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8화 – 3막 1장 해적-검은해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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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5권 8화 – 3막 1장 해적-검은해품

3막 1장

해적-검은해품

섬으로부터 약간쯤 떨어진 곳에 밤바다의 조수에 몸을 실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선미가 날카롭고 폭이 좁은 데다 바람을 거슬러올라가기 편 한 삼각돛이 여러 겹 달려 있는 무척이나 날쌔 보이는 배였다.

‘검은 해풍’이라 명명된 이 배는 생긴 모습만큼이나 수많은 전적을 지닌 배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위험이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가로지른 이 녀석의 활약은 동종 업 계에 종사하는 친구들 중에서도 발군의 것이었다. 그 정도의 사선을 거치고도 아직 한 번도 침수당하지 않은 게 이 배의 자랑이었다.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맡으며 우뚝 서 있는 사내의 외눈은 한곳에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보타암.

그의 시선이 지금 머무르는 곳이었다. 거리가 먼 데다 달도 뜨지 않는 그믐밤이라 별빛조차 희미한 지금은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침투경로는 확실히 숙지해줬겠지?”

‘검은 해풍의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도곡이 중광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두목!”

도곡은 이 배의 해로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결정권자였다.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배 위에서 그가 두목이라 불렸다는 것은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짐작 케 한다. 중광은 부두목이었다.

딱!

느닷없는 주먹이 밤바다 위를 갈랐다.

“어이쿠!”

검은 해풍의 두뇌이자 현명한 갈매기라는 별호를 지닌 지현구(智賢鷗중광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도곡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두목이라 하지 말랬지! ‘제독님!’이라고 부르라 몇 번이냐 말했냐? 죽고 잡냐, 앙?”

제독이라 하면 수십 척의 군함을 이끄는 함대의 최고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무리 봐도 노략질이나 약탈을 일삼는 해적에게는 과분한 칭호였다. “꼴에 허세는… 제독은 무슨! 그냥 단순한 해적 나부랭이 주제에…….?

현실에 대한 판단력은 두목 도곡보다 부두목 중광이 더 높은 모양이었다. 하다못해 선장님 정도라면 별로 내키진 않더라도 인정해줄 수도 있었다. 사람은 제 분수 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중광은 현명했고, 나름대로의 머리도 있었기에 속으로는 궁시렁거렸지만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 깔끔한 표정관리까지! 흠잡을 데 없 는 처세술이었다.

“도곡 제독님! 아…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울림이란 말인가!”

보다 빈틈없는 처세를 위해 중광은 망상에서 허우적거리는 두목이 익사하든 말든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해적(海賊)!

산에는 산적(山賊)이 있고, 바다에는 해적이 있다. 따라서 해적이란 지리적 특성에 의한 특수 업종 종사자들의 직업적 분류를 위해 쓰는 말이다.

혹자는 지리적 특성이 아니라 특정의 탈것을 이용해 업무에 종사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탈것에 모여 타고 하늘에서 영업을 하면 공중해적, 우주에서 영업을 하면 우주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골자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관용적이거나 은어적인 표현이 곧 언어의 보편적 정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이들의 주된 업무가 ‘약탈’과 ‘파괴’라는 사실이다. 그들 본인은 억압된 사회에 반항하는 ‘바다의 자유로운 바 람’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강도는 강도, 도적은 도적인 것이다.

도곡에게는 오른쪽 눈이 없었다. 그래서 얻어진 별호도 편목왕(片目王).

그가 이끄는 ‘검은 해풍’은 남해 유수의 해적 집단으로 이 남쪽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는 공포와 욕지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집단의 우두머리인 편목왕 도곡은 뱃사람에게 있어 ‘개새끼’, ‘열여덟놈’ 혹은 ‘자라새끼’ 같은 직유적 의미로 종종 사용된다.

왜구들도 한수 접어준다는 이 악명 높은 해적 집단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물론 영업을 위해서였다.

그의 텅 빈 우안은 옛날 젊은 시절 건강하고 활발하게 노략질을 일삼다가 어느 여검객에게 당한 흔적이라고 한다. 다행히 여검객의 자비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평 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물론 그 일에 대해 증오는 할지언정 감사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넘치는 자존심을 주체할 수 없는 이 바다도적도 그 일에 대해 주제넘게 복수할 생각만큼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 일은 곧바로 당랑거철 같은 개죽음으로 끝날 것이 명약관화했고, 그는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미덕을 가진 사내였다.

부두목 중광은 그 여검객의 출신이 어딘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 여검사의 사문은 바로 검각이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은 검후 이옥상이 란 존재였다.

도곡으로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기사회생의 행운이었다. 검후의 처사는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수호자답게 자비로운 것이었다. 개과천선하라는 의미였 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해적답게 은혜를 몰랐다. 대신 그는 증오로써 그 은혜를 갚았다. 그때부터 도곡은 검각이라고 하면 이가 갈릴 정도로 증오하게 되었 다. 그래도 완전한 바보는 아니라서 검각의 인물들에게 해코지를 한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검각과 검후, 이 두 존재는 그에게 있어 증오의 대상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간접적으로 검각에게 타격을 주는 방식을 매우 선호했 다

이번 보타암 약탈 계획도 그런 투철한 정신 하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럼 자시 정각에 행동을 시작한다!”

도곡이 명령했다.

검각에 있어서 야간 순찰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이 야간 순찰은 검각의 날개 두 장짜리 제자가 돌아가면서 맡는 것이 관례였다. 원칙적으로는 이인일조지만 모종의 이유나 사정으로 인해 혼자서 맡는 경우도 드 물지 않았다.

오늘 독고령은 혼자였다. 그래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도 본인 혼자뿐이었다.

‘저, 저들은…….?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일단의 무리들이 어깨에 무언가를 메고 바닷가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깨에 멘 것은 일견하기에도 상당히 묵직해 보이는 물건이었 다. 그들이 온 방향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바로 보타암이 있는 곳이었다.

‘설마 해적?’

그녀는 급히 근처의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광해 대장, 이거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렸네요.”

부하로 보이는 사내 중 하나가 일행의 선두에 앞장서서 걷고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거구의 사내는 허리춤에 찬 거도 외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 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무리의 대장인 것 같았다.

“그러게 말이다. 보타암, 보타암 하기에 무진장 어려울 줄 알았더니 이름만 듣고 너무 쫄았던 모양이다. 막상 해보니 이게 뭐냐, 너무 시시한 거 아니냐? 난 좀더 어려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광해라 불린 거구의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상연락종의 위치와 감시의 위치를 사전에 알아둔 게 주효했지요. 역시 부두목의 머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흥, 늙은 갈매기가 머리라도 없으면 어따 쓰겠냐? 그거라도 있어야 새 구이 신세를 면하지!”

심드렁한 목소리로 광해가 대답했다. 불쾌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부두목 중광에게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중광을 칭찬하는 소리가 귀에 곱게 들려올 리가 만무한 것이다.

어쨌든 이들의 대화는 그들이 누구인지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역시 해적이었어! 감히 관세음보살님의 거처를 털다니!’

이런 경우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어서 각에 연락을!’

그런데 비상호각을 찾기 위해 품속을 뒤지던 독고령의 안색이 급변했다.

‘어, 없어! 비상호각이 없어!’

순찰 중에 비상호각은 상비하는 게 규칙이었다. 물론 그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지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녀의 실수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많고 많은 날 중에 오 늘이란 말인가!

무사태평한 날들이 계속 길어짐에 따라 정신이 점점 더 해이해졌던 것이다. 만에 하나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무인의 마음가짐인 것을.. 평화와 최근의 기쁨에 절어 너무 나태해지고 말았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보다는 행동할 때였다.

“멈춰라!”

검을 빼든 독고령이 풀숲에서 달려나가며 외쳤다.

“누, 누구냐!”

보람찬 약탈을 마치고 귀선하던 해적들은 이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 잠시 동요했다.

“감히 보타암의 물건을 훔치다니…, 간이 부었구나! 어서 물건들을 돌려놔라! 그렇지 않으면 이 검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딴에는 기세를 넣어 위압적으로 외친 것이지만 단신의 몸으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뭐, 뭐야! 깜짝이야! 고작 계집애 하나잖아?

광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감히 쪼끄만 계집애가 어르신을 놀려? …응?”

독고령의 미모를 본 돌격대장 광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의외의 덤이었다. 갑자기 광해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욕망이 검은 불꽃처럼 솟구쳐올랐다. “오우, 이런 곳에 저런 극상품이!”

독고령의 미모는 이런 변두리 작은 섬에서는 실로 보기 힘든 수준의 것이었다.

광해는 입에 군침이 도는 것을 느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두꺼비보다도 더 혐오감이 들게 만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해적 집단에서 돌격대장은 바로 약탈대장을 가리킨다. 이 직함은 전통적으로 약탈의 최전선에서 앞장서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저돌적이고 가장 흉악한 이에게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검은 해풍의 돌격대장 광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나 지독했으면 약탈한 배를 미친 파도가 휩쓴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해서 광파랑(狂浪)이라고도 불렸겠는가! 같은 인간으로서 상종해서는 안 될 족속인 것이다. 특히나 독고령 같은 미모의 소녀들은..

“우리 검은 해풍에게 감히 단신으로 덤비다니! 그 용기는 가상하지만 아가씨, 애석하게도 잡혀주셔야겠어. 우리의 상품으로 말이야, 흐흐흐흐흐.”

천박한 웃음이 오물처럼 흘러나오는 미친 파도 광해의 입에서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얘들아, 귀중한 상품이다. 흠집나게 해서는 절대 안 돼! 조심조심해서 잡아라!”

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말에 독고령은 분노했다.

해적에게 잡히면 잘해야 노예 상인에게 팔려 노예가 될 뿐이다. 몸과 신세를 망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검은 해풍이라면 그녀도 이름 정도는 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열심히 뒤져봐도 그들이 얌전하게 몸값이나 요구하는 품위 있는 집단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네놈들! 인신매매까지 겸한단 말이냐! 내 검각의 이름을 걸고 모조리 죽여주마.”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 될 인종들과 직면했다는 결론에 도달한 독고령은 검에서 망설임을 지웠다. 그것은 살인에 대한 각오였다. 사실 그녀는 여태껏 실전을 경험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거, 검각!”

검각이라는 이름에는 이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자극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몇몇 해적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바다 위에서라면 모르지만 육지 위에서 는 검각이 한수 위였다. 아니, 애당초 승부가 되지 않는다. 남해의 해적들에게 검각이라는 이름은 ‘나찰녀’들이 서식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 두려워하지 마라! 뭘 두려워하는 거냐, 이 바보 자식들아!”

노련한 해적답게 광해는 금방 이 혼란을 수습했다.

“상대를 잘 봐!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소녀다! 게다가 혼자다! 뭘 두려워하는 거냐?”

그 말대로였다. 광해의 호통에 해적들은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얕보지 마라! 네놈들 같은 해적 나부랭이는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독고령이 기운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 스무 명의 거친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과연 검각의 제자!’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당당한 태도였다.

그러나 광해가 집중한 건 다른 것이었다.

“흐흐흐, 그 말은 정말로 너 혼자라는 것이군!”

이 야만적인 해적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독고령은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좀더 현명했다면 혼자라고 스스로의 입으로 고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세도 병법의 한 계책이 었다.

“검각의 이름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거기서 기르는 토끼까지 무서운 건 아니다! 검을 버리고 얌전히 잡혀주시는 게 어떨까? 신상품에 상처를 내려니 영 마음에 걸 리는구먼! 이 멋진 오라버니가 충분히 귀여워해줄 테니 안심하라고! 앞으로 광대가(廣大哥)라고 부르는 게 어때? 광랑(廣郞)이라 부르면 더 좋고! 흐흐흐흐흐!” 금방이라도 입가에 고인 침이 투둑 떨어질 것 같은 흉측한 미소였다. 그 느글느글한 미소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광언을 들은 독고령의 전신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 났다.

“다, 닥쳐라! 누가 너같이 못생긴 야만인에게 미쳤다고 신병을 위탁하겠느냐! 차라리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 말의 진실됨은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뭐, 뭣! 야… 야만인이라고! 네년은 이렇게 멋지게 생긴 야만인 본 적이 있냐, 앙?”

광해의 말은 그 부하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하늘이 네모로 바뀌거나 땅이 둥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제독이라 불러 달라는 도곡도 그렇고……. 아무래도 망상은 이들 검은 해풍의 전통인 모양이었다.

“굳이 상을 마다하고 벌주를 자처하겠단 말이지! 그 말 곧 후회하게 될 거다! 얘들아, 쳐라!”

해적들이 흉폭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누가 할 소리! 검각의 검이 얼마나 매서운지 그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라!”

뭐가 상이고 뭐가 벌이란 말인가? 미친놈이 강요하는 잘못된 가치판단 기준에 동의할 생각이 전혀 없는 독고령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맞부딪쳐갔다. 두 려움도 잊은 채 의연하게 맞서는 그녀의 검에서 은빛 검기가 어른거렸다. 전쟁의 여신도 그녀보다 더 용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긴 밤이 시작되었다.

오늘 밤만큼 확실히 시간이 자신의 적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동안 시간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한 적이 한번도 없었음에도 시간은 자신을 적대하고 있었다. 불공평한 일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독고령에게 불리한 양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역시나 역부족이었나?”

소안검과 비홍검을 숙련하고, 검후에게 칭찬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녀는 아직 소녀였다. 게다가 실전은 이번이 처음. 예전에 사자매들과 약속 대련을 한 것이 고작 이었다. 실전에 가까운 비무의 경험은 전무하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의 검술은 눈부셨다. 날쌘 기러기처럼 포위망을 누비며 펼치는 날랜 날갯짓 같은 날카로운 검초는 해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오랜 기간 명문의 제자로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독고령에게는 그만한 역량이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로 근력에만 중점을 두고 무식하게 연마한 해적 나부랭이들 이 당해낼 상대는 아니었다. 무공다운 무공을 익힌 사람은 이 중에서 돌격대장 광해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에겐 오랫동안 실전인 노략질을 통해 쌓아온 야비함과 잔인함이 있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도덕윤리는 지나가는 개소리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 이기는 자가 장땡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해적으로서 당연한 사고방식이었다.

실전 경험이 없다는 점은 아무리 명문 제자로서 체계적인 수련을 받은 그녀라고 해도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손은 열 손을 당해낼 수 없는 법. 아직 그녀의 실력은 수와 남녀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독고령은 열세로 몰리고 있 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두 발은 모래사장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무겁고, 검을 든 팔은 천근 철봉이라도 든 것처럼 힘겨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눈앞에 달려오는 귀두도의 사내를 향해 날카로운 일검을 날렸다. 은빛 섬광이 그믐밤의 바닷가를 날카롭게 갈랐 다. ‘착’소리와 함께 사내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그의 귀두도는 반토막으로 잘려 백사장에 흩어졌다. 검기로 쇠를 베는 단강(斷鋼)의 경지였다.

“헉, 헉, 헉!”

다시 해적 한 명을 쓰러뜨렸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전신의 근육이 맹렬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질 대로 가빠져 있었다. 숨쉬기가 이렇게 힘들 때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처음으로 체험했다. 마치 물속에서 숨을 쉬는 듯 고통스러웠다.

지금까지 몇 명을 베었을까?

일곱 명? 여덟 명?

그 중 마무리를 짓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 속에서도 해적들은 집요했다. 동료가 한 명씩 쓰러질 때마다 독기(毒氣)가 짙어지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부었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의 발로인지 생포를 포기하지는 않고 있었다. 다행히 그 점이 지친 독고령에게는 호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였다. 아직 이들의 대장격인 광해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직접 나서면 그때는 정말 위험했다.

그의 이마에 검푸른 핏줄이 서 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부글부글 끓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는 인내심하고는 거리가 먼 상대였다.

“바보 같은 놈들! 꼭 이 어르신까지 순서가 와야 하겠냐? 내가 너희들 같은 약골들을 믿고 어떻게 마음놓고 약탈을 할 수 있겠냐? 미덥지 못한 녀석들 같으니! 비 켜라, 내가 직접 처리한다!”

마침내 대장이 나섰다.

독고령으로서는 각오를 세워야 했다. 여기서 전력을 다해 그를 쓰러뜨려야만 그녀가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배수(水)의 진이었다.

“어? 어?”

광해는 좀 많이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저 자그마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충분히 지쳤다고 생각하고 필승을 자신하며 나왔는데……. 이대로는 큰소리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일대일의 승부를 염두에 둔 그였다. 체면이 있지 차마 함께 덤비자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일대일의 상황이 되자 저 작은 소녀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위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검은 여전히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여전히 신 묘막측한 변화를 부리고 있었다.

“이, 이게 아닌데… 쩝!’

상황은 광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주지 않고 있었다.

‘빨리 결착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독고령도 독고령 나름대로 조급해져 있었다. 이제 진기도 체력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다만 단전을 밑바닥까지 짜내고 짜내어 이를 악물고 덤벼들고 있는 중이 었다. 그러나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불리한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쓰는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매우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쓰지 않으면 결착을 낼 수 없다. 그것 외에는 승부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된다면 단신인 자신이 불리한 것은 명백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 비홍검의 마지막 초식에 모든 것을 거는 거야!’

독고령은 침착하게 기회를 노렸다.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임을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으리얍!”

독고령의 기세가 눈에 띄게 떨어지자 이때다 싶어 광해가 거도를 크게 놀리며 힘차게 찔러들어왔다. 정묘함이 떨어진 이상 큰 동작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녀는 기회를, ‘적시(適時)’를 잡기 위해 수세에 전념했던 것이지 힘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적 시를 기다리며 수세에 전념하면서 힘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동작이 커지면 그에 따른 틈도 더 큰 법, ‘백홍무란’의 보법을 써서 상대의 공세를 빠져나온 독고령이 그 빈틈을 향해 자신이 가진 최강의 초식을 발출했다.

비상천리(飛上千里)!

허공을 격해 수십 개 검기를 일시에 날리는 고도의 검기(劍技). 열두 마리 기러기 모양의 검기가 소녀의 검을 떠났다. 현재로서는 열두 마리가 한계였다. “헉!”

광해는 일류고수의 검에서나 볼 수 있는 검초가 조그만 소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헛바람을 삼키며 다급하게 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백홍 모양의 검기를 구명절초의 ‘광파막막’을 써서 막아나갔다.

채쟁챙챙챙! 탕탕탕탕탕! 파바바바밧!

죽기 싫은 마음에 전력을 다해 거도를 휘둘렀다. 철판 위에 우박 떨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허억허억허억! 마, 막았다!”

겨우겨우 막아내긴 했다. 하지만 그도 성하지는 못했다. 숨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도 덕분에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버렸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잔 상처가 많이 생기기는 했지만 피부만 베였을 뿐 근골에까지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실패인가…….?

거칠어진 호흡을 달래던 독고령은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수는 없었다.

‘과연 검각의 검은 매섭구나! 어린 소녀까지도 이런 위력적인 검초를 발휘하다니 말이야!’

광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일 보타암의 기별을 듣고 검각 전체가 나선다면……. 상상만으로도 실로 두려운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보타암의 변고는 검각에 도달했다고 봐야 했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광해는 매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한번 광소하며 외쳤다.

“크하하하하! 이 오라버니께서 좀더 귀여워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구나! 안됐다만 놀이는 여기까지다!”

억지로 큰소리로 웃어젖혔더니 상처 여기저기가 욱신욱신 쑤시고 아파왔다. 그래도 허세를 위해서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흥, 웃기지 마라! 그런 이야기는 나를 쓰러뜨린 다음에나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독고령의 말에 광해가 즉시 대답했다.

“지금 쓰러뜨릴 거다!”

그는 오른손으로 매서운 도초를 질풍처럼 휘두르며 왼손으로 부하들을 향해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받은 부하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 그거 진담 입니까? 저런 조그만 소녀를 상대로? 그런 비겁한!’이라는 반응이 분명했다. 아까 그렇게 호언장담 해놓고서는!’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잠시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검각에 대한 두려움이 원래 얼마 되지도 않는 수치심을 깡그리 몰아냈다.

곧 쓰러질 듯 비척거리면서도 독고령은 용케 그 도초를 피해내고 있었다. 맞부딪칠 힘은 모두 소진했지만 모험이 성공하면 자리를 피하기 위해 비축해두었던 마지 막 기력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의 눈으로는 그 사실을 간파해내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더욱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시끄러워! 닥치고 빨리 실행해! 안그럼 죽 어!’라는 의미를 지닌 신호였다.

부하들이 마지못해 행동에 들어갔다. 키가 크고 빼빼마른 해적 하나가 품에서 작은 대롱을 꺼냈다. 그리고 가죽주머니 안에 단단히 싸여 있는 침 하나를 꺼내 그 안으로 넣었다. 그러고는 다른 한끝을 입술에 대고는 그 반대편을 소녀를 향해 겨냥했다.

독고령은 광해의 맹공을 피해내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 보였다.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를 받은 광해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가 그리 즐..”

훅!

깡마른 해적이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대롱 안으로 단숨에 불어넣었다.

피잉!

압축된 공기가 좁은 대롱 안을 무서운 압력으로 질주했고, 팽창된 강력한 힘이 무서운 속도로 철침을 날려보냈다. 철침은 화살처럼 빠르게 독고령의 등뒤를 향해 날아갔다.

독고령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정신이 육체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쾌한 기분이 엄습했다.

“이, 이건?”

아무리 몸을 바르게 세우려고 용을 써도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야가 수경 위에 번진 먹물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도, 독(毒)?”

독고령이 입술을 깨물며 반문했다.

“흐흐흐, 안심해도 좋아! 단순한 수면제니깐! 귀중한 물건인데 함부로 망가뜨릴 수야 있나!”

끈적끈적한 두꺼비보다도 더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광해가 말했다.

“수, 수면제?”

질문하는 독고령의 눈에 초점은 이미 상당 부분 풀려 있었다.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코끼리도 단숨에 잠재울 수 있는 특제 수면제지! 일반인보다 내성이 강한 무림인용으로 특별 조제한 진짜배기지. 무지막지하게 비싼 거라 우리도 함부로 쓰지 않는 귀한 물건이야.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그리고 기뻐해도 좋아! 깨어나면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깐, 흐흐흐흐!”

그에겐 천국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지옥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손발이 뒤엉키고 점점 더 머리가 빠개질 듯 아 파왔다. 헛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비, 비겁한…….”

이제는 혀까지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저주라도 퍼부어주고 싶었건만 이제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했다.

“크헤헤헤, 칭찬 고맙구먼! 해적이란 게 원래 다 그런 족속이지!”

느물거리는 그 웃음이 소름끼치도록 징그러웠다. 저 목에 일검을 박아넣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석화의 주박에라도 사로잡힌 것처럼 손도 발도 더 이상 움직여지 지 않았다. 독고령의 의식은 저 어두운 심연 속으로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은명…….’

왜 지금 그 이름과 그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 그것은 부질없는 기대…,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다 해도 그에게 자신을 구할 힘이 있다 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한번 더 만나고 싶어…….”

그걸 끝으로 독고령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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