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2장
조우(遭遇)
“사자(師姉)! 사자! …독고 사자?”
나예린의 부름도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돌린 독고령의 시선은 정지한 것처럼 한 사람의 얼굴 위에 못박혀 있었다. 같은 공간 안에서 동일한 대지 위를 딛고 서 있 는데도 마치 영원히 닿지 않는 평행 공간 안에 있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소름끼치는 단절감! 아무리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 불러도 절대로 저편에 닿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한참을 굳어 있던 독고령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예린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쪽을 향해 걸어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육체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일까?
“사자!”
멀어져가는 그녀의 등을 향해 나예린이 소리 높여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마침내 체념하고 등을 향해 뻗었던 손을 내린다.
그 감각은 무엇일까? 뇌리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강렬한 감각! 이윽고 자신의 마음속으로 홍수처럼 흘러들어오는, 난마처럼 뒤엉킨 복잡한 혼돈! 그 강렬한 감정 의 분출에 나예린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언니…….”
불길한 바람이 그녀의 마음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가느다란 팔이 춤의 한 동작을 잘라 붙여놓은 듯 우아하게 옆으로 뻗어나오며 열여섯 개의 발걸음을 정지시켰다.
“잠깐!”
마천칠걸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로 걸어가는 대공자의 앞길을 겁도 없이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장본인은 여인의 몸이었다. 그녀의 왼쪽 눈은 역삼 각형 모양의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비의 무심한 눈길이 그 안대 위로 가서 멈췄다.
“무례한!”
마천칠걸 중 삼걸 사갈검편(蛇蝙劍鞭도추운과 사걸 사교검 백사영이 살기를 내뿜으며 질풍처럼 튀어나왔다. 혈풍이 몰아치는 고대의 전장을 누비는 잔혹한 전 차처럼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는 불문곡직(不問曲直) 천참만륙斬萬戮)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런 위협에도 독고령의 독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됐다!”
대공자 비가 한 손을 들며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 하지만 주군의 앞길을 가로막은 자입니다.”
삼걸과 사걸이 이구동성으로 거세게 항의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주군에 대한 충성밖에 없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고령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떠올랐 다.
“흥, 무척 충성스런 짐승들이군요. 주인을 위해 저렇게나 으르렁거릴 수 있다니 말입니다. 잘못하면 아무에게나 물어박지르겠군요. 재갈을 제대로 물리는 게 어떨 까요?”
짐승처럼 덤벼들어 들이받고 물어뜯고 하면서 몸부림칠지도 모르니 재갈을 물리라는데 이런 모욕을 받고서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주, 죽인다!”
모욕을 받은 두 사람의 전신에서 지독한 살기가 폭출되었다. 위협만으로 그칠 것 같지 않은 짙은 살의.
찰칵!
독고령은 조용히 자신의 왼손으로 검집을 쥐고 왼쪽 엄지로 살며시 검을 열었다. 이런 놈들에게 사과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다. 출검을 위한 준비였다.
“들리지 않았나? 그만두라 했다!”
더욱 가라앉은 비의 목소리는 노기를 띠고 있지 않았지만 두 종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살기를 거두었다. 그것이 그들의 주인이 노여워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익 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마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분노!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분노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의 왼쪽 가슴에 수놓아진 문장을 잘 봐라.”
그녀의 왼쪽 가슴에 주렴(珠)처럼 드리워져 있던 윤기 나는 흑발이 바람에 흩날리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세라도 비상할 듯한 네 장의 날개를 지닌 백기 러기 문양! 그리고 그 가운데는 검(劍)이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저… 저 문장은!”
두 종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던 바로 그 문장이었던 것이다.
“사익비홍(四翼飛鴻)! 남해 검각의 주인이자 무림제일의 여고수 검후의 수제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문장이다. 아무리 너희들이라 해도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 닐 터…, 더 이상의 소란은 원치 않는다.”
비상백홍(飛翔白鴻)의 문양은 검각 고유의 문장으로, 검각에서는 날개의 개수로 그 숙련도를 나타낸다. 이 중 가장 최고위라 할 수 있는 검후의 날개 수는 여섯 장, 그리고 검각의 실제적 운영을 담당하는 원로들이 다섯 장이었다.
네 장의 비익이라 하면 젊은 층에서는 오직 세 명만이 그 소유를 허락받고 있었으니 수제자라 불려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삼성의 일좌인 검후의 수제자라 해도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주인의 명에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자신감!
저 자신감이 결코 허풍만은 아니라는 것을 독고령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평범한 수련이나 공부로는 결코 저런 광오함을 얻을 수 없을 터였다.
“얼마만 한 역량을 숨기고 있는 자들일까??
방심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소. 무슨 용무로 본인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오?”
“……”
독고령은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던지라 다짜고짜 가로막고 봤던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무엇을 물어야 좋을지 자기 자신조차 혼란스러웠다.
막상 질문을 하려 하니 목구멍에 바늘이라도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수치심을 참으며 간신히 용기를 짜내 물었다.
“…우리 언제 만났던 적이 있던가요?”
대공자 비의 눈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독고령이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복잡미묘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의 눈이 놀라움 때문인지 약간 크게 떠졌다.
“지금 본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오? 검후의 수제자님께 그런 것을 받아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다니… 광영이오!”
“와하하하하하!”
“크헤헤헤헤!”
“호호호호!”
대공자의 조롱 섞인 대답에 일동이 요란스레 폭소를 터뜨렸다.
“다… 당치도 않은 소리!”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독고령이 일갈했다. 그러나 이런 모욕을 받고도 그녀는 단지 소리만 쳤을 뿐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응이 었다. 대답을 구해야만 하는 절실함이 분노를 누른 것이다. 굳게 쥐어진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웃음이 잦아들자 대공자 비가 정색한 얼굴로 독고령의 외눈을 직시했다. 그녀도 지지 않고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넘겼다.
‘무정한 눈……. 마치 겨울의 고봉(孤峰)처럼 보는 듯하구나!’
그녀가 알고 있는 눈은 얼어붙은 동토 같은 저토록 차가운 눈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천박하게 웃음을 터뜨렸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싸 늘하고 무정한 얼굴이었다. 마치 조금 전의 웃음이 한 편의 연극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시 사람을 잘못 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비의 대답이 들려왔다.
“우린 과거에 만난 적이 없소. 그리고 앞으로도 그다지 만날 필요는 없지 않나 사료되오. 대답이 됐소?”
조용히, 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의 표정을 일견한 후 비는 칠걸을 이끌고 그녀의 곁을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독고령은 정지된 시간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제자리에 못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 가득히 밀려왔다. “사자, 무슨 일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매 나예린이 걱정 어린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란 독고령이 급히 변명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다!”
걱정은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그리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윽!”
갑자기 안대 밑에 가려진 왼쪽 눈에서 맹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급히 손바닥으로 얼굴의 반면을 덮고 눌러보지만 격렬한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언니!”
나예린이 걱정스럽게 외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탁!
독고령은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뿌리쳤다.
“령 언니…….”
놀라움이 깃든 그 목소리에 독고령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미, 미안하다! 별일 아니니 걱정 말아라. 언제나 있는 연례행사일 뿐이다. 가서… 좀 쉬어야겠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했다.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독고령의 어깨는 축 처져 있어 활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켜보는 나예린의 눈가에 수심이 어렸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이렇게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큭!”
독고령의 악문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점점 더 좌안의 통증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불개미가 그 녀의 몸을 물어뜯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혼란의 극에 달해 뒤죽박죽이었다. 중심을 잃은 몸이 비틀거리고, 발걸음이 만취한 취객의 그것처럼 난마같이 꼬인다.
지금은 오직 쉬고 싶을 뿐,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은 나서야 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퇴의 시기를 잘못 잡아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흔히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놈’이라고 칭한다. 보통 이런 유형은 자기만의 잣대로 세상을 재고는 그게 단 줄 알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현실을 떠나 망상 속에서 사 는 것과 진배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유의 인간은 특별히 희귀한 인종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자주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불행일 것이다. 주위를 한번만 둘러보면 어 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인종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그런 놈이 하나 있었다.
“헤헤헤헤! 대공자님, 그년 눈깔이 하나밖에 없어도 본판은 꽤나 반반한 것 같지 않습니까?”
묵묵히 걸어가는 대공자 비의 옆에서 천박한 어투로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은 오걸 쇄풍겸 오문추였다.
“검각의 제자라는 직함 하나만 믿고 잘난 척 날뛰다니 무척이나 건방지지 않습니까? 감히 대공자님의 발길을 가로막다니 말입니다.”
대공자 비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발걸음도 늦추지 않았다. 그것을 오문추는 동조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신이 난 그는 더욱더 게걸스럽게 입을 놀 렸다. 그것은 실수였다.
“어떻습니까요, 대공자님? 제가 나중에 위에서 콱 한번 찍어눌러줄깝쇼? 그러면 그년도 좋아서…. 헉!”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음담패설을 입에 담던 마천칠걸의 오걸 쇄풍겸 오문추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 샌가 그의 입안에 시퍼렇게 날이 선 낫 한 자루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면 철겸의 날에 혀가 반쪼가리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문추는 혼백이 달아날 만큼 경악했다. 지금 자신의 아구창에 처박혀 있는 낫이 무엇인가? 항상 자신이 남을 도륙할 때 쓰던 자신의 애병 ‘쇄풍(碎風)’이 아니던 가. 자신의 허리춤을 떠난 적이 없던 그 녀석이 언제 어느새 대공자의 손으로 넘어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비의 입에서 지극히 절제된 무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허락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너보고 그런 잡스러운 걸 생각해도 좋다고 했더냐?”
공포로 인해 오문추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의 이마 위는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나머지 육걸들도 아연실색한 표정들이다. 그 러나 아무도 말리러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난 천박한 걸 싫어한다.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라. 다시 한번 그래 봐. 그럼 그 즉시 네놈의 그 추잡한 혀를 잘라 개 먹이로 던져줄 테니 말이 다.”
조용하지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지옥의 신이 있다면 저런 목소리로 말할 게 분명했다.
“되, 되송함…다!”
베일까 저어돼 혀를 놀리지 못하니 발음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낫의 칼날은 그의 입에서 사라졌고, 철겸은 어느새 오문 추의 허리춤으로 돌아가 있었다. 공기의 미동을 느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귀신 같은 손놀림이었다.
오문추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낮에 백일몽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신에 돋은 소름과 쫘악 곤두선 솜털이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항변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마라. 너희들은 내 종이자 수족이다. 나의 허가 없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명심하라!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어리석은 수족 은 잘려나갈 뿐이다. 교체할 수족은 얼마든지 있으니깐!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는 그녀에게 손대지 마라.”
“조, 존명! 며, 명심하겠습니다.”
대공자 비의 목소리에는 북풍한설로 날을 세운 얼음칼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일국의 군주를 능가하는 그 추상 같은 위엄(威嚴)에 마천칠걸 모두가 일제히 부복하며 대답했다. 조용한 공포가 그들의 심장을 옥죄인다. 거역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항명은 곧 하늘에 대한 거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