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1장
“네가 바로 독고세가의 령아구나. 영민하게 생긴 아이네. 환영한다, 얘야! 내가 바로 오늘부터 네 사부가 될 이옥상이란다.”
관음보살의 현신 같은 자애로운 미소 가운데서 흘러나온 무척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이… 이분이 바로!’
소녀의 조그만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이옥상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소녀는 자신의 마음속 사당에 모셔놓은 신(神)을 알현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너 무나 감격해 간단한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환희에 떨고 있었다. 만년빙옥처럼 얼어붙은 채 감격으로 떨고 있는 소녀를 이옥상은 미소로 받아주었다. “뭘 꾸무럭거리고 있는 게냐? 어서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도록 해라!”
자신의 부친이자 독고세가의 현 가주인 독고영홍의 말에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독고령이 부랴부랴 큰절을 올렸다.
검각을 창건한 초대 시조(始祖)의 영정에 삼배, 사조(師祖)인 전대검후의 영정에 삼배,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사부가 될 검후 이옥상을 향해 다시 삼배. 합이 구배. 독고령, 이때 나이 아홉 살.
이날 그녀는 마침내 검각의 제자가 되었다.
곱게 빻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백사장 위에서 한 소녀가 너울너울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소녀의 날씬한 교구가 모래사장을 박차고 움직일 때마다 탐스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채가 비단수실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아직 얼굴은 소녀티를 완전히 벗지 못 했지만 건강미 넘치는 육체는 벌써 굴곡이 완연해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한창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아름다움. 그 속은 젊음의 결정체인 빛과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녀의 춤사위가 점점 더 빨라지자 단아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물이 보석처럼 허공중에 비산했다. 소녀의 연분홍빛 입술은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가득 메우는 빛의 편린과도 같은 발랄하고 상큼한 미소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무척 활동적인 꽃이다.
사르르륵!
소녀의 검이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그 아래의 모래가 호응이라도 하듯 따라 움직이며 나선의 궤적을 그린다.
‘검풍적(劍風蹟)’이라 불리는 현상이었다. 일초 일식에 담긴 검력이 소리 없이 내뿜어지는 모습인 것이다.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하건만 벌써 이 정도 성취를 이루었 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재능이 아니었다. 자신마저 잊은 듯 몰아의 상태에서 검무를 추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기러기가 바닷바람을 타고 노니는 듯 미려한 모습이었다. 그런 소녀의 상의 왼쪽 가슴에는 두 장의 날개를 지닌 백기러기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다.
소녀는 검이 좋았다. 그 맑게 빛나는 곧은 검신과 바람을 가르는 은은한 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특히 검을 통해 자신의 정신이 육체를 초월해 자유로워짐을 느낄 때면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도취되곤 했다. 이런 검술 수련이라면 평생 동안이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화려한 의복에 값비싼 장신구, 멋진 남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 검만 있으면.
검술을 연마할 때마다 종종 자신을 잊어버리고 마는 소녀는 때때로 정말 그렇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만큼 소녀는 그 무엇보다 검이 좋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짝짝짝짝!
등뒤로부터 느닷없이 들려온 박수소리에 소녀의 시선이 그 근원지를 향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 안에 파고들어온 선명한 백기러기 문양, 그 날개의 수는 여섯 장이었다.
육익비홍(翼飛鴻)!
검각에서 저 문장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검례를 취하며 소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렇다! 소녀의 예를 받고 있는 이 여인이 바로 천무삼성의 일인이자 강호의 검도 최고봉이라 불리는 여중제일검 이옥상, 본명보다는 존경의 염을 담아 ‘검후(劍 后)’라는 호칭으로 더욱 자주 불리는 이였다.
분명 백수(白壽)를 한참 전에 넘긴 나이이건만 도저히 백세를 넘긴 호호백발 할머니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사십대 중반의 미부인이라고 해도 속아넘어갈 만큼 기품이 넘치는 우아한 얼굴, 세월을 역으로 거슬러오른 듯한 칠흑의 검은 머리. 극상의 주안술인가, 아니면 신 의 경지에 이른 화장발인가? 그것도 아니면 반로환동(返老還童)?
지금의 이 형상만으로도 그녀가 초범입성의 경지에 든 초극강의 고수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령아야, 많이 늘었구나. 검끝에서 머뭇거림이 사라졌어. 게다가 그렇게 기쁜 듯이 검을 휘두르다니, 지켜보던 나까지 즐겁더구나!”
“가… 감사합니다, 사부님!”
아직 어린 소녀의 마음에 하늘 같은 사부의 칭찬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결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부였다. 좋지 않은 것을 좋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녀가 늘었다면 정말 는 것이다. 독고령은 복받치는 감격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애로움이 가득한 얼굴로 검후가 웃었다.
“호호호호호, 이런! 할머니의 칭찬에 울듯이 기뻐하다니 아직 멀었구나.”
그녀의 웃음에는 녹음의 푸르름과 해풍의 시원스러움이 가득해 어느 모로도 백수를 예전에 넘긴 할머니의 웃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사십을 넘긴 어머니보다 젊어 보인다는 게 독고령의 생각이었다.
“정묘한 소안검(小雁劍)에 시원스런 비홍검(飛鴻劍)이었다. 네 나이에 벌써 자신을 잊고 검에 취하는 몰아취검(沒我醉劍)의 경지라니… 대견스럽구나!”
검법에 대해 검후의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검객으로서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다.
검각에는 소안검(小雁劍 작은 기러기 검법)과 비홍검(飛鴻劍: 큰기러기 검법), 이렇게 두 가지 입문 검법이 있다. 이 두 개를 익히고 나서야 비로소 그 성취도에 따라 비전의 입문을 허락받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검법을 통해 자질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평생 비전의 끄트머리조차도 구경할 수 없다.
함부로 전하지 않기에 비로소 비전인 것이다. 작은 그릇에 억지로 물을 담으려 해봤자 그릇만 깨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때가 왔는지도 모르겠구나!”
“그, 그럼.
그녀의 얼굴에 희열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래, 너도 이제 한상옥령신검의 비전을 전수받을 시기가 왔다는 이야기다. 열심히 하려무나. 지켜보고 있겠다!”
“저, 정말요?”
검후는 이 사랑스런 제자를 위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사부님!”
독고령은 그지없는 기쁨에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방망이질쳤다.
아,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이 얼마나 고대했던 순간인가!
검각의 문인명부(門人名簿)에 기명(記名)된 제자라 해서 누구나 다 비전 오의의 전수를 허락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에 특권이었다.
검각의 다른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독고령 역시 그날을 위해 지금까지 고련(苦鍊)해왔다.
아직도 행복한 혼란이 채 수습되지 않은 독고령은 잠시 멍한 눈빛으로 사부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야 안에서 검후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그녀는 계속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꺄아아아악! 이야호!”
그리고 잠시 후, 기쁨에 찬 비명이 금빛 가득한 어느 해변에 가득히 울려퍼졌다.
푸드득!
다만 이 신바람 난 비명에 백구(白鷗 : 하얀 갈매기) 몇 마리가 심장마비로 추락사할 뻔했다는 비사는 끝내 인간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한 채 자연의 숨겨진 이야기 로만 영원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