈엔가 다가온 검극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 또한 변치 않는 현실이었다. 그것이 점하고 있는 위치와 ‘시점(時點)’이 실로 시기적절하고 절묘해 이진설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 검의 주인인 독고령 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너도 알다시피 허점을 간파하느냐 못하느냐는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하지만 ‘적시’를 읽어내는 ‘수읽기’가 선행되지 않으 면 허점도 간파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효한 허점의 발견은 자신의 실력에 비례한다. 상대의 허점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 다. 상대의 품안으로 뛰어들 용기, 대담성,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틈새를 파고들기 위한 속도, 상대의 검력을 견뎌낼 수 있는 완력과 흘려낼 수 있는 기술! 자신이 얼마만한 힘과 기술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가 승과 패, 생과 사를 가리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 신의 시야를 가장 먼저 부단히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 역시 자신의 눈이기 때문에. 주제를 모르고 무작정 검을 휘두르며 힘만 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뇌가 근육으로 꽉 찬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지는 독고령의 금과옥조 같은 조언에 이진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청하는 그녀의 눈은 매우 진지했다. 검후(劍后)의 수제자에게 검 리를 배울 수 있다니! 보통 때라면 맛볼 수 없는 행운이었다.

이진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걱정되었기에 독고령이 가르침을 자청하고 나섰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단련시켜놔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진설은 배움에 임했다. 그녀도 이제 조금은 어른이 된 건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래 갈지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독고령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수를 상대할 때는 검이 하나든 둘이든 상관없어. 쌍검이라 해서, 검을 남들보다 하나 많이 들고 있다 해서 방심하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양쪽에 하나씩

들고 있는 만큼 서로 각자의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해 궤도가 제한되고, 양손보다 힘도 떨어진다. 때문에 항상 자신의 무기가 지닌 단점을 숙지하고 있어 야 함은 물론이다. 자신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 즉 단점보다는 장점이 커질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점, 잊지 말고 명심하도록 해라.”

그러고는 다시 검을 찔러들어간다. 말보다는 몸으로 익히는 게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쉴새없이 요혈을 찔러들어가는 그녀의 검은 모든 변화를 배제한, 무척이나 단조로운 공격이었다. 이진설은 쌍검을 휘두르며 화려한 검기로 단조로운 찌르기 공격을 상대해나갔지만 역부족인지 계속 뒤로 밀리기만 했다.

그러기를 이십여 합!

물러나는 이진설의 얼굴은 점점 더 찡그려지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는 반면, 무찔러 나아가는 독고령의 얼굴은 산보라도 하는 사람처럼 편안했다.

“너의 쌍검은 그 움직임이 화려함에 너무 중점을 두고 있다. 현란함은 상대의 눈을 속이는 데 도움이 될지 몰라도 진정한 고수를 만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장 식일 뿐이란다. 그들은 현란한 겉모습에 속지 않고 한눈에 허와 실을 간파해내기 때문이지. 게다가 움직임에 낭비도 많아진다. 그래서 지금 내가 펼치는 단순한 찌 르기조차 제대로 받아넘기지 못하고 있는 거다.”

발랄하고 귀여운 외모와 달리 원래부터 무공에 대한 애정과 탐구욕이 남다른 이진설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오기가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녀는 그녀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한 수를 펼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눈이 빛남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두 개로 갈라졌다.

쌍검이연십이참격(雙劍二連十二斬擊)!

운신 가속을 이용한 이 분신의 이십사 수 연환 검기 공격. 생사가 갈리는 전장이나 명예와 긍지를 건 비무대회에서나 쓸 필살의 기술이었다. “멍청한!”

이제껏 평정을 유지하던 독고령도 이번만큼은 다급해졌다. 지금까지처럼 가볍게 상대해서는 막아낼 수 없는 기술! 하지만 파훼(破毁)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진설의 몸이 희끗 흔들리는가 싶더니 신형이 두 개로 갈라졌다. 도합 네 개의 검에서 검기가 휘둘러져 나온다.

“아직 무르다!”

슈욱!

독고령은 가볍게 손목을 퉁기며 한 점을 향해 재빨리 검을 찔러넣었다.

이진설의 고왔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울먹울먹 사슴 같은 두 눈에서는 금세라도 진주 같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다.

분한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 여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십이와 십이, 도합 이십사 수의 연환공격이 채 다 펼쳐지기도 전에 독고령의 검끝은 보란 듯 이진설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이번에는 목젖이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검식이 파훼되었는지는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독고령은 한차례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힐난했다.

“바보 녀석! 방금 설명해줬는데도 벌써 잊었느냐! 현란함에 너무 중점을 두면 동작이 커지고 그만큼 허실이 많이 생겨난다 하지 않았더냐. 그 허실이 상대에게 간 파당하면 공격이 실패하거나 역습당할 확률도 크다. 게다가 힘이 분산되면 결착을 내기도 힘들어.”

불을 토하는 듯한 독고령의 매서운 힐책에 주눅이 든 이진설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추위에 떠는 작은 새처럼 가녀린 어깨가 미세하게 경련한다. 그렁그렁 맺힌 무 언가가 당장이라도 점점이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저런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철석간담을 지녔다고 하는 이 여인이라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설아, 넌 언제나 날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울지 마라!”

떨리는 작은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독고령이 말했다.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 같던 호통이 아닌, 봄날의 훈풍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훌쩍훌쩍거리며 이진설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강아지 같다.

“고수들의 싸움에 여러 초식은 필요 없단다. 보통 단 일합에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지. 그만큼 고수들은 서로 맞부딪쳤을 때, 승산이 없는 이상은 함부로 움직이 지 않아. 허점이 없으면 일단 기다린다. 자신만의 ‘적시’를……. 그래도 안 되면 만든다. 그리고 파고든다. 이것이 고수들의 싸움이지. 먼저 휘두르든지 나중에 휘두 르든지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상대에게 닿는가 하는 거란다. 닿지 않는 검은 대화할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말하는 것만큼 무의미하지. 물론 초절정고 수라면 이런 거 저런거 다 신경 안 써도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그제야 이진설은 고개를 빠끔히 쳐들며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두 눈은 퉁퉁 부어 엉망진창이었지만 괘념치 않고 배시시 웃는다.

“초절정고수라면 검후님 같은?”

그 귀염무쌍한 모습에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독고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은 초절정고수 따위가 아니다!”

“그럼요?”

“그분은 검의 신이다!”

절대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확고한 신념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이 여걸이 얼마나 자신의 사부를 존경하고 있는지 쉬이 짐작 가능한 태도였다. 이미 그것은 경외를 넘어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나도 사실 그분의 진짜 실력은 본 적이 없다. 사실 검을 꺼내드는 일도 드문 분이시지. 그분께서는 아마 이미 검이 필요 없으실 터. 그분께서 검을 잡는 모습을 뵌 것은 이 나로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그분의 검 앞에 서면 한 가지 느껴지는 묘한 감각이 있지. 그 감각만큼은 언제라도 잊혀지지 않은 채 나의 몸속에 새겨 져 있다.”

“어떤?”

전 여성 무림인의 우상인 검후에 대한 일화다. 귀가 쫑긋 서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언제 울먹거렸는지는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독고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런 투기도 검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 난 그분의 검극이 나를 가리키는 순간 깨달았다. 아아,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도 저 검으로부터 는 도망칠 수가 없구나, 하고! 투명한 하늘의 그물이 나 자신의 머리 위를 촘촘히 덮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무력감과 위압감은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감각이다. 언표하기 불가능한 느낌이지. 하지만 만일 자신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하고 맞부딪치게 된다면 필사적으로 도망가거라. 자신보다 한없이 강한, 격이 다른 자라는 증거니깐 말이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역량의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다.”

“예, 언니!”

이진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속으로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흐흠, 예상 외로 자상한 면도 있군요!”

“저런 모습, 의외인가요?”

나예린의 반문에 비류연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 사람은 지금 독고령과 이진설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바위에 앉아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이 일(이런 정기적인 산책)에 합의한 적은 없었다. 비류연은 그에 대한 허락을 굳이 구하려 하지 않았고, 나예린 역시 동의나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 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코를 자극하는 짙은 초록의 풀내음을 맡으며 새벽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길을 함께 걸었고, 저물녘 저 멀리 펼쳐진 아득한 구름바다의 수평선까지 붉은빛으로 가득 찬 황혼의 노을 속을 함께 거닐었다. 아무도 이 일에 대한 언급이나 합의가 선행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해오던 것처 럼 매우 자연스러웠다.

“평소의 그 사나운 행동을 보면 저런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죠.”

특히나 그 사나움이 가장 강력하고 확실하게 발휘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 자신이었다. 무슨 도적놈이나 불한당쯤으로 보는 그 시선이 좋아질 수는 없는 노 릇 아닌가. 게다가 만만치 않은 강력수비! 다른 떨거지들을 털어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본인까지 그러면 여러모로 민폐다.

“네, 아주 무서운 분이시랍니다. 지극히 엄격한 분이시죠. 하지만…….”

“하지만?”

“아주 상냥한 분이시기도 해요. 예전에는 훨씬 밝고 명랑한 분이셨습니다만…….”

나예린은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저 왼쪽 눈, 선천적인 건 아니겠죠?”

비류연의 지적에 나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큰 상처가 후천적인 것이라면 그것에 얽힌 사연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연은 분명히 평범치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외눈의 봉황이라…….”

그 이름은 지금 천무학관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흠모하며 동경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옆에 함께 앉아 있는 여인은 수백 명, 아니 강호를 뒤엎 으면 수천 명은 족히 나온다고까지 말해지는 막대한 수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있는 인물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런 걸 ‘민폐’ 이상으로는 보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몇몇 분자들은 확실히 대민폐였다.

“언제부터?”

“칠 년 전… 여름이었죠…….”

나예린의 기억 속에 새겨진 과거는 텅 빈 눈 안에서 핏물이 콸콸 쏟아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때리듯 내리는 폭우 속에서 울부짖는 한 여인의 비통한 모습이었 다. 하늘이 그녀와 함께 우는 듯했고, 핏물 또한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처럼 보였다. 그래서 모두들 지혈도 잊은 채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물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이야기겠군요?”

빛 속으로 끄집어내 공개해야 하는 과거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어둠 속에 묻어두어야 하는 과거도 있는 법이다.

“그래요, 하지만 대답해주려 해도 대답해줄 이야기가 없어요. 그 팔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때를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악몽에 다름 아니었다. 때로는 시간의 바람과 세월의 물결로도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이다.

“혹시 그거 아시나요?”

“……?”

“사자(師姉)는 사실 저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더 많다는 것을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그 7년 전의 사건 때문에?”

“네, 2년을 꼬박 요양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큰 상처였어요. 그 이후로도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죠.”

다시 나예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비류연은 아차 했다. 아무리 행동양식이 상식을 초월하는 그였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를 헤집을 만큼 몰상식한 인간은 아니었다. 믿거나 말거나.

남의 과거는 흥미삼아 함부로 들춰봐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것이 한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할 때는 더욱더!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말았군요. 미안해요!”

이 비류연이란 인간이 사과 비스무리한 걸 하다니……. 아는 사람이 봤다면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을까 우려할 만한 모습이었다.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얘기는 아직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에게만은 할 수 있는 걸까?

“아니요. 고의는 아니었으니까요. 괜찮아요! 이제 독고 사자도 그때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겠지요. 지금 웃고 있는 저 모습으로 충분합니다. 그것도 모두 설이 덕분 “이지요.”

그 당시에는 생기를 잃은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그때의 처연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예린은 만 족할 수 있었다.

굳게 닫혔던 그녀의 마음을 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저기 있는 저 아이였다.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 그때는 그녀 자신도 감정이 없는 무기질의 인형이나 다 름없었다.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저 말괄량이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마동 시험 이후 악몽을 꾸는 횟수가 늘었어요. 괜찮으면 좋으련만.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앞으로 독고령이 겪게 될 운명의 시련에 대해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아침의 바람이 두 사람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어쩌면 이날 아침에 분 바람은 그 암울한 전조를 알리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단일 인의 힘으로 멸겁삼관을 뚫고 이곳 홍매곡에 도착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대공자 비라 불리는 자였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