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양표국의 운명
-비류연, 중양표국을 방문하다
“엥? 저건 또 뭐야?”
이제 이 바닥에서도 제법 관록이 붙은 중양표국 남창지국 선임표두 허상두는 오후 정기 순찰 중이었다. 그는 순찰을 꽤 좋아했다. 표국의 운영 상태가 신경 쓰여서 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정당하게 과시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 을 즐기는 속물이었다. 속물이기 때문에 위는 절대 쳐다보지 않았다. 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아무렇게 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저 앞으로 정문을 지키는 보초 표사들의 모습이 그의 야비하게 희번뜩이는 눈에 포착되었다. 뱀 을 만난 개구리처럼 움츠러드는 부하들의 모습에 언제나처럼 묘한 희열을 느끼며 그는 토끼를 사냥하는 늑대처럼 악의 서린 송곳니를 번뜩이며 어슬렁어슬렁 정문 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는 이곳의 열 명밖에 안 되는 표두 중에서 최고참으로 표행 경력만 해도 백 회가 넘는 숙련자였다. 몇 년만 더 고생하면 대표두로 승진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그의 부하들에게는 악몽이겠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 나름대로 기연이란 것을 만난 이후 실력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 이곳 남창지국에 상주하는 대표두는 한 명뿐이 었으니, 선임표두의 직위를 지니고 있는 그는 이곳 남창지국의 실질적인 삼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표국의 성세가 날로 상승하며 덩달아 그 역시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왠지 덩달아 대단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대단하신 삼인자 양반의 거만한 눈에 허름한 흑의에 병기도 휴대하지 않은 수수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애송이 따위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감히 자신의 즐거운 과시 행보를 방해하다니! 자신의 앞을 막아선 건방진 애송이에 대해 분노 가 치밀어 올랐다.
“여긴 애들 노는 곳이 아니다! 얼른 저리 가라! 쉬쉬!”
게다가 머리카락 하나 제대로 정리 안 하고 사는지, 길게 자란 앞머리가 참으로 꼴불견이지 않은가!
“쯧쯧, 꼬락서니하고는!”
이럴 땐 약간 겁을 줘서 쫓아내는 게 최고였다. 허상두가 눈짓으로 신호하자 문지기 둘이 재빨리 창을 정면으로 내려 아직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는 청년의 눈 앞에 겨누었다. 눈치 하나는 재빠른 부하들이었다.
“멈춰라! 웬 놈이냐? 선임표두님의 말씀이 안 들리느냐?”
창을 꼬나 든 문지기의 외침에 비류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반말이란 말인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이 이런 무례한 취급을 당해도 되는 타당성에 대해 다방면으로 검토해 보았다.
가장 하찮게 쓰이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진부하니까. 혹시 등 뒤에 있는 배경이 자신의 무례를 감싸줄 수 있을 만큼 두텁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직장에 대한 찬미도 좋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먼저 배양해야 할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어린 아무에게나 반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며 보내는 인간들을 그는 바 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이 봐왔다. 자신이 뭐가 아쉬워서 뭣 때문에 사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인간에게 반말 같은 거나 듣고 살아야 하겠는가. 자기가 검을 차고 있거나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아서 무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가? 문지기는 그렇다 치고 그 둘의 상관인 듯한 저 놈팽이는 또 뭐란 말인가? 생긴 것도 야비하게 생긴 것이 머리 속도 텅텅 빈 듯했다.
여긴 무림에 속하지만 이익의 발생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표국이 의리와 협을 위해둘 다 정체불명의 가치 판단이지만ᅳ손해 보면서 일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번듯한 명문정파에서도 제대로 그걸 행하는 이가 없는데 엄연한 사업체인 일개 표국에 그걸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처사라 할 수 있었 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걸 남에게만 요구하다니……. 그처럼 훌륭한 자기 기만도 드물 것이다.
“웬 놈이냐아?”
적어도 자신에게 반말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자격을 갖추어야 했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대가 자신에게 반말을 찍찍 지껄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구십니까겠지!”
순간 그의 목소리에 실린 위협을 두 명의 무례한 문지기도 눈치챘다. 청년은 겁도 없이 손가락으로 눈앞의 창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따위 장난감으로 뭘 어쩌려고?”
순간 둘은 손이 저릿한 감각과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과 함께 쥐고 있던 창을 놓치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뎅그랑!
두 자루의 창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놈들이 군기가 빠져서!”
무인이 자신의 무기를 놓치는 순간은 죽을 때뿐이다. 그렇게 훈계하려고 하던 허상두의 말은 두 부하의 손아귀를 본 순간 다시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마치 불에 덴 듯 거멓게 그을려져 있었고, 찢어진 손아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단한 두 번의 동작만으로 창을 고속 회전시켜 열상과 화상을 동시에 입 힌 것이다.
“어더… 어더… 어더더더더…….”
그제야 눈치가 느린 허상두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런 행패를 부리… 시는 거니… 세요?”
가벼운(?) 위협만으로 반말에서 존대말로 변했다.
“행패? 손님의 입장으로 방문하는 것? 아니면 기껏 방문한 손님을 창으로 위협하는 것? 어느 쪽을 말하는 건가요?”
변변하게 닦은 실력도 없는 이 세 사람에게 검은 불꽃처럼 날름거리는 무형의 살기는 견디기 힘든 압박이었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은 그들의 전신에서 식은땀 이 폭포처럼 주루룩 흘러내렸다. 특히 항상 뱀의 역할만 하다가 개구리 역할을 맡게 된 허상두의 심리적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이런 놈들은 한번 호되게 혼내줄 필요가 있었다. 다시는 사람을 함부로 깔보지 못하도록. 저런 인간이 자신보다 약해 보이면 곧바로 찍어 누르려 들고 잡아먹으려 들고 등쳐 먹으려 드는 그런 인종인 것이다. 그런 인간 말종이 되기 전에 계도시키는 게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고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도 이득이었다.
친절, 봉사의 마음 씀씀이를 가슴 깊숙이 새겨 두 번 다시 잊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비류연은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뼈에다가 새겨 넣는 것 이다. 이제껏 여러 수단을 골고루 써봤는데 이것만큼 효과가 빼어난 방법은 아직 인간 지혜의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었다.
씨익!
비류연이 살랑거리는 앞머리 아래쪽에 위치한 입술의 오른쪽 입꼬리를 말자 미소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붉은 물감처럼 번져 나갔다.
씨… 이익…….
그의 미소에 인력이라도 작용한 것일까? 선임표두 허상두와 문지기 두 명의 입도 마치 조작이라도 당한 듯 따라 움직였다. 상당히 어색하고도 또 어색한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헤~”
그들 셋이 실없이 웃었다. 비류연도 웃었다.
아드드드득!
비류연은 주먹을 뚜두둑 불끈 쥐고 문자 그대로 세 사람의 뼛속 깊이 예의범절, 친절봉사 여덟 자를 새겨 넣었다.
뚜쉬! 뚜쉬! 뚜두두두뚜쉬!
오랜만에 작렬하는 삼복구타권법의 권영(拳影) 아래 오늘도 어김없이 세 마리의 검은 양이 비참한 단말마를 남긴 채 제물로 바쳐졌다.
제단에 올려진 제물의 이름은 ‘피떡’이었다.
문밖의 소란을 듣고 장우경이 달려왔을 때는 상황이 이미 끝장난 이후였다. 접객 정신이 부족하다는 판결을 언도받은 문지기 두 명과 선임표두 한 명은 바닥에서 발발거리며 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팰 만큼 패고 기절은 안 시키는 게 기술의 중요한 핵심인 모양이었다. 장우경은 부하들이 만들어낸 꼬락서니에 잠시 골이 지끈한 지 엄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눌렀지만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는 이 사태의 주인공에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오셨군요, 비 공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수하들이 공자를 몰라보고 결례를 범한 모양입니다.”
선임표두 허상두와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 두 문지기의 명복을 빌며 장우경이 말했다.
“아닙니다. 살다 보면 그런 실수를 할 때도 있지요. 별거 아닙니다. 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 그렇군요. 별거 아니군요.”
장우경이 침음성을 삼키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라면서 저기 흙바닥에 간신히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저게 바로 신경 쓰지 않는 결과란 말인가?! 삐질삐질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실제로 더욱 두려운 경우는 그 말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을 경우였다.
차마 두려워서 그럼 신경 쓰면 어떻게 됩니까?’라고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것은 군자가 취할 만한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죠. 한 번 실수야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고 하지 않습니까? 흔히 있는 일이라는 거지요.”
비류연의 웃음은 정말로 밝고 맑고 평화로웠다.
“그, 그렇지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현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무래도 저 인간이 장군이라면 그 밑에 있는 병사들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흔하게 죽을 위험이 다분했던 것이다.
“허허, 그런데 아직 바람이 찬데 왜 이렇게 더울까요? 이거 참.”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장우경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신체의 생리현상이 계절의 절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위험물을 취급할 때는 언제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그놈을 상대할 때는 살얼음 따위가 아냐! 물 위를 걷는다고 생각해라! 명심해라, 아우야! 목숨은 대출받을 수 없다. 항 상가슴속에 새기고 명심 또 명심하거라!”
그때는 형님이 왜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겁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형님의 마음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님으로부터 그렇게 귀 아프게 경고를 들었는데 그 문제에 소홀히 한 자신의 책임도 컸다.
간판이 멀쩡히 걸려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형님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흠! 그, 그럼 절 따라오시지요.”
비류연은 장우경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질렀다.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기합성이 그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고, 넓은 마당의 한 켠에 몇 대의 표행 용 수레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림잡아도 열다섯 대는 족히 넘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일꾼들이 어깨 위에 짐을 진 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들의 역할은 비어 있는 쓸쓸한 수레 위에 푸짐하게 짐을 올리는 일이었다. 수레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말이 오래 끌 수 있도록 적당하게. 욕심은 금물이었 다.
너무 짐을 많이 올리면 말이 일찍 지친다. 가끔 소를 쓰기도 하지만 중양표국에서는 짐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너무 적게 실으면 쓸데없이 수레를 추가로 사용하게 된다. 수레가 많아지면 몰이꾼도 추가로 써야 하고 자연 그것을 지키는 인원도 늘려야 되니 그것은 곧 낭비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된다. 당연히 여정도 늦어지게 마 련이니 여러모로 손해인 것이다. 이쪽으로 봐도 손해, 저쪽으로 봐도 손해다. 그러니 그런 불미스런 일은 일찌감치 미연에 방지하는 게 이로웠다.
그들이 지나가자 일을 하던 사람들이 잠시 손을 멈추고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비류연의 인격이 훌륭해서 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손사래를 치며 인사를 사양하는 쪽은 공손히 비류연을 안내하고 있는 쪽이었다. 사람들의 인사가 비류연을 향한 것이 아님이 밝혀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비 공자. 그분은 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되어 온 곳은 장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객방이었다. 이곳은 남창에 위치한 중양표국 남창분국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가장 공손하고 극진한 자 세로 예의와 성심을 다해 모신 이는 중양표국 제일이자 본국 다음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남창분국의 분국주 삭풍도 장우경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인물이 경어 를 쓴다는 것은 저 안에 있는 사람이 적어도 남창분국주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전 이만. 두 분께서는 담소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만날 때 그랬던 것처럼 헤어질 때도 그는 정중하게 예의를 다해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사실 더 이상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재빨리 기회를 봐서 빠져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수고하셨어요!”
비류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드르르륵!
비류연은 망설임없이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요. 전 이삼 일 정도는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의외라는 듯한 비류연의 첫마디에 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이 세 마리나 죽었습니다.”
길목 길목에 설치되어 있는 마방에서 말을 갈아타고 왔을 텐데도 세 마리나 죽었다는 것은 이 남자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무자비했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퀭한 눈과 거무죽죽한 눈자위, 움푹 들어간 광대뼈, 침식을 잊고 휴식마저 잊은 채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과로사로군요. 마방에 보상해 주려면 돈이 많이 들겠군요. 보상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쯧쯧쯧.”
참 안됐다는 듯 비류연이 혀를 찼다. 아무리 말 못하는 동물이라지만 자기 마음대로 쓰고 버리다니……. 인간은 역시 아직도 한참이나 더 진화가 필요한 생물임이 틀림없었다. 하나 그것이 비록 정론이긴 하나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비류연이 자신있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돈이 나가는 게 아니어서인지 그다지 진심이 깃들어 있는 것 같지 않은 위로였다. 적어도 이 남자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저희 표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특급급행으로 날아온 전서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비류연은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세 마리의 희생을 딛고 그가 직접 와야만 했다.
“저희 표국의 미래에 비하면 싼값이지요.”
자신의 기반이, 생명보다 소중한 기업의 미래가 걸렸다는데 한시라도 지체한다면 주인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것이리라.
세 마리 모두 일급 말이라 그 보상비가 만만치 않겠지만 말 세 마리보다 표국의 미래가 더 중요했다.
놀랍게도 이 남자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의 비류연에게 꼬박꼬박 경어를 쓰고 있었다. 남창분국주 장우경의 경어를 듣는 사람이 비류연에게 또다시 경어를 쓰
고 있는 것이다. 중양표국의 실질적인 이인자인 삭풍도 장우경에게 ‘그분’이라 불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십팔검이라는 명호로 불리웠고 요즘은 “대표걸’이라는 명호로 더 유명한 현 강호 표행계의 새로운 거성(巨星), 떠오르는 태양, 바로 중양표국주 장우양이었다.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본인의 청각 사정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데 퉁박을 주기는 좀 미안했다. 그래서 항상 심약하고(?) 상냥한(?) 마음이 문제라고 스스로 반성하곤 하는 비류연은 다 시 한 번 친절을 베풀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본인으로서도 수고로울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멀쩡한 성능을 유지하고 있는 귀 두 짝에 게도 미안한 노릇이었다. 그런 실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제가 장 국주님의 뛰어난 청각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겠지요. 그런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기 회를 제공했습니다. 못 들은 척 다시 한 번 듣는다 해서 생각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꿈을 이룰 기회, 그 기회를 잡고 안 잡고는 전적으로 장 국주님 몫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런데도 굳이 싫다고 하시면 본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군요. 아아, 중원표국을 제치고 천하제일표국으로 도약, 아니지, 비상할 수 있는 기회를 금전에 대한 순간의 내적 갈등으로 인해 포기한다면 본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매우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비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사정없이 방을 나가려는 순간 그의 바짓가랑이를 힘껏 붙잡는 한 쌍의 손이 있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 공자!”
아래를 내려다보자 울며 겨자 먹는 표정을 한 채 식은땀을 훔치는 것조차 잊고 다급함에 실룩거리는 안면 근육을 수습하고 있는 중양표국주 장우양의 얼굴이 있었 다.
씨익.
비류연이 웃었다.
씨익.
전염이라도 된 듯 몸에 매달린 수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로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장우양이 따라 웃었다. 하지만 비류연만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헤퍼 보이는 바보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래도 스스로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비류연은 국주씩이나 되어서 ‘일개 표두랑 수준이 똑같네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비아냥과 빈정댐의 달인인 그에게 있어 그것은 매우 드문 일었다.
“자, 비 공자,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우선 자리에 다시 앉으시지요. 앉은 다음에 다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눕시다.”
장우양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비류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후에는 이런 시간 낭비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국주님? 사업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지요. 유한한 생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 모두에게 시간 은 금이 아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을 제가 약속드리지요.”
장우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류연의 특기인 무형의 시선이 장우양의 얼굴에 꽂혔다. 확실히 기억하는지 증명해 달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장우양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어야 했다. “본인은 국주님의 마음속에 원대한 포부가 비상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그 절호의 기회가 될 겁니다. 한번 지나가면 과거와 같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런 기회죠. 그런 기회를 단지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포기하시렵니까?”
확실히 비류연의 말은 장우양의 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 그에 따른 이익 분배에 표국 전체 수입의 삼할을 원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예? 다행이라뇨?”
“정말로 장 국주의 청각에 이상이 생겼으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확실히 청각에 이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상이 있는 것은 자신의 머리일까, 상대의 정신일까?
“본인은 금전 문제에 관해서는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신용이 생명이어야 할 금전 거래에서의 허언을 본인은 지금껏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습니다.” 매우 정중해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가장 무서운 협박도 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도 조심하라는 건가?”
오래 사업을 하다 보면 느는 것은 눈치뿐인 법이다.
‘성격 한번 지랄 맞기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할 말 다 하는 장우양이었다.
‘속으로 한 말을 누가 알겠어? 제까짓 게 독심술을 익힌 것도 아니…….?’
“지금 성격 한번 지랄 맞다고 생각하셨죠?”
비류연이 싱긋 미소 지으며 아무렇게나 던진 한마디는 그를 사레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쿨럭! 캑캑캑! 쿨럭쿨럭!”
너무 놀란 나머지 기침이 멎지 않았다. 이래서는 아니라고 부인해도 온몸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흐흠, 반응을 보니 확실히 그런 모양이네요?”
여전히 비류연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부동심을 익힌 선승(禪僧)의 그것처럼. 하지만 장우양은 그게 더 무서웠다. 저 인간이 어떤 인간 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몇 번의 짧은 동행일 뿐이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그때 자신이 입은 충격의 강도는 자신의 수명을 몇 년분이나 깎아먹을 만큼 지대한 크기 였거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기억 속에 불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는 그간의 기억들. 게다가 간간이 잘 때 꿈속에 나타나는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는 항상 초 토화된 가업의 터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언제나 그 꿈의 결말은 같았다.
일이 이럴진대 어찌 망각이란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세월의 약으로도 잡을 수 없는 기억이란 것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비 공자, 공자께서 자신하고 계신 계획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그것 하나 모르고 이렇게 들이닥쳤을까 봐요?”
약간 화난 억양으로 비류연이 말을 이었다.
“날 뭘로 보시는 겁니까, 장 국주님? 내가 비전도 없이 허무맹랑한 환상이나 떠들고 다니는 그런 정신병자로 보이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 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장우양은 무의식 중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리곤 당황한 채 얼른 두 손을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계속해서 상황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만 하는 장우양이었다.
“중원표국을 제일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의미지요.”
비류연은 그의 예상 이상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서도 저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어지간한 힘이 없으면 계획조차 세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해 보이겠다고 비류연은 말하는 것이다. 일신상의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경추와 목 근육에 무리가 가고 말았다. 철심이라도 박힌 것처럼 목이 뻐근했다. 내일은 아무래도 의원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덜컥 믿어버리면 곧바로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치밀하고 쫀쫀한 성격으로 볼 때 이익의 분배까지 생각하고 온 걸 보면 빈손은 아닐 터였다. 아마도.
“비 공자께 저희 중양표국을 천하제일로 끌어올릴 만한 번천지복의 묘수가 존재한다 그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꼭 한번 경청해 보고 싶습니다.” 일단 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판단은 그 후에 내려도 된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비류연을 쫓아낼 능력도 없었다.
“물론이죠. 이른바 승승전략이죠.”
비류연은 자신이 그동안 짜놓았던 계획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계획을 모두 들은 장우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물론 그렇게 되면 중양표국은 조금씩 조금씩 점차적으로 중원표국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계획대 로 착착 진행된다는 가정 하에서의 일이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 일의 진행이 계획대로 되는 놀라운 기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이성적이었 다.
“이런이런, 또또. 인간이란 왜 이렇게 손쉽게 자신의 한계를 결정하고 마는 거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당신은 과연 당신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가슴속 에 내재된 가능성을, 미래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장우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없군요.”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너무나 바쁜 일상이었다. 때문에 그의 마음은 온통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쏠려 있었다. 자기 탐구 같은 건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벌써 마음으로부터 항복하시겠다? 그런 인간을 하늘이 도와줄 리 없잖아요. 자기 자신도 안 믿는데 누가 당신을 믿어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인격을 훼손하고. 비굴해지면 뭔가 알 수 없는 희열을 만 끽할 수 있는 건가? 자신도 알 수 없는 괴상망측한 희열이라도 느끼는 건가? 그딴 변태적인 쾌감은 만일 있다 해도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한계를 부수기보다 마음이 만들어낸 틀 안에서 안주하길 바라는 나약함, 그것이 앞으로 나가는 한 걸음을 막는 거대한 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발전할 수 없냐고 애꿎은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한다 해도 죄없는 하늘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안 한다는데 그 자유를 꺾을 힘은 설령 천 상의 신이라 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권리는,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권리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일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상일체(萬相一切)는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가르침은 거짓이 아니다.
“우물 안이 깊든 말든, 아무리 그 수면이 보이든 안 보이든 물을 길어 먹고 싶으면 두레박을 던져 넣어야 물을 길을 것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요.”
“두레박도 안 던져 넣고 물을 거저 마실 셈입니까? 누가 대신 떠주길 기대하는 겁니까, 지금?”
비류연이 거침없이 장우양을 몰아세웠다. 그 박력에 장우양은 저도 모르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비류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두레줄이 짧으면 물을 길을 수 없겠지요. 그럼 그 줄이 뭘로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부끄럽지만 모르겠습니다.”
장우양이 대답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절대적인 확신! 그리고 반드시 물을 긷고야 말겠다는 신념! 그 깊이는 누구도 모릅니다. 때문에 던져 놓고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죠.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전일(全)한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두레줄을 꼬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두레박이 물에 떨어지기 전에 포기하지요. 기다릴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그런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가 있는 사람은 물을 마시고 아닌 쪽은 텅 빈 두레박에 담긴 공기밖에 못 마시죠. 주역에서 변화 삼괘 중 하나인 수풍정(風井) 괘(卦)가 나타내는 것도 그런 거죠. 마을이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어도 우물은 항 상 그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지금 목이 마르십니까? 그럼 두레박을 던져 넣으세요. 자신의 꿈을 남이 대신 이루어주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 필사적으로 두 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마시던가, 아니면 갈증으로 괴로워하다 어영부영 죽던가 선택하세요. 그 몫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후우.”
장우양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악연도 연이라고 이것도 인연. 비류연과 얽혀서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우습게도 중양표국 전체는 급성장해 왔다. 지금은 삼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다 노사부란 인물이 자신의 표국에 제자들을 이끌고 난입해 들어온 이후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걸고 도박에 임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돈을 지르면 이제 더 이상 되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러자 묘한 흥분이 그를 덮쳤다. 자신의 전 일생을 걸고 승부를 벌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은 하 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는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한번 덤벼보는 거야, 인생을 건 도박에! 전부 아니면 무(無)다!’
비류연이란 이 친구는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니니 뭔가 한 수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이번 건은 그저 말만 듣고 덜컹 믿어버리기에는 건수가 너무 컸다. 하지만 유혹은 더욱 컸다.
마침내 결심이 섰다. 이익의 삼 할은 분명 커다란 대가지만 최고가 될 수 있다면 아깝지 않았다. 사실은 속이 쓰릴 정도로 아프지만 그는 위의 통증을 손으로 지그 시 눌러 잡았다.
“좋습니다. 비 공자의 예언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손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차질은 없겠지요?”
드디어 장우양은 미지의 운명을 선택했다.
“물론입니다. 이미 안배는 끝나 있습니다.”
비류연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