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5권 9화 – 3막2장 사신강림(死神降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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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5권 9화 – 3막2장 사신강림(死神降臨)

3막2장

사신강림(死神降臨)

“자, 빨리 아무나 들쳐업어라! 이동한다. 두목이 눈깔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광해가 명령했다. 여기에 도곡이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누가 두목이냐며 냅다 뒤통수를 후려갈겼으리라.

“예이!”

황의를 입은 부하 해적 한 명이 나서서 바닥에 쓰러진 독고령을 들쳐업으려는 순간……

팟!

“크아아아악!”

황의 해적의 입에서 소름끼치는 괴성이 터져나왔다. 고통으로 점철된 비명. 지옥의 밑바닥에서나 울릴 법한 비명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광해가 당황하며 부하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런 돌발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흡!”

광해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곳에는 놀라운 광경이 있었다. 좀 전까지 멀쩡하던 황의 해적이 팔꿈치 아래로 깨끗하게 잘려진 오른팔을 움켜잡은 채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 절단면으로부터 붉은 피가 물컹물컹 솟아나고 있었다.

[손대지 마라!]

아직 혼란이 수습되지도 않은 이때, 사방을 동시에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네 방향이 아니라 팔방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울려퍼진 듯한 느낌이었다. 방향 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누, 누구냐?”

광해가 좀더 예의바르고 현명했다면 ‘어느 고인이시오?”라고 물었을지 모르지만, 그럴 경황은 없었다.

[손대지 마라! 너희들의 그 더러운 손으로 그녀를 만지지 마라! 그것은 범해서는 안 될 무례(無禮). 분수를 모르는 짓이다! 분수를 모른 것, 주제를 모른 것, 자신의 천박함을 알아채지 못한 것, 그녀를 모욕한 것, 나의 신성(神聖)을 더럽히려 한 것. 그것은 모두 용서받지 못할 죄, 오직 죽음으로 갚아야 할 큰 죄. 죽음 외의 것으로 는 갚을 수 없는 큰 죄. 죽음만이 그 죗값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목소리에 자연의 공기가 울리고 있었다. 엄청난 압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듣는 이의 심령을 제압하는 신비한 힘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 은 군신(軍神)의 군령(軍令)처럼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서, 설마 육합전성(六合傳聲)?”

공력을 이용해 여섯 방향에서 인위적인 공명을 일으켜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 상대에게 혼란을 안겨주는 비법이다.

“모, 모습을 드러내라!”

광해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알 수 없는 거리낌과 공포가 그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불안이 그의 내면을 엄습했다. “부, 부두목! 저, 저기…….”

광해의 시선이 부하의 손끝을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작은 관목숲에서부터 한 사람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지만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그 긴장 은 고조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눈에 띄게 풀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나 무척 어이가 없습니다요!’라는 의미를 지닌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임은 분명했지만 산전수전 중에서도 주로 셀 수 없는 수전을 겪었던 광해의 눈에는 코흘리개 애 송이일 뿐이었다.

그는 독고령이 은명이라 이름 지어줬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광해는 겉모습만 보고 자신의 개인적 판단으로 이 소년을 무시했다. 그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책이 었다.

현상에는 이면이 있는 법! 보이는 게 전부 다는 아니다.

‘강호에서 나이와 겉모습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금물이다.’

표면적 형상이 내면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색창연한 비단주머니에만 금덩어리가 들어 있으라는 법은 없다. 무명 천주머니에 금덩어리가 들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요는 열기 전에 그걸 알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눈썰미야말로 강호에서 오래도록 생명을 부지하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기술인 것이다.

그는 이때 이런 강호의 금언을 망각하고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 ‘당연한 것’을 망각하고 있으니 딱히 그만을 나무라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이 다. 하지만 실책에 따른 책임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쓰러진 독고령의 모습을 일별한 은명의 눈이 다시 해적들을 향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어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두 눈만은 보는 이의 심장을 옥죄일 만큼 살기등등했다. 그 눈은 마치 죽음이 깃든 것처럼 냉막했 다.

[대가를 받겠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은명의 두 눈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서릿발도 무색케 하는 차가운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꼴깍!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 소년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이질적인 공기를 이들은 이성에 앞서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소년이 스물이나 되는 거친 바다의 해적들을 지배할 만한 기백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광해는 소년을 얕잡아봤던 최초의 감정을 버려야만 했다. 이미 장내는 소년이 내뿜는 싸늘한 기백에 압도당해 있었다. 그 증거로 모두들 저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 지 못한 채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눈앞에 사신이 강림해 있었다.

“꼬… 꼬마야… 이, 이름을 밝혀라!”

광해가 허세를 부리며 큰소리쳤지만 심적 동요를 완전히 감추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초반의 기세는 이미 잃어버렸다. 실기였다. 하지만 더 이상 기세를 잃을 수 는 없었다. 승패에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불리한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 이름을 알 자격도, 물을 자격도 없다!”

한 조각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정무심한 목소리였다. 저승의 염라전에서나 울려퍼질 듯한 그런 목소리가 저렇게 나이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믿겨지 지 않았다.

“너희들이 해야 할일도,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도 오직 하나뿐이다.”

염라대왕의 목소리로 소년은 선고했다.

“그 죄, 죽음으로 속죄하라!”

판결은 내려졌다.

먹이사슬에 종속된 생태계의 생명들 중에 맹수에게 잡아먹히기를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먹이가 먹음직스러우면 싫어도 맹수들이 꼬이는 법. 그런 면에 있어서 보타암은 먹이로 치자면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각이란 존재가 이 최 상급의 먹이를 ‘그림의 떡畵中之餠)’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이 금은(金銀)에 굶주린 육식동물들은 포기할 줄을 모른다. 몇 번이나 도전해 그때마다 고배를 마시고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 포기를 모르는 집요함이야말 로 이 맹수들의 진정한 무서운 점이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 낭패를 당하는 쪽은 오히려 이 해적들이었다. 그들은 사신과 조우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다시 한번 짤막한 단말마가 심야의 해변 위에 울려퍼졌다.

철썩철썩!

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그 비명을 백사장의 모래와 함께 집어삼킨다.

광해는 대공황 상태였다.

그의 이빨은 지금 쉴새없이 딱딱거리며 부딪히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수라장을 거쳐왔지만 사나운 식인상어 같은 이 사내가 이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년의 호리호리한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은 죽음의 손길 그 자체였다. 그의 일초를 견뎌내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 죽음을 불러왔는지 그 흔적조차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손이 가볍게 한번씩 휘둘러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매번 어김없이 하나의 죽음이 찾아왔다. 손속에 사정을 두는 법은 절대 없었다. 검이나 도 같은 날 달린 병기는 그 안에 들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법도 권법도 지법도 각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음은 그들 사이에서 흉폭한 마수(魔獸)처럼 사납게 날 뛰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 죽음의 옷깃에 스친 이는 보검에 잘린 것처럼 예리하게 절단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보이지 않는 사신의 낫 이 이들을 토막질치며 도륙하고 있는 듯했다.

그 일초는 매우 빠르고, 정확하고, 또 잔인했다. 열 명째 부하가 그의 손에 쓰러졌을 때 광기 속에서 광해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놈은 우릴 몰살시킬 생각이야! 그의 장담대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작정이야!’

참기 힘든 공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다 함께 쳐라! 혼자서는 무리다! 합공해!”

살기 위한 발악이 시작되었다.

“우와아아아아아!”

괴성과 함성으로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며 여덟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은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원래 수십 판의 계란이 던져져도 바위는 꿈쩍하 지 않는 법이다.

다시 한번 그가 소매를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은빛 질풍이 맹수처럼 달려나가 여덟 개의 목을 물어뜯었다.

푸샤샤샤샥!

여덟 명의 머리통이 피분수와 함께 동시에 허공중에 솟아올랐다. 단 한수에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 아홉!”

무감각하게 내뱉는 그의 두 눈에서 냉혹한 살의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도, 도망가자!”

눈이 거의 뒤집힌 상태로 광해가 외쳤다.

그러나 사신은 도망자도 용서하지 않았다. 해적이 떨어뜨린 창 하나를 발로 차올려 잡은 뒤 힘껏 던졌다.

푹, 푹, 푹!

뀈! 뀈! 꾸에에에에엑!

세 명의 해적이 단번에 일렬로 꿰여 해적 꼬치구이가 되었다.

이 정도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으, 으아아아아악! 다, 달아나야 돼! 저런 괴, 괴물하고 싸우다니 말도 안 돼! 사, 사신이다.”

광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뒤돌아볼 여가 따위는 없었다. 그는 타고 온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저 배만 타면…….?

마침내 그는 자신이 타고 온 배에 도착했다. 그것은 그를 이 지옥으로부터 빼내줄 방주였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네놈이 대장인가?”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를 올려다본 광해는 기겁하고 말았다.

은명은 어느새 그가 타고 온 배 위 선미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죽음의 결정처럼 차갑고 무심했다.

“…하지만 두목은 아니군. 두목은 어디 있나?” 은명의 눈은 정확하게 그의 신분을 꿰뚫었다.

“저, 저기… 저쪽 바다 위 본선에 있습니다.”

해적에게 충성심 따위가 있을까보냐. 해적에게 있어 충성심이란 위기상황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긴급투척 목록 일순위를 뜻했다.

그 둘째손가락 끝에 시선을 맞춘 은명이 안력을 돋우어 어둠을 꿰뚫자 별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사물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별빛에 의지했다 고는 하나 놀라운 능력이었다.

해적선이 직접 항구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 해적선이 정규 항구에 정박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이런 뭍에 잘못 다가왔다가 암초에 걸리거나 방향타가 모래에 파묻히 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도 작은 쾌속정으로 나눠 타고 해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좋아! 확인했다! 그만 가봐라!”

무뚝뚝한 목소리로 은명이 말했다.

“그, 그럼 살려주시는 겁니까?”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던 광해의 얼굴에 회생의 빛이 감돌았다. 감격한 그가 벌떡 일어나 읍하며 예를 표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광해는 포권지례를 취할 수 없었다. 아마 두 번 다시 불가능할 터였다. 왜냐하면 그의 양팔은 이미 그의 어깻죽지에 붙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팔이 어깻죽지한테 정이라도 떨어진 걸까?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그것은 기묘한 동시에 영혼을 갈가리 찢을 만큼 두려운 경험이었다. 귓가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퍼졌다. 그 에게는 그의 부하들 같은 자비로운 한순간의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털썩!

그의 키가 갑자기 줄어들었다. 이번에 떨어져나간 것은 두 다리였다. 역시 통증은 없었다. 그런 기괴한 경험을 깨어 있는 맨정신으로 한다는 것은 실로 측량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것은 영혼을 분쇄시키는 충격이었다.

광해의 얼굴에 인간이 지을 수 없는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표정이 떠올랐다. 초점을 잃어가는 두 눈으로부터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고, 반쯤 헤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동안 환상처럼 잠시 잊혀져 있던 격통이 사지의 절단면으로부터 깨어나 단숨에 그의 뇌로 몰려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인간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귀신의 호곡성도 이보다는 덜할 터였다.

툭!

마지막으로 절단된 광해의 목이 모래사장 위로 떨어졌다. 눈은 동그랗게 부릅떠진 그대로였다. 그 고통에서 해방되어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때문에 아마 그에게는 생애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난 분명히 말했다. 너희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소년의 모습을 빌린 사신이 무심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셈은 끝나지 않았다.

그믐밤이라 달은 외출하지 않았다. 대신 별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했다. 바다에도 별빛이 깃들었는지 넘실거리는 검은 표면 위에도 진줏가루를 뿌려놓은 듯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검은 해풍호는 그렇게 반짝이는 검은 비단폭 위에 조용히 떠 있었다.

“얼래? 야, 점박아? 저게 뭐냐?”

“그… 글쎄요, 두목?”

해적왕 도곡의 질문에 점박이 ‘막풍’은 머리를 긁적였다.

딱!

예상대로 주먹이 날아왔다.

“제·독·님!”

한 자 한 자 강조하며 도곡이 다시 한번 언성을 높였다. 막풍의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온다.

“벌써 돌아오나? 빠른 놈들일세. 그런데 왜 벌써 돌아오는 거야? 광해 놈, 설마 혼자 농땡이 치는 건 아니겠지?”

돌격대장 광해가 이번 일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애원해 도곡이 이곳에 남아 있는 터였다. 믿고 있는 부하인지라 한번 맡겨보기로 했다. 일단 광해를 잘 키워놔야 나중에 자신이 편해질 수 있기에 많은 경험을 쌓으라는 차원에서 이번 작전을 맡겨놨던 것이다. 그 믿음직스런 수하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있는 곳을 불었 다는 사실을 안다면 도곡은 아마 눈이 까뒤집힐 것이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본선을 향해 다가오는 상륙정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엄청나게’ 빨랐다.

“억수로 빠르네! 우리 애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노 젓기 실력이 좋아……?”

그러나 그는 하던 이야기도 채 마치지 못하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눈이 점점 더 확대되어갔다.

펑!

펑! .펑!

적막한 밤바다의 고요함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폭음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동시에 새하얀 물보라가 연달아 치솟아올랐다.

“뭐, 뭐냐? 함포사격이냐?”

기겁한 채 얼른 몸을 숙이고, 두리번거리며 호들갑스럽게 외쳤지만 사방 어디에도 군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 게으른 놈들이 이런 야밤중까지 근무에 힘쓸 리가 없 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 근방의 물길을 잘 아는 그들이 아니라면 이런 달조차 떨어진 야심한 밤은 좌초되기 딱 알맞았다.

폭음은 본선을 향해 달려오는 저 조그만 쾌속정에서부터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 저게 뭐다냐?”

“그, 글쎄여?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자랑스럽고 용맹한 해적들은 쥐새끼처럼 조용하게 다니지 저렇게 요란스럽게 다니지 않는다는 거죠.”

“빨리 가서 중광을 불러와!”

도곡이 급히 외쳤다.

“옙, 두목님!”

상황이 상황인지라 도곡도 이번 건은 그냥 저축해두기로 했다. 점박이 막풍이 선실을 향해 달려갔고, 느긋한 자세로 해적답지 않게 놀랍게도 독서란 것을 하고 있 던 지현구 중광이 부랴부랴 갑판으로 달려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두목?”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놈들, 분명 일부러 반항하는 게 틀림없어!’

그 증거로 두목이란 말을 필요 이상으로 힘주어 발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문제로 싸우고 있을 틈이 없었다. 중광의 질문에 도곡은 말없이 한쪽을 가리켰 다. 거기에 예의 그것이 있었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품속에서 망원경(꽤 오래전의 약탈품이었다)을 꺼내 그쪽 방향으로 돌렸다. 그믐밤이었지만 별빛에 의지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광의 입이 떡 벌어졌다.

펑!

…펑!…펑!

쾌속정 뒤에서 물보라가 요란스레 솟아오를 때마다 배는 쏜살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중광의 손에서 망원경을 가로채 오른쪽 눈에 대고 안력을 돋우어 바라본 도곡 의 입 역시 쩍 벌어졌다. 믿지 못할 광경이 그곳에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것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젊은 소년이었다. 배 뒷전에 꼿꼿이 서 있는 소년이 바다를 향해 장력을 내뿜을 때마다 배는 날랜 돌 고래처럼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래도 양심에 찔렸는지 손에 노 하나는 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두목?”

망할놈! 언젠가 저 아구창을 확 찢어버릴 것을 맹세하며 도곡이 지시를 내렸다. 저것의 적의는 명확했다.

“총원 전투배치! 지금부터 본 함은 전투에 들어간다.”

중광이 복창했다.

“알겠습니다, 두목님! 본 함은 지금부터 전투에 들어갑니다, 두목님! 총원 전투배치입니다, 두목님!”

‘안 그래도 바쁜데! 뿌드득!’

도곡의 이마에 검푸른 핏줄이 포효하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의향이 전혀 없었다.

“야, 갈매기!”

아주 옛날 옛적 별명으로 다시 불린 중광은 순간 찔끔했지만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예, 아직 용건이 남으셨습니까, 두목님?”

“너, 아주 노골적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목님!”

딴청을 피우며 중광이 대답했다.

“뭐 좋아! 나중에 두고보자!”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두목님!”

중광이 맞장구를 쳤다. 도곡이 다시 큰소리로 명령했다.

“등화관제(燈管制) 해제(解除)! 불을 밝혀라!”

주위의 이목을 피하면서 보다 완벽한 은신을 하기 위해 갑판의 불은 모두 꺼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암흑은 몸을 숨기기에는 더없이 이로울지 모르나 전투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갑판 위가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궁수대, 좌현 배치! 빈둥거리는 나머지 놈들도 남은 활을 들고 집합! 쇠뇌 준비! 전투용 투망 준비! 뭔가가 온다. 무조건 쏴버려! 수장시켜버려! 밤바다에 꼬르륵 안녕이다. 생선 먹이로 안겨줘라!”

도곡이 고래고래 악을 쓰며 명령했다. 왠지 모를 본능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의 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도곡의 명령에 따라 갑판 위가 분주해졌다. 그의 명령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어김없이 지켜졌다. 근래 이 남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해적답게 일사불란하고 신 속한 움직임이었다.

궁수대가 배치되고, 쇠뇌가 장전되고, 시위가 당겨졌다. 아직도 배에는 오십 명 이상의 수하들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떼거지로 움직여봤자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 는 꼴밖에 되지 않기에 뭍에는 많이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준비완료입니다, 두목님!’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도곡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마에 돋아난 핏줄이 더욱 도드라진 다.

“야, 이 바보 천치들아! 제독님이라니깐, 제독!”

이런 놈들을 부하랍시고 믿고 해적질하고 있었다니…. 갑자기 자신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한숨이 푹푹 새어나온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놈들 몽땅 정신재무장을 시켜버리고 말리라고 그는 결심했다.

열 받아 있는 두목은 무시하고 중광이 명령했다.

“다들 대기! 기다려라! 사정거리 경계에서 오장 안까지 들어오면 일제히 쏘는 거다. 사거리에 진입했다고 성급하게 쏘면 날아간 화살에 힘이 실리지 않아 치명상 을 입히지 못한다. 화살 낭비다. 2열 교차 연환사진(連環射陣) 준비.”

지현구라는 별호답게 중광의 지휘는 상당히 유능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린 자세로 기다렸다.

마침내 쾌속정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해적들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시 소년의 장심에서 두 번의 장력이 발출되자 배는 벌써 오장 거리를 이동해 있었다.

“일제 사격!”

들려 있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수십 발의 화살과 세 발의 쇠뇌가 검게 출렁이는 밤바다를 향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날아갔다. 피 냄새를 맡고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상어 떼처럼 무서운 기세였다.

쾌속정을 타고 맹렬한 속도로 밤바다를 가로지르던 은명은 가소롭다는 듯 노를 풍차처럼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냈다. 풍차처럼 회전하는 노

에서 발생한 거대한 바람의 기류가 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평범한 화살로 무림인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웃기는군.”

무심한 얼굴로 은명이 중얼거렸다.

꽤나 자신 있었던 첫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도곡과 중광의 얼굴이 급변했다.

“젠장, 역시 무림인이다. 그것도 상당한 고수다. 화살은 별로 소용없다. 쇠뇌수, 배를 노려라! 침몰시키는 거다.”

중광의 말 그대로였다. 진기가 실리지 않은 화살로는 일류고수의 움직임을 봉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절정고수라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쾌풍전을 장전해라!”

세 대의 거대한 쇠뇌가 일제히 쾌속정을 향했다. 그 위로 쇠몽둥이 같은 대를 지닌 화살이 장전되었다. 쾌풍전은 쇠뇌용으로 특별히 제조된 화살로 함대전을 가정 하여 만들어진 무기였다. 이거라면 저런 작은 나무배는 일격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게다가 웬만한 강호고수도 맨몸으로 이걸 받아낼 수는 없다.

“발사!”

피유유유유융!

한층 더 날카로운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며 쾌풍전은 무서운 속도로 은명이 탄 쾌속정을 향해 질주해갔다. 한 대는 빗맞았다. 두 번째는 노를 이용해 비껴내듯 튕겨버렸다. 쾌풍전의 묵직한 중량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쾅!

그러나 세 번째는 정확하게 배의 선수부에 뻥 하고 구멍을 뚫고는 바다로 도망쳐버렸다. 무겁고 큰 만큼 파괴력은 대단했다. 충격의 반동으로 인해 은명의 몸이 허 공중에 던져졌다. 거대한 힘이 선수를 때리자 후미가 크게 들어올려졌던 것이다.

“맞았다! 아싸!”

도곡과 중광은 서로를 얼싸안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둘은 더욱 놀라운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바다로 떨어져 허우적거릴 줄 알았던 소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해면을 박차며 물 위를 달려 자신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귀, 귀신이다!”

일부 무식한 해적들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하여 소리쳤다. 사람이 육신을 걸치고 물 위를 달리다니! 그들로서는 듣도보도 못한 경지인지라 귀신의 소행으로밖에 치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곡과 중광은 달랐다. 그들은 그 나름대로 일류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인 것이다. 무림인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격이란 것이 존재한다.

문제는 지금의 자신들과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존재 사이에도 커다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드, 등평도수! 그, 그런 바보 같은! 말도 안 돼! 그딴 건 이야기나 전설 속에 있는 거라고.”

혼란에 빠진 도곡이 게거품을 물며 광인처럼 외쳤다.

“쏴라! 쏴! 절대 올려보내서는 안 된다!”

수하들을 향해 윽박지르면서도 도곡은 왜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광해 일행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버렸다는 사실을! 저기에서 죽음의 사신이 달려오 고 있었다.

인간들은 사신의 발걸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수면 위를 육지처럼 달려오고 있는 그 존재는 날아오는 화살을 가소롭다는 듯 쳐내고 피해내며 계속해서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 마침내 배의 홀수선 앞까지 도착했다.

펑!

폭음과 동시에 삼장 높이의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쳤고, 동시에 은명이 갑판 위에 내려섰다.

후두둑!

솟구쳐오른 물보라가 비가 되어 갑판 위를 때렸다. 그럼에도 은명의 옷은 젖은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너, 넌… 누, 누구냐?”

도곡이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신!”

무심한 목소리로 은명이 대답했다.

“저항해도 죽고, 저항하지 않아도 죽는다. 어떻게 할 테냐?”

그는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였다.

“항복하죠? 이대로는 개죽음입니다.”

중광이 도곡의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현재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판단은 최선의 것이었다. 그러나 도곡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 그런다고 저 괴물이 우릴 살려줄 것 같으냐! 얘들아, 모두 쳐라! 공격해 몽땅 달려들어!”

도곡이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발악성은 공기중에 공허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그에 따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뭣들 하느냐? 어서 공격해! 어서!”

그러나 역시 아무도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주박(呪)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사내를 공격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의 본능이 못이 되어 그들의 발을,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 었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중광이 도곡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올렸다. 평상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뭐야?”라고 묻는 얼굴로 도곡이 뒤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군요. 두목의 그 드높은 용기, 이 지현구 중광은 감복할 따름입니다!”

엄숙하다 못해 경건한 얼굴로 중광은 시를 읽듯이 읊조렸다.

“야, 임마! 무슨 소리야? 엉?”

중광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뒤를 맡기겠습니다. 두목! 자, 그럼! 안녕히!”

“크르르르! 너, 자꾸 두목, 두…….

그러나 분노에 떨고 있는 도곡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 말과 동시에 잽싸게 몸을 틀어 과감하게 바다로 뛰어드는 중광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잡혔던 것이다. 사무치는 배신감에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밤바다의 냉기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맹스런 행동에 감화된 수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무기를 버리고 밤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개중에는 영 리하게 나무통을 하나 끼고 뛰어내리는 이도 있었다.

풍덩, 풍덩, 풍덩!

여기저기서 요란스레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은명도 딱히 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현명한 부하들이구나. 용감하고! 하지만 저들 중 얼마나 살아서 다시 육지를 밟을 수 있을까?”

밤바다의 냉기는 아무리 따뜻한 남해라 해도 무시할 수 없다. 세 시진 안에 육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체력이 떨어져 익사하거나. 이들 중 상당수는 죽고, 일부만 살아남을 것이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오직 신의 영역이었다.

“이, 이럴 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도곡 앞에 은명은 칼 한 자루를 던져줬다. 갑판에 떨어져 박힌 칼날이 부르르 소리를 내며 떨렸다.

은명이 물었다.

“너도 배를 버리고 저들과 함께 행동할 테냐?”

도곡이 버럭 소리쳤다.

“웃기지 마라! 선장이 자신의 배를 버리는 법은 없다. 배와 함께 운명을 함께하는 자만이 선장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비록 해적이긴 해도 그는 뼛속까지 뱃사람이었다.

“그 용기를 봐서 자결한다면 시체만은 온존하게 해주마!”

감정이라고는 일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방금 던져준 칼은 아무래도 자결용이었던 모양이다.

“까불지 마라! 네놈 같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손에 죽을 성싶으냐!”

날이 시퍼렇게 선 강도를 꺼내든 도곡이 광분한 야수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은명은 가벼운 동작 하나로 그의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산들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팟!

순간 은실보다 가느다란 빛이 밤바다 위를 갈랐다.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재빨리 몸을 튼 도곡이 사납게 외쳤다. 그러나 은명은 적에게 등을 보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뭐… 뭐냐, 그 시건방진 태도는? 지금 무시하는 거냐?”

그러나 은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죽은 자와 나눌 이야기는 없다.”

순간 도곡의 남아 있는 오른쪽 눈이 부릅떠졌다.

끼이이이이이이익!

녹슨 경첩이 비틀릴 때나 날 법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검은 해풍호에서 가장 높은 중앙 돛대(메인 마스트)가 천천히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밑동은 무엇인가 예리한 것으로 잘린 것처럼 분리되어 있었다. 그 절단된 경사면을 타고 지금 돛대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절망과 공포 속에 부릅떠져 있던 도곡의 오른쪽 눈의 떨림이 정지했다. 반쯤 ‘헤’ 벌어져 있던 입도 정지했다. 그의 목 부위에 선명한 붉은 선이 그려졌다.

은명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푸아아아악!

은명의 등 저편에 굳어 있던 도곡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갑판으로 쓰러지는 돛대에 걸린 하얀 돛이 비산한 피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그의 수하들이 날마

다 닦던 갑판 위는 지금 해수 대신 붉은 피로 흥건했다. 그의 몸이 밀짚인형처럼 힘없이 갑판 위로 무너져내렸다.

남해를 주름잡던 검은 해풍의 두목, 두목이라기보다 제독이라고 불리고 싶어했던 사내, 편목왕 도곡의 최후였다.

“어리석은! 자결하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을…….”

은명이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새하얀 백광이 그곳으로부터 뿜어져나왔다. 마치 손으로 검강을 뽑아낸 듯했다. 수강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새하얗게 빛나는 손을 힘껏 아래를 향해 내질렀다.

쾅!

배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그의 발밑으로 깊고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몇 겹의 바닥을 지나 맨 밑바닥 선저에 이르자 그곳에서는 콸콸콸 바닷물 이 들어오고 있었다. 단 일격에 배 밑창까지 뚫어버린 것이다. 놀라운 힘이었다.

“우리의, 우리의 배가…, 우리의 검은 해풍호가… 가라앉아간다.”

밤바다에서 얼굴을 내민 채 둥둥 떠 있던 중광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뛰어내린 여러 명의 수하들 역시도 마찬가지 로 망연자실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제 그들은 돌아갈 장소를 잃은 것이다.

“사신…, 역시 그자는 사신이었다. 사신…….”

망연한 목소리로 중광이 중얼거렸다.

이후 이 남해 앞바다에 검은 해풍이란 이름이 들려오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감겨 있던 눈이 살짝 반개했다.

“여기는…….”

“이제 괜찮아요.”

“해, 해적은?”

기절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낸 독고령의 몸이 격하게 움찔거렸다. 은명이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이제 그들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고 쉬어도 돼요.”

조용하게 미소지으며 은명이 말했다. 조금 전 사신의 강림을 보는 듯했던 그 냉혹함과 잔인함은 지금 이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떻게?”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사문의 사람들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기척은 오직 은명 한 사람뿐이었다.

“서, 설마!”

놀란 눈으로 은명을 바라본다. 그는 부정하지 않은 채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신비한 미소였다.

“구해준 거네요…….”

독고령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은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초지종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고마워요.”

속삭이듯 말했다. 그 따뜻한 숨결이 귀를 간질이자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올랐다.

“몸은 어때요?”

“괘, 괜찮아요. 아직 약간 어지러운 것을 빼면……”

독고령이 대답했다.

“큰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침묵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독고령을 은명은 지켜보기만 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늘게 떨리던 길고 가는 속눈썹의 끝에 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독고령이 갑자기 은명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은명은 잠시 당황하다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안아주었다. 여인 특유의 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흑…, 흑…….”

그의 품에 안겨 독고령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은명은 더욱 난감해졌다. 우는 여자는 이 세상 최강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은 사 실인 듯했다. 사신이 여자의 눈물에 겁을 먹고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무서웠어요, 엉엉……. 무서웠어요, 엉엉엉. 정말, 정말… 무서웠어요…….”

그녀에게는 이것이 첫 실전이었다. 사문의 사자매들과 연습대련을 한 적은 있어도 직접 생사의 격전지에 뛰어들어 싸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칼끝에 스러져가는 생명, 칼이 타인의 살을 헤집을 때마다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미묘한 감촉, 코를 자극하는 강렬한 피비린내, 고막을 울리는 비명. 모든 것이 아직 그녀의 정신이 견뎌내기에는 과중한 충격이었다. 아직 그녀는 소녀인 것이다. 이런 실전은 너무 일렀다.

은명은 조용히 그녀를 안고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누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장벽을 넘지 않으면 안 되죠. 현실은 상상보다 더 냉혹하니까요.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잔인하지만 피해갈 수는 없어요. 그것 이, 그 장벽을 하나하나 넘어간다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곁에 있잖아요.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더 쉽게 장벽을 넘을 수 있을 거예요…….”

독고령은 아직도 눈물이 글썽이고 있는 흑진주 같은 두 눈을 들어 은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조금 전 수십 명의 해적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귀신 같은 차가움은 발견할 수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 된 얼굴로 독고령은 웃었다.

“헤헤헤, 얼굴… 엉망이죠?”

확실히 눈은 토끼처럼 빨갛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얼굴이기도 했다. 은명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가 로저었다.

“아니요, 아주 예뻐요!”

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 채 그대로 있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의식은 하나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해안가 절벽에 뚫린 한 동굴 안쪽에서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독고령의 차가웠던 몸을 녹여주는 것은 그 불꽃보다 더 뜨겁게 느껴 지는 한 사람의 체온이었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자 마음 한구석이 텅빈 듯 공허해졌다. 마음의 우물 속에서 물이 모두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무기력했다.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수면침 을 맞고 쓰러져 해적에게 납치당할 뻔하기도 했으니 정신은 이미 그녀 같은 소녀의 가녀린 신경이 견뎌낼 내성 한도를 오래전에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벤 것은 처음이었다. 강호에 몸담고 있는 이상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미칠 듯이 누군가가 그리웠다. 인간의 온기를 지 금 이 순간처럼 간절히 원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때 부드럽고 따뜻한 그 손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자신이 오열할 때 힘껏 안아주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 손길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 았던가. 그의 존재가 아직도 혼란과 공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그가 물었다. 자상한 목소리다. 소녀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부끄러워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라면 좋다’고 생각했다. 이 결정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그녀의 텅빈 마음이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그가 절실히 필요했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아직도 비릿한 피 냄새가 그녀의 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워줄 다른 손길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곁에는 그가 있었다. 자신을 구해주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그 손의 주인이었다.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 자상하고 부드러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의 손끝을 타고 인간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기와 기가, 영혼과 영혼이 서로 감응하고 있었다.

위를 바라보자 그의 등뒤로 불꽃에 흔들리는 그림자의 일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윽고 그 밑으로 그의 눈이 들어왔다. 자상함이 넘치는 눈이었다. 그녀는 살며 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조용히 겹쳐졌다

그녀의 감겨진 양쪽 눈에서 볼을 타고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쏴아아아아!

귓가로 잔잔한 파도소리가 자장가처럼 아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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