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6권 7화 – 검후의 검, 마침내 뽑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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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6권 7화 – 검후의 검, 마침내 뽑히다

검후의 검, 마침내 뽑히다

“설마 검까지 뽑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가볍게 할 마음이었다.

상대는 새까맣게 어린 후배인 것이다.

무림 최고의 배분인 자신이 이런 어린아이를 상대로 진심이 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본능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좋다! 네가 어느 정도의 그릇[器]인지 시험해봐주마!”

차캉!

검후의 왼손 엄지가 검을 살짝 검집에서 밀어냈다. 그 순간 채 한 뼘도 드러내지 않은 백옥 같은 순백의 검신으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리고 동장군의 얼음 검처럼 차가운 냉기는 살기와 한데 버무려져 주위의 공기를 급속도로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을 오후의 태양이 숨을 죽이고 초목이 추위에 벌벌 떨었다.

“저, 저럴 수가!”

모용휘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살짝 배어나올 만큼 따뜻한 가을날이었고, 태양은 눈을 시뻘겋게 뜬 채 중 천에 걸려 있었다.

동장군(冬將軍)이 겨울의 군세를 이끌고 찾아오려면 절기가 두서너 개는 더 지나야 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비류연의 입에서는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검후의 검기가 그의 주위를 면밀하게 물샐 틈 없이 장악했다는 증거였다. 검후와 비류연의 주변은 이미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기(氣)… 기가…….”

모용휘의 목소리가 전율로 떨리고 있었다. 마른침이 목젖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막대한 기가 대기를 일그러뜨리고 있어!”

대기를 일그러뜨리고, 공기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막강한 기의 소용돌이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자신의 세력권을 전혀 다른 세계로 분리시키고 있었다. 고수의 싸움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그 승패가 갈린다고 한다. 고수가 방출하는 농밀한 살기와 막대한 투기에 짓눌려버리면 대부분의 범인은 전의를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기세에 밀리면 그 다음 싸움은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겨울의 눈보라… 자연을 감응(感應)시킬 정도의 기를 방출하다니. 진심이로군! 저 아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 상대란 말인가!”

검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성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거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게 됐군. 이대로는 중간에 끼어들기조차 힘들지도 몰라.”

최상위 고수가 발출하는 거대한 기와 그 막대한 존재감은 주변 환경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다.

“이, 이 믿을 수 없는 막강한 신위… 이것이 바로 천무삼성의 진면목이란 말인가!’

모용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강렬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공포, 지금 당장 몸을 돌려 도망가고 싶은 두려움, 심저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정신적 압박. 자기보다 까마득하니 높은 자를 본다는 것 은 기쁜 일임과 동시에 지독히 슬픈 일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할 수 있기에 그것은 도약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좌절의 기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두 가지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는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계절을 거스르다니…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검성이 경악과 찬탄과 외경의 혼란 속에 서 있는 손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휘야, 너는 산택통기(山澤通氣)란 말을 아느냐?”

검성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모용휘는 그 가르침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할아버님!”

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자는 정말 가르칠 만한 인재였다. 그는 이 비무를 통해 자신의 손자가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얻는 것은 이제부터 모용휘의 몫이었다.

“천지자연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호수 위에 산이 있다고 치자. 그들은 얼핏 보기에 전혀 관계없는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소이다’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가?

호수의 물은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산 위로 떨어져 산 위의 나무들을 자라게 한다. 물은 나무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천맥을 따라 다시 호수로 흘러 들어온다. 이것은 현상적인 측면을 가지고 예시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본질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법칙이다. 이 모두가 천지자연이 서로

감응(感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감응이라는 것은 서로가 기를 주고받으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뜻한다. 검후의 저것도 자기 내부의 소우주와 외우주를 보 다 적극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리(理)’에 의해 엮여 있다. 때문에 그 ‘리’의 그물의 만다라화(曼茶羅畵)보다 복잡무쌍한 문양(文樣)을 타고 주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강력한 존재감은 그곳에 집약된 기의 밀도와도 정비례하는데, 그런 면에서 검후 이옥상이 지닌 존재력은 어마어마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여름이라 하면 겨울이라도 그곳은 여름이고, 그녀가 겨울이라 하면 여름이라도 가을이라도 그곳은 겨울이 된다. 이 절대적인 존재력이 바로 초고수의 진면 목이라 할 수 있다.

슈욱!

물속을 헤엄치는 잉어처럼 매끄럽게 검후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마침내 검후의 검기가 수십 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보았느냐?”

독고령이 나예린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볼 수 없었어요. 마치 검은 장막에 둘러쳐져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너의 용안(龍)으로도 읽어낼 수 없단 말이냐?”

나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만능은 아니라는 것이죠.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무에서 유를 가져오는 능력은 아니니깐요.”

천지의 운행, 음양의 동정,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오행, 착종(綜)하는 팔괘. 그 흐름들을 무의식중에 읽고 몸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종합 분석하는 신기, 용안 이 것 역시 자연이 서로 감응하기에 가능한 기이다. 혹자는 모든 일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뛰어넘어 오직 지금 한순간 동시에 발생하는 자연(自然)의 동시성(同時性) 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만능은 아니었다. 변수가 무한에 가까워질수록 읽는 것은 어려워진다.

검후와 같은 초고수의 경우 아예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혹 읽어낸다 해도 몸이 따라갈 수 없거나……. 그런데 비류연은 섬광처럼 빠른 발검술을 피해낸 것이다. 그 모든 변식을 읽었단 말인가? 아니면 단순한 운……? “어쩌면 이 승부…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조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지?

어안이 벙벙하지 않은 이는 오직 검성과 도성 두 사람뿐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일말의 기미도, 미세한 근육의 떨림도, 형체도 없이 검기는 공간을 가르고 비류연의 어깻죽지 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비류연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리한 면도날에 잘려진 듯 갈라진 천 사이로 핏물은 배어나오지 않았다. 살갗은 빼고 옷만 베였던 것이다.

“어머,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이번 건 그저 단순한 맛보기였을 뿐이니까.”

생긋 웃으며 검후가 말했다. “네가 잘나서 피한 게 아니라 내가 일부러 빗맞혔다’는 의미였다.

사라라락!

살짝 잘려진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흩어졌다.

“어떠냐? 지금 여기서 그만 포기한다면 받아줄 용의도 충분히 있는데?”

투항 권고였다.

“그래요, 류연! 너무 무모한 일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사부님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만 포기해요!”

지켜보던 나예린이 때는 이때다 싶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평소 차가웠던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어?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이거 기쁜데요!”

상황의 긴박함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비류연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검후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포기하지 않습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려 하는구나!”

검후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검에 다시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진짜로 가겠다!”

비류연은 정신을 집중했다. 눈도 깜빡여서는 안 된다. 만일 그랬다가는 그 순간 바로 검후의 검이 자신의 목을 관통하고 말리라.

“젊은이가 너무 무모하군.”

이를 지켜보던 검성과 도성의 일관된 평이었다.

‘무모?”

과연 그럴까? 모용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삼 년 전이었으면 그 역시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비류연의 도전이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무모 무식의 극치라고 단 정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시각은 그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어떤 기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그래 왔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상상하 던 것 이상의 것을 보여줄 것을! 일상과 일반이 규정지어놓은 상식의 틀을 깨고 한정 지어진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로 비상하는 것을!

“전 성격이 좀 삐뚤어져 있어서 한 번 뱉은 말은 꼭 지켜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말만 내뱉고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다고 포기해버리는 대중의 무리에 끼는 건 정말 싫걸랑요. 지위랑 나이에 상관없이 내뱉은 말은 꼭 지켜야죠. 아니 나이가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철저히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 제 가 이 내기에서 이기면 꼭 약속을 이행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그의 본심이었다. 그리고 내뱉은 말을 당신도 꼭 지키라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물론이다! 스스로 지키지 못할 말은 내뱉지도 말아야지. 지키지 못할 말을 남발하는 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밖에 더 되겠느냐?”

“그 말을 들으니 저로서도 무척이나 안심이 되는군요.”

검후의 호쾌한 대답에 비류연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오호호호호! 보기보다 영악한 녀석이로구나! 좋아좋아! 걱정마라. 내가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설사 오늘 나의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내뱉은 말은 나의 동료들에 의해 끝가지 지켜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비무를 보고 있는 많은 관중이 내가 약속을 이행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공증인이 될 것 이다. 이제 믿을 수 있겠느냐?”

“아뇨! 그래서는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만일 제가 내기가 이긴다 해도 그 사실을 좋아할 사람은 오분의 일도 채 안 될 걸요?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부정해버리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너, 원한을 좀 많이 사는 체질인가 보구나?”

“원래 인기인은 고달픈 법이죠!”

“좋아!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주지!”

그들을 향해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누구지? 몰라? 너는 알아? 웅성거림은 사방에서 들려왔다.

두 사람은 초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겉모습만 봐서는 신분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어머 두 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요? 이런 일에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다니?”

검후가 의외라는 투로 말했다.

“허어, 좀 전에 자기가 죽으면 우리한테 다 떠넘긴다고 스스로 말했으면서… 발뺌하는 거요?”

짱달막한 도성이 검후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머 그랬었나요?”

“우리 두 사람이 공증을 서면 불만 없겠나?”

“정말 못 말리겠군요. 두 사람 다 어린애처럼 나서다니…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천하의 검성과 도성, 이 두 사람의 공증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어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이 가져온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검성과 도성!

이들의 정체를 안 중인은 벼락을 맞은 사람들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로만 전해지던 무림의 신화가 다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무삼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니… 아무나 접할 수 있는 행운이 아니었다.

검과 도의 신, 모든 무인이 목표로 하는 우상 중의 우상.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중에는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기절한 사 람이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었다.

“이제 안심이 되느냐?”

“물론이죠. 누가 감히 세 분의 신용에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비류연은 천무삼성의 등장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그로서는 드물게 상당히 예의를 갖춘 대답이었다.

천무삼성 전원이 공인한 약속, 이것은 강호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약속이라 할 수 있었다.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이와 수치를 모르는 이 빼고는 이들의 약속에 토를 단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세 사람을 보기 위해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둘러쳐진 원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성과 도성이 다시 모용휘의 옆 자리로 돌아가서야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그럼 준비가 되었느냐?”

검후가 검을 겨누며 물었다.

“전 항상 준비가 되어 있죠!”

“좋은 대답이다. 그럼 어디 한번 젊은 영계와 벗하여 놀아볼까?”

검후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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