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검성을 죽여라!
용건은 짧고 간결했다. 그러나 말의 길고 짧음[長短]과 내용의 무게[輕重] 사이에는 어떤 비례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부복한 채 공손히 듣고 있던 청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마치 생명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검성(聖)을 죽여라!”
백 보, 아니, 한 천 보나 만 보 정도 양보해서ᅳ내키지는 않지만ᅳ언제 어디서나 시대를 막론하고 지극히 미덥지 못하게 평가되고 있는 개인의 자유 의지란 것에 전적으로 일임되어 있는 인간의 언행(言行)이란 것이 지닌 특성상 인간의 입에서도 이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폭언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는 빌어먹을 점까지는 이 해할 수 있다(이 시점에서 이미 만 보 정도 양보한 것이지만).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드리우는 그림자 역시 짙어지는 법. 천무삼성(天武三聖)쯤 되면 존경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반대급부로 증오하는 자들도 많다는 사실에 대 해 철저히 감정이 배제된 심경으론 이해할 수도 있었다(역시 내키지 않지만). 그만한 명성을 쌓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나 제물이 당연히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당하는 당사자들이야 자신들은 죄없는 희생양이라 바락바락 우기겠지만 그들 역시 남들을 제물 삼아 자신의 명성을 키운 사람들일 터였다. 어느 시대, 어느 때나 가 해자는 희생자가 되기 전까진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법이다.
각설하고, 검성의 살인 사주같이 끔찍한 것은 음습하고 끈적끈적하고, 귀기 어리고 사악한 마기(魔氣)가 너울거리는 어둠의 밑바닥에 둥지 틀고 있는 마두 소굴에 서나 나올 법한 말이지, 벌건 대낮 햇빛 쨍쨍하고 바람 산들산들하고 새싹이 푸릇푸릇한 오후에, 그것도 백도 정신 함양의 중심인 천무학관의 한복판에서 떠벌려질 만한 말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이보다 더 크나큰 중차대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필연의 결과인지 사주를 받아들이라고 종용받 고 있는 사람 본인의 성(姓)이ᅳ참으로 우연히도―모용(暮容)에 그 이름이 휘(輝)라는 것이었다. 상대는 인륜(人倫)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일어난 마음을 말을 통해 밖으로 무단 투기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여러 정황과 상식의 잣대로 미루어볼 때 친손자 본인에게 할 만한 이야기 는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상대라지만 천보, 만 보 양보해도 이 점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바라는 것은 전적인 복종과 순응이지 납득 이 아니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그의 세상이 넘실거리는 너울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약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곧바로 너울 아래 펼쳐진 어두운 심연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앞서 호흡을 조절해 육체를 진정시켰다. 빨라진 맥박, 아 직도 미약한 잔떨림이 가시지 않고 있는 사지(四肢), 그리고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식은땀. 마음의 혼란이 육신의 껍질 위로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였다. 그는 역 (逆)으로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호흡하며 그것들을 다스려 나갔다. 호흡이 안정되자 잔떨림이 가시고 이마에 맺힌 땀이 마르고 심장의 맥동이 제 운율을 되찾았다. 그러자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너울거리는 혼란의 파도도 약간은 진정되는 기미가 보였다.
그제야 비로소 모용휘는 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물론입니다!”
혁중의 물음에 모용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힘차게 대답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하나는 시원시원하구나. 너의 그 말만큼이나 행동도 시원시원하기를 바란다.”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등가(等價)의 의지와 각오가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바른생활 모범 청년이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역시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이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어떠한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느냐? 내가 시킨 일이라면 뭐든지 따를 각오가 정녕 되어 있느 냐? 어떤 의심도 없이? 어떠한 명령이라도?”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노인이 되물었다.
“예, 죽으라고 하시면 죽을 것이고 살라고 하시면 살겠습니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도 감내하겠습니다.”
요즘만큼 절실하게 강함을 열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의 의지는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비장한 대답에 노인은 위압적인 기세를 거두고는 너털웃음 을 터뜨렸다.
“허허, 내가 너보고 죽으라고 할 리가 없지 않느냐? 정작 강해져야 할 본인이 죽으면 난 누구를 가르쳐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렇게까지 비
장하게 대답하니 그에 걸맞는 각오를 보여줬으면 한다.”
말은 보여질 수 없다. 보여질 수 있는 건 오직 행동뿐이다.
“너보고 죽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별거 아닌 일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각오도 없다면 애당초 시도하지 않는 게 낫 겠지?”
“하명해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모용휘의 두 눈에서 의지의 불꽃이 번쩍였다.
“여전히 망설임이 없구나.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니 믿음직스럽구나. 좋아, 좋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겠느냐? 넌 딱 한 가지 일 만 하면 된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노인의 입이 움직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순간 절망의 선율에 맞춰 공포가 춤추며 내려왔다.
-검성을 죽여라!
모용휘는 노인이 내뿜는 영혼마저 압도할 듯한 태산 같은 기세에 짓눌려 짧은 반문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선천적인 벙어리도 아닐진대 혀와 입이 마비된 듯 하고 싶었던 말은 가슴속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할 뿐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했다.
―죽여라[殺]… 죽여라[殺]… 죽여라[殺]….…….
누구를? 검성을? 누구를? 자신의 조부를? 누구를? 자신의 우상을? 누구를? 자신의 신(神)을……?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화두. 그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이면서도 전율스럽고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노인의 말에 언령(言靈)이라도 깃들어 있는 것일까? 언령의 조화 에 사로잡혀 모용휘는 심신이 옭아매이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노인의 말은 자신에게 있어, 모용휘라는 한 존재에 있어 최대, 최고의 금기(禁忌)를 건드리는 말이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그런 길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지금 수라의 길 위에 서 있단 말인가?
새삼 자신이 얼마나 험난한 길에 들어섰는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과 사지의 끝을 미친 듯이 두드리는 전율과 쿵쾅쿵쾅 미친 듯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의 고동 속에서 그는 자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농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농담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노인은 틀림없이 모용휘에게 검성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눈빛과 그 말투는 분명 농담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 에게 검성을 죽일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모용휘는 자신의 내부에 불타고 있던 열정이 싸늘하게 식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의지의 탑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쉽게 맹세의 말을 내뱉은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여전히 망설임이 없구나!
이미 과거로 흘러간 말의 잔향이 그의 귓가에서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애에서 가장 큰 고민을 떠안은 채. 생각도 없이 무심코 말을 내뱉었던 자신의 입이 그는 원망스럽기만 했다.
ᅳ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마음 밖으로 내던져진 말이 그를 속박하고 있었다. 말을 번복하고 싶었지만 아교라도 붙은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법은 맡기겠다!”
혼란에 휩싸인 청년을 일별한 후 노인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쾅!
멍한 눈을 한 채 완전한 방심 상태에서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모용휘는 멍하니 노인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나뿐인 출구가 닫히는 그 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마치 어디로도 도망갈 구멍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듯이.
“쯧쯧, 할아버지, 나잇살깨나 잡수신 분이 너무 짓궂으신 거 아니에요? 과연 그걸 저 바른생활 도련님이 해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완전한 망실 상태에 빠진 모용휘를 내버려 둔 채 무심하게 방을 나서던 혁중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아, 자네였나?”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팔짱을 낀 채 문가에 기대서서 흥미롭다는 듯이 씨익 미소 짓고 있는 자칭 의문의 천재 미소년 비류연이 있었다. 자칭 우주제일의 미소 년이 물었다.
“방금 죽이라고 말했던 검성이라는 분 말입니다. 저 친구의 친할아버지 아닌가요?”
“무림에 그 사람 말고 또 다른 검성이 있었더냐? 노부로서는 금시초문이네만.”
“흐흠, 확신범이란 말이군요. 아, 난 또 혹시나 다른 사람인가 했죠.”
“아니, 노부가 미쳤나? 저 아이에게 검성 이외의 다른 사람을 죽이라 하게? 그렇게 해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나?”
어라? 그럼 안 미쳤단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강호인이라면 백이면 백 누구나 그렇게 반문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도 목숨이 아깝지 않거나 무지의 칼날을 휘두르는 자에게만 허락된 묘기이지만.
“하긴 그렇군요. 검성 이외에는 의미가 없다 그 말이죠?”
비류연은 노인의 비도(非道)를 비난하기는커녕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혁중의 얼굴에 약간 의외인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 정말 이해가 빠르구먼.”
확실히 탐나는 놈이다.
“일단 천재니까요.”
저런 점만 빼면.
“흠, 그랬었나?”
이번에는 이쪽이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부가 요 얼마간 계속해서 이곳에 머무르며 면밀히 지켜봤네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인정 안 해주는 것 같던데?”
그러자 비류연은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쯧쯧, 우매한 범인들에게 인정받으면 어디 그게 천재인가요? 그건 그냥 수재이거나 사기꾼인 거죠. 애당초 천재를 재는 도구로 범인의 잣대를 이용한다는 게 어 디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다른 데 가서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씀 하덜 마세요. 다들 노망난 줄 압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비류연이 말했다. 본인 스스로는 정말로 한 점 의혹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건 아주 극단적인 의견이로군.”
저토록 젊은 나이에 저토록 뻔뻔할 수 있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과격 무식해 보이는 그 의견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네그려.”
노인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말만 되는 게 아니라 그게 진실이죠. 옛날부터 대중들과 지배자들은 천재들을 안 좋아했어요. 그들이 좋아하는 건 천재와 성인(聖人)의 시체뿐이라구요. 자신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포장할 수 있는.”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실이었다. 예로부터 성인의 시체는 언제나 지배자와 각종 종교 조직의 배를 불려왔다. 죽은 자는 언제나 말이 없는 법이란 말이 꼭 살인멸구 (殺人滅口)할 때만 쓰이란 법은 없다. 아마 돌아가신 옛 성인들도 자신의 시체를 쪼아 먹으며 배를 불리는 까마귀들의 존재를 안다면 자다가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 나시리라.
그 부분은 노인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비류연이 천재가 아니냐란 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 굳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논쟁하고 싶지는 않았다. 노인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자네는 노부가 너무하다고 생각하나? 이런 날 비정하다 비난할 텐가? 하지만, 저 아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그 정도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고난의 길일세. 자신 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없으면 안 돼.”
“아뇨.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해요. 지금 저 녀석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니까요. 우회해서 넘을 수 있는 장애물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순간 노인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준 종자기를 만난 백아의 심정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자네 정말 천재일지도 모르겠구먼그려.”
혁중이 감탄하며 말했다.
“일지도가 아니라 ‘이다’라니까요. 믿어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란 말도 못 들어봤어요?”
“못 들어봤네. 그거 어디 건가?”
혁중이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부정한 다음 되물었다.
“글쎄요. 나도 언젠가 성질머리 나쁜 늙은이한테 들은 거라서요. 출처 미상이라 해두죠.”
이번에는 비류연이 말을 돌렸다.
“하지만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대의 금기이자 침범해서는 안 될 성지(聖地)이자 금역(禁域)일 텐데요? 과연 자신이 디디고 있는 세계를 스스로 부정할 수 있을까요?”
검성을 죽인다는 것은 모용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기 때문에라고 해야 정확할까? “스스로 못할 것 같으니까 노파심에 바람 넣어주는 것 아닌가? 그 성역을 진흙 발로 짓밟고 금역의 결계를 부수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지. 지금 저 아이가 가야 할 곳은 그런 곳일세.”
“만일 실패하면요? 그럼 그대로 포기?”
지금으로서는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함부로 포기란 말을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가? 여기서 내기를 해보지 않겠나?”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은근한 어조로 노인이 운을 띄웠다. 같은 눈높이를 지닌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이 답답한 세상에서 꽤나 상큼하고 신선한 경험인 것 이다.
“내기라……. 그건 참으로 갑작스런 제안이네요. 게다가 꽤나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하게 들리는데요?”
“왜, 관심없나?”
비류연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관심없긴요.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흥미롭기까지 하네요.”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서운 인간들이다. 강호의 초거물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천무삼성의 일인인 검성의 죽고 사는 문제 따위는 이 두 사람에게 그저 한낱 내기거리밖에 되지 못한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노소(老)는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신경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다면 이딴 식으로 막가는 사고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저 방 안에서 고뇌하고 번뇌하고 있는 모용휘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런 불량아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는 게 젊고 싱싱한 청춘을 낭비하지 않고 순탄하고 평범하면서 지루한 인생을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비류연 역시 씨익 웃어 보였다. 혁중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뜸 들이지 말고 태도를 확실히 하게. 자네는 저 친구가 그걸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내기를 한번 해보잔 말일세. 자네의 예언이 맞을지 틀릴지 말일세. 이건 대결이네. 자네와 노부 둘 중 누가 더 넓고 심도 깊고 정확한 전망을 지니고 있는지, 누가 더 정확하게 오는 현재를 미래에서 기다릴 수 있는지 말일세. 시간을 거스르는 것, 수왕자(數往者) 순(順), 지래자(知來者) 역(易)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별 뜻 없이 내뱉었던 노인의 마지막 말은 비류연의 묻어두었던 기억을 자극해 버렸다.
“천지정위(地位), 산택통기(山澤通氣), 뇌풍상박(雷風相薄), 수화불상사(水火不相射), 팔괘상착(八卦相錯), 수왕자(數往者) 순(順), 지래자(知來者) 역(易), 시 고역(是故易), 역수야(逆數也)!”
비류연의 입에서 무의식 중에 경문이 흘러나왔다.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하늘[乾]과 땅[坤]이 바로 서고, 산[艮]과 호수[兌]가 서로 기운을 주고받고, 벼락[震]과 바람[巽]이 서로 부딪치며, 물[坎]과 불[離]은 서로 다투지 않으니 이로써 팔괘(八卦)가 서로서로 뒤얽히며 변화를 일으킨다. 알겠느냐?”
“뭘요?”
뻑!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절대 휘도(輝度)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명랑쾌활하던 어조도 조금 침중해졌다.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 삼장에 나오는 말이군요.”
가는 것을 세는 것은 순(順)이라 하고 다가오는 것을 아는 것은 역(逆)이라 한다. 그래서 역(易)이라는 것은 거꾸로 수를 세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쉽게 말해서 시 간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순(順)이라는 것이고 미래의 한 지점에 미리 가서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거스르는 것, 즉 역(逆)이라고 한다는 것 이다. 수를 거꾸로 센다는 것[逆] 역시 같은 의미이다. 사태에 순종하면 그냥 휩쓸려 흘러가는 것이고 미리 가서 오는 것을 예측하고 있으면 흐름을 주도할 수 있
다. 능동이냐 수동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도 저도 역(易)에 대해, 변화의 규칙성에 대해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 “으잉? 어라? 자네, 그런 것도 알았나?”
비류연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성질 고약한 누구 땜에 싫어도 억지로 익혀야 했죠.”
-변화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탐구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진정한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이냐? 너, 미쳤냐?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그런 어둡고 칙칙한 기억에 자꾸만 사로잡혀 있으면 정신 오염도가 지나치게 높아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밝은 미래의 조감도를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허허! 자네는 처음엔 별거 아닌 것 같더니만 보면 볼수록 노부를 놀라게 하는구먼. 최근(?) 수십 년을 통틀어 이토록 연속해서 자주 놀란 적은 요즘이 처음이라 “네.”
이번에야말로 혁중도 진짜로 놀라고 말았다. 방심하는 와중에 의표를 찔리고 만 것이다. 이해하길 기대하지 않았던 혼잣말이 이해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끔 당황하 게 되는 법이다.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이라도 거기까지 공부하는 이는 지극히 드물었다. 일류, 혹은 절세라 불리는 모든 무공이 일음일양(陰陽)의 도(道)에서 벗어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이 변화의 극치인 역(易) 에 대해 무지하다. 가장 핵심적인 정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기반 위에 세워진 무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사람들의 그런 무모한 태도를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알고 또 이해하고 있다면 좀 더 이야기하기가 쉽겠구먼. 주절주절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일세. 그게 아주 귀찮단 말이지. 또 사실 재 미도 없어요. 지루하거든. 듣던 상대가 딴청을 피우면 양반이고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지. 그래서 대부분 무시하고 넘어가 버리게 되는데 그럼 또 대화가 안 돼버리 거든. 서로 이해하고 있는 기반이 다른데 어떻게 그 사이에서 제대로 된 대화가 나올 수 있겠는가? 안 그런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간의 거리를 인식하고 대화를 포기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이해를 시도하려는 사람은 정말로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 라 할 만할 것이다. 아니면 그냥 바보이거나.
“그렇죠. 이해합니다.”
자신도 기존의 상식의 틀에 사로잡힌 녀석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력과 폭력(?)을 사용했어야만 했던가. 인간 상호 간의 이해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불가능에 대한 인간의 장대한 도전임에 틀림없었다.
“누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지 그 시야는 항상 갈고닦아야 하지. 거기에 실전만큼 좋은 건 없지 않겠나? 인간은 약간의 긴장감이 더해지지 않으면 집중을 잘 못 해요. 미지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던질 용기가 필요하다 그 말씀이지.”
비류연이 장황한 노인의 말을 단 한 줄로 요약했다.
“그러니까 누가 더 용한지 한번 붙어보자는 말이군요?”
누가 거꾸로 수(數)를 더 잘 세는지 한번 겨루어보자는 뜻이었다.
“거러췌! 화끈하게 말이야!”
노인이 두 팔을 활짝 펴며 맞장구쳤다.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었다. 품위는 잠시 황야에 내던져 놨는지, 벌판에 방치해뒀는지 장난기가 가득한 맑은 눈을 똘망똘 망,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노인의 정신은 세월과 나이를 이미 뛰어넘은 모양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아까 자칭 천재라 하지 않았나? 예언의 적중률이야말로 천재의 증거라네. 천재란 인종은 때때로 자기 발밑은 못 볼 때가 있지만 보통 사람이 절대 볼 수 없는, 그 리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훨씬 아득하고 까마득한 앞을 바라볼 수 있거든. 주어진 현실의 것을 깨작깨작 잘 만진다고 천재가 아니라네. 게다가 이건 그리 먼 곳을 내 다보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 정도도 못해서야 부끄러워서 어찌 감히 천재의 간판을 내걸겠는가. 안 그런가, 자네?”
확실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도전이었다. 네가 진짜 천재라면 한번 그것을 증명해 보라는 이야긴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흐흠…….?
99
그러나 마음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해서 당장에 그 의견을 수락해야 할 필요는 없었기에 비류연은 짐짓 고민하는 척 팔짱을 낀 채 딴청을 부렸다. 자신이 타인의 의 도에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어허, 밥 다 된 지 언젠데 아직도 이리 오래 뜸을 들이나? 자네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네. 그 말 노부가 안 꺼냈으면 자네가 먼저 꺼냈을 거라는 걸 모를 줄 아나? 선수들끼리 그러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은근하면서도 전의를 자극하는 고단수의 도발이었지만 비류연은 넘어가지 않았다.
“선수라니요?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저 같은 선량한 학생은 승산을 운에 맡기는 위험한 도박에 함부로 발을 들이밀지 않는 법입니다.”
비류연이 아닌 몇몇 사람들이 들었으면 기가 막혀 피를 토하고 말았을 만큼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였다. 물론 스스로 상식인을 자처하고 있는 노인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자네가 아니면 또 어디 가서 자네만한 내기 상대를 고르겠나? 이런 내기도 서로 눈높이가 맞아야 재미있는 것 아니겠나?”
노인이 사정했다.
“그렇게 말하시는데 더 이상 뺄 수는 없겠죠.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마지못해 응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류연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뒤로 엉덩이를 빼는 척했지만 사실 바라던 바였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아직 내 기에서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그럼 걸게나!”
혁중 노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침내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친족 살해의 음모에 가담할 뜻을 내비쳤다.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방조하면 역시 공 범이 되는 걸까? 그 또한 매우 흥미로울지 모른다.
“좋습니다!”
비류연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노인이 물었다.
“어디에다 걸겠나?”
내기의 제안자로서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의미였다.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밑져 봐야 본전이라고, 전 저 친구가 검성을 죽일 수 있다는 데 걸죠.”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역시 보통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잔뜩 지어 보이며 자신보다 적어도 백 살(!)은 어릴 새파랗게 젊고 맹랑한 청년을 쏘아보았다. 약간 눈에 힘을 줘서 쏘아주었는데도 비류연은 태연작약하기만 했다. 작금의 강호에서 이 노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만일 그 사실 을 안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지 않고 답례를 보내주는 비류연의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 위업의 가치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여유로운 태도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손해 보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역전 노장은 그런 허장성세에 넘어가기에는 쌓아놓은 경험치가 너무 높았다.
“난 자네가 손해를 본다는 말을 어째 신뢰할 수가 없구먼. 믿기지가 않아. 아니, 절대 안 믿네.”
“나이가 들면 의심병만 는다더니… 좀 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라고요.”
누가 뭐래도 비류연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허공 중에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만 보아도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부족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면을 튼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비류연이란 인종을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늙은 생강이 맵긴 더 매운 모양이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할 수 없군. 장유유서의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진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좋네, 노부는 그럼 그 아이가 검성을 죽이지 못한다는 쪽에 걸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내기가 성립된 거라 봐도 되겠나?”
“물론이죠.”
검성의 목숨이 한낱 도박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무림의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는 천무삼성의 명성이 참으로 알 수 없는 곳에서 모진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무림공적으로 삼기 딱 알맞은 말이었다. 검성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그래,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말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무얼?”
“판돈!”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긴 앞머리의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비류연이 혁중과의 내기 수립을 막 확인하고 있을 때 그의 애매인 우뢰매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우아하게 허공을 한 번 선회한 후 매끄럽게 하강하더니 힘차게 뻗은 두 날개를 펄럭이며 바람의 왕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비류연의 팔목 위에 앉았다. 우뢰매의 발목에는 전서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답장이 돌아온 것이다. “예상보다 빠르군.”
약간 의외인 얼굴을 하며 비류연이 중얼거렸다.
“그건 또 뭔가?”
노인이 주름살 곳곳에서 묻어 나오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전서를 한 번 훑어본 비류연은 다 읽은 서찰을 접어 품 안에 넣으며 말했다.
“그냥 개인적인 사업입니다. 노인께서 관심 둘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죠.”
“흥,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네. 숨기고 싶은 비밀을 캐내는 취미는 없으니 말일세.”
혁중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만일 이 노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 중에 이 광경을 목격한 불행한 이가 있다면 그는 경악과 공포로 얼어붙고 말았을 것이다. 심한 경우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할 수도 있었다.
“가볼 곳이 생겨서 이만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겠습니다.”
“대단찮은 편지 하나 나눠 읽지 못하는 사이에 뭘 거창하게 석별의 정씩이나 나누나. 그래, 이 늙은이를 제쳐 놓고 재미 많이 보시게.”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비류연의 마음은 이미 금강불괴지경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라 그는 반격까지 감행했다.
“그럼 다음에 뵐 때는 제가 승리하는 날이 되겠군요. 그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기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비류연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등을 노인은 유심히,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 봤다.
“누가 저런 괴물을 키웠을까?”
풀리지 않는 의혹은 안으로 안으로 무수한 의문의 문양을 수놓으며 점입가경으로 꼬여가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