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6권 16화 – 공포, 절망(絶望), 비탄悲嘆)
공포, 절망(絶望), 비탄悲嘆)
-죄여오는 공포-
어느 놈의 발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이 관문을 고안한 사람이 대자연 속에서 모두가 사이좋게 협력하여 단결하기를 바랐다면, 그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멍청이나 얼간이, 그 어떤 것으로 불려도 변 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서로가 투쟁하고 경쟁하고 군림하는 약육강식의 철의 규칙이 존재하는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면 그는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는 야비한 천 재라 불릴 만했다. 인간은 먹이사슬이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화합보다는 투쟁과 쟁취를 선택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더 큰 미지의 공포와 조우하게 됐을 때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중토관이 시작되고 벌써 닷새가 흘렀다. 마천삼흉이라는 머저리들 빼고도 7조를 습격한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삼흉과 똑같은 꼴을 당해야 했다. 현재 이곳 중토관은 먹느냐 먹히느냐,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었다.
닷새째 되던 그날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만큼 짙은 안개였다.
“헉헉헉!”
남자는 달리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가든 말든 그는 상관치 않고 달렸다. 목구멍이 타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괴로웠지만 그는 달렸다.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오직 그자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일념만이 그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그가 속한 조는 9조, 그의 이름은 현운. 주작단의 바로 그 현 운이었다.
그는 맹수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도망치고 있었다. 그다지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현운은 자신의 실력에 자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 인 대사형을 두다 보면 그럴 엄두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비류연이나 염도 노사 같은 경우는 예외 중의 예외라 할 수 있었다. 그 둘만 빼면 자신의 실력 도 그리 빠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천무구룡의 칭호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도대체 그 괴물은 뭐지?”
그자는 느닷없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다른 조원의 습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기백을 지닌 괴물이 그들 사이에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 다. 결정적으로 그자는 노인이었다. 그것도 자신 같은 젊은이 아홉 명이 떼거지로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그런 노인이었다. 백도와 흑도에서 거르고 걸러 모아놓은 이들이 손 한번 제대로 못 쓰고 당해버렸다. 그들 중 그자의 일 검을 받아낸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뭔가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터무니없는 뭔가가 그들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눈을 몇 번 깜빡하고 나자 서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는 생각했다. 지금 달려들어봤자 전혀 승산이 없었다. 그들은 그자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시시해! 시시해! 시시해!’
그 괴물은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심심풀이 장난감조차 되지 못했다.
‘재미없어!”
혼자 남은 자신을 보며 그자가 툭 내뱉은 말이었다. 여덟 명이 땅바닥에 뒹구는 가운데 그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현운은 뒤를 향해 전진했다. 아니 뒤를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신형을 날렸다.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럼 누구에게??
그러자 한 사람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난 공포가 그의 심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도 조원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처절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역시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공포를 억지로 누르며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때 한 그림자가 느닷없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땅에서 불쑥 솟기라도 한듯 그 등장은 갑작스러웠다. 공포가 폭발한 현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수천수만 번 반복해서 훈련된 몸은 자동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쉬익!
그는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눈앞의 불청객을 향해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무당파 장문인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한 그런 쾌속한 일검이었다.
“어!”
짧은 경호성. 하지만 그 그림자의 움직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미간을 향해 최단 거리로 찔러오는 검을 고개를 살짝 돌리는 짧은 동작으로 피한 다음 재빠른 금나수법으로 현운의 오른 손목을 잡고 살짝 비틀었다.
부웅!
현운의 몸이 쏟아져 들어가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중에 원을 그리며 빙글 돌더니 등짝부터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커헉!
현운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림자가 땅바닥에 메다꽂힌 그를 오만하게 굽어다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야, 위험하잖… 어라? 현운?”
““대, 대사형!”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대사형 비류연이었다. 볼 때마다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던 비류연의 얼굴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다니,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러니깐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겨우 진정이 된 현운을 향해 비류연이 물었다. 이미 물을 세 사발씩이나 벌컥벌컥 들이켠 후 한참 동안 운기조식을 한 터였다. 비류연에게 당하기 전부터 엄청나게 피로가 쌓여 있었던 터라 바로 자초지종을 물을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
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괴한에게 무슨 특징이라도 있어?”
“특징이라면… 물론… 이… 있습니다.”
현운의 목소리는 바람에 희롱당하는 나뭇잎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뭔데?”
“그… 그것은…….”
다시 그 괴물의 모습이 떠오르자 현운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은 지켜보며 비류연은 생각했다.
“저녀석 정도 되는 놈에게 저 정도의 공포를 심어주다니… 게다가 인상착의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인상까지 풍기고 있군.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현운은 스스로 그 사실을 자꾸만 망각하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엔 아직 그의 수업이 부족했다. 하지만 도망만 가서는 아 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적어도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그렇게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이며 그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머리가 눈처럼 새하얀 백발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슴께까지 오는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는…….” 현운은 남아 있던 용기를 한꺼번에 쥐어짰다.
“얼굴을 반쯤 가린 은가면(銀假面)을 쓰고 있었습니다.”
“으… 은가면?”
현운의 몸이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예, 그것은… 달빛처럼 차갑게 빛나는… 은빛 가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면 뒤에는… 차가운 고… 공포가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서, 설마… 그, 그럴 리가. 그런 바보 같은 일은..
모두들 숨을 삼켰다. 사람들 대부분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는 비류연 정도뿐이었다. 반면(半面)의 은가면, 그것은 그들의 기억 밑바닥에 봉인된 가장 어둡고 공포스러운 상징을 절망 속에서 떠올리게 하는 도화선이었다.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공포. 그것은 그 런 종류의 공포였다.
영겁처럼 흐르던 침묵을 깬 사람은 비류연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동요(動搖)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기 소개는 안 하데?”
“자… 자기 소개요?”
“그래, 통성명도 못 해보고 당했냐?”
“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이름은 공포, 마음속 깊은 곳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심장을 먹어치우는 자!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라고 말입니다.” “선전포고로군. 현운만 멀쩡히 돌려보낸 것도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는지 몰라. 그렇지 않다면 과연 여기까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군.”
“뭐가 확실해졌다는 말인가? 난 아직 혼란 그 자체일 뿐이네.”
효룡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비류연이 대답했다.
“적어도 이제 서로 싸우고 있을 때는 아니라는 거지. 얼마나 더 당해야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야.”
비류연의 예측대로 피해자는 비단 현운이 속한 9조만이 아니었다. 다른 조 역시 9조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여덟 마리의 사냥감으로는 아직 공복이 가 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넌 누구냐?”
용천명은 느닷없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은가면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나 말인가?”
구유의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 심령을 억압하는 듯한 목소리가 은가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의 이름은 ‘공포’, 마음속 깊은 곳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심장을 먹어치우는 자!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용천명은 손을 떨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물었다.
“그런 분이 여긴 무슨 용무시오?”
은가면이 대답했다.
“그대들의 마음에서 희망을 몰아내고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 나는 왔다!”
“겨우 혼자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용천명이 신호를 보내자 2조 전원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그를 포위했다. 두 번 다시 그런 건방진 말을 꺼 내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결심과 함께. 공포라니… 그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닌 단련된 무인들이었다.
“싸움은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닌 법! 수가 많다고 방심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지.”
모두들 병기를 꼬나들고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섣불리 달려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체불명의 압박감이 그들의 뼈와 살을 붙들어매고 있었다.
“쯧쯧, 그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지.”
스윽스윽스윽!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접시만큼 크게 떠졌다. 은가면이 산보하듯 가볍게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그의 신형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 분신!”
눈이 휘둥그레진 용천명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여덟 걸음째, 그의 신형 수는 정확히 2조의 조원 수만큼 늘어나 있었다. “이걸로 일 대 일이군.”
무려 구 분신이었다.
아홉 명의 은가면은 어느새 2조원들의 사각에 절묘하게 자리를 점하고 있었고, 너무나 놀란 사람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그들의 심령을 옭아매기라도 한 듯했다. 그리고 은가면이 한 번 장난처럼 손을 휘두르자 엄청난 검압에 모두들 병기를 떨구고 말았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게 인간의 경지인가 싶을 정도로 강한 상대의 실력을 접한 그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어허, 검은 생명인데 그렇게 쉽게 놓쳐서야 쓰나? 그래서 어찌 검객이라 할 수 있겠으며, 무인이라 이름 할 수 있겠고, 자신의 생명을 제대로 간수할 수 있겠는가?
그 비난에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검이 없어도 손은 있다!”
몇몇 사람이 용감하게 권법과 장법을 휘두르며 은가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렸다. 조금은 흡족해진 것일까? 은가면은 다시 한 번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크아아아아아악!
일곱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세의 것이라 믿겨지지 않는, 무간지옥에서나 울려 퍼졌을 법한 처절한 비명소리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달려들던 일곱 명의 몸은 움직이던 모습 그대로 딱딱하게 굳더니 썩은 집단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것이 여덟 걸음, 단지 여덟 걸음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용천명과 마하령뿐이었다. 용천명은 녹옥여래신검을 빼내 들고는 달마삼검의 제일 검을 펼쳤다. 여래의 광휘처럼 눈부신 검기가 상대를 향해 뻗 어나갔다. 은가면은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살짝 들더니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하게 그의 일 검을 받아냈다. 그의 책망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쯧쯧, 불가의 검은 부동심과 자비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법이거늘… 마음은 너울지는 바다처럼 일렁이고, 검에는 살기가 어렸으니 어찌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 겠느냐? 그 정도 실력으로 녹옥여래신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 검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어… 어떻게 그걸!”
핵심을 단번에 관통하는 너무나 정확한 지적에 용천명은 경악하고 말았다.
“시끄러워!”
용천명이 심적 충격을 받고 밍기적거리자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한 마하령이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엄청난 질풍이 불어닥쳤다. 자연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인간의 힘에 의해 불어닥친 질풍이었다. 갑자기 나타는 작은 체구의 은가면 남자는 폭풍처럼 단 숨에 다섯 명의 무인을 잠재워버렸다.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어린 불나방들을 어린애 다루듯 다루었다.
11조의 공격은 은가면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옷깃조차 스칠 수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은가면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그 힘의 흐름이 그들의 검과 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반면 그들은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호된 꼴을 당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귀신의 손이 그들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게다가 한 수 한 수에 엄청난 나선력이 작용했기 때문에, 그와 장을 부딪치기라도 하면 옷이 몽땅 걸레처럼 찢겨져 나갔다. 보이지 않는 우악스런 손이 빨래 짜듯 옷 을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먼저 소매가 나선형을 그리며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고, 그 다음은 전신이었다. 완전한 알몸 대신 누더기로 끝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떨리는 목소리의 그는 얼굴 한쪽에 검상이 있는 사내였는데, 소유라는 청년에게서 이 사형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싸늘했던 얼굴도 지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의 사제는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의 이름은 절망! 희망을 삼켜 인간의 마음을 꺾는 끝이 없는 깊은 늪.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은가면의 입에서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습격은 계속되었고, 1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대공자 비와 마검익 추명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이었다.
“어머, 머릿수가 모자라네, 아까워라!”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피처럼 붉은 적의로 온몸을 감싼 채 은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웬 년이냐?”
마천오걸 오문추는 그 말 한마디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입이 걸은 대가를 뼈저리게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은가면의 여인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의 몸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천지가 역전되었고, 동시에 방아를 찧듯 대지에 머리통을 박았다.
쿵!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 말은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자칫 잘못하면 화를 부를 수도 있거든요.”
같은 1조 소속인 이걸 칠련창 종리추가 일곱 개의 창을 차례로 휘두르며 연속적으로 불청객을 찔러 들어갔다. 이에 보조를 맞춰 삼걸 사갈검편 도추운도 검편을 휘두르며 은가면을 유린해 들어갔다. 역시 동료라 그런지 그들의 호흡은 딱딱 맞았다. 편영과 창영이 어지럽게 공간을 수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그저 그녀의 몸을 통과해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들이 찌르고 유린한 것은 실체가 아닌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기도 하고 물안개 같기도 했다. 남궁상과 진령까지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베어도 베어도 계속해서 생겨날 뿐이었다. 아무리 베어도 안개처 럼 스러지고 다시 생성되기를 반복했다. 바다 위의 물안개처럼 형체를 파악하기조차 힘들었다.
“귀, 귀신이다!”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베어도 베어도 베이지 않는다. 그런 게 귀신 이외에 또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허공중에서 불만 가득 섞인 항의가 터져 나왔다.
“아니, 귀신이라니?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신봤나요?”
“히에에에엑! 지, 진짜 귀신이다!”
덜덜덜덜!
노학이 무서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귀신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귀신이 무섭기는 진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안색은 매우 창백해져 있었다.
“멀쩡한 사람을 보고 귀신이라니… 벌을 받아야겠군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나뭇가지가 그녀가 들고 있는 건 검도 아니었다 – 사방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몽땅 바닥에 쓰 러졌다. 정말 싱거운 싸움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독고령뿐이었다.
“어머, 귀엽게 생긴 아이구나!”
혈의를 두른 여인이 즐겁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염도만큼이나 맵시가 안 좋은 사람이 또 있었다니… 그녀의 옷에서는 왠지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너는 좀 더 큰 즐거움을 나에게 선사해줄 수 있겠니? 저 아이들처럼 허약하다면 난 정말 슬퍼질 거야.”
어리광쟁이 같은 말투였다.
독고령은 비홍검의 절초인 ‘비상천리(飛上千里)’로 전력을 다해 공격해 들어갔다. 서른여섯 마리 기러기 모양의 검기가 그녀의 검을 떠났다. 열두 마리가 한계였 던 예전 그때와는 천양지차의 위력을 지닌 일격이었다.
“훌륭한 한 수로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막을 수 없어요.”
은가면의 검이 허공에 한 번 휘저어지자 서른여섯 마리의 비홍검기가 마치 새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듯 끌려가더니 완전히 무력해져버리고 말았다. 자신 의 일 초가 이토록 간단히 제압당할 줄 몰랐던 독고령은 경악하고 말았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야… 흔들리는 마음, 불안과 초조가 모두 드러나 있구나. 요즘 연애라도 하는 게냐?”
“무, 무슨 근거로!”
독고령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렇게 부정하느냐?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의 검에는 너의 심란함이 모두 깃들여 있구나. ‘심정청도(心靜淸道)’에 이르지 않고서 어떻게 제대로 된 검 을 펼칠 수 있겠느냐!”
“다… 당신이 어떻게 심정청도의 법문을?”
그러나 은가면의 여인은 그녀의 경악 섞인 반문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자기 말을 계속했다.
“마음의 청정함이 없이는 검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지. 이렇게 말이다.”
여인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쭈욱 내뻗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텅 빈 허공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어느새 검기가 그녀의 미간에까지 다 가와 있었다.
쉬쉬쉬쉭!
그때 갑자기 수십 장의 나뭇잎이 표창처럼 빠르게 여인의 측면을 휩쓸었다. 여인은 더 이상 검기를 찔러넣지 못하고 몸을 피했다.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고령과 은가면의 여인이 동시에 나뭇잎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대공자 비와 마검익 추명이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대공자 비가 물었다.
“나? 나의 이름은 ‘비탄, 탄식의 바다에서 태어나 비애의 늪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이니라!”
좀 전의 장난스런 모습과는 사뭇 다른 위압감이 여인의 몸에서 풍겨져 나왔다.
“원군이 도착했으니 이제 더 재미있어 지려나?”
상대가 두 명 더 늘어났지만 이 여인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장난감이 늘 어난 어린애처럼.
“이러면 더 재미있을까요?”
대공자 비와 정 반대편의 숲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비류연이었다. 그가 왜 1조의 영역에 있는 것일까?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독고령 역시 비류연의 등장은 의외였던 모양이다.
“사자, 괜찮으세요?”
이번에는 나예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긴장이 가득했다. 그녀 옆에는 이진설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남자라고 하지 않았나?”
또 한 사람이 숲의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오비완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장홍과 효룡, 윤준호, 교옥이 나타났다. 7조 중에서 빠진 사람은 거의 폐인처럼 지내고 있는 위지천뿐이었다. 그는 수화관 이후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버려두고 있는 처지였다. 7조가 아닌 사람들도 보였는데, 현운과 모용휘 였다. 그들 역시 다들 은가면의 습격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다들 살아 있었다.
“여기는 웬일이시오?”
마검익 추명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정이 안 가는 놈이었다.
“갑자기 이 산이 뒤숭숭해진 것 같아서요. 어떤 정체불명의 무리가 산을 돌아다니며 장난삼아 습격을 하고 있다지요?”
“장난삼아?”
“아직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으니 그런 표현을 쓴 것이오.”
장홍이 대답했다.
“안 죽었다고?”
“예,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걱정 마세요. 비명소리는 컸지만 기절한 것뿐이에요.”
나예린이 독고령을 안심시켰다.
“엄청난 심령적 타격을 받고 기절한 거예요.”
“저도 그때 경황이 없어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가보니 다들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아닙니까? 처음에는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죠.”
현운이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죽이지 않은 것까진 좋은데,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해버려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
“그들이 각 조들을 습격한 다음 기절시켜놓고 그들의 천율패를 빼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천율패를 빼앗긴다는 것은 이곳 중토관에서 중도 탈락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천율패를 빼앗을 작정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공은 워낙 고강해서 각 조원들만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바로 모든 조원이 일단 분쟁을 중단하고 대동단결하자는 것이죠. 미지의 적의 위협 에 대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나머지 조들은 다들 저희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1조뿐이죠. 어떻게 하실지 조금 있다 의 향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장홍이 그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매우 흥미로운 의견이었다. 확실히 검을 맞대본 지금 독고령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란 것을.
“근데 진짜로 남자 아니었나요?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남자였는데?”
비류연이 은가면의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의아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확실히 지금 눈앞에 있는 자도 분명 은가면을 쓰고 있었고, 증언대로 터무니없이 강하긴 했지만, 어딜 봐도 남자 같지는 않았다.
“남자라니!”
은가면를 쓴 여인의 적의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미려하고 우아하게 쫙 빠진 늘씬하고 완벽한 몸매를 지닌 남자도 봤니?”
여인이 여보란듯이 자세를 취했다. 허리와 다리 선, 가슴 선을 동시에 강조하는,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자세였다. 음음, 몇몇 남자가 주책 맞게 고개를 끄덕 였다. 확실히 잘 빠진 몸매였다.
“몸매 관리를 열심히 하시나 봐요?”
비류연이 감탄하며 물었다.
“물론! 항상 몸에 좋은 것만 먹고 피부 마사지도 잊지 않는다. 햇빛에 함부로 노출시키지도 않고 운동도 꼬박꼬박 하지. 내 내공의 팔 할은 몸매 관리를 위해 소용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굉장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 은가면 여인이 자랑스레 말했다.
“오오, 과연! 그런 노력이 그런 훌륭한 몸매를 만든 비결이군요.”
“좋아, 소년! 오늘은 훌륭한 심미안을 가진 자네의 얼굴을 봐서 이만 물러가지. 그럼 소녀야! 다음에 만났을 때는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네 남자친 구에게도 그렇게 전해주렴. 네 남자 친구는 범상한 친구는 아닌 것 같구나!”
“남자친구 아닙니다!”
대공자 비와 독고령이 강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흐흠, 아니면 말고…….”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 없을 것이오!”
장홍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의문투성이인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자 여인이 입가를 가리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가릿수가 좀 늘어났다고 이 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오늘은 흥이 깨져 물러가는 것뿐이란다, 아가야. 난 언제든 올 때도 갈 때도 마음대로란다. 나 를 막으려면 아직 백 년은 일러!”
그 순간 여인의 몸에서 엄청난 검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모두들 수십 개의 검이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모양에 기겁해서 제각각 병기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검기는 그들의 코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어… 어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살기로군! 엄청난 살기로 검이 찔러 들어오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거야.”
장홍이 신음하며 말했다. 단순한 살기만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소름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강함이 아닐 수 없었다.
“쳇!”
비류연은 얼얼한 손을 만지며 투덜거렸다. 딴 사람들에게는 허상을 보여줬으면서 자기한테만은 실제로 손을 쓴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직 허상의 살기에 어리둥절 해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얼얼한 느낌이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견제였나…….”
그렇다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방금 전의 일 초를 막느라 그녀의 움직임을 뒤쫓을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녀는 실로 절묘한 검기로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적 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솜씨였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 느낌은??”
은가면의 여인과 손속을 나눈 비류연은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느낌이 결코 생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는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허리춤에서 뭔가가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았고, 이것도 저것도 풀리지 않는 수 수께끼투성이였다. 비류연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자 상념을 끊고 몸을 움직였다.
“응?”
비류연 일행의 쑥덕거림을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대공자 비는 땅바닥에 떨어진 이물질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들었다. “이것은!”
그의 손안에 들린 것은 중토관에선 생명과 다름없는 천율패였다. 그곳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