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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7권 5화 – 회담

회담

-빙검, 마진가를 만나다

화산규약지회가 대소동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엄청난 방화 사건으로 끝난 이후 철권 마진가는 하루도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현재 사건의 발단이 된 주모자 대 공자 비라 불리는 인물과 공범으로 추정되는 그 일당 마천칠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전 무림의 정보망이 전력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 전체에 긴급 수 배령이 돌았음에도 아직 흉수의 종적은 깊은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듯 오리무중이었다. 천무학관의 관주 직속 정보 조직인 ‘비영전(秘影殿)’도 초과 근무 와 상시 야근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었다. 비영전주 암약(暗躍) 이하 전 대원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아니, 직위상 타 정보 조직보 다 몇 배의 과중한 업무를 견뎌내야만 했던 것이다. 슬슬 죽어가는 곡소리가 심심찮게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천무봉 홍매곡이 불꽃에 휩싸여 재가 된 ‘홍매화’ 이후 벌써 수개월. 음모의 실마리를 풀 단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음모 준비 과정부터 진행, 사건 발발 후의 도주와 잠적은 실로 너무나 완벽해 오히려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지간한 등급의 조직으로 이런 일은 절대 불 가능하다. 강호에 퍼져 있는 눈[眼]은 일반인의 상상 이상으로 많고 다양하다. 강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괜히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 눈들을 모두 피했 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배경이 그들을 지원하지 않는 한 이런 말끔한 뒷수습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홀홀 단신으로 호수 속에 빠진 투명한 얼음 조각처럼 감쪽 같이 자신의 종적을 감출 수 있을 만큼 강호(江湖)는 만만한 세계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조직이 많을 리가 없었다(뭐, 그들 스스로 밝히기도 했지만). 백 년 동안 잠적한 채 무림을 좀먹고 있는 암적인 존재. 그들이 아니라면 이처럼 섬뜩할 정도로 매끈한 끝마무리가 가능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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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와 뒷수습에 대한 한 단면만 봐도 그들이 화산지회의 음모에 대비해 얼마나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만일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쓸 만한 재목이 되는 데 이삼백 년은 기본으로 걸리는 나무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인간 역시도 한 명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천무삼성을 필두로 한 현 무림을 지탱하는 대들보들과 무림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젊은 재목들이 저주스런 붉은 화염에 휩싸여 검은 숯이 될 뻔했다. 강호의 현재와 미래가 단 한순간에 싸그리 날라가 버렸을지 모를 일대 위기 상황이었던 것이다. 흉수들은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보란 듯이 화려무쌍하게 저질렀건만 이쪽은 아직도 그들의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그림자만 뒤쫓고 있었다. 초조함과 불안감과 과로로 인해 정신과 육체 모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성과는 감감무소식이라 다들 지쳐 가고 있었다.

철권 마진가는 오늘도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다. 지금 집무실 내에 쌓여 있는 흉수의 배후와 그 목적에 관련된 보고서만도 수천 종에 달 했다. 서류가 모두 무너진다면 아무리 천하의 고수라도 맥을 못 추고 질식사하고 말 것 같았다. 사실 그전에 정신적으로 압사당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말이다. 서 류 처리에 필요한 체력과 무공을 구사하는 체력은 서로 전혀 다른 별개의 힘임이 틀림없었다. 수(水)와 화(火)처럼 완전히 속성이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 했다. 수십 명의 적을 상대한다 해도 삼 일 밤낮을 맑은 정신과 넘치는 내공으로 능히 대적할 수 있었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의 무덤과의 싸움에서는 하루 밤낮 만으로도 기력이 쇠하는 것이 몸으로 바로 느껴졌다. 그때마다 잠시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면 글자와 종이의 색이 한데 뒤섞이면서 눈앞이 회색으로 변하 고 만다. 물론 그 안의 내용은 잿빛 혼돈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그에게는 이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 걸맞게 천무학관의 제반 운영 상황에도 관여해야만 했다. 그리고 몇몇 특수한 부분에 대해서는 친히 살펴보고 결재를 해야 했다. 지난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해본 적이 없는 몽롱한 머리를 쥐어짜내어 하나의 긴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게다가 보모도 아닌데 아랫사람들까지 어르고 달래줘야 할 실정이었다. 뭐, 그쪽이 자신의 직속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처량한 마 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요즘 같아서는 파업이라도 하고 싶다고요~”

막 푸념을 늘어놓고 있던 사내의 목소리가 딱 멈췄다.

“응? 손님이 오신 모양이로군요.”

문밖 일 장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과연! 마진가는 내심 감탄했다. 보통 십 장 밖에서도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이었다. 아무리 피곤에 절어 있는 빈사 상태라지만 겨우 일 장 밖에서야 가까스로 인기척을 감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은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는 용담호혈(龍潭虎穴)인 이 천무학관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뭐, 그것도 다 무의식 중에 행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와 같은 초일류고수에게 그런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숨기고 싶어서 숨기고 드러내고 싶어 드러내는 게 아니다. 수천, 수만 번에 걸친 반복 수행 끝에 체득(體得)된 깨우침이 무의식 중에 녹아들어 생활 속에서 미세한 행동 하나하나에 깃들어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무인은 비로소 초일류 라 불리는 절정의 고수로 거듭나는 것이다.

“들어오시게.”

상대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마진가가 말했다. 방문객의 손이 문지방에서 실 한 가닥만큼의 틈새를 남겨놓고 뚝 멎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관주님!”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들이 내비치는 햇살을 등 뒤로 깐 채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약간 푸른 기가 감도는 청은(靑銀)의 은발, 눈처럼 새하얀 비단 무복, 허리에 걸린 주인을 닮은 시리도록 푸른 한 자루의 검, 그리고 얼음처럼 차갑고 조용한, 그러면서도 완고한 눈빛. 방문자는 바로 대무사부 빙검(劍) 관철수였다. 그는 관주의 호출을 받고 천주전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한창 바쁠 텐데 번거롭게 불러내서 미안하네, 관 사부.”

철권 마진가는 자신의 지위와 나이가 비록 빙검보다 높았지만 결코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빙검 관철수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물 론 사회적 지위와 나이 따위로 압박한다 해도 통하기는커녕 경멸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검 하나로 천하오검수의 한 사람이 된 그는 예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 다.

“자자, 얼른 편하게 앉으시게나.”

마진가가 한 손으로 방금 작업 중이던 명부를 덮으며 자리를 권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무언으로 답하던 빙검의 시선이 흘끗 그 명부의 표제로 향했다.

..예상 명부.

본 적이 있는 명부(名簿)였다.

“이런 때인데도 학관에서는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인가?’

빙검으로서는 약간 의외의 일이었다. ‘그 일’은 당연히 취소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시기상으로 보나 환경상으로 보나 여러모로 ‘그 일’을 진행하기 에 적합하지 않았다. 억지로 진행한다 해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빌어먹게도 그랬다.

빙검의 미심쩍은 시선을 눈치챈 마진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것 말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곧 그 시기가 아닌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할 수도 없고 또 남에게 떠넘길 만큼 가벼운 일도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싸매고 있다네.”

어차피 일급기밀이라 해도 대무사부의 지위를 가진 빙검은 그것을 열람할 자격이 있었다. 하물며 이것은 일급 축에도 못 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화산규약지회의 일도 아직 채 수습되기 전입니다. 어느 것 하나 명확해지지 않은 이 시기에 아이들을 그쪽으로 보낸다는 것은……. 그들 은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빙검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잘못하면 큰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진심을 어느 정도 숨 기고 말을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외교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도록 자신을 감추고 상대를 드러나게 하는 게 목적인 것이다.

마진가 역시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솔직히 본인도 그들이 미더운 것은 아닐세.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없어. 그 증거가 잡히기 전에는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 가… 저쪽에서 계속 진행할 것을 강력히 희망해 왔네. 위협에 굴복한 듯한 인상은 주고 싶지 않다고 말일세.”

화산규약지회와 마찬가지로 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전통이었다. 백 년의 전통을 심증만으로 때려부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위험에 직접 노출될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마진가가 원하던 반문이었다. 사실 그가 빙검을 부른 용건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함께 가주었으면 한다네.”

“제가 말입니까?”

“그렇다네. 하지만 걱정 마시게 도와줄 사람을 확실히 붙여줄 테니.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라네. 또한 강하고!”

“설마…….?”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화산규약지회 때도 힘들게 했는데 또 수고를 끼치게 돼서 자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요.”

타인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더 많은 권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권력은 그에 대한 사소하고 부가적인 대가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책임은 방기하고 권력은 남용한다. 그런 것들을 가리켜 ‘인간’이라 쓰고 ‘쓰레기”라고 읽는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이번에 염도 노사도 함께 갑니까?”

제발 아니기를 빙검은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예상이라도 한 듯 마진가는 그의 기대를 무참하게 깨부숴 버렸다.

“물론이네. 두 사람은 둘도 없는 단짝 아닌가? 바늘이 가는데 실이 어찌 안 갈 수 있겠는가?”

빙검은 순간 ‘노망나셨나요?”라고 말할 뻔했지만 예의와 체통을 생각해 가까스로 참았다. 착각도 이만하면 중병이었다.

‘…아니면 설마… 알고서도 일부러 그러는 건가?”

빙검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이었다.

항상 냉철한 그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염도와 일이 얽히면 항상 평정이 무너지고 만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리라.

“알겠습니다. 이미 내정된 것을 제 개인의 호불호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내키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으면서 그렇게 쑥쓰러워할 것 없네. 친구란 좋은 것이지. 특히 생사를 함께한 전우만큼 든든한 존재는 없지 않은가. 안 그런가?”

마진가가 웃으며 빙검의 염장을 후벼 팠다.

‘친구? 전우?”

오늘따라 익숙한 이 단어들이 굉장히 생소하게 들렸다.

좋긴 뭐가 좋단 말인가? 골이 지끈지끈해진 빙검은 천주전을 나가는 즉시 신의(神醫)를 이쪽으로 보내 검진을 받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반드시. 역시 지나친 과 로는 육체는 물론 정신 건강의 적이었다.

“몸조심하십시오.”

빙검이 걱정스런 마음으로 충고했다.

“어… 어, 고맙네.”

뜬금없는 걱정에 마진가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맥락으로 돌아왔다.

“나도 자네 둘이라면 믿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을 것 같네. 본인 역시 그쪽 마천각 쪽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나?”

사실 마진가 역시 학생들이 걱정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폐증 환자처럼 골방에 처박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비단 의심스러운 곳은 그곳뿐만이 아닙니다.”

심각한 얼굴을 한 빙검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심스러운 곳이 또 있다?”

빙검은 신중한 얼굴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게.”

턱을 괴고 있던 마진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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