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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6권 9화 – 검문

검문

오 년 전, 아미산 이름 모를 준봉.

두 노소는 초옥 앞에 펼쳐진 넓은 공터에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새하얀 백발이 가슴 밑까지 오는 노인은 주로 말하는 쪽이었고, 한창 클 나이의 소년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노인은 검초에 대해 강론하고 있었다.

“검초를 파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변화의 전체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규칙 없이 일어나는 변화는 존재하지 않아. 다만 그 복잡한 규칙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 지.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이치에 의해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가 감응하여 새로운 변화를 무궁무진하게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팔은 특별한 수업을 받지 않는 한 안으로 굽어지고, 발은 두 개뿐이며, 목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현실의 제약에 의해 검초는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격할 경우 그 변화를 읽어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사부의 물음에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바로 검문(劍紋)을 파악하는 것이다.”

“검문이요? 그게 뭔데요?”

“검문(劍紋)이란 검이 가는 길, 검이 공간에 수놓는 문양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세상의 근원적 바탕을 향해 파장을 내보내고 또한 그 바탕으로부터 파장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기의 파장이라고 불러도 좋다. 귀찮으면 그냥 기라고 불러도 좋고. 크고 작음, 복잡함과 간단함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존재는 이 바탕을 향해 무수히 많은 파형을 발산해내고, 그것들은 이 바탕에서 얽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낸다. 이 바탕은 도(道), 리 (理), 태극(太極), 신(神) 등 무수히 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특징은 일정하다. 바로 텅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그 깊이가 끝이 없어 모든 것이 그곳으로부터 나온 다. 그러므로 무궁(無窮)하다. 그러므로 만변(萬變)한다. 이 바탕 위에 이 세상은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움직임, 아니 모든 기의 움직임은 그 바탕 위에서 움 직인다. 그것은 부동의 동인이고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이다. 모든 존재는 시작이 없는 하나에서 시작되고, 그 모든 존재는 끝이 없는 하나에서 끝난다. 즉 시작도 끝도 없는 부동의 하나 위에서 우리는 움직이고 생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검문이란 그 바탕 일부에 검이 남긴 길이라 할 수 있지. 이해하겠느냐?”

“아뇨!”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이해를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해되지 못하도록 가르친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한 기세 였다.

그가 다시 항의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그걸 이해하라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예시를 들어주셔야죠. 지나친 비유와 상징은 이해를 돕는 데 적이 된다구 요.”

“후우~ 너한테 이런 걸 가르친 내가 어리석었다. 어쨌든! 그럼 가장 간단하고 쉽게 말해주마. 검문이란 게 있다. 그걸 파악해라. 그럼 그 검초의 시작과 끝을 파악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그 변화를 거스르지 않고 피해내는 것이다. 이걸로 끝이다. 이제 이해하겠냐?”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간단하네요. 근데 그 검문이란 걸 어떻게 파악하죠?”

그러자 사부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몸으로!”

사부의 손에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비뢰도 다섯 자루가 뇌인(刃)을 품은 채 들려 있었다.

찰칵!

접혀 있던 다섯 개의 뇌인이 호랑이의 발톱처럼 펼쳐지며 탐욕스런 빛과 함께 번뜩였다. 칼날의 예리한 섬광은 서리가 내린 듯 창백했다.

“우선 가볍게 다섯 개부터 시작하자꾸나!”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사부가 말했다. 비류연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어야 했다.

‘제길! 역시나 이렇게 되는군.’

비류연은 탄식했다.

사부의 그 독특한 웃음이 불길함을 불러오지 않은 적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들 검후의 천변만화하는 검기의 폭풍에 비류연의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져 나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절초는 마치 그물처럼 엄밀했기에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류연은 무수한 변식에 대응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 다. 그가 산에서 매일 하던 게 그런 일들이었던 것이다.

비뢰도의 운신보법은 기본적으로 비뢰도의 공격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역점을 두고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일종의 창과 방패라 할 수 있었다. 그 리고 최강의 창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 방패는 최강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비뢰문의 독특한 독문운신보법인 봉황무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무공이었다.

‘수시변역(隨時變易) 이종도(以從道)! 때에 따라 변하여 도를 쫓는 것! 진정한 변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거스르지 말고 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무형(無形)이기 에 만변(萬變)할 수 있다.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 비 사이를 걸어도 옷이 젖지 않는다. 이 오의를 잘 생각해보도록 해라.’

아직도 사부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했다. 그것은 지옥 같은 수업이었다. 그러나 그 지옥을 거치고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니 아무리 검기의 사나운 회 오리가 그를 압박한다 해도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도 비뢰도보다 더 복잡하고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는 무공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비류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비뢰도(飛刀) 독문운신보법

봉황무(鳳凰舞) 비전극상오의(秘傳極上奧義)

우중거(雨中去) 불점의(不)

스르륵!

비류연의 몸이 마치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긴 빈 배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물 흐르듯 지극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지금 한 사람의 육신을 난자하고 피의 비를 내리기 위해 검기의 폭우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사나운 검기의 세례도 그의 몸을 어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검초조차도 거스르려 하지 않고 그 흐름 속에 동화되었다.

봉황무의 공부가 극에 달했을 때 펼칠 수 있다는 환상의 기술, ‘우중거 불점의 ‘빗속을 거닐어도 옷이 젖지 않는다’는 뜻의 이 여섯 자가 대변해주는 경지가 마침 내 한 인간의 몸을 빌려 체현(體現)된 것이다.

그는 이 초식의 검문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그 몸은 그 흐름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검후의 검초가 아무리 흉맹하다 해도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불 가능했다.

‘차라리 비 사이로 막가가 더 낫겠네요.’

이것을 처음 배웠을 때 제기했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언제나처럼 따끈따끈한 혹 한 개. 그래도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혹 하나를 늘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름은 자기가 지은 게 훨씬 나았지만! 역시 사부의 심미안(審美眼)은 문제가 있었다.

“놀랍군! 저 어린 나이에 저토록 시야가 넓고 깊다니.”

방금 전 비류연이 펼쳐 보인 움직임을 본 검성은 흥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비류연이 선보인 신법은 그조차도 견식해본 적이 없는 독특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 마술 같은 움직임을 인간이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였다.

“믿을 수가 없어! 아니, 안 믿어! 설마 진짜로 해낼 줄이야…….”

도성 역시도 흥분해서 외쳤다.

“하지만 인정해야겠지. 현실은 현실이니깐. 저 현란하기까지 한 검후의 검문(劍紋)을 저토록 완벽하게 꿰뚫어보다니! 도대체 저 나이에 어느 경지까지 도달했다 는 건가? 도대체 어떤 수업을 받은 거지? 스승은 누구란 말인가?”

“적어도 광안(廣眼)은 얻었다는 건가?”

“심(心)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르지.”

“설마 그럴 리가? 저 나이에 벌써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네. 사실 회의적이긴 하지. 하지만 고정관념을 맹신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체험과 자신의 눈을 더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네.”

“어쨌든 이렇게 되면 내기는……?”

“저 아이의 승리로군!”

화산의 남쪽 봉우리 한 계곡에서 지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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