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후, 검을 들다
-모습을 드러낸 검후의 검-
고요한 침묵의 장막이 장내를 뒤덮었다. 사사로운 잡담으로 이 침묵을 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신경은 구름처럼 뿌연 먼지가 일어나고 있는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예린 역시 심리적 충격 때문인지 망연자실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독고 언니, 설마 진짜로 그 사람이 죽었을까요?”
안절부절못한 채 나예린 곁에 서 있던 이진설이 울상이 된 얼굴로 독고령에게 물었다. 독고령은 한쪽 눈을 차갑게 빛내며 한 남자가 메다꽂힌 바위더미를 바라보 고 있었다.
“저 정도로 죽을 남자였다면 예린의 광신도들에게 벌써 예전에 골백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내 손에 죽었을 테지! 난 바퀴벌레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저 남자가 저 정도에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니 너도 그를 믿도록 해라!”
마지막 말은 자신의 사매를 향한 말이었다. 어느샌가 독고령의 오른손은 나예린의 왼쪽 어깨에 올려져 있었다. 사자매 간의 마음이 통하는 데 긴 말은 필요 없었 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자(師姉)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 언니! 저기 봐요!”
그때 장내의 변화를 알아챈 이진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거 봐라! 내가 뭐랬니? 그의 생명력은 바퀴벌레만큼이나 끈질기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는 저대로 누워 있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난 이 이후가 더 두렵구나!” “왜요?”
“그럼 적어도 저분의 손에 검이 들리지 않게는 할 수 있을 테니깐. 넌 저분의 손에 검이 들린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난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저분의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순간… 그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독고령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콜록콜록! 아야야… 이건 좀 너무하잖아요…….”
자욱한 흙먼지를 헤치며 초대형 바퀴벌레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왔다.
비류연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튼튼했던 모양이다. 그는 지붕 꼭대기에서 떨어진 사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나의 일격을 맡고도 멀쩡하다니……”
설마 허세인가? 하지만 검후로서는 비류연이 아직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는 데다가 무례하게 걷기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절단이 덜 난 모양이었다.
먼지 구름을 헤치고 나온 비류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태연하게, 상대의 시선을 신경쓰며, 천천히 자신이 입고 있는 흑색 무복에 뽀얗게 내려앉은 황색 먼지들을 툭 툭 털어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수롭지 않은 듯 느긋하게 굴면서 조금 전 당한 일격이 자신에게 눈곱만큼의 후유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이다.
“이야아아… 위험했다……! 정말로!”
우득우득!
비류연이 자신의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꺾고 어깨를 돌릴 때마다 관절 사이에서 으드득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이 가당치 않은 행위에 검후의 눈썹이 살짝 솟 구쳤다.
하지만 일부러 그것을 무시한 채 비류연은 손을 좀 더 바지런히 움직여 몸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털어낸 다음에야 몸을 바로 세웠다.
“절 죽일 셈입니까? 진짜로 죽을 뻔했다구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엄청나게 무자비한 공격! 일 푼의 동정도, 한 치의 인정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일격! 검후의 일격에는 분명히 그것이 들어 있었다. 자신을 베고야 말겠다는 의지. 잘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그 느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나 진배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명명백백 틀림없는 살기였다.
“그 정도 각오는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어떤 비무에 임하더라도 진지해야 하지. 마치 실전처럼. 비무라도 상대를 봐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느냐?”
검후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자신의 검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시는 분 같지는 않은데요? 제가 착각한 건가요?”
“글쎄… 그건 다음 내 일 초를 한 번 더 받아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게다.”
앞으로 이 초도 필요 없다는 선언 같았다.
“글쎄요? 근데 뭘로 하시게요? 제가 보기엔 이제 공격할 거리가 남아 있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뭐라고? 무슨 뜻이냐?”
“잘 보시죠.”
검후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어느새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었다. 아니 그것은 그녀를 경악시키는 것만큼이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지금 이 순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낸 사람이 탄생했다
언제 손을 쓴 것일까? 그녀가 들고 있던 체대가 십 수개의 조각으로 토막토막 잘리더니 꽃잎처럼 팔랑팔랑 땅에 떨어졌다.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검후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상대는 상상 이상으로 녹록지 않았다.
“재미있구나! 인정하마. 네가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검후가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놀랍군. 검후의 눈을 피해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도성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검후의 삼 초를 받고도 아직 멀쩡한 데다가 그녀에게 검까지 뽑게 만들다니… 녀석은 자신을 놀라게 할 자격이 충분했다. “동감일세. 하지만 저 아이에겐 그것이 불행이 될지도 모르겠군.”
검성 역시 감탄한 모양이었다.
“누가 키운 녀석일까?”
“글쎄, 확신할 수 없군. 지금까지의 움직임만으로는 아직 그의 사승을 알아내기가 힘들어!”
“근데 정천, 저 둘 말리지 않아도 될까?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은데.”
“음, 그게 가능하면 그러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만 정하면 말일세. 자네가 할 텐가?”
“뭐? 나보고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라고? 농담 말라구, 그런 건 정중히 사양일세! 난 오래 살고 싶다구.”
“그것 참 우연의 일치군. 사실은 나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다네.”
“으음… 아무래도 우리 둘은 마음이 통하는 것 같군. 우리 서로 목숨은 소중히 하도록 하세.”
결국 두 사람은 그냥 지켜보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는 특히 위험 했던 것이다. 건드리면 당장에 폭발한다. 그리고 그 폭발의 충격은 두 사람이 감당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천무삼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무공의 고하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였고, 이 둘은 오랜 경험과 교훈을 통해 그것을 잘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냥 수 수방관하기로 했다.
전혀 천무삼성답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은 곁에서 지켜보는 모용휘에게 황당함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얼마나 두렵길래? 두 분 다 뭔가 약점이라도 잡혔나?”
모용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불가해한 일이었다.
검후는 끝자락만 남은 체대를 쥔 채 자신의 허리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검을 뽑은 지 얼마나 되었더라?”
녹을 방지하고 예기(氣)를 유지하기 위해 ‘소지하려 꺼낼 때는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검을 뽑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다만 꺼내보았을 따름이다.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수련을 위해, 시범을 보이기 위해 꺼내들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검을 뽑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사람을 베기 위해 뽑았던 때가 언제였었지?’
검을 뽑았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사람을 베기 위한 각오를 가졌을 때를 의미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득히 먼 옛적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지금 최강의 여인이 검을 뽑으려 하고 있었다. 최고의 경의를 담아, 최고의 힘으로.
“네가 과연 이번 일격도 막을 수 있을까?”
스윽!
검후의 왼손이 칼집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가장 완벽한 상태, 최상의 속도로 발검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전혀 딴판으로 변했다. 그녀 자체가 검과 동화되어 마치 뽑히기 직전의 검과 같은 섬뜩한 날카로움이 비류연을 압박했다.
“과연! 이래서야 허투루 대할 수 없겠군요.”
소매 안에 감추어진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이 아줌마는 강호 출두 후 지금까지 싸워온 사람 중 가장 무서운 검기의 소유자임에 분명했다.
“진심으로 해볼 생각이시군요.”
“물론! 왜 겁나느냐?”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좋습니다! 선의에는 선의, 악의에는 악의, 그리고 진심에는 진심! 그게 저의 신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