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7권 2화 – 시(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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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7권 2화 – 시(始)

시(始)

-회귀 (回歸)

“아직도 보이지 않는구나…….”

사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발 아래 놓여 있는 쭉 뻗은 길[道]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지나왔던 길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그의 등 뒤에 놓여 있 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까마득히 멀었다. 지평선을 꿰뚫고 저 너머의 세계로까지 이어진 그 길은 과연 끝이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하찮은 인간의 마음에 심어준다. 얼핏 보아서는 사내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챙 넓은 초립에 더 더욱 갈피를 잡기 힘들다. 하지만 특정한 거처도 없 이 강호를 떠도는 낭인(浪人)들이 넘치고 넘치는 시대인지라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저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이 있다면, 길게 자란 앞머리 탓인 지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잘 안 보인다는 정도일까? 평소 머리 손질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인 모양인데 이것 역시 별 대수롭지 않은 특징이긴 하다. 강호를 유랑하는 낭인들이란 자신의 외모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사내가 일개 낭인들과 구별되는 것은 기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심연에 다다른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드러날 때뿐이었다.

사내는 우주를 관조하는 것처럼 심원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무한히 뻗어 있는 길을 지그시, 그리고 찬찬히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한 앞머리는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그의 눈은 자신의 시야에 비치는 것만을 인지할 수 있었지만—그 시야라는 것도 범인의 다섯 배 이상에 달했다그의 정신은 그마저도 뛰어넘어 시야의 저편, 언젠가 자신이 도달해야 할 곳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눈에 힘을 집중시켜 안력(眼力)을 돋우자 지평선 위에 걸쳐진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대지와 하늘의 경계에 잘려진 산의 그림자였다. 그림자 의 끄트머리는 어찌어찌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으니 그나마 나은 형편이라 해야 하나?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넓은 들판과 그 위에 솟은 산, 바꿔 말하자면 나 무와 풀뿐이었다.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는 길. 사람의 기척만 없다 뿐 중원 어디에나 뚫려 있는 평범한 길이었지만 이 사내에게는 결코 평범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 았다.

이 여정의 종착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길은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 것일까?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답변이 나오는 것은 없다.

그 길의 마지막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일까, 아니면 끝을 넘어선 새로운 시작일까?

쿵쿵!

사내가 느닷없이 오른쪽 발을 들어 힘차게 땅바닥을 두어 번 굴렀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는 대지의 굳건함이 그의 심장에 작지만 또렷한 울림을 던져 주었다. 그의 심장은 지금도 힘차게 맥동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유치하다고 비웃음당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존재의 작은 몸부림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의 무게가 자신을 짓 누르기 전에.

만류일귀(萬流一歸).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듯 모든 이치는 하나의 리(理)로 귀일(歸)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저기 보이는 저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저곳은 자신이 흘러나온 원천(源泉)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바다를 찾고자 하는 게 아니라 흐름[流]을 거슬러 올라 근원(根源)으로 회귀하고자 헤엄쳐 가는 한 마리 연어와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여겼건만…..”

자신의 다짐이 관철되기에는 세상의 물살이 너무 거셌다.

요람(搖藍)에서 나와 세상 속을 뒹굴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자신이 그렇게도 나오고자 발버둥 치던 요람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

이 넓은 세상에서도 오직 이 길의 끝에서만 자신이 원하는, 그리고 추구하는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지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걸 걸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와 함께 걷기 시작한 것이 일반인이라면 곧 까마득한 점 이 된 사내의 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만약 상대가 경공이란 걸 다소나마 익힌 무림인이라 해도 그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내공을 짜내고 근육을 혹사시켜도 이 사내를 추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축지법이라도 쓰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내는 단호히 ‘아니[不]’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빨라도 지평선 을 뛰어넘기는 불가능한 법. 그래도 삽시간에 저 앞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산도 조금 전에는 산머리,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 가마가 있는 부분만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전체적인 형태가 매우 또렷이 보인다. 사내는 갈림길에 서 서 좌우를 살펴보았다. 한쪽 길은 넓고 한쪽 길은 좁았다. 한쪽은 잘 다듬고 깔끔하게 관리한 모양인지 매우 곧고 평탄했다. 반면 다른 한쪽은 다듬어지기는커녕 거 의 방치되고 있었다. 마차가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좁고 울퉁불퉁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대로(大路)의 끝에는 유명한 산이 하나 있다. 그 산의 이름은 아미산(蛾眉山)! 검과 여인으로 유명한, 구대문파 중에서도 부동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아미파(蛾眉派)가 그 안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그가 지향하고 있는 곳은 아미파가 자리한 준봉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름없는 봉우리였다. 잊혀진 과거가 철없던 어린 시절과 함께 아련한 추억 속에 묻혀 있는 시작의 땅. 두 번 다시 그곳에 발을 디딜 일은 없을 거라 여겼던 맹세의 장소.

“결국 이곳까지 오고 만 것인가……. 다시 이 갈림길에 설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건만.”

그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씁쓸하게 뇌까렸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갈림길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응?!?’

그의 몸이 살짝 미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바위처럼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잠깐 열렸다.

“…소란스럽군.”

적막이 들어앉아 있는 길 한가운데 서서 사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사방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이 정적을 깨뜨리기에는 그의 중얼거림 이 너무 미약했다.

길은 아무래도 자기 위를 밟고 서 있는 그가 못마땅했는가 보다. 길은 걸으라고 있는 거지, 멈춰 서 있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걸까?

사내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이 정적을 깨기 위한 때[時]가 시간의 화살이 되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전조(前兆)는 희미한 땅 울림 으로부터 시작됐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부터 지나친 속도로 화급하게 길을 가로질러 오는 이가 있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떼고 난 지 일각 후, 멀리서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대지를 요란스레 질타하는 다중 공명의 말발굽 소리로 미루어볼 때 말 네 필이 끄는 사두마차였다. 그러나 사방에 들어찬 적막을 날려 버리자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보통 사람의 시야로도 볼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불쑥 마차가 나타난 것은 그 로부터 반 각이나 더 지난 후였다.

두두두두두두!

푸푸푸룩!

“이랴! 이랴! 이랴!”

철썩! 철썩! 철썩!

이제는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또렷이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말발굽이 대지를 박차는 소리, 헐떡이는 말들의 몸 위로 떨어지는 다급한 채찍 소리, 마부의 광기 어린 독촉, 그 인정사정없는 채찍질에 지친 말들의 투레질 소리 가 너무도 생생하게 그의 귀에 잡혔다.

화려하진 않지만 고급스런 사두마차가 거칠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관도를 질주해 오고 있었다. 건장한 마부가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으로 쉴 새 없이 채찍을 내려치 며 말들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의 입은 더욱더 거칠고 우악스럽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비켜! 비켜! 비켜!”

모양인즉슨 달리는 마차 앞에 느닷없이 미련한 궁둥짝을 들이민 소를 다급하게 쫓아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애꿎게 소 취급을 당한 것은 바로 길을 걷고 있던 초 립의 사내였다.

그리좁지는 않았지만 사두마차 하나면 가득 찰 만한 길이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마차가 결단코 행인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멈출 리는 없다는 것 이었다. 피해갈 생각도 없다는 것은 이어서 튀어나온 거친 말만 보아도 확실했다.

“비켜! 비켜! 비켜! 어이, 거기! 앞에서 알짱거리는 새꺄! 빨랑 비켜! 죽고 잡냐!”

우락부락한 마부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나가던 행인에게 따끔한 채찍 맛이라도 보여줄 기세였다. 그 거칠고 막돼먹은 기세는 사내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단어 중 하나를 일깨워 주웠다. 꽤 익숙한 말. 음, 이런 것을 뭐라 부르더라? 잠시 후 그는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경쾌하게 탁 칠 수 있었다.

“아참, 저런 게 무례(無禮)란 거였지?”

마침내 기억이 돌아오자 그는 기억 상실에서 회복된 환자처럼 기뻐했다.

“음음.”

사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이런 취급을 받아보니 나름대로 신선했다.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정지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질주 마차와 초립사내의 간격은 지척이었다. 저 사나운 말발굽 아래 깔릴 예정이라면 몸 성할 생각은 버려야 했다. 그러나 사 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 길을 걸어갔다. 결코 옆으로 비킬 생각은 없다는 듯이. 당연하다. 왜 무례하게 강요하는 일방적인 요구에 순순히 응해야 하는가?

“이런 미친!”

히이이이잉!

마부가 마침내 말고삐를 힘껏 늦추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사실 맘 같아서는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가고 싶었다. 최후의 양심이 그의 행동에 최후의 최후에 가 서 고삐를 채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그리 행하였을 터였다. 그러나 멈추는 일에도 다 때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렇게 막판에 가서 고삐를 늦춰봤자 엄청난 속도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일은 적어도 이 세계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납게 달려오던 마차는 마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내를 깔고 지나간 후였다. 자욱한 흙먼 지를 꼬리처럼 뒤로 남긴 채.

끼이이이익!

히이이이이잉!

십 장 정도 더 달려나가고 나서야 폭주마차는 겨우 멈춤이 뭔지에 대해 이해했다.

사두마차는 꽤나 훌륭한 제작 과정과 마감 과정을 거쳐 양질의 관리를 받은 물건이었지만 이처럼 갑작스런 변화에 견뎌내기에는 내구성이 약간 부족했던 모양이 다.

쩌적!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왼쪽 바퀴가 축으로부터 튕겨져 나갔고, 마차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왼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워워!”

마부는 다급하게 마차를 제어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건장한 두 팔뚝으로도 사태를 어찌하기에는 불가능했다. 상황은 이미 그의 팔심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에 도 달해 있었다.

“흐헉!”

이대로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본체마저 산산조각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때 가녀린 손 하나가 마차의 창밖으로 불쑥 튀어나왔고, 이어서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땅이 한 번 진동을 하자 위태롭던 마차 역시 그 반동으로 거세게 들썩거렸다. 속도가 약간 떨어지면서 마차가 지면 위에 거칠게 내려앉았다. ‘우당탕 탕하는 굉음을 대여섯 번쯤 토해내고 어지럽게 춤을 춘 뒤에야 마차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마차의 열렬한 춤사위에 흥분한 대지가 황토색 입김을 뿜어댔다. 구 름처럼 일어난 흙먼지가 자욱하게 주위를 뒤덮었다.

“크으으윽!”

자욱한 먼지 속에서 신음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부여잡고 걸어나온 사람은 건장한 체구와 철사 같은 수염이 인상적인 마부였다. 그는 허둥지둥 마차의 객실문 쪽 으로 쩔뚝거리며 걸어가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조금 전의 험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산적질에나 딱 맞을 그의 얼굴은 지금 걱정만이 가득했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무사합니다. 소란 떠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혼잡한 와중에도 의외일 정도로 의연한 목소리였다. 아직 앳된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도 어지간한 어른들보다 침착했다. 특히 저 마부보다는 훨씬 더. 역시 철드는 것과 나이는 별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마차 문이 열리고 새하얀 발이 스윽 뻗어 나왔다. 소녀는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깃털처럼 사뿐히 땅에 내려앉았다.

열여덟쯤 되었을까? 새하얀 피부, 오뚝한 코, 의지가 깃든 검고 맑은 눈동자, 가지런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 적당하게 부풀어 오른 봉긋한 가슴, 호리호리 한 몸매에 버들가지처럼 낭창낭창한 허리. 어리지만 확실히 눈에 확 띌 만한 미인이었다. 백의의 소녀는 금방이라도 꽃잎을 틔울 것처럼 농익은 꽃봉오리였다.

“무사하셨군요, 아가씨!”

“아가씨 덕분에 무사했습니다’를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을 만한 지각(知覺)은 이 남자에게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차가 땔감이 되는 걸 필사적으로 저 지하고자 했으니 그 노력의 가상함은 인정해 줄 만했다.

그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남자 목소리였다.

“콜록콜록! 아야야! 아직 살아 있긴 살아 있는 건가…….”

마차에는 소녀 이외에도 한 명이 더 타고 있었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한 떨기 백합처럼 고아한 자태의 백의소녀에 비해 광채의 밝기 면에서 꿀리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꽤 준수한 얼굴이었다. 대중에게 통하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왼쪽 팔뚝에 가볍게 붕대를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미한 부상을 입은 듯했다. 두 사람 모두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적어도 두 사람의 검 모두 장식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두 사람의 신상에도 이로웠다. “콜록콜록! 괜찮으십니까, 진 소저?”

청년은 자욱한 황토빛 먼지구름에 목이 간지러운지 연거푸 기침을 하며 소녀의 안부를 물었다. 평소라면 상당히 번듯하게 보였을 얼굴도 어느새 난민처럼 먼지투 성이가 되어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유공자야말로 놈들에게 당한 상처는 괜찮으신지요?”

“아직 멀쩡합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조금 베였다고 해서 끙끙거리면 체면이 말이 아니죠. 걱정 마십시오.”

유씨 청년이 왼팔을 휘휘 휘둘러 보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안 아플리야 만무하지만 저 나이 때면 으레 여인 앞에서 허세도 부리고 싶은 법. 필경 속으로는 눈물 을 삼키고 있으리라.

자욱했던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그제야 마차의 형태가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의심할 여지 없는 칼자국—였다. 게다가 보란 듯 이 심심찮게 꽂혀 있는 화살들은 장식용이 아닌 게 분명했다. 마치 전장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달리는 마차 앞을 가로막는 미친놈만 아니었어도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을! 아가씨의 신변에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 게 주인어른의 얼굴을 뵐 수 있을지… 크흑! 정말 원통합니다!”

철사수염의 마부가 분하다는 듯 바위만한 주먹을 움켜쥔 채 부르르 떨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미 지나가던 미친놈의 생사 따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부보다는 산적이라고 하는 편이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더 설득력이 있었다.

“미친놈이라니… 그건 좀 심한 평이로군. 본인은 그저 길을 걸어가기만 했을 뿐인데 말일세.”

어디선가 뜬금없이 들려온 한가로운 목소리.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던 마부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경추 탈골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소녀와 청년 역시 깜 짝 놀라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부와 같은 행동을 취했다.

이들 셋이 비록 함께 경악하기는 했지만 이유는 각기 달랐다. 산적같이 생긴 마부는 저 미친놈이 납작 포가 되지 않고 사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청년은 이 토록 가까운 곳에 저토록 편하고 느긋하게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도 전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소녀는 이에 더해 그토록 자욱한 황색 구름 속 에서도 사내의 낡고 빛바랜 옷에는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반경 십 보 안에 있는 사람의 기척조차 감지할 수 없는 안이한 수련 따위는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자신들의 감각에 혼란이 온 것인가? 불과 십 보도 떨어지지 않은 길가에 초립을 쓴 사내는 보란 듯이 앉아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청년이 경계하며 물었다. 그의 눈에 비친 사내는 이미 수상한 놈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달고 있었다. 그러니 질문에 예의 따위가 들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해서 초립의 사내는 하루에 연속 두 번의 무례를 겪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사내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나 말인가?”

사내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나가던 행인일세.”

그러자 마부가 발끈해서 꽥 고함을 질렀다.

“아가씨, 저 녀석입니다! 저 자식 때문에 저희 마차가 전복된 겁니다! 저놈이 길에서 피하기만 했어도 마차는 전복되지 않았을 겁니다! 저딴 망할 자식은 마차에 깔려 피떡이 되었어야 했다구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마부는 사내를 향해 삿대질까지 마구 해대고 있었다.

“피떡이라니? 그것 정말 몰인정한 말이구먼. 뼛속 깊은 인명경시 사상은 좋지 못해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할 줄 알아야지. 만수일리(萬殊一理)라는 말도 못 들어 봤나? 모두가 하나에서 나왔으니 한 형제가 아니겠는가?”

초립의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설법하듯 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굉장히 아귀가 맞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질 때 느껴지는 특유의 위화감. 그 사실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소녀 쪽이었다. 피하질 않아? 피하질 않다니?!

“피하질 않았는데 어떻게 저리 멀쩡할 수 있죠?”

초립을 쓴 사내의 사지는 온전히 다 붙어 있었고, 몸통에는 바퀴 자국도 나 있지 않았다. 사내가 입은 단정한 흑의는 백색에서 황색으로 변해 버린 마부의 마의와 무척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요모조모 신경을 써서 뜯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극히 평안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말 네 마리가 신나게 짓밟고 지나간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그저 길을 가던 것뿐이네. 갑자기 예고도 없이 흉포하게 달려와서 자기들 멋대로 전복한 것은 자네들이 아닌가? 난 모르는 일일 세.”

사내의 태평한 시침에 마부는 다시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소리쳤다.

“거짓말 마라!”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마부를 바라보면서 사내가 한마디 했다.

“저 사람이 자네들 하인인가? 정말 시끄럽군. 좀 조용히 시켜줄 수 없겠나?”

사내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소녀는 당장이라도 폭주한 마차가 되어 인명 사고를 낼 준비가 끝난 마부를 진정시켰다.

“진정하세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마부는 너무 흥분하고 있었다. 흥분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게 그의 문제점이었다. 소녀는 여기서 더 이상 위험이 늘어나는 것을 사양하고 싶었기 에 직접 나섰다.

“왜 피하질 않으셨는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소녀가 물었다. 버르장머리없는 두 남자보다는 훨씬 더 나은 태도가 사내를 흡족하게 했다.

“아무래도 아가씨 때문인 것 같군.”

사내가 대답했다.

“왜 저 때문이죠? 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녀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반문했다.

“저 사람이 아가씨 아랫사람이 맞다면 예절 교육을 잘못 시킨 아가씨 자신을 탓해야겠지.”

“그 말씀은…….”

감이 빠른 아가씨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에게 부탁할 때는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니겠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한 법일세.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 은 말에 내가 먼저 길을 피해줄 필요는 없지.”

그런 하찮은 이유로 질주하는 마차를 무시한단 말인가? 마부와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침착했다.

“아하! 그렇다면 저의 잘못 때문이 맞군요.”

소녀는 시원시원하게 사내의 말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의문이 가셔서 개운하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허허허! 시원시원한 아가씨로구먼. 마음에 들었네. 아가씨의 얼굴을 봐서 조금 전의 무례는 잊어주도록 하지. 애당초 없었던 일이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이미 불 가능한 일이니 그저 넘어가는 수밖에.”

매우 선심 쓰는 듯한 말이었다.

“그렇군요. 과거가 없어질 리는 없으니까요. 우리들이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놓았더라도,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외면하거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편하게 망각해 버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겠네요. 요새 사람들이 과거 천혈세의 비극을 잊고 사는 것처럼 말이죠.”

약간 의외라는 얼굴로 사내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가씨였다.

“아가씨!”

“진 소저!”

억울하다는 듯 마부가 외쳤다. 청년도 덩달아 외쳤다. 소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사내의 억지에 반박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순순히 사내의 말에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한가로이 뜬구름 잡는 얘기까지 주고받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 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솔직히 이렇게 한가한 문답 따위나 나누고 있을 여유는 추호(秋毫)의 끄트머리만큼도 없었다. 그들을 집어삼키려는 창칼의 폭풍은 이제 지 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 지금 바쁜가 보군?”

“네, 쫓기고 있거든요.”

쫓기는 사람의 말투에서 항상 느껴지는 다급함과는 거리가 먼 목소리였다.

“흐흠, 도망가지 않아도 되나?”

“아뇨. 이미 늦었는걸요.”

소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척 앙증맞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똑똑한 아가씨로군. 마음에 들었네. 게다가 대범하기까지 하고. 어지간한 남자 한 패거리보다는 백배 낫군 그래.”

초립의 사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칭찬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아가씨였다. 도망가는 게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힘을 비축해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내리기 어려운 영특하고 현명한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아미파가 좋은 제자를 거두었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가 말했다.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아미파의 제자 진소령이라고 합니다만… 사문의 표식은 지금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은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나?”

소녀의 의혹에 사내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는 아미파의 가르침대로 먹고, 아미의 가르침대로 자고, 아미의 방식대로 걷고 서고 앉고 눕지. 또 아미의 가르침대로 체내의 기(氣)를 움직이고 무공을 익 히지 않았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호흡(呼吸)조차 아미의 방식대로 행하고 있지. 안 그런가? 아가씨의 모든 행위(行爲)와 동정(動靜)이 아미의 방식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는데 까막눈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걸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런가요? 선배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까막눈이겠네요?”

“허허, 그걸 이제 알았나? 아가씨처럼 총명한 여인이라면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깨달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초립의 사내가 웃으며 그녀의 말을 긍정해 주었다.

“여하튼 축하하네. 아가씨는 감추어진 세계의 비밀 중 하나를 지금 막 알게 되었다네.”

“그럼 제가 어디 문파인지도 아신단 말씀입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청년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저렇게 물었다는 것은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그의 두 눈에서 불신과 질시의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초립사내의 눈이 청년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한 번 훑었다.

“자네의 허리에 매달린 검은 얇고 가볍군. 하지만 그만큼 빠르겠지? 자네가 몸담고 있는 곳은 힘으로 대변되는 무거움[重]을 버리고 빠름[快]을 취한 곳, 사일(射 日)의 이치를 추구하는 곳이 아닌가? 자넨 후예의 후예(後裔)로군.”

사내는 단박에 젊은이의 신분을 알아맞혔다.

“마,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전 점창(點蒼)의 제자 유은성이라 합니다.”

한 번은 우연이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더 이상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이렇게 된 이상 진소령과 유은성은 초립사내의 눈썰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눈앞의 사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그때였다.

“오는군.”

초립사내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는군요!”

진소령이 대답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수십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의 정적을 단숨에 깨뜨렸다.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일단의 기마 무리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죽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마부의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진소령과 유은성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진소령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직접 맞닥 뜨려야 하는 순간이 막상 다가오자 어쩔 수 없는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그녀는 아직 열일곱이었다.

“아, 아가씨, 천마보(千馬堡) 놈들입니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어떻게 돼먹은 놈들인지……. 이제 어쩌죠, 아가씨?”

초조한 목소리로 마부가 물었다. 그는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연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대지의 천둥소리는 점점 더 높고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저 정체불명의 사내놈과 노닥거리지만 않았어도 훨씬 먼 거리를 도망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한 번 저 초립의 사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여전히 그의 주인 아가씨가 도 망을 포기하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 소저!”

유은성도 그녀의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나이는 비록 가장 적으나 이 일행의 중심은 소녀임이 명백했다. 사내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들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걱정하는 게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그의 귀를 괴롭히는 소리의 근원에 있을 것이다.

“저들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유은성이 외쳤다. 그러나 진소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늦었어요. 지금 도망가 봤자 체력만 낭비할 뿐이에요. 여기서 맞서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녀가 택한 길은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칫, 조금만 더 가면 되었는데…….”

진소령은 분한 듯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이라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태연한 척 가장하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한계였다. 마음의 호수가 동요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수행이 부족하구나.’

그녀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었다.

천마보주(馬堡거력쌍부(巨雙斧) 오마광은 확실히 분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 엉덩이가 무겁고 부하 잘 부려먹기로 유명한 그가 고 작 두 명의 어린애를 추적하기 위해 직접 거의 팔십 명 가까이 되는 부하를 이끌고 천리를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천(千) 마리 말들이 있는 작은 성’이라는 명칭에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업종이 말장사인지라, 천마보는 힘센 건각(健脚)을 지닌 준마들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말 그대로 말 걱정 없 이 빠른 속도로 추적에 임할 수 있었다.

“멈춰라!”

선두에 앞장서 달리던 두목의 손이 올라가자 부하들이 일사불란하게 말을 멈추었다. 말장사를 하기 전에 한때 마적(馬) 떼로 영업했던 탓인지 그들의 기마술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마장(馬場)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때 말 강도짓으로 모은 자금과 기술 덕분이었다.

진소령과 전[元] 마적 두목의 눈이 허공 중에 부딪쳤다. 오마광의 눈에 비웃는 기색이 짙어졌다.

“흥, 웬일이냐? 지금쯤 꽁지에 불난 개처럼 허겁지겁 도망갈 줄 알았는데 말이다!”

수십 년에 걸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지금쯤은 당연히 헐레벌떡거리며 한창 지쳐 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망은커녕 당당히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겁도 없이 기다리고 있다니, 오마광으로서는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보통 그들은 남을 추격할 때마다 늘 허겁지겁 달아나는 등만을 보아왔다. 그 리고 언제나 어김없이 그 등짝에 아낌없이 칼침을 놔주었던 것이다. 추격전에서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흥, 도망갈 필요가 더 이상은 없으니까요.”

진소령은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뭔가 획기적인 타개책이라도 생각해 낸 걸까?

“호오, 그러신가?”

허세가 분명한데 넘어갈 만큼 오마광은 어리석지 않았다. 여전히 침착하고 능글능글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급변했다. 진소령의 품에서 나온 화통을 본 이후였 다.

“그것은 설마… .!”

오마광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진소령은 화통의 도화선을 힘껏 잡아당겼다.

피이이이이이잉!

붉은 연기가 긴 꼬리를 그리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추적자의 무리 속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동요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노리는 바였다. 그녀는 가슴을 편 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당당히 외쳤다.

“흥,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준비했죠! 강호의 물을 좀 먹으신 분이니 방금 올라간 붉은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시겠죠? 아미파 독문의 비상 신호탄인 ‘홍련(紅蓮)이에요! 아미파의 제자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쏘아 올리는 것이죠! 당신들이 그 더러운 발로 딛고 있는 곳은 이미 아미파의 영역, 곧 신호를 본 아미파의 제자들이 몰려올 겁니다! 봉변당하기 전에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그럼 지금까지의 무례는 못 본 척해 드리죠! 애당초 없었던 일이면 더 좋았겠지 “만요.”

그러자 천마보의 진영 측에서 술렁임이 전해졌다. 역시 구대문파라는 이름은 언제나 사파에게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였다. 구대문파를 적으로 돌리고 좋은 꼴을 본 인간이나 조직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공포의 상징이 된 딱 한 집단을 제외하고는.

진소령은 초조한 마음으로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부디 성공하기를…….”

그 순간 술렁거림이 뚝 멎었다. 진소령은 시선을 꼿꼿이 한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우두머리 거력쌍부 오마광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음, 좋소. 소저께 그간의 무례를 사과하며 우리들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소.”

진소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하는 바로 그때였다.

“…라고 말할 줄 알았냐, 이 건방진 계집애야?”

정중함으로 치장한 가식적인 목소리는 어느새 예의와 품격하고는 담을 쌓은 거친 목소리로 돌변해 있었다.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년이 감히 어르신을 희롱하려 들다니,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안 그러냐, 얘들아?”

오마광이 부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 그렇습니다요! 저런 계집애의 조잡한 농간에 넘어가면 천마보의 이름이 울죠, 울어!”

여기저기서 요란한 광(狂)가 터져 나왔다.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는 놈들도 있었다.

“그래도 보주님, 꼬마 계집애의 재롱을 보고 있으니 귀엽긴 합니다. 그냥 이대로 델꼬 가서 이런 저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것들을 잔뜩 시험해 보며 듬뿍 귀여워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그거 좋구먼.”

탐욕과 욕정이 일렁거리는 모욕적인 언사 세례에 진소령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껏 한 번도 당 해보지 못했던 취급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주둥아리 닥쳐라!”

그때 앞으로 나서며 대갈일성을 터뜨린 이는 바로 점창파 제자 유은성이었다.

“이 더러운 놈들! 감히 누굴 모욕하려 드는 거냐! 더 이상 진 소저를 모욕하면 내 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분노에 몸서리치며 고함치는 그의 얼굴은 달구어진 쇠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모하는 여인이 바로 코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남자 라 할 수 있으랴. 세불리(勢不利)고 뭐고 다 무시하고 저 무도한 불한당들의 한가운데로 달려들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활화산 같은 분노가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파리 날개 바람 정도의 자극밖에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라? 이게 누구신가? 얼마 전 본인 앞에서 깝짝깜짝 깝치다가 칼침 맞은 풋내기 소공자 아니신가? 어떻소? 본인의 거치도(鋸齒刀)에 당한 왼쪽 팔뚝은 괜찮소?”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사정없이 청년을 농락한 이는 천마보의 부두목 격이라 할 수 있는 혈치도(血齒刀) 오경이었다. 사죄나 유감 표명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희롱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닥쳐라! 그땐 방심했을 뿐, 어디 감히 네놈의 더러운 칼을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그때의 수치가 다시 떠올랐는지 유은성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쯧쯧쯧, 아직 젊군, 젊어! 가벼운 도발 정도에 저토록 쉽게 마음이 흔들려서야. 혈기 왕성한 것도 좋지만 저래서야 어찌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고…….” 

구경하고 있던 사내가 초립 밑으로 혀를 찼다. 아직 반숙(半熟)이었다. 설익은 부분을 익히려면 앞으로도 부단하게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은 아미파가 두렵지도 않나요? 방금 하늘로 올라간 홍련삭을 보고도 그렇게 느긋하다니요? 이제 곧 사문의 동료들이 몰려올 거예요.”

그러나 진소령의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마보주 오마광의 넓적하게 째진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 고년 참 맹랑하구나! 그런 얄팍한 허장성세에 어르신이 넘어갈 거라 생각했느냐? 엉? 아미파라는 이름에 이 거력쌍부 어르신네가 비루먹은 개처 럼 꼬리를 말고 도망칠 거라 생각했느냐 말이다! 모를 줄 아느냐? 이곳에서는 신호가 아미파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니 맹랑한 연극 따윈 집어치우고 껍질 벗겨질 준비나 하거라! 이 어르신네의 두 도끼가 곧 네년의 껍질을 하나둘씩 벗길 테니깐 말이다!”

진소령은 휘청 몸이 무너지려 하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어, 어떻게… 그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고 당차던 기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핏기가 빠진 것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홍련삭, 즉 그들의 생명을 구해줄 붉은 봉화도 이곳에서는 바람과 거리 때문에 헛되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저 정체불명의 남자만 아니었어 도. 손해 배상이라도 청구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되었는데…….”

진소령이 안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죽어라 달렸으면 아미파의 영역 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하늘에 던져 올린 홍련삭의 붉은 밧줄이 이내 그들의 구명줄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그 성세가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는 강남사패(江南四覇)의 하나인 천마보라 해도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아미파의 직전제자이 고 그녀의 사부는 현 아미파 장문인인 혜명 사태였다.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워온 장문 후계자가 살해당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문파는 없었다. 그것은 명예 문 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하고 원통하게도, 저 악적의 말대로 이곳은 아직 진정한 아미파의 영역이라 보기 힘들었다. 물론 이곳 역시 넓게 보면 아미파의 영역이지 만, 제자들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보장될 만큼 확실한 장소는 아니었다.

저 간악한 놈의 말대로 여기서 아무리 비상 신호를 올려봤자 사문의 문전에 다다를 확률은 전혀 없었다. 먼 거리와 바람이 붉은 신호를 허공 속에 흩어버릴 것이기 에. 붉은 연꽃 줄기를 구명삭으로 삼기에는 길이가 짧았다.

“이런 폭거가 용서될 거라 생각하나요?”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네년이 내 아들의 원수라는 것뿐이다!”

오마광이 짙은 살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저 아이는 남의 원한을 사고 다닐 유형은 아닌 것 같은데??

지켜보고 있던 초립사내의 머리 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자식을 살해한 자에 대한 복수라면 그에게도 확실히 대의명분이 있다.

“흥, 부녀자를 희롱하는 그런 파렴치한은 죽어도 싸요!”

진소령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생사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아직 기세가 완전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흠, 그렇게 된 건가?”

소녀의 한마디 대답만으로도 대충 상황이 짐작 갔다.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았다.

사부의 엄명에 의해 시작한 석 달간의 폐관 수련이 끝나고 진소령은 오랜만에 긴 휴식을 허락받았다.

같은 구대문파의 제자로 평소 친분이 있었던 점창파의 유은성을 포함해 몇몇 친구와 함께 조금 멀리 가보기로 했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항주였다. 항주에서도 평 판이 자자한 주루인 금란객잔(金蘭客棧)에서 함께 모여 어울리고 있을 때, 그녀의 미모에 혹해 감히 수작을 걸어오는 쓰레기 같은 놈팽이 하나가 있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과 금방이라도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은 그 시뻘건 입술을 떠올리면, 지금도 생리적인 혐오감에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이었다.

그 빌어먹고도 망할 놈의 무뢰배는 자신의 뒤를 받쳐 주는 뒷배경을 굳세게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구대문파와 팔대세가의 이름을 듣고도 세상 물정 어두운 그 놈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 놈팽이의 아버지는 항주의 어둠을 지배하는 천마보의 보주였고, 놈팽이 자신은 무려 삼대독자이기까지 했다. 천마보라는 것도 앞에 서는 거대한 말 상인 집단이지만, 뒤로는 무력을 통해 항주의 밤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무력 조직(武力組織)이었다. 비록 장사를 시작했지만 전직(前職)에서 남은 버 릇이 어디 따로 가지는 않았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정도로 애지중지했고 어떤 무리한 요구도 오냐오냐하며 다 받아주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무조건적이라 는 말이 있는데 오마광의 자식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은 물론이요, 무절제하고 무개념적이기까지 했다. 부모의 사랑은 하해(河海)와 같다는데 하늘의 광활함도 바다 의 깊음도 오마광의 자식 사랑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들이 나이 일곱에 처음으로 몇몇 친구들의 이빨을 부러뜨리고 이마를 깨뜨려 피투성이를 만들고 돌아왔을 때, 오마광은 장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아들 나이 열에 버릇없이 선생을 개무시하다가 급기야는 글 선생이 항의하러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었을 때, 오마광은 망설임없이 선생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입을 닥 치게 했다. 공자(孔子)님이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나이 열다섯에 아들이 부녀자 다섯을 집단으로 희롱하고 겁탈했을 때는 그 사내다움과 용맹함에 엄지손가락을 치 켜세워 주었으며, 아들이 나이 열여덟에 유부녀와의 치정 문제로 인해 그 남편과 문제를 좀 해결해야겠다는 말을 하자, 엄하게 다스리기는커녕 살인멸구가 전문인 유능한 부하 둘을 붙여주기까지 했었다.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그는 그 무엇 하나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끝없는 사랑의 대상인 아들은 얼마나 천 진난만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아들내미가 개념과 상식을 망각의 저편으로 영원히 던져 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무절제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교육 방식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 아이의 버르장머리를 송두리째 상실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는 놈이 또 하나 이 세상에 탄생함과 동시에, 구제 불능이란 말은 자기 쓰임새를 찾게 되었다. 그 비극적인 무뢰한의 이름은 오대광, 별호는 날뛰는 미친 종마[狂種馬]

였다. 그래도 이 무분별한 부모에게도 최소한의 이성, 아니, 본능의 한 조각은 남아 있었는지 그가 권장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근친 살해’였 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미 다 배웠다 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다만 아직 마땅한 기회를 찾지 못했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한 아이를 정신적인 불구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일을 벌이고 나면 자신의 의지를 거스를 존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천마보의 배경은 언제나 그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안겨주었다. 그러니 아마 그 이름이 제대 로 통하지 않는 인물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쪽은 이쪽대로 뒷세계의 사정에는 어두웠다. 그래도 감히 구대문파를 건드리겠느냐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충돌을 야기했다.

천마보의 삼대독자라는 남이 만들어준 위치에 오대광은 너무 깊게 몰입해 있었다. 그러나 배경으로 치면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도 만만치 않았다. 시비가 붙었고, 검이 뽑혔다.

자기 자신이 지닌 일신의 능력보다 아버지의 뒷배경에 더 관심이 많았던 쓰레기한테 질 만큼 허접하고 녹록한 단련 같은 것은 진소령의 사전에 존재치 않았다. 석 달의 고독 속에서 정련(精)된 진소령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상대를 압도했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번뜩이는 검광에 오대광은 연신 도망치기에 바빴다. 항상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지금까지 수많은 악행과 폭력을 대행하고 동조해 왔던 그의 믿음직한 호위역들도, 유은성을 비롯한 동료들의 공세 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자랑이었던 배경은 물론이요, 저열한 폭력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호위무사들마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상황이 되자 그의 진가는 바로 나타났다. 상수학 적인 가치로 평가하자면 ‘십초미만지적(十招未滿之敵)’이었다.

평가 그대로 결판이 나는 데는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삼 초는 상대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한 견제였고 나머지 육초는 무례에 대한 징벌이었으며, 마지막 일 초는 그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마무리였다.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제구초째 허벅지 사이로 날아든 비겁한 암수에 그녀 는 분노했고, 이성을 잃은 검날에 인정이 실릴 리 만무했다. 그렇게 해서 일개 소녀의 검끝에 한창 잘나가던 사파 조직 천마보의 대는 또까닥 끊겨 버렸다. 명백한 자업자득임에 틀림없었지만 삼대독자를 잃은 채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상태에 빠진 천마보의 주인 거력쌍부 오마광에게 그딴 논리가 통용될 리 없었다. 추격이 시작됐다. 아무리 구대문파의 잘나가는 후기지수라 해도 백여 명에 달하는 천마보 무인들의 총공세를 막아낼 재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전상 유연한 대처를 결의했다. 도망치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구파의 영역은 아미파였다. 그리고 그곳은 천마보주 오마광이 일단 가죽을 벗겨 내장에 매달아 널어놓겠다고 선언한 진소령의 사문이기도 했다.

쉽지 않은 도피행이었다. 마차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화살의 흉흉함이 그들의 도피행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음을 쓸쓸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떠세요?”

진소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절 죽이면 아미파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요? 게다가 이쪽 유공자는 점창파의 기명제자예요. 이 사천에서 아미와 점창을 적으로 돌리고도 무사할 문파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 당신이 그의 후예들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녀의 마지막 말에 초립사내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짧은 미동이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저들이 이곳에 도착한 이후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듯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헹, 그걸 누가 알겠느냐?”

오마광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뼈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걱정 마라, 가루를 내서 갈아 마셔줄 테니! 이 세상에 흔적이 남을 걱정일랑은 안 해도 괜찮다!”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하늘과 땅이 보고 있을 거예요.”

입술을 깨물며 진소령이 말했다.

“흐흐, 하늘과 땅 따위의 증언은 효력이 없지!”

옛날에도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천벌 따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거친 황야에서 그의 쌍부가 수백 명의 피를 머금었을 때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이 죽어나가는 지금도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자신 자체가 하늘의 무의미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분명 목격자가 있을 거예요.”

“다 죽여주마!”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 속에서 그가 증거 인멸에 성실한 자세로 기꺼이 최선을 다할 용의가 담겨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 너희 두 연놈은 물론이고 저기 저놈까지 포함해서!”

오마광의 굵직한 손가락이 살벌한 장내의 한 켠에 태연히 앉아 있는 한 사내를 가리켰다.

졸지에 목격자 갑이 되어버린 초립사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좀 곤란한데…….”

목격자 갑(甲)의 역할은 상관없지만 ‘살인멸구대상자 을(乙)’은 사양하고 싶은 역할이었다. 그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천마팔위(天馬八衛)는 앞으로 나와라!”

“존명!”

말에서 내린 여덟 명의 사내가 반월형으로 자리를 잡은 채 서서히 세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저 망할 년을 산 채로 내 앞에 잡아와! 껍질을 벗겨 산 채로 기둥에 매달아 하늘로 올라간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겠다!”

저질스럽지만 무시무시한 협박에 진소령은 소름이 쫙 끼치는 게 느껴졌다. 저자라면 그런 야만적인 행동도 충분히 취할 수 있을 터였다.

“흥, 이미 무간도(無間道)에 떨어졌을 텐데 헛수고가 아닐까요?”

진소령은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닥쳐라! 발가벗겨져 능욕당한 뒤에도 그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는지 보겠다!”

광견처럼 붉게 빛나는 두 눈에서 흉흉하고 음습한 살기가 넘쳐흘렀다.

“흥, 당신들은 내 시체도 가져갈 수 없을 거예요.”

모욕당하느니 죽는 게 차라리 나았다. 게다가 저런 악적들이 시체에 대한 예의가 있으리라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 기대하는 게 나았다. “천마팔진(八陣)을 펼쳐라!”

그가 상처투성이의 오른손을 활짝 펴며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천마팔위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산개하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중앙에 위치한, 얼굴에 다섯 개 이상의 상처가 나 있는 거도의 사내가 아무래도 이 집단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그가 명령을 내리자 팔위라 불린 나 머지 일곱 명이 진을 형성하기 위해 그들을 둥그렇게 둘러싸기 시작했다. 위(衛)란 것은 지키는 자란 뜻인데 그들은 먼저 공격하려 들고 있었다.

네 명은 장창을, 나머지 네 명은 같은 모양, 같은 길이의 도를 꼬나 들고 있었다. 사실 진법을 펼치는 데 있어 각기 다른 간격을 지닌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기는 그 형태와 길이에 따라 모두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런 다양한 개성을 한곳에 녹여 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자칫 진법의 구성을 잘못 짜면 서로 상극의 성질을 지닌 무기가 변식 도중에 충돌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골머리를 싸매고 여덟 개의 각기 다른 무기들이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 을 만한 진법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진법은 당연히 복잡 난해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력(功)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겨우 두 가지 성질의 무기로 이루어진 진법이라면 이들의 능력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반면 무기의 수를 줄이고 통일을 할수록 그 긴밀함과 짜 임새는 높아지기 때문에 진의 발동시 일류고수가 아니더라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함부로 얕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쪽수를 믿는 것 인지 천천히 느긋하게 포위를 좁혀왔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검을 중단에 겨눈 채 꼼짝 않고 그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음이 역력히 느껴졌다.

특등석에서 이 대결을 관람하고 있던 초립사내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보게, 아가씨. 잔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닐세. 하지만 나 같으면 포위망이 완성될 때까지 느긋하게 손가락 빨며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네만. 자신의 위치를 어디 에다 둬야 유리한지를 파악하고 그곳을 먼저 장악하는 자가 유리하지 않겠나?”

초립사내의 말에 진소령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맞아. 내가 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지, 멍청하게?”

일부러 지리적인 이점을 넘겨주려 하다니,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관계란 혼자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관계망 안의 역학 구조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일상에서의 인간관계와도 유사하다. 상대와 나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자신을 놓아둘 것인가? 어떤 위치에 어떤 형태로 자신을 놓아두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까?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생사를 가르는 결투는 바둑이 아니다. 상 대는 장고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때문에 상대를 파악하는 안목과 재빠른 판단력, 그리고 찰나(刹那)에 번쩍이는 순발력과 민첩성이 요구된다. 상대의 변화에 맞추 어 가장 적절한 형태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수시응변(隨時應變)의 묘리(妙理). 그 중요한 이치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싸움의 흐름이 상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자신을 살해하기 위한 상대방의 복잡한 장례 준비에 동참해 줄 필요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선공(先攻)이 최고였다. 진소령은 영특했고 이해가 빨랐다. 그녀는 그 즉시 유은성에게 신호를 보냈고, 두 사람은 서서히 좁혀오는 포위의 그물망을 찢 어발기기 위해 검을 날카롭게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 어라?”

느닷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들 줄 몰랐던 여덟 졸개는 순간 당황했다.

“어, 이게 아닌데?”

그들의 장기는 언제나 그렇듯 공포에 압도되어 공황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소수를 압도적 다수로 핍박하는 것이었다. 핍박받아 마땅할 소수가 이렇게 당돌하게 덤벼온 적은 그들이 기억하는 한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이성보다 폭력을 선호하는 그리 좋지 않은 머리통이라도 여덟 개가 한데 모이면 그나마 사정이 나을 법도 한데도 역시 이런 경우는 기억 속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하물며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는데 이 두 사람은 생쥐보다 훨씬 유능하고 용감했다.

마음의 흐트러짐은 언제나 그렇듯 빈틈을 제공했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무찔러 들어갔다. 시리도록 푸른 검기가 두 사람의 검끝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진법을 파훼(破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법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지. 아직 어린 아가씨인데 다행히 귀가 어둡지 않군 그래. 아니… 아직 젊어서 그런 건가?”

사내는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대결 구도가 좀 볼 만할 것 같았다.

관습에 절어 있는 나태한 정신의 의표를 찌른 두 사람의 기습은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생각만큼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기습만으로는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얻은 가장 큰 이득은 바로 적들의 진법을 여전히 미완(未完)의 상태로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 었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집요할 정도로 그들의 연계를 방해했다. 압도적인 무력 차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상 진법이 완성되면 세불리는 극복하지 못할 만큼 커질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진소령의 검끝에서 아미의 절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제비처럼 날쌔고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이런 격전의 와중에도 저 정도 상태까지 심 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기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초립사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는 좋은 제자를 두었군. 장래의 대들보라는 건가?”

반면 머슴아 쪽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한심한 꼬락서니는 뭐란 말인가?

유은성은 자신을 향해 교대로 달려드는 네 명의 적을 향해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매서운 검풍이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꽤나 용맹스럽게 느 껴졌다.

그러나 초립사내는 여전히 불만인 모양이었다. 저 풋내기의 출신 성분으로 미루어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언뜻 보면 요란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는 공격이란 것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게, 거기 총각!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나?”

보다 못한 그가 여전히 난전에 정신이 팔려 있는 청년을 향해 불만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예?”

나직한 말이었음에도 바로 귓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똑똑하게 울려 퍼졌다.

“자네, 점창파의 제자 아닌가?”

“마, 맞습니다.”

열심히 검을 휘둘러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유은성이 대답했다. 아직 그 정도 정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대화 도중에도 적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딴 데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더욱 맹렬하게 파상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일곱 개의 허초를 간파하고 두 번의 찌르기를 신형을 틀어 피한 다음 세 번의 베기를 연달아 막아내야 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불리해진 유은성의 어리둥절한 대답에 사내가 혀를 끌끌 찼다. 대답하면서도 도합 여덟 번의 연환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다. 치사하게시리. 대화 도중에는 정중하게 기다려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현실은 몽상보다 확실히 냉엄했다.

“쯧쯧쯧, 점창의 제자란 자가 검을 휘두르고만 있다니! 무슨 짓거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사내가 되물었다.

“자네, 점창파 독문비전인 사일검법(射日劍法)을 익히긴 익혔나?”

“물론 이, 익혔습니다.”

다시 그는 세 번의 찌르기와 다섯 번의 베기를 막고, 흘리고, 피했다.

“익혔으면 제대로 써야 할 것 아닌가? 배워놓고 쓰지 않으려면 뭣 하러 힘들여 배웠는가? 시간 낭비하고 싶어서?”

사내의 비판은 통렬했다.

“여전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그의 마음은 더욱 흐트러졌고, 결국 적 중 하나의 공격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지고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졌다. 다 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점창파의 제자 주제에 검을 휘두르고 있다니, 무슨 짓거린지 묻고 있는 거네.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그리고 사내는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천돌관일(天貫日:하늘을 넘어 태양을 꿰뚫는다)의 검을 익혔다는 자가 그 무슨 추태인가?!”

사내의 호령은 빛보다 빠르게 유은성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ᅳ점창의 검은 가볍지만 저 하늘의 해도 꿰뚫는다.

호사가들이 점창의 검을 칭송할 때 자주 입에 올리는 단골 대사였다.

원래 검이란 휘두르고 찌르는 물건이긴 하지만 사일검법에 있어서 휘두르기는, 즉 베기는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주역은 언제나 찌르기. 사일검법의 정수(精髓)는 마치 쏘아진 화살 같다고까지 칭해지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초고속 찌르기였다.

파바밧!

그는 자신의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칼날의 무리들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신변을 걱정하는 진소령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 준 것은 초립사내의 목소리였다.

“자네의 화살은 몇 개의 태양을 떨어뜨릴 수 있나?”

“어, 어떻게 그걸?”

청년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점창 문하뿐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섯 개입니다.”

유은성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젊은 나이에 성취가 대단하군. 그걸 실전에서 전혀 써먹지 못했다는 점만 빼고 말이야. 그러다가 죽을 뻔한 것도 빼는 게 좋겠군. 게다가…….”

사내가 말했다.

“저들은 넷이군.”

사내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유은성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신관처럼 부르르 전율에 몸을 떨었다.

유은성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던 소극적인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자루의 날카로운 송곳 같은 예기 를 온몸에서 발산하기 시작했다.

검을 든 자세도 바뀌었다.

우선 힘줄이 돋아 나올 정도로 꽉 쥔 손아귀가 느슨하게 풀렸다. 손목이 유연해지고 검을 든 자세가 가벼워졌다. 몸을 살짝 틀고 오른팔을 앞으로 내민 다음 버드 나무 가지처럼 가볍게 든 검을 앞으로 내밀며 수평보다 약간 위를 향하게 자세를 잡는다. 검끝이 향하는 곳은 적의 장기 중에서 불을 상징하는 심장이었다.

그의 육체가 힘차게 당겨진 강궁처럼 팽팽해졌다. 호랑이가 먹이를 잡기 전 도약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그는 이제 당장이라도 용수철처럼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활은 언제나 공격을 위한 물건, 방어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쏘아진 화살이 적을 꿰뚫지 못하면 죽는 쪽은 자신이다.

일격필살(一擊必殺)! 문자 그대로 한번 쏘아지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적중(中) 관통(貫通)하면 상대가, 실패할 경우 자신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기 에 진정한 일격필살이라 할 수 있으리라. 점창파 비전인 사일검법의 찌르기 역시 이러한 철학 위에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급변한 분위기에 천마팔위 중 넷은 감히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것이 패착이었다.

“제일사!”

푸슛!

유은성의 검이 한 자루의 화살이 되어 침묵 너머로 쏘아져 나갔다.

소리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고속의 찌르기. 그것이 관통하지 못할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큭!”

‘삼(三)’이란 숫자가 새겨진 무복을 두르고 있던 칼잡이 사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쪽 견정혈 부근에서 피보라가 솟아올랐다. 유은성의 찌르 기가 정확히 그곳을 관통한 것이다.

파바바바밧!

또다시 그의 검이 화살처럼 퉁겨 나갔다. 이번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진 연속 찌르기였다.

“큭! 컥! 캑! 헉! 윽!”

점창의 검은 태양조차 꿰뚫는다. “사일(射日)’이란 명(名)은 그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은성이 제 몫을 해주자 진소령 쪽에 걸리던 부담이 상당 부분 줄어들게 되었고, 압박이 줄어든 만큼 그녀의 움직임 역시 훨씬 가벼워지고 또 재빨라졌다.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만!”

추태는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오마광의 뇌 속을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러나라!”

천마팔위는 그 즉시 이미 여러 번 무의미를 경험한 공격을 거두고 재빨리 물러났다. 그들에게 보주의 명령에 감히 거역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게다가 그럴 만한 상태도 아니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꺼풀 벗은 유은성의 찌르기는 쾌속하고 집요했다. 그의 예리한 검봉은 그들의 몸을 벌집으로 만드는 것에 매우 집 착하고 있었고, 그 의도는 곧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진소령의 검 역시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의 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현묘함이 깃들어 있었다. 또한 그녀 역시 그의 검봉이 지향하는 의지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며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채 완성도 되지 못한 진법으로 이 두 사람의 기량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그들 여덟 명의 표정은 어두웠다. 보로 복귀하게 되면 이번의 추태와 무능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소령은 확신했다.

‘저자가 직접 손을 쓸 생각이구나!’

강남사패(江南四覇)란 강남에서 가장 패도적인 네 집단을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 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수장들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거칠다고 소문난 사람이 지금 두 사람에게 패도적인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는 거력쌍부 오마광이었다.

저벅저벅!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몸에 휘감겨 있는 검은 쇠사슬이 철그렁그렁 위협적인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의 도끼와 도끼 사이를 잇는 단단한 쇠사슬은 특히 마상에서 돌풍 같은 위력을 발하며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 뒤를 그의 오른팔이라 알려진 혈치도 오경이 뒤따르고 있었다. 주인의 수고를 조금 덜어줄 작정인 모양이었다.

과연 강남사패의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구나. 이토록 패도적인 기운이라니……. 숨이 막히려고 한다.’

전신의 신경이 경고성을 보내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유은성 역시 잔뜩 몸에 힘을 주며 긴장했다.

마침내 폭군의 진군이 정지했다.

“십 초 안에 끝내주마!”

주절주절 한가하게 떠들고 있기에는 축적된 분노가 너무 컸다.

부웅!

경고도 없이 그의 팔이 휘둘러졌다. 아무런 사전 준비 동작도 없었다.

쐐애애애애액!

굵은 쇠사슬에 달린 거대한 양날 도끼가 바람을 갈랐다. 족히 십 척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도끼가 마치 질풍처럼 두 사람을 덮쳤다. 그의 장기인 ‘질풍도살인(疾風 屠殺人)’이었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감히 정면으로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몸을 피했다. 자신들의 얇은 검은 저 사나운 질풍 앞에서 장난감처럼 부서질 것 같았다. 그들의 판단 은 옳았다.

“흥! 그런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오마광이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에 들린 쇠사슬을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거대한 검은 박쥐가 양 날개를 활짝 편 듯한 기괴한 모양의 편복월이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벽력단지(霹靂斷地)!

통나무처럼 굵은 오른손이 세차게 쇠사슬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하늘로 솟구쳤던 도끼가 마치 벼락처럼 대지를 때렸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급하게 뒤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큰 동작에 걸려들 것 같나요?”

위력은 있지만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쇠사슬을 사정없이 휘돌렸다.

쿠콰콰콰콰콰!

대지를 때린 도끼에서 두 가닥의 충격파가 땅을 파헤치며 달려갔다. 노림수는 이것이었다. 화려하고 무식한 공격은 허초였다. 단단한 마음을 비틀어 열어 빈틈을 만들기 위한

진소령과 유은성은 서둘러 검을 정면으로 옮겨 해일처럼 덮쳐 오는 황토빛 충격파를 막아냈다. 그러나 반 호흡 정도 늦고 말았다.

“크윽!”

“꺄악!”

두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간의 방심이 승부 전체를 좌우하는 법. 제때 막아내지 못했는데 제대로 힘을 흘려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흘리기에 반 감되지 못한 여력이 두 사람의 몸을 덮쳤다.

두 사람 모두 지면을 긁으며 삼 장 정도 물러난 후에야 겨우 몸을 멈출 수 있었다.

울컥!

내상을 입은 것인가. 진소령의 입가에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 무슨 엄청난 힘이란 말인가! 아직도 내장이 진동하는 것 같구나.’

진소령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충격파만으로 이 정도라니? 만일 저 도끼에 직격당하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은성 역시 더욱더 경각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손아귀가 얼얼하고 내장이 진탕된 듯했다. 조금 전 맞붙었던 천마팔위와는 격이 다른 강함이었다.

게다가 그의 간합(間合)은 자신들보다 훨씬 길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그의 거대한 편복월은 영활하고 재빨랐다. 오마광은 자신들을 완벽하게 자신의 영역 안 에 가둬두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의 검은 도끼날이 그들의 허리에 찍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간격이었다.

“모험을 할 수밖에 없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가 수족처럼 부리는 편복월의 움직임이 크고 화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두 명이었다. 혈치도 오경이 그의 뒤에 버티고 있지만 함부로 나설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의 장기인 질풍도살인은 타인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무공이었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동료나 부 하들까지 함께 휩쓸고 가버리는 인정사정없는 무공인 것이다. 동작이 크고 위력적인 만큼 세밀한 제어는 힘들었다. 거기에 승기(勝機)가 있었다.

진소령은 그 의견을 눈짓과 함께 유은성에게 보냈다. 구체적인 계획을 위해 두어 번의 전음이 오갔다. 그들은 수십 년 된 지기도, 생사의 경계를 함께 넘나들던 전 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연인(戀人)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만나자마자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심전심(以心傳 心)처럼 두루뭉술하고 불명확하며 무책임한 말에 함부로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대화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시위라도 하듯 오마광이 그의 머리 위에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그의 거대한 검은 도끼를 풍차처럼 돌리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미끼 역을 맡은 유은성이었다. 그는 단전에 축적되어 있던 진기를 몽땅 끌어올려 검끝의 한 점에 주입했다. 좁쌀보다도 추호지말(秋毫之末)보다 도 작은 한 점에 대량의 검기가 흘러들어 갔다.

“폭우산사(暴雨散射)!”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그의 검끝에서 수십 줄기의 검기가 오마광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의 역할은 되도록 요란하고 화려하게 상대의 시선을 잡아매어 놓는 것이었다. 그것도 멀리서.

“소용없다!”

그의 무모한 공격을 비웃으며 오마광이 쇠사슬을 두어 번 교차해서 휘두르자 날아오던 검기의 소나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죽어라!”

재빨리 유은성의 공격을 무마시킨 오마광은 그에 대한 응징을 잊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의 오른손이 퉁기듯 움직였고, 쇠사슬이 민첩한 채찍처럼 영활하게 움직 이며 그 끝에 매달린 묵빛의 도끼를 쏘아 보냈다.

‘어차피 무모한 건 알고 있었다!’

쏘아진 검기는 어차피 일정 거리 이상을 지나면 자연 소멸되기 마련이다. 신체의 그릇을 떠난 기는 그 특성상 허공 중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 우주(宇宙)라는 거대한 기의 전체 집합에 녹아들어 가기 때문이다. 수련의 정도와 내공의 화후에 비례해 그 거리는 늘어나거나 줄기는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법은 결코 없다. 아 직 유은성의 수준은 십 장 거리를 무(無)로 만들 만큼 그 성취가 높지 못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자 의도했던 대로 그 의 도끼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십 장이란 간격은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진소령이 신형을 박찼다. 아미파 비전보법인 수련보(水蓮步)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섬련(閃蓮)’이었다. 태어나서 딛는 가장 빠른 한 걸음이 었다. 그녀는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탄검일시(彈劍一矢)!”

날아오는 도끼의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는 유은성의 손에서 사일검법의 비장삼절초 중 하나가 펼쳐졌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이 신의 활에서 쏘아진 빛의 화살처럼 빠르게 오마광의 미간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가 현재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초이자 마지막 초식이었다. 이 초식이 실패하면 그 역시 죽는 것이다. 필살기 (必殺技)란 이 일격에 적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기술이기에 비로소 필살기라 불리우는 것이다. 어느 한쪽은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 필연이다. 적이든 나든. “좋구나!”

지켜보던 초립사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끝이다, 흉적(凶賊)!”

외침과 동시에 진소령의 검에서도 아미파의 독문절초인 섬영연화(閃影蓮花)가 화려한 꽃을 피우며 허공을 수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의 별호에 왜 쌍부가 들어가 있는지를 말이다.

이번만큼은 패기 넘치는 오마광도 안색이 변할 만큼 놀랐다. 새파란 애송이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이번 합공은 정교하고 예리 했다.

그러나 그의 별호는 거력쌍부였다. 양날 달린 편복월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니었다.

“차압! 얕보지 마라!”

오마광역시 사파의 거두답게 숨겨진 한 수가 있었다. 그의 나머지 도끼는 등 뒤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그만큼 작았고, 그런 만큼 빨랐다. 쾌검술(快劍術)은 있어 도 쾌부술(快斧術)이라는 말은 없다. 도끼란 게 원래 생겨먹기부터가 무식하고 둔하기 짝이 없는 둔중한 물건이다 보니 속도 면에서는 언제나 불리했던 것이다. 그 러나 지금 오마광의 왼손이 선보인 도끼질은 쾌부술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찾기 힘들었다.

십 척이 넘는 편복월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팔심이었다. 그 손에 작고 가벼운 소부가 들리자 그 속도와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파바바박!

질풍처럼 휘둘러진 그의 도끼가 맨 먼저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유은성의 검을 쳐냈다.

챠앙!

정확하게 측면을 얻어맞은 유은성의 검이 태양을 향해 튕겨 올라갔다. 튕겨 나간 검이 다시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도끼는 이미 진소령의 전신에 쇄도하고 있었다. 피처럼 붉게 변한 그의 안광이 마치 지옥의 무저갱에서 기어오른 악마를 연상케 했다.

매서운 도끼질의 난타에 그녀의 검초가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아악!”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진소령이 검을 놓치고 말았다. 손아귀가 찢어져 선혈이 흘러내렸다. 오장육부가 진탕되자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의 도끼는 뽑혀져 나온 만큼 재빨리 그의 등 뒤로 사라졌다. 그 다음 순간 진소령의 가녀린 목은 어느새 오마광의 투박한 마수에 사로잡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가녀린 목은 악동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화초처럼 꺾어질 것 같았다.

허공 중에 떠올라 바둥거리는 진소령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바라보는 오마광의 두 눈이 빨갛게 불타올랐다. 원래 천천히 시간을 들여 죽여줄 생각이었지만 싹 가셔 버리고 말았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안 돼애애애애애! 진 소저!”

유은성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최후의 의지처라 할 수 있는 검조차 들고 있지 않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죽어라!”

수많은 인간의 피를 들이마신 오마광의 마수가 다시 한 번 생명을 거두기 위해 움직였다.

유은성의 눈이 질끈 감겼다.

어둠 속으로 도망쳤던 유은성이 이상함을 느낀 것은 조금 지나서였다. 가장 먼저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진소령의 최후의 단말마가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 꽃다운 여인의 생명을 거두었을 악적들의 포악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은성은 용기를 가지고 한쪽 눈을 빼꼼히 떠서 앞을 바라보았다. 불행이었던 것은 진소령이 아직까지 저 간 악한 야수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점이었고 다행인 것은 그녀의 목이 아직 그녀의 어깨에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아직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

오마광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시뻘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의 팔뚝은 힘줄과 핏줄이 징그러울 정도로 툭툭 불거져 있었다. 그는 진소령을 잡고 있던 왼쪽 손아귀를 쥐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아 귀는 마치 시간의 그물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농간이란 말인가! 이유를 알 수 없어하던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눈이 밝은 유은성도 그걸 발견할 수 있었다.

“서, 설마 비침?”

그의 굵다란 왼쪽 손목 바깥에 삐죽 튀어나온 검은색의 가느다랗고 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냐, 이 어르신에게 이런 비침을 날린 자식이?”

그러나 그건 비침이 아니었다. 독침은 더 더욱 아니었다. 저건 그런 잡스러운 물건이 아니었다.

유은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마광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나치게 뻣뻣하다는 점만 빼면 항상 많이 보던 물건이었다. 특히 머리통 위나 바람 부는 날 펄럭이는 시야 안에서.

“서, 설마 머리카락?”

혹시나 눈이 잘못된 건가 하고 몇 번 비벼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것은 한 올의 머리카락이었다.

짝짝!

“거기까지!”

조용하고 온화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초립사내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 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유은성은 물론이고 모두가 어리둥절해야만 했다.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인식 영역 안에서 정보가 처리되고 재처리된 정보가 다시 입력되고 이해되기까지 한참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네놈은 또 뭐냐? 곧 죽을 새끼가!”

부자유한 왼손과 달리 아직 멀쩡한 오마광의 오른손으로부터 사나운 질풍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그 다음 순간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 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거대한 암석도 단번에 분쇄시킬 수 있는 위력의 검은 편복월이 사내의 손 안에 정지해 있었다. 초립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을 슬쩍 들어 너무나 수월하게 도 끼의 공세를 완전히 무로 돌려 버렸다.

“이런 장난감으로 뭘 할 수 있나?”

와자작!

가볍게 손아귀를 움켜쥐자 도끼는 까만 쇳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사내는 오마광과의 거리를 무로 만든 다음 사내의 오른팔을 비틀었 다. 철심을 박아놓은 것처럼 억세 보이던 팔뚝이 물기 짠 빨래처럼 비틀렸다.

“으아아아악!”

항상 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게 하던 천마보주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약간의 정신이 남아 있던 부보주 혈치도 오경이 선혈이 뚝뚝 흐를 것 같은 거치도를 꼬나 들고 보주를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톱날 같은 날이 달린 한 자루의 흉악스런 칼을 휘두르며 항상 가장 앞서 살육을 자행해 왔기에 붙은 별호가 ‘혈치도’였다. 그러나 수많은 이의 원념이 서려 있던 그의 거치도 는 사내의 가벼운 소맷바람에 수수깡처럼 부러졌고 그의 전신은 사나운 야수의 발톱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선혈을 뿜으며 뒤로 날아 갔다. 허공에 잠시 떠올랐던 진소령의 몸이 마치 깃털처럼 천천히 초립사내의 품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몸을 받쳐 주고 있는 듯했다. “괜찮니, 꼬마 아가씨?”

두 손을 펼쳐 부드럽게 소녀를 받아 든 사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진소령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도 제대로 못한 채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생사 의 저편에서 급격히 빼내온 탓인지 그녀는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진소령은 조심스레 생명의 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초립의 그림자와 머리카락 때문에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약간 낙심한 진 소령이 대답했다.

“전 꼬마 아가씨가 아니에요.”

“허허, 이거 내가 실수를 했나 보군. 미안미안. 나이가 들다 보면 가끔 그런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얻었는가는 아무 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가끔 잊어버릴 때가 있거든. 평생 눈에 진흙을 덮고 사는 불쌍한 치들도 넘쳐흐르는데 말이야. 용서해 주겠니?”

평생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사람들이 다수의 위치에서 끌어내려진 역사는 지금껏 한 번도 없다. 진소령은 얼굴을 붉히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께서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분은 아니시겠지요. 실수는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만 절 내려주 시겠어요?”

여전히 사내의 품에 안겨 있던 진소령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미안. 아직은 안 되겠구나. 끝까지 방관자로 남았으면 모를까 일단 나선 이상 매듭은 확실히 지어야겠지. 저쪽은 아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생각이 없는 듯하니 까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같은 곳에 시선을 옮긴 두 사람은 미친 말처럼 푸르렁거리는 한 인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죽여! 죽여! 죽여!”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충격이 가져다준 일순간의 방심 상태에서 빠져나온 오마광이 절규하며 외쳤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그의 분노에 뒤에서 말을 타고 대기 중이던 칠십칠 명의 부하가 편자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왔다. 말발굽의 해일이 초립사내와 그의 품에 안긴 작은 새를 피떡으로 다지기 위해 밀려왔다. “쓸데없는 짓을!”

초립사내가 소녀를 안은 채 걸음을 한 발짝 떼며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너희들을 도와주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처음부터 너희들을 위험에 몸담지 못하도록 지켜줄 힘이 있었는데? 위기의 순간에서 너희를 빼내줄 수도 있었는 데? 너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난 지금에 와서야 너를 구해주었을까?”

진소령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너희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가는 것은 결국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몫이지. 이 존재의 세계에 던져진 너희 자신이 스스로 발버둥 치지 않으면 안 돼. 그게 삶이지. 그것이 너 자신의 인생이고 삶이란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규정해 가는 행위야. 난 너희들의 삶에 있어서는 그저 타인일 뿐이지. 덮쳐 오는 운명의 파도를 넘기 위해 조언해 주고 도와줄 수는 있지만 언제나 마지막에 남겨진 몫은 너희들 거야. 나는 보모가 아니고,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 너희들 을 구해줄 수는 없단다.”

소녀는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수십 마리의 말이 지축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부드럽고 온화하며 힘이 깃든 말이 그녀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말 속에서 힘과 자신감과 확신을 느꼈다.

“지금 이런 건 우연이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주아주 특별하고 희귀하고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우연, 필연이 아닌 것. 내가 우연한 순간에 너희들을 만나 우연찮게 너희들에게 힘을 빌려준 것은 그런 하고많 은 우연 중의 하나야. 우연 중의 우연. 이런 걸 아마 억세게 운이 좋다고 하는 걸 거야. 하지만 이런 운에 기대서는 안 돼. 필요할 때마다 때맞춰 일어나는 우연 따위 는 없으니까. 스스로의 힘을 길러라. 그리고 운명의 파도와 맞서 싸워 이겨라. 그래서 난 너희들을 여태껏 도와주지 않은 것이란다. 네 자신의 삶에, 그 치열한 투쟁 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너의 의지가 나아가는 길에 나의 의지가 개입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런 우연은 그냥 없었던 일이거니 하고 잊어버리 도록 해라.”

그는 소녀를 ‘두. 팔로’ 안은 채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말을 향해 걸어갔다.

“만물유전(萬物流轉). 만물은 언제나 변화를 거듭한다. 끊임없이 이 세상에 변화가 멈추는 법은 없다. 무궁한 변화야말로 이 세상의 참 본질. 변화가 계속된다는 사실 하나만이 불변할 뿐. 끝나지 않는 춤, 영원히 이어질 흐름, 끊임없는 상호 작용의 변역(易) 속에서 이 세상은 유지된다. 싸움도 마찬가지야. 변화와 변화가 서 로의 우위를 다투며 한 점에서 맞부딪치는 것일 뿐이지.”

이제 쇄도하는 군마 무리들과의 거리는 겨우 지척이었다. 제대로 훈련된 말은 인간을 짓밟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말 들을 베는 것은 말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차라리 말은 인간에게 도움이라도 되지만 이 인간들은 해만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도 말을 어쩔 생각은 없었다. 도구는 그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기에 거울을 깬다고 해서 인간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다.

“물론 관계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는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복잡하지. 아무리 복잡한 변화라도 그 중심을 꿰뚫으면 그 변화의 전체 상을 지배할 수 있지. 그걸 바로 치중화(中和)라고 한단다. 바로 이렇게 말이지.”

그것을 쓸모있고 유효하고 교육적인 시범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소녀는 무슨 일이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났는지 전혀 인식할 수 없었다. 꽃을 꽃이라 부르기 전에는 꽃이 아니듯 인식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기마술도 그의 몸에 해를 끼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명랑하고 온화했으며 그의 발걸음은 여유가 넘쳤다. 또한 그의 두 팔은 여전히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주 고 있었다. 그녀를 지켜주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삶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자신의 무를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상승의 무리(武理)와 일맥상통하는 하나의 비전이라는 것을.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말로서 죽어 있던 비전이 생명을 가지고 체 현(體現)되는 부활의 광경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것은 필연의 결여가 가져온 우연 중의 우연, 기연(奇緣)이었다.

그가 한 명의 소녀와 함께 칠십여 필의 말 사이를 가로질러 짧은 산책을 끝냈을 때 말 위에 타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각종 흉악하게 생긴 무기란 무기는 몽땅 뽑아 들고 단 한 명을 난자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전직 마적들은 모두 안장에서 떨어져 바닥을 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말발굽에 밟혀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정강이가 부러지거나 발목이 으스러지거나 내장이 터지거나 심지어 고환이 짜부라진 이들―삼가 명복을까지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어떻게 손을 썼는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졌다.

“어버… 어버… 어버…….?”

천신의 권위가 지상에서 찰나 동안 휘둘러진 듯한 광경에 얼이 빠져 버린 오마광은 호흡 곤란에 빠진 잉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싸늘한 정적이 주위를 살포시 뒤덮었다. 오직 한 사내만이 그 침묵의 중심에 조용히 서 있었다. 품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작은 새를 안고서.

“저… 이제는 내려주실 수 있나요? 볼일은 끝나신 것 같은데.”

얼굴을 푹 수그리고 소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죠, 소저!”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는 충실하게 소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조금 전의 짧았던 산책이 남긴 잔상을 돌아보며 사내는 씁쓸하면서도 슬픈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이 자신이 그 광경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 세계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구나. 재앙의 도래가 그토록 명확하게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시련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 다투기를 더 즐겨 한다.’

좀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예지의 힘을 인간은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예지력’이란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그리 초자연적인 힘은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인 추리 력과 직관력, 통찰력이 합쳐진 능력이며 학습과 사유 훈련을 통해 충분히 얻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며 그렇게 주장하는 이의 주장은 받아들이는 것보다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하다. 특히 신의 이름을 판매 대상으로 삼고 내세의 공포를 영업 전략으로 내세우는 놈들은 백이면 백 거짓 선지자이다.

예지력의 토대는 상상력이다. 주어진 바 그대로 받아들이면 껍데기밖에 얻을 수 없다. 현상의 안을 들여다보고 그 진수(眞髓)를 얻고 싶다면 그 껍질의 이면을 들 여다볼 상상력과 통찰력을 함양해야 한다.

특히 이 경우 그렇게 많은 양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한 호흡 정도 쉬면서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지금 서로 너 잘났네, 내 잘났네 다투어 봤자 거대한 겁난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앞으로 다가올 예고된 재앙은 거대한 해일이 되어 이 모든 어린애 장난질 같은 놀음을 휩쓸고 지나가 버릴 것이다. 거대한 해일이 아직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 고 있는 이 세계를 덮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나로 모아진 마음의 결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후예,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이 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전혀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들이 세계의 일부라 는 사실을 부정하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그때 또다시 그들의 뒤편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기마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강호인 특유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소리. 바로 경공을 펼칠 때 나는 소리였 다.

설마 증원(增員)인가? 지금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일흔아홉 명이 천마보의 전체 인원은 물론 아니었다.

진소령과 유은성, 마부 사이에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미 그들의 몸은 혹독한 싸움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더 이상 싸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진소령의 얼굴은 곧 환하게 밝아졌다. 경공을 펼치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들 중에 아는 얼굴들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교수대의 밧줄처럼 그녀의 사지를 옥죄어오던 긴장이 일순간에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신호는 산문까지 닿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당도한 시간도 예상 이상으로 빨랐다.

‘게다가 저분은?!?

선두에 앞장서서 약 오십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는 할머니는 매우 낯이 익었다. 아미파 오대장로 중 한 명이자 일부 제자들 사이에서는 백발 노괴라 불리우며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혜월(慧月)’이었다. 그녀는 천겁혈세의 생존자였다. 그러니 그녀의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혜월 장로는 백 살이 넘은 것치고는 시력이 좋았다. 그래서 멀리서도 진소령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미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 중 한 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다고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구해준 한 사내와 제자들에게 외쳤다. “먼저 가겠다!”

일단 남자들은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인 그녀의 눈에 맨 먼저 밟힌 것은 소령의 바로 곁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일단 그놈부터 먼저 떼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경공은 더욱더 빨라졌고, 돌개바람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어 튼 다음 그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냅다 외쳤다. “웬 놈이냐? 무엇이 목적인지 모르지만 이 아이에게서 떨어져라, 이 늑대야!”

일단 모든 남자는 늑대 내지는 승냥이 후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가치관이 곧바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물론 남자 쪽이었다. 초립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혜월, 그 남성기피증은 여전하구나!”

진소령은 발목을 삐끗했고, 유은성은 딸꾹질을 했다.

“혜월~?”

말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아니, 이런 썩을 놈을 봤나! 내가 네 친구냐? 어따 대고 감히……!”

노발대발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쏙 들어갔다.

“히에에에에에에에… 캑캑캑!”

느닷없이 터져 나온 기겁성. 그러다가 비명이 목에 걸렸는지 사레가 들려 버리고 말았다. 폐까지 목구멍 바깥으로 외출할 듯한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돌볼 계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혼백은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 이상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육신을 빠져나가 염라전까지 도달했으나 염라대왕과의 상담을 통해 생사부에 기록된 날짜와 다르다는 것이 발견, 저승사자 두 명이 업무 태만으로 중징계를 당하고 그녀의 혼백은 다시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체 이탈의 후유증 때문인 지 얼굴이 새파래진 혜월이 얼른 땅에 몸을 던지며 오체복지했다. 본 파 장문인조차 받아보지 못한 예였다.

“아, 아미의 혜월이 조, 존안을 뵈옵니다!”

아미파 내에서도 성격 꼬장꼬장하고 심술궂기로 유명한 장로 혜월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다시 한 번 화등잔만하게 커진 자신의 눈을 세차게 비벼야 했다.

“박력있는 인사, 고마웠네. 오랜만이구나.”

초립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혜월의 몸이 황공함을 감당 못하겠다는 듯 더욱 쪼그라들었다.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 이 천한 것의 무례는 죽음으로써 갚겠습니다.”

혜월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허허, 오랜만에 만난 인사치고는 너무 살벌하군. 죽다니? 게다가 자네 스스로 자신을 천하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한 번 실수했으면 다음에 안 하면 그만 아닌가? 그 정도 일로 마음 상하지 않네. 그만 일어나게.”

“아, 아닙니다. 감히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그녀의 몸은 보이지 않는 손에 들려 땅에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감히 마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자넬 내려보고 말하려니 목도 아프고 말일세.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저 아이 말로는 여기서는 홍련삭의 신호가 아미까지 닿지 않았을 거라 하던데.”

그러자 혜월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이러했다.

요 며칠간 이 주변에 아미파의 얼굴을 무시하는 눈먼 도적 떼들이 날뛴다는 소문을 듣고 한참 몸이 근질근질하던… 이 아니라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는 모범적 인 장로라 할 수 있는 자신이 몸소 아이들을 이끌고 도적 떼들을 토벌하러 갔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사내 녀석도 한 명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름이 장씨라고 하는데 불쌍하게 도적 떼들에게 다 털려 빈털터리가 되려는 찰나에 그녀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명색이 표사 나부랭이 주제에 강도에게 홀랑 털린 그 꼴이 하도 한심해 서 한 수 지도해 주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몸을 푸니 좀 상쾌해지던가?”

“아, 예. 물론입니다. 한동안 산문 안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어찌나 좀이 쑤시… 헉!”

무심결에 대답하던 혜월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 와중에도 혀는 두어 번 더 움직였다. 진소령은 갑자기 자신이 아미파의 제자라는 사실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 다.

초립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너는 여전히 씩씩하구나.”

“부, 부끄럽습니다.”

그가 은거한 지 어언 오십여 년.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돌던 인물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혜월 사태는 진심으로 감격했다. 직접 다시 한 번 전설과 조우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이때 진소령과 유은성, 마부, 이 세 사람은 꽁꽁 얼어붙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늘처럼 여기고 있는 사천무림의 최원로 중 한 사람인 혜월이 저처럼 경외시하는 인물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정도의 거물에게 자신들은 그런 무 례를 범했단 말인가?

처음 만났을 때는 경황이 없어 마차로 피떡을 만들 예정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 혜월은 어떻게 돌변할까? 한때 ‘피보라’라고까지 불리웠던 과거의 명성에 덮인 먼 지를 다시 한 번 털어내려 할지도 몰랐다.

“곧장 장문인에게 연락해 영접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의당 해야 할 의무라는 듯 말하는 혜월의 말에 초립사내는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더 이상 자신의 여행이 번거로워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원래 이들과의 만남도 예정 외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우연이 빚은 이 인연의 씨앗이 좋은 싹을 틔우기를 바랄 뿐.’

“그럴 필요 없네.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니 말일세. 장문인에게 그런 번거로움을 끼칠 수야 없지.”

“아닙니다. 번거롭다니요. 감히 어찌 그런 불경스런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 아미파를 방문해 주신다면 삼생에 다시없는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또한 묵으실 방은 영구히 보존되겠지요. 그렇지. 기념관으로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아마 사천의 제문파들과 구파의 나머지도 부러워서 미치려 하겠지요. 그러니 부디 사양한단 말은 하지 마시고 며칠만이라도……..”

혜월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열렬히 그의 왕림을 염원했다. 그녀의 두 눈망울은 소녀의 그것처럼 약동(躍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뜻은 완고했다.

“미안하네. 나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세.”

혜월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기라도 한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녀는 정말 낙심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뜻대로 하십시오.”

마지못해 한 대답이란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고맙네. 그리고 저 사람들도 좀 잘 처리해 주고.”

“예, 걱정 마십시오. 두 번 다시 이런 잡짓을 못하도록 쓴맛을 보여주겠습니다.”

혜월이 붉은 혀로 윗입술을 살짝 핥으며 말했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오고 만 오래된 습관이었다.

‘쯧쯧, 저 버릇은 여전하군. 천마보 간판이 내려가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갑자기 천마보 사람들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의 연민일 뿐 남에게 해를 끼치려면 자신이 해코지당할 각오 정도는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이제 나이도 있으니 너무 피를 많이 보지는 말게.”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만다. 그리고 며칠 후 천마보는 강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아무도 죽은 이는 없었다.

당연했다. 고래(古來)로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반죽음이 진정한 죽음으로 인정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 때때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 현실상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불타(佛陀)께서도 이미 일체개고(一切個苦)를 설 파하시지 않았는가. 천국와 지옥 둘 모두 지상에 있지 지상 이외의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거할 것인가, 지옥에 거할 것인가? 선택은 언제나 신의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몫인 것이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 저… 대협!”

정식으로 고마움을 표해야겠다고 생각한 진소령은 이 정체불명의 사내를 호칭할 말을 뭘로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해야만 했다. 소협, 대인, 노야, 노선배, 오라버니, 오빠, 그 외 기타 등등. 그러다가 그녀가 선택한 것은 가장 무난한 느낌의 명칭인 대협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를 구한 건 너 자신이다. 너의 포기하지 않는 행동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뿐이다.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그저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해 주도록 해라. “애썼다, 분발했구나, 참 잘했다, 장하다, 나 자신아’라고 말이다.”

“저… 그,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무리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해도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현실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겠지요. 만일 대협의 도움이 없었다 면 소녀는 저 악적들에게 능욕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수천 번을 감사해도 베풀어주신 이 은혜에 보답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현재와 가 능성으로 남아 있는 미래 모두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감사의 말은 언제나 기분 좋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 사내는 소녀의 진실 어린 모습에 미소 지었고, 마지막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우연 중의 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운이란 스스로의 의지를 움직여 그 능력만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기를 극복하고 지 고(至高)의 하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라.”

“금과옥조 같은 말씀, 소녀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소녀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 니다.”

“너의 말이 지켜지길 기대해 보마.”

이제 시간이 되었다.

“그럼 이만 이별이구나.”

“저…….”

진소령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뗐다.

“또 뵐 수 있을까요?”

소녀의 붉게 달아오른 볼은 매우 앙증맞아 보였다. 사내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그려졌다.

“인연이 닿는다면.”

진소령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사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하지만 더 아름다워지고 또 강해졌어. 그럼 작별이다.”

진소령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저희 어머니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이미 벌써 길의 저편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는 곧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사내는 떠났다. 사람들은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중 특히 감격에 겨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혜월이었다. 아직도 감동의 물결이 가시지 않은 노장로를 붙잡고 진소령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장로님?”

진소령은 지금의 과정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한 후에야 겨우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 반응마저도 상당히 건성이었지만 혜월이 다시 사적인 망상의 세계로 돌아 가 버리기 전에 얼른 질문해야 했다.

“저분께서는 대체 누구십니까?”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 여겨지지 않는 신위였다. 사천의 최고령자 중 한 명인 혜월이 오체투지가 모자라다 할 정도로 예를 표하고 자진해서 본 파 장문인까지 끌고 와 인사를 시키겠다고 벼른 인물이 어찌 보통 인물일 수 있겠는가.

“허참, 저분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함께 있었단 말이냐?”

“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무례를 범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더불어 수차례의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도 밝히 지 못했다. 겨우 살았는데 다시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쯧쯧, 너희들은 오늘 운이 좋았다. 저분을 두 눈으로 직접 배견할 수 있었으니… 자손대대로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이야기지. 너희는 전설을 보고 전설과 함께 잠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이야기를 공유했으니까 말이다. 운이 좋다면 기나긴 전설의 한 켠에 이름을 올려놓을지도 모르지. 뭐, 오늘 일은 그렇게 되기에는 너 무 빈약하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여전히 동경과 선망이 반짝이는 소녀 같은 눈으로백 살 넘은 마귀할멈의 눈이 그렇게 변하니 그건 그것대로 상당히 공포스러웠다―혜월은 진소령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저분이 바로 현 무림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변화의 두 축 중 하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두둥!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직도 귓가에 남아 기억에 있는 목소리.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 자신을 보호해 주던 울타리가 된 두 팔.

“괜찮니, 꼬마 아가씨?”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아직도 기억의 한 켠에 남아 있는 거대하지만 따뜻한 그림자. 나무에서 떨어지던 어린 자신을 구해준 굳센 두 팔. 그것은 십 년도 더 전의 이야기. 그러나 그는 그때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백도와 흑도를 떠나 모든 이의 추앙을 받은 무림의 전설이자 신화, 강호의 구세주, 무(武)의 신(神).

“그, 그렇다면 저분이 바로 그……. 헉!!!”

“헉!”

찌링!

진소령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리고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선 채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얼음의 관은 백만 년이 지나도 녹지 않을 것 같았다.

***

혼돈의 추종자들이 질서에 전면적으로 완벽하게 굴복한 적은 유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없다. 그들은 어느 시대에나 매번 존재해 왔다. 바퀴벌레보다 더 끈질긴 생명 력을 자랑하면서. 상식적으로 봐서도 질서를 유지하는 것보다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쉽다. 질서의 유지가 조금 흐트러져도 질서는 바로 혼돈으로 돌변한다. 그만큼 이 만물유전의 세계에서 질서만큼 어색한 존재는 사실 없다. 질서를 찾고자 하는 것은 단지 불멸성을 거부하는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반발에 불과한 것일 까?

드디어 한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선 초립사내는 오른손으로 초립을 살짝 들어 올린 다음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 가득 히 우뚝 솟은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등 뒤로 석양과 함께 황혼이 밀려오고 있었다.

“여길 나간 나는 이토록 변했는데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구나…….”

사시사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자연의 본성일 텐데도 그의 눈에는 그날 그가 이곳을 나가면서 새벽의 여명 속에서 바라본 그때의 풍경과 똑같아 보였다.

다시 초립을 눌러쓴 사내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뗀 후 산의 품 안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이제 곧 목적한 곳에 도착한다. 어떤 또 다른 힘이 작용하는 것은 아 닐 텐데도 목적지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마음이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하고많은 길 중에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무리 불타께서 일체개고의 법문을 전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고(苦)라고 설파하셨다고 하 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운명을 주관하는 하늘의 부서가 있다면 항의 서한을 산더미처럼 전달할 용의도 있었다.

재수 옴 붙은 셈치고 그냥 돌아갈까? 자신의 마음이 내면에 뿌리내린 지워지지 않는 미련을 기반으로 급조해 낸 제안이긴 했지만 실로 매력적이 아닐 수 없었다. 자의식 깊숙한 곳으로부터 달콤한 유혹에 몸을 던지고 싶어하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분출되고 있었다.

편한 길은 언제나 달콤하다. 다만 가능성을 포기하기만 하면 된다. 희망은 그것이 지적하는 미미한 결과에 비해 언제나 보다 과한 괴로움을 강요한다. 수지타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사내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다가 멈추면 아니 간만 못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왜 갈 것도 아니면서 가느냔 말이다. 그 간 거리만큼 손해 막심이다. 그냥 출발조차 하지 않았으면 얼마든지 다른 목적지를 설정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이곳을 떠난 지도 벌써 몇 해인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사내는 황혼으로 덧씌워진 녹옥빛 세계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변했지만 자연은 그때 그대로 불변의 영원으로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유유하게 하늘을 떠다니며 푸른 하늘을 하얗게 가리는 구름 무리는 적었다. 광대한 자연은 무한했고 자신은 혼자였다.

그는 갑자기 고독을 느꼈다.

거느리고 있던 많은 이들이 죽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며 신뢰하던 맹우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없다. 자기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났다. 그를 혼자 남겨둔 채 오직 그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이들의 넋을, 신념에 불타던 그 의기를 평생 가슴 에 묻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 친구와 자신은 다른 길을 간다. 이 길이 언젠가는 하나로 이어지길 바라지만 그때가 과연 올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시야가 미치는 지평의 저 바 깥쪽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시간의 지평은 이제 그가 측량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초립사내의 입가에 처연한 웃음이 맺혔다.

현 상태로는 절대 다음의 위기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내는 팔십 년 전에 이미 깨달았다. 그의 상상력은 그렇게 빈곤한 축에 속하지 않 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데 매우 좋은 결과가 올 만큼 세상의 법칙 체계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신뢰하는 맹우와 함께 그 다음 백 년을 바라보며 장대한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의 허약했던 무림을 겁난에 대비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변화시키 기 위해. 그것은 체계적인 교육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을 실행할 의지와 각오와 능력이 겸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교육 기관이 강호에 그 모습 을 드러냈다.

천무학관과 마천각의 등장이었다.

강호의 질서는 이 두 개의 양 축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세계가 뒤바뀐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을 단련하고 남을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 본격적으로 숙고해 보기 시작했다. 이 이전에는 그럴 건덕지조차 없었으니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양(陽)만으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음(陰)만 있어서도 안 된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변화는 면면부절히 일어나는 것이다.

“씨는 뿌려놓았다. 남은 것은 그것들이 장대한 꽃을 만개하길 기원할 뿐.”

세상에 대해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자신의 일을 할 때였다. 원래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했는데 그는 그 과정을 역으로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전의 자신 역시 하나의 자기 극복을 이룩한 존재였지만 어차피 이 한계지평은 무한히 확장된다는 아주 얄미운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뛰어넘어야 할 때였다. 그는 그래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여겼던 이곳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숲이 열리며 태양이 자신을 반겼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흘러나왔던 원류에 도착한 것이다.

그곳은 아주 자그맣고 초라한 초옥이었다. 초옥에 비해 넓은 마당의 한 켠에 놓여진 탁상에 새하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손에는 술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맞은편의 잔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주거니 받거니 자작 중이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목이 탔다. 그러나 반응은 짧았다. “응? 너냐?”

그게 다였다. 노인은 다시 술병을 술잔에 기울였고, 넘치지 않을 만큼 찰랑찰랑 담은 다음 단숨에 목 안으로 비워 넣었다. 술잔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린 그대로였 다.

“예, 접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지금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사물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눈이 정작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다니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다시 사내는 왼손으로 오른 주먹을 감싸쥐었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그럭저럭 오랜만이긴 하구나.”

잠시 하나둘 손가락을 꼽아보던 노인은 이내 그 행위의 무의미함을 깨닫고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다른 손에 든 술잔을 놓을 생각은 없었고, 설혹 그것을 내려놓는다 해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거의 구십 년 만이니까요.”

“흠, 그랬냐?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구나.”

“벌써 치매십니까?”

“네놈이 자다가 이불에 오줌 싸고는 무서워서 덜덜덜 떨던 건 기억나는구나.”

“그런 건 망각의 저편에 흘려보내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면 밥 쫄쫄 굶고 꾀죄죄한 몰골에 어느 객잔 뒷문 앞 쓰레기통에 쓰러져 있었던 거라던가 말야.”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작 그 자신은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아니, 망각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해야 옳으리라. 자신이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사람 덕분이었다.

“웬일이냐? 우리의 인연은 이미 끝난 것으로 아는데. 아니면 죽을 자리가 필요한 거냐? 푼돈도 안 되는 장의사가 돼라고 강요하면 좀 곤란하구나. 죽을 자리라면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난 일없다.”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사내의 입가에 햇살을 머금은 듯한 엷은 미소가 서렸다.

“변함없으시군요, 스승님.”

정말 자신이 떠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 똑같은 행동이었다. 그 점이 가장 그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또 잊어버렸나 보구나. 뭐, 헤어진 지 꽤 오래되었으니 잊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이해해 주마.”

“…..”

“그러니 여기서 다시 한 번 수고스럽지만 네가 잊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주마.”

노인이 분명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네 스승이 아니다!”

그는 한때 무림의 정점으로서 신의 권좌에 올랐다고 칭해지던 사람이었다. 무신이라고까지 불리운 적도 있었고, 아직도 부끄럽지만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정점에 선 자는 무엇이 다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고금 미증유의 경지를 개척했다고 칭송되어지는 초인들, 고금 유일, 전무후무, 고금제일, 천하제일, 극한 의 경지에 도달한 자, 깨달은 자,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말해지는 역사상의 초인들이 느끼는 공통된 감각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신과 그가 얻은 것을 함께 나눌 벗이 없다는 데서 오는 고독감이고 또 하나는 이것이 아직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안다. 아니, 깨닫는다. 필연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완전하게.

이 위에 또 다른 단계, 또 또 다른 경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안다. 범속한 범인(凡人)들이 그들을 보고 끝이라 말할 때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광활하 게 펼쳐진 새로운 지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다음 단계를 볼 수 있다.

세계지평은 완결될 만하면 언제나 그 다음에 펼쳐지는 또 다른 존재지평을 지적한다. 그렇게 세계는 자신을 확장해 나간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존재의 세계는 끝이 없다. 세계는 결코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 공(空)의 허(虛)는 그 끝 자락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행인지 불행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리라.

이를 가리켜 진무한(眞無限)이라 한다.

***

회색빛 장삼을 몸에 두르고 창가의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노인의 고개는 천장을 향해 들려 있다.

“역시 그 친구는 자신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던가……”

지그시 두 눈을 감은 혁중 노인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제 속세에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단 말인가…….”

노인은 비감한 표정으로 이십 년 동안 묵묵히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봉해두었던 슬픔을 토해냈다.

직감적으로는 느끼고 있었다. 영혼과 의지를 함께 공유하던 유일한 지음(音)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친구가 남긴 후예들에게 확답을 받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려나? 이제 그의 유지는 자신 혼자서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박정한 친구…….?

세계를 혼자 짊어지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다. 허리가 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 짐을 함께 나눠 지던 친구는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다. 이제 자신의 옆 자 리는 언제나 텅 빈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염도와 빙검은 고개를 숙인 채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감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던 유일무이한 최고의 지음(知音)이 사라졌다. 이제 누구랑 벗하여 인생을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그가 느끼는 상실감을 실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곳에 서보지 않고서 함부로 떠드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자 오만의 극치일 뿐. 아무리 그 대상이 친구의 제자라는 특이한 위 치라 할지라도, 아니, 자신의 친혈육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절반이 소멸한 듯한 이 공허함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라.

“사인(死因)은?”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농담 따위는 사양이었다. 자신이 이토록 멀쩡한데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그가 수명이 다한 자연사일 리 없었다.

“잠시 나갔다 오시겠다며,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다며 한동안 긴 여행을 떠나셨다가 돌아오셨을 때는 이미…….”

“이미?”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고 돌아오셨습니다. 넝마처럼 찢어발겨진 가슴에는 거미줄 같은 미세한 혈선들이 무참하게 그분의 육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고 있었습 니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자 빙검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얼음처럼 차갑다는 평을 듣고 있는 그의 마음도 당시의 기억을 완전히 동결(凍結)시키지 는 못했다. 아직도 그는 그때의 악몽을 꾸고 때때로 잠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거미줄 같은 혈선? 설마 ‘그’인가?’

그러나 노인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가 이십 년 동안 얌전히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뭐라 하더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을 터였다. 그것이 지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이것은 자신이 원했던 일이라고…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 또한 각오했던 일이니 복수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수하지 말라고?”

“예.”

“그 녀석은 후회하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이것은 그 대가라고… 다만 아쉬울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라……. 너희들에게 남긴 심득(心得)이 있었겠구나.”

염도와 빙검은 품에서 반쪽의 거울을 꺼내 혁중에게 내보였다. 건곤조화경이었다.

“이것을 반으로 나누어 저희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셨습니다.”

“그 친구의 의지가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겠구나. 그리고 마음 씀씀이도.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인 후 노인은 염도와 빙검을 번갈아가며 한번씩 쳐다본 후 물었다.

“…그것이 합쳐진 적은 있느냐?”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있느냐, 없느냐?”

노인의 질책은 사부의 책망이 되어 그들의 심장을 후려쳤다.

“사부님……..

그들의 몸은 현재에 놓여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이 가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광경을.

그날 그들의 망막 안에 새겨진 그 광경은 장대한 세월의 격류에도 결코 씻겨 나가지 않을 터였다.

“너희들, 왜 우느냐? 슬프냐?”

***

사부님의 자상한 물음에 두 청년과 한 소녀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을 연신 훔치며 오열하고 있었다. 천신과도 같이 위대했던 사부가 지금은 차디찬 바 닥에 누워 있었다. 호흡이 거칠고 안색이 창백했다. 두 청년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들의 앞에 찬란히 빛나고 있던 태양의 불이 곧 꺼질 것이라는 것을. 황 혼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쉽긴 하지만 슬프진 않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팔십 년 전 그날부터 내 안에 심어진 시한폭탄이 터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십 년이나 살았으니 의외의 행운이라고 해야겠지. 덕분에 너희들도 만날 수 있지 않았느냐?”

“아빠, 돌아가시면 안 돼요! 엉엉!”

소녀가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했다. 소녀의 예쁘장한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에겐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사부는 간헐적인 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만 걱정이라면 너희 둘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영희야, 너는 너무 마음이 여리다. 눈물을 감출 줄도 알아야지. 철수야, 너는 언뜻 보면 이성

적인 것 같으나 때때로 불같이 화를 잘 내니 걱정이다. 둘 모두 이걸 받거라!”

품속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매끈한 청동거울이었다. 그 거울의 면에는 어떤 경문과도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줄 건 한 쌍의 도검과 이 거울뿐이구나. 철수야!”

“예, 사부님!”

양 볼에 흐르는 눈물을 지우지 않은 채 푸른 옷의 소년이 대답했다.

“나의 왼손과도 같았던 이 얼음의 속성을 지닌 보검 ‘빙백(魄)’을 너에게 주마. 내가 너에게 전수해 준 검술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희야!”

“예, 사부님! 저 여기 있습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에 범벅이 된 붉은 옷의 소년이 대답했다.

“너에게는 나의 오른손과 같았던 이 불꽃의 속성을 지닌 이 보도 ‘홍염(紅焰)’을 주마. 내가 너에게 전수해 준 도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사부님! 흑흑!”

“그리고… 소련아!”

“예, 아빠!”

“미안하다. 너에게는 줄 만한 것이 없구나. 대신 이 ‘옥소(玉簫)’를 너에게 주마. 너는 음률에 재능이 있으니 나보다 더 이것을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심심풀이로 가르친 검법을 응용하면 몸을 지키는 데는 문제없을 것이다.”

“아빠~ 돌아가시면 안 돼요. 절 두고 가시면 안 돼요.”

옥소를 받아 든 소녀가 울면서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하지만 위엄있는 목소 리로 말했다.

“철수와 영희는 듣거라!”

“예, 사부님! 하교하십시오.”

“이제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을 가르칠 수 없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너희들을 두고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너희와 나 사이에 이어져 있던 사제 간의 인연은 오늘로서 끝인 모양이다. 그러나 걱정이 하나 있구나. 너희들 각자는 내가 지닌 무공의 반쪽밖에 익히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겁난에 대비할 수 없다. 너희 둘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물과 불처럼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 점 이 걱정이구나. 나는 너희들에게 내 마지막 심득이 담긴 이 ‘건곤조화경’을 반씩 맡기려고 한다.”

사내가 거울을 잡고 조금 힘을 주자 거울이 각기 태극 문양으로 갈라졌다.

“음양(陰陽)이 태극(太極)에서 나왔지만, 그것은 여전히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건곤과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들은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하며 정진하도록 하거라. 그리고 언젠가 그 안에 담긴 심득을 체현할 수 있을 만한 자질을 지닌 인재를 만난다면 너희 둘이 함께 힘을 합쳐 그 아이에게 나의 심득과 너희들이 얻은 심득 전부를 전해주기 바란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너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강호에 나가면 너희가 누구의 제자인지 밝히지 마라. 또한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알려지게 하지 말거라. 아 직 나는 살아 있을 필요가 있다. 죽은 공명이 사마중달을 쫓아 보냈다더니… 나도 그 꼴이구나. 그 친구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게 되었어…….”

그의 입가에 씁쓰레한 고소가 맺혔다.

“나의 육체는 사라지지만 나의 정신은 남아 있을 것이다. 태극의……. 쿨럭쿨럭!”

심한 기침과 함께 또 한 번의 각혈이 이어졌다.

“사부님!”

“스승님!”

“아빠!”

“괜찮다. 나는 괜찮아. 잠시 성질 급한 친구가 날 재촉한 것뿐이다. 잠깐 정도야 뭐 문제가 되겠느냐.”

그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그의 호흡도 안정되어 있었다. 얼굴에 괴로워하는 표정도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는 무척 편안해 보였 다. 죽음의 안개가 그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나의 정신을 이어갈 자, 태극의 인재를 찾아라. 너희 둘이 힘을 합한다면 나의 정신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의 빛이 너희 대에 다시 한 번 찬란 하게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기원하마.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소련이를 부탁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무림의 가장 찬란했던 쌍성 중 하나가 떨어졌다.

절대라 생각했던 신이 죽은 것이다.

마침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노인의 입이 열렸다.

염도와 빙검은 고개를 가슴에 파묻었다.

***

“그런가? 한 번도 없었더냐? 그 녀석이 슬퍼하겠군..

노인은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둘에게는 어떤 비난보다도 가슴이 아팠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숨을 거두었다니 쓸쓸하지는 않았겠구나. 그만큼 너희들을 믿고 있었다는 이야길 게다. 자신의 의지를 반드시 이어줄 이 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

염도와 빙검은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들은 하늘 같은 사부님의 유지를 거역했던 것이다.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 았다. 상심한 불꽃의 열기가 비 맞은 모닥불처럼 시들해지고 비통함, 얼음의 투명함은 슬픔에 물들어 잿빛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하게 변했다.

그런 둘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흘겨보며 혁중이 말했다.

“쯧쯧, 뭐냐, 지금 그 힘없는 낯짝들은? 네 녀석들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직 후천기(後天技)밖에 익히지 못했겠구나! 안 그러냐?”

불꽃과 얼음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그것을 어떻게……?”

“뭘 그리 불똥 맞은 병아리마냥 화들짝 놀라느냐? 그 정도야 척 보면 삼천리인 것을.”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혁중이 대답했다. 그러나 염도와 빙검은 결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니,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들의 성취를 한눈에 알아보다 니……. 아무리 사부의 절친한 맹우라 할지라도 그들의 독문무공의 체계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서둘 러 경악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반쪽짜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러니 자네들이 아직 선천기(先天技)를 익히지 못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겠군.”

“서, 선천기까지 아신단 말씀이십니까?!”

눈이 튀어나올 만큼 경악한 후인데도 아직 더 경악할 것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두 눈은 조금 전에 경악하느라 이미 써버렸기 때문에 다른 걸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입이 쩍 벌어졌다. 턱이 빠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앞이 없는 뒤도 있단 말이냐, 이 상대계에서? 앞이 있으니 뒤가 있고 뒤가 있으니 앞이 있는 것 아닌가? 좌와 우가 한 쌍이듯, 음과 양이 하나이면서 둘이 아니듯, 둘이면서 하나이듯!”

태극신군의 절학은 알려져 있기로 ‘건곤태극무상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며, 엄밀히 따져서 정밀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절학이 지닌 가장 깊은 곳을 보여주는 이는 없다. 무림인에게 그것은 가장 큰 비밀이며 최후의 최후까지 감춰진 마지막 한 수이기 때문이다. 무공이란 것은 그 특성상 타인에게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오히려 해가 될 뿐 득이 될 건 없었다. 적에게 미리 대비하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생명의 위협과 고생이 좀 더 늘어난다는 것 이외에 말이다. 그래서 알려지는 것은 언제나 절학의 일부분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배운 독문무공의 최고 비 전에 속하는 ‘선천기’를 안다는 것은 공부(功夫)의 전체 상(像)을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상대 앞에서 벌거벗겨진 느낌을 받고서 좋아할 사람은 오직 변태뿐이었다.

염도와 빙검은 각각 염의 속성과 빙의 속성을 지닌 무공을 전수받았다. 그들은 사부가 바라던 그릇에 모자랐다. 그들은 ‘태극의 인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고 싹수가 노랗다고 내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천하오대도객은 사대도객으로, 천하오검수는 사검수로 이름을 바꿨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둔재였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 사부의 재능이 금세에 보기 드물게 너무 뛰어났을 뿐이다.

어쨌든 그들은 선천기를 익히기에는 아쉽게도 자질이 모자랐다. 그러나 그들의 사부는 그들을 내치는 대신 그들의 특성과 개성에 맞는 무공을 전수해 주기로 결정 했다. 그래서 이 둘은 이(離)와 감(坎)이 변화[易]의 중심을 이루는 ‘후천기’를 익히게 된 것이다.

하도(河圖)에서 나온 복희 팔괘도에서는 건(乾)과 곤(坤)이 음양의 두 축을 이루지만 낙서(洛書)에서 나온 문왕팔괘도에서는 음양의 중심, 즉 변화의 중심을 이 (離)와 감(坎), 즉 간단하게 말해 불과 물이 두 개의 축을 형성하게 된다. 하도는 체(體)의 세계이고 낙서는 용(用)의 세계이지만 복잡하니 넘어가고.

원래 후천의 변화(變化), 동(動)을 통해 선천의 무변(無變), 정(靜)을 깨달아가는 것이 ‘건곤일월신공의 수련 과정이었다.

양(陽)의 속성이 현상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이(離), 음(陰)의 속성이 현상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바로 감(坎)이었다.

‘이’와 ‘감’의 속성을 토대로 그 상(象)을 무리로 풀어낸 것이 바로 염도의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과 빙검의 ‘빙령수류검(氷靈水流劍)’이었다. 그러니 후천의 ‘양의(儀)’ 중 한쪽만 익힌 그들은 본래 위력의 사분의 일도 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후천기에서만 그렇고 선천기로 넘어가면 그 위력 차가 얼마나 될지는 추량조차 불가능하다.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하늘 같은 스승의 광휘(光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태산보다 높은 명성을 더럽히고 있는 자신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보라. 지금 자신들 의 형편없는 몰골을! 사부님의 유지를 계승하기는커녕 겨우 어린 소년의 제자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 저승에 계신 사부님을 뵙기가 두려워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죽은 다음에 저승에서 우연찮게 뵙기라도 하면 무슨 낯짝으로 감히 떠벌릴 수 있겠는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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