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6화 – 2막 2장 – 검각 관음수호자

랜덤 이미지

비뢰도 15권 6화 – 2막 2장 – 검각 관음수호자

2막 2장검각 관음수호자

남해에 보타산이라는 산이 있다.

– 사실 보다 정확하게는 동남해 정도가 옳을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남해라고 쓰이니 일단 남해라고 해두자.

보타산(普陀山).

절강성(浙江省) 항주만 주산(山) 군도의 한 섬에 위치한 불교 성지다.

오대산(五臺山), 아미산(峨眉山)과 더불어 중국 3대 명산(名山)으로, 구화산(九華山)을 넣어서 4대 도량(道場)으로 치기도 한다.

전설상 남(南)인도에 있다는 관세음보살의 영지(靈地) ‘보타락(補陀落 : 범어로 Potalaka)’의 명칭을 딴 것으로, 당(唐)나라 때 한 승려가 오대산에서 관음상(觀音 像)을 가지고 오는데 배가 이곳에 이르러 저절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자 보타사(普陀寺)를 세우고 불상을 모신 것이 성지가 된 시초라 한다.

관음시현(觀音示顯)의 땅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곳에 바로 그곳, 검각이 있었다.

검각(劍閣).

남해 보타산 기슭에 위치한, 오직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검의 성지.

절대금남구역(絶對禁男區域).

강호의 중심이랑 멀리 떨어진 관계로 강호 정세에 많이 개입하지는 않지만 이곳을 무시할 만한 담량을 지닌 문파는 어디에도 없다. 현재 정사를 초월해 가장 존경 받는 무림의 구성(救星) 천무삼성의 일좌인 검후 이옥상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후 본인이 아니더라도 그녀들의 신묘막측한 검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무늬만 사내인 작자들은 그녀들의 검을 통해 고절한 검공은 성별을 초월한다 는 교훈을 뼈저리게 얻는다고 한다. 검후라 불릴 만한 여류 검도 고수를 배출해낼 수 있는 이 저력이야말로 검각의 실질적인 힘인 것이다.

많은 강호인들이 남해 보타암을 곧 검각이라 생각하는데, 이 둘을 같은 곳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마도 검각의 제자들이 강호에서 활약하던 초기에 (이때는 아직 검각이 이름을 가지기 전이었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보타산에서 왔다고 대답한 것이 현재의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 듯하다. 게다가 이 곳 남해는 강호의 중심이랑 너무 멀어서 직접 가본 이도 많지 않기에 보타암이 곧 검각이라는 관념이 굳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검각이 곧 보타암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둘이 한 장소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고, 두 문파 사이에 많은 가르침의 교류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역대 대대로 양측 사이에 매우 긴밀한 교류가 있었던 듯하 다).

하지만 설혹 그렇다고 해도 이 두 곳을 같은 곳으로 보는 행위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별개의 집단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보타암은 일종의 종교 성지라 할 수 있었고, 검각은 무림 집단이다. 소림사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강호의 많은 종교 집단이 무림 집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니, 무력을 보유한 이상 무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집단이 무림 집단인 것은 아니다. 기본 적인 역량이 없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초대 보타암의 창건자는 무공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초반부터 무림하고는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보타암은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vara)라 불리며, 그 이름은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또는 자재로운 관찰의 뜻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관자재(觀 自在)라 불리기도 한다.

관세음은 이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이고, 관자재라 함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하여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 하면 두 개 다 같은 의미인 것이다. 이 중 무엇을 골라 쓰는가는 개인의 취향이라 하겠다.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자재(觀自在)·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약 칭한다.

그렇다면 보살은 무엇인가?

보살(bodhisattva)이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聖者)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이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 는 보살이다.

존함 그대로라면 무척이나 귀가 밝고 시력이 굉장한 분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쓸데없는 헛소리가 훨씬 많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겠는가(볼 만한 게 별로 없을 건 명약관화하지만)!

자비와 자애를 빼면 남는 게 없는 이런 분을 모시고 있는 게 바로 보타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검을 잘 쓰지 않냐고 물으면,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을 모시는 자에게 흉험한 날붙이에 대해 묻는 건 ‘언어도단이라고 성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오해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검각의 탄생 배경에서 그 연유를 찾아낼 수 있다.

이곳 보타암은 불교 4대 도량의 한 곳인 만큼 신자와 참배객이 많고, 또 그만큼 막대한 시주와 후원금·기부금이 줄을 잇는 곳이다. 여기에 자체 보유 전답에 의해 얻어지는 수입까지 합하면 그 부(富)는 엄청날 것으로 추정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지나친 부는 내키지 않는 손님을 초대하게 되는 법. 이곳 보타암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그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의 직업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곳 보타암은 과거 여러 차례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금품과 식량을 약탈당했다. 남해의 관군들은 신출귀몰한 이 바다도적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주변 강호문파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보 타암은 예전에 기둥뿌리까지 뽑아 해적들에게 적선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주변 무림문파가 파견해줄 수 있는 전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관 군은 썩 미덥지 못한 존재. 뒤통수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해적의 약탈 행위는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하여 여인의 몸으로 분연히 일어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초대 검각주이자 초대 검후인 이옥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그 미모와 뛰어난 검의 재능으로 젊어서부터 이름을 얻었는데, 보타암의 신도이자 투철한 관음보살의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한시도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마음속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곳 남해에서 한 이름 없는 고인에게 비전의 검법을 전수받은 후 그녀는 관음수호야말로 자신의 운명이라고 느끼고, 제자들을 모아 검각을 세운다. 이때 보타암 의 적극적인 지지와 열렬한 환영, 그리고 든든한 지원을 약속받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실제적으로 실질적인 무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던 보타암으로 서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그렇게 해서 검각은 탄생했다. 하지만 이곳이 정식으로 검각이라 불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개파 초기 그녀들 대부분은 검각의 제자임과 동시에 보타암의 제 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곳이 종종 같은 곳으로 오해를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때문인지 검각의 제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관세음보살을 믿고 있으며 태검후 이옥민 이후 검각의 각주는 대대로 관세음보살의 수호자, 남해 보타암의 수호신으 로 칭해지고 있다. 남해 보타암이 관음시현의 성지라면 이곳 검각이야말로 관음수호의 땅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검각은 조용히 관세음보살의 성지를 그 검으로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었다.

평소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검각이 지금은 매우 부산스러웠다. 각의 사람들 모두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우자 여기저기서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몇 가지 이야기를 종합해본 결과 독고령은 이 분주함이 귀빈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각 전체를 이 정도로까지 바쁘게 만들 수 있는 귀빈이라면 도대체 어떤 인물인 걸까? ‘황제’라도 오는 건가? 궁금증은 해소되기는커녕 더더욱 증폭되고 말았다. 독고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유 사자, 누가 오는 거죠?”

결론을 내린 독고령의 행동은 신속했다. 그녀는 정리라는 명목 하에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유수경을 잡아 세우며 물었다.

“한창 바쁜데… 얘는 참!”

유수경은 이 호기심 왕성한 사매가 자신의 일을 방해한 데 대해 약간의 불만을 표시하긴 했지만 그래도 궁금증은 해결해주었다.

“마천각 각주님이 곧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래.”

독고령의 얼굴에 약간의 놀람이 떠올랐다.

“마천각주님이면 엄청난 거물이잖아요!”

그런 사람이라면 검각을 이 정도로 바쁘게 만들 자격이 있었다.

“근데… 왜요?”

마천각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머나먼 변두리까지 아무런 용건 없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아무리 나이 어린 그녀라 해도 믿을 수 없었다. “글쎄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마천각 여관도 중 몇 명을 여기로 연수 보내고 싶다고 그에 대한 상의를 위해 오신다더구나.”

검후에게 사사 받는다.

정사를 떠나 여검객이라면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일이었다. 여자라면, 특히 무공을 배우고 있다면 검후를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천각주님도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역시 사부님은 대단하세요!”

자랑스러운 마음에 독고령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유 사자, 전 뭘 하면 되죠?”

각내는 다들 귀빈을 맞을 준비로 부산스러웠지만 독고령은 딱히 맡은 일이 없었기에 한가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방해라는 것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 한가하다는 사실이 그녀는 매우 못마땅했다. 왠지 아직 넌 책임을 맡을 만한 자격이 없어!’라고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의 성격 은 놀아도 된다는 말에 ‘얼씨구 좋다구나!’하며 천연덕스럽게 놀 만큼 태평스럽지 않았다. 이런 부지런함이 오늘날의 그녀를 있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글쎄, 별로 맡길 만한 일은 없는데?”

이미 업무 분담은 끝나 있었다. 독고령에게까지 돌아갈 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떼를 썼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은 취미에 안 맞아요. 무슨 일이든 좋아요. 시켜만 주세요. 명예와 생명을 걸고 반드시 완수해내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외쳤다.

“뭘 거창하게 생명씩이나…….”

유수경이 실소했다.

“헤헤.”

독고령이 살짝 혀를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앙증맞은 웃음이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뭐라도 시켜줘야 했다.

“쯧쯧, 너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그 결연한 의지에 대략 난감해진 유수경은 없는 것도 만들어야만 될 처지에 놓였다. 비록 그것이 별 의미가 없는 일일지라도 눈앞의 사매에게는 의미가 있을 게 분 명했다.

“으음…,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봐도 기막힌 방책이었다. 이거라면 자신의 사매도 만족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방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순찰이라도 돌고 오려무나. 어때?”

유수경이 넌지시 물었다.

“순찰이요?”

“그래, 혹시 불순한 의도를 품은 불한당들이나 자객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주위를 살펴보고 오렴. 아주 중요한 일이니 열심히 해야 돼.”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만에 하나 정도로 매우 희박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매가 그런 세부적 사항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 사자!”

그녀의 예상대로 소녀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반론도 반박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로써 밥버러지 신세는 면한 것이니 독고령은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했 다.

“독고령, 지금부터 순찰 임무를 맡아 섬 주위를 돌고 오겠습니다.”

군대의 병사처럼 힘찬 목소리로 독고령이 대답했다.

그 생기발랄하고 진지한 목소리에 유수경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그래…….”

‘이 앤 왜 사서 고생을 한담.

일과의 빈틈을 노려 일신의 휴식에 투자하는 그녀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정신이었다.

“자, 우선 백사장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고 올까!”

이곳에서의 순찰이란 항상 해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지리적, 지형적 특성상 불순한 마음을 품은 흉악한 불청객들은 항상 바다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 지만 바다는 그 속성상 모든 것에게 전 방향으로 개방되어 있으므로 이상을 발견하기 또한 수월했다. 이 때문에 머리 위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는 낮 시간에는 좀처럼 방문하는 법이 없다. 게다가 오늘은 저 멀리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수평선까지 시야에 확연하게 들어올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독고령은 산책하는 기분으로 해변을 거닐었다. 아니, 순찰했다! 지금 그녀가 걷고 있는 백사장 여기저기에는 사람 키를 넘는 바위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있었 는데 바람과 파도에 깎인 탓에 검은 표면이 맨질맨질 광택을 띠고 있었다.

그때 찰싹찰팍 작은 파도가 밀려왔다가 모래를 한 움큼 쥐고 쓸려나가는 바위 한곳에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걸친 어린 소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독고령의 눈에 들 어왔다.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백의 소녀는 나이답지 않게 깊고 조용한 눈으로 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소녀의 옷이 순백의 날개처럼 펄럭였다. 독고령의 발걸음이 소녀의 등뒤에서 멈추자 백의 소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령 언니?”

모든 감정이 사멸한 듯한 무감각한 목소리. 칠채 보석을 깎아 만든 듯한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열서너 살 소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그 것은 무기질적이었다.

“아, 예린이구나!”

독고령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앞의 이 어린 백의 소녀가 바로 삼 년 전에 새로 들어온 사매 나예린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감추어지지 않는 이 소녀의 몽환적이고 신비스런 아름다움은 같은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특출한 것이었다.

“무슨 일……??”

나예린이 짧고 단속적인 말로 질문했다.

“순찰!”

독고령이 웃으며 짧고 강하게 대답했다. 그 쾌활하고 당당한 대답에 예린은 이해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한 후 어린 소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언니…….”

“응?”

독고령과 나예린의 시선이 한곳에서 마주쳤다.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천공에 펼쳐진 밤하늘처럼 신비로운 두 눈. 그러나 때로 그 눈은 미래를 훔쳐 보고, 사람의 마음속에 둘러쳐진 장벽을 꿰뚫어보는 듯해서 오싹해질 때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문 내에서도 그녀를 기피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나마 개중에 독고령이 그녀와 가장 잘 지내는 편이었다.

“조심해요.”

고저(高底)를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 경고하는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단조로운 음역(音域)이었다.

“얜!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니? 얘도 참 엉뚱하기는…….”

약간 당황하며 독고령이 말했다. 순찰을 조심해서 하라는 말은 분명 아니었다. 부연 설명이 없었지만 왠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 어린 사매는 가끔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한다.

“그냥……”

그 대답에 독고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역시 이해하기 힘든 아이였다. 하지만 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묘하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 워지는 마음이 들곤 했다.

“언니…조심… 남자… 사랑… 아픔……”

나예린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독고령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펼쳐진 밤하늘 같은 저 눈동자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소녀 자신조차도 알 수 없 는 일일지도 모른다.

“응, 무슨 말이라도 했니?”

나예린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고령은 포기하기로 했다.

“정말 얼음처럼 차가운 아이라니깐. 정말이지… 얼음조각상도 너보다는 덜 차가울 거야, 예린! 소녀는 소녀답게 좀더 밝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핀잔을 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사매에 대한 진정이 가득했다. 걱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월등히 나아진 것이다. 옛날에는 칠일 밤낮 은 벙어리인 채로 지낸 적도 있었다.

저 나이는 보통을 넘는 활기와 가득한 호기심에 잠시 잠깐이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려 견디지 못할 때인데……. 저 작은 새처럼 자그마한 가슴에 얼마 나 큰 상처가 새겨져 있는 걸까?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저 애가 온 지도 벌써 삼 년째인가…….?’

독고령은 자신이 입문한 날의 광경만큼이나(아마 이 광경은 평생 그녀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광경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사하거라, 오늘부터 너의 사매가 될 아이다. 이름은 예린이라고 하지. 현 무림맹주이신 진천뢰검신 나백천 대협의 여식이란다.”

처음 보는 소녀를 가리키며 사부님이 말했다.

“안녕, 예린아! 난 독고령이야. 잘 부탁해. 소령 언니라고 부르렴!”

독고령이 쾌활한 목소리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나 답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형처럼 예쁜 백의의 소녀는 비에 젖은 작은 새처럼 사부의 등뒤에 숨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런, 이런! 쯧쯧, 가엾게도……. 아직 채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 같구나. 아직도 이토록 강하게 타인의 접촉을 거부하다니…….”

검후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때 독고령의 뇌리에는 사부의 말이 묘하게 귀에 남았다. 하지만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감히 물을 수 없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면 그건 팔불출에 꼴불견이지만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답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이다. 다만 눈앞의 작은 소녀가 무엇인가를 굉장히 두려워하 고 있다는 사실은 보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일을 겪었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의 두 눈은 밤하늘처럼 맑고 깊었다.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무척이나 인상 깊은 눈이었다.

독고령은 이럴 경우 어느 쪽이 먼저 용기를 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이럴 경우 가식은 통하지 않는다. 진심과 진정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나예린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독고령은 손을 들어올려 작은 사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배사지례를 올리고 정식 입문식을 거쳐 사문의 사자매 간이 된다는 것은 피를 이은 친자매보다 더 깊은 인연으로 묶인다는 뜻이야. 친자매는 피만을 이은 사이지 만 사자매는 영혼을 이은 사이거든. 그러니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넌 혼자가 아니니깐. 내 작은 사매를 괴롭히는 녀석이 있다면 이 위대하신 사자님께서 때려부숴 줄게! 그러니 걱정 붙들어매라고!”

상당히 과격한 발언이었다.

처음 독고령의 손이 머리 위에 얹어졌을 때 어린 나예린은 눈을 질끈 감으며 낯을 가리는 고양이처럼 움찔거렸다. 손끝을 통해 두려움에 젖은 작은 떨림이 고스란 히 전해져왔다. 그래도 독고령은 개의치 않고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떨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바람처럼 부드럽게 쓰다듬는 사자의 손길이 어린 사매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잘 부탁해, 동생!”

다시 한번 쾌활하게 웃으며 독고령이 인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응이 있었다.

“예…, 언니…….”

모기소리만큼 가는 목소리였지만 검각의 ‘관음지청법’에 단련된 독고령의 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감격에 독고령은 어린 나예린을 와락 껴안았 다.

‘꺅!’하는 소녀의 짧은 비명이 잠시 들렸다가 사라졌다.

“어머, 용하구나! 지금까지 계속 사람들을 피하기만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나예린의 굳게 닫혀 있던 마음에 약간의 틈새가 생겨났다. 검후는 대견스럽다는 눈빛으로 독고령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또 한 명의 새 식구가 생겼구나…….”

서로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제자를 그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처럼 자애로운 눈빛으로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늘 저녁은 환영식이라도 할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