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7권 7화 – 그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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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7권 7화 – 그의 공포

그의 공포

-홍, 두려움에 가득 차다

가만히 있어도 냉랭하게 보이는 빙검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차가운 북풍한설이 그의 온몸에서 사납게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어떤 용건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관 사부의 말씀은… 매우 의심스러운 곳이 하나 더 있다 그런 말씀이시오?”

“물론입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빙검이 대꾸했다. 마진가는 아직까지 이 사람이 허언을 하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은 그릇에 따라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모양을 바꾸 지만 한겨울에 꽁꽁 언 얼음은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물의 속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런 얼음처럼 완고한 인물이 바로 빙검이었다.

마진가도 감히 허투루 들을 수 없었기에 자연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본인의 우매한 머리로는 그 실마리의 끝자락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구려. 가르침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천무학관에 몸담은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기에 빙검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 관주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무심으로 일관하려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관주께서는 중원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데없이 여기서 중원표국이 왜 나오는 걸까? 철권 노인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곳은 중원제일표국이라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강호에서 으뜸가는 표국이 아 닌가. 오랜 신용과 의리로 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입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철옹성 천무학관은 물론 백도무림맹인 정천맹도 운송 거래의 칠 할 이상을 이 중 원표국과 정식 계약을 맺고 거래하고 있었다. 벌써 삼십 년도 더 넘은 일이다.

강호 물류의 칠할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게 강호의 정설이었다.

그런 곳에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인가? 정말이라면 그것은 소름 끼치게 두려운 일이었다. 적은 언제든지 그들의 보급로 중 상당 부분을 끊을 수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원표국은 정천맹의 십대원로 중 한 명인 표왕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증거는 있나?”

“증인은 있습니다.”

“그럼 아직까지 확실한 물증은 없는 거로군.”

“현재 찾고 있는 중입니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말에 모든 걸 걸기엔 사안이 너무 중차대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빙검은 그 말 안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렸다.

“현재까지 저희 천무학관은 물류 운송의 너무 많은 부분을 중원표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백이 의심되는 지금 비록 심증만이라곤 하지만 학 관의 생명줄을 전적으로 저들에게 맡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처사라 사료됩니다.”

“동의하네.”

“정천맹 역시 상황은 비슷하지만 우선 우리 천무학관에서만이라도 저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는 품새가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말인가?”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질문이 던져졌다. 빙검은 은근한 어조로 나직하게 물었다.

“중양표국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마진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봤네. 요즘 한창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사천의 표국이 아닌가? 아미파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고 들었네만. 사람들은 그곳을 사천제일표국이라 부른다 고 하더군. 국주의 별호는 ‘대표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제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특별히 의심할 만한 요소가 없는 표국입니다. 그리고 몇 번 일 때문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그다지 위 협적일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들을 이용해 중원표국을 견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대표객이 아니라 대표걸이랍니다.” 빙검의 의견에 마진가는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리 요즘 명성을 높여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백 년 전통의 터줏대감인 중원표국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까? 약간의 압력에도 굴복할 위험은 없겠나?”

“걱정 마십시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자를 보내 확실히 해두었습니다.”

“잘했네.”

빙검이 그답지 않은 열띤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관주님과 제가 그들을 은밀히 지원한다면 단기간 내에 충분히 중원표국을 위협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나머지 거대 표국들은 중양표 국만큼 폭발적인 잠재력이 없습니다. 현재 기대할 만한 곳은 중양표국뿐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마진가의 고개가 드디어 끄덕여졌다.

“음, 좋네. 번거롭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짜줄 수 있는가?”

“걱정 마십시오. 그쪽 방면에 유능한 녀석이 있으니 며칠 안에 쓸 만한 계획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그 계획은 비류연이란 인간의 머리 속에 다 짜여져 있고, 단지 꺼내오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하겠네.”

“예, 그럼 나누시던 말씀 계속 나누십시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의미 불명의 인사말을 남기고 빙검이 물러났다. 그러나 이 의미 불명의 인사를 받은 당사자 마진가의 안색은 상당히 볼 만했다. 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빙검의 밑도 끝도 없는 인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고민해 본 후 그는 웃기로 결정했다. 생과 사의 순환 속에 위치한 유한자(有限者)로서 매사에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남는 장사였다.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은신술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이거 한 방 먹고 말았습니다. 저것이 빙검 대무사부의 진면목 중 일부라 는 건가요?”

건방지게 사람은 형체도 없는 허공 중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 넓게 퍼져 있던 그림자가 새벽 잎새 위의 이슬처럼 한곳에 맺히더니 아래로 뚝 떨어졌 다. 실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떨어진 그 그림자의 덩어리 속에서 그는 유령처럼 나타났다. 입가에 쓰디쓴 고소를 머금은 채.

“들킨 것 같은가, 홍(紅)?”

마진가가 약간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그의 정체는 탄로나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그가 빙검을 신뢰하고 하지 않고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제가 숨어 있다는 것은 알았어도 제 신분을 눈치채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은신을 간파해 낸 것만 해도 굉장하군요. 아마 제게 조금이라도 살기가 있었으 면 가차없이 베었을 겁니다. 제가 관주님과 대화하고 있는 걸 멀리서 눈치챘다고 해도 말입니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어렴풋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장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그의 검만큼 그의 감각은 무섭지. 저 사람과 알고 지낸 지 벌써 십수 해가 넘었지만 아직 나조차도 그의 본 실력의 그 끝이 어딘지 모른다네.”

“과연 믿음직한 분이군요.”

홍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니 믿고 가줄 수 있겠나?”

이때다 싶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진가가 재빨리 말했다.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까? 그것과 이건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심각한 목소리로 홍이라는 사내가 대답했다.

“자네 정도 되는 인간이 뭘 이 정도의 일 가지고 벌벌 떠나?”

“이런 일에는 무림맹주인 나백천 대협도 벌벌 떤다구요. 무공 실력이나 지위와는 관계없는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걸로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산더미만큼 많다 구요.”

화를 억누르고 있던 체통의 누름쇠가 한계에 다다르자 마침내 뚜껑이 열리며 마진가는 폭발하고 말았다.

“뭣이라! 윗사람이 까라면 깔 것이지 뭔 불평이 그렇게 많나? 천무학관주씩이나 되는 내가 이렇게 부탁하지 않는가? 내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인가? 내 체면도 좀 봐 주게.”

그러나 홍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눈썹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관주님 체면 봐주기 위해 제 목숨을 걸라구요? 싫습니다.”

홍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네, 그렇게 겁쟁이였나? 그동안 자네를 믿고 의지한 나는 도대체 뭐가 되나?”

“소생이 겁쟁이면 나 대협도 겁쟁이겠지요. 이번 일만은 안 되겠습니다. 만일 거기에 가게 됐다가 일이 잘못되면 전 틀림없이 살해당할 겁니다. 십이(十二) 할 보 장합니다!”

상상만으로도 오한이 드는지 홍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은 결코 연극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이럴 때 강압적으로 나가면 오히려 역 효과만나게 된다는 것을 마진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온갖 각종 고문과 심령 제어술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인고의 수련을 견뎌온 그를 저토록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강권하지 못하고 있음을 본인도 자각하고 있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저쪽도 아마 이해할 걸세.”

“글쎄요. 약이 될 때도 있지만 이 경우는 독이 될 가능성이 더 크죠.”

방어가 워낙 튼튼해 구슬리기도 잘 통하지 않는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먼, 자네. 꼭 내가 자네 앞에서 무릎을 콱 꿇어야 되겠는가? 그렇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무릎을 꿇겠다는 비굴한 행동에 이런 박력을 담아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홍은 처음 알았다. 어지간한 협박보다 무서운 기세였다. 게다가 가장 소름 끼치도록 무서 운 것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렁그렁한 두 눈이었다. 저 강철의 철탑을 연상케 하는 거무튀튀한 거구의 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른다면? 그런 상상 만으로도 처참하고 끔찍한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영양실조에 걸리고 싶지도 밤잠을 설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신조인 ‘쾌면(快眠), 쾌식(快食), 쾌변(快便)’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 그렇게 하실 것까지야…….’

그래도 밑에서 월급 받아먹는 처지이다 보니 상사의 저런 모습은 심히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웠다. 무능한 상사라면 통쾌함이라도 느끼겠지만 그러기엔 마진가는 너무 유능하고 성실했다.

“이것 참…….”

홍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 정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홍 같은 유형의 사람에게는 진심을 담은 정면 공격이 제일 버티기 힘든 법이다.

“위험수당도 평소의 세 배, 아니, 다섯 배 이상 지급하겠네.”

유능한 상사답게 마진가는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휴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할 수 없죠. 제 생명을 거는 수밖에. 너무 심하게 부려먹는다구요, 이곳은!”

업무상 사고사는 절대 사절이었건만.

“만에 하나, 뭐,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장담하네만 혹시 죽더라도 자네 장례식은 꼭 대대적으로 치러주겠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도록 말이야.”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홍의 심리 상태를 마진가로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일단 그도 남자인 것이다. 게다가 그 역시 경험이 있었다.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나백천이라 해도 그의 구구절절한 심경을 역시 이해하고 공감해 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가줘야만 했다. 믿을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기에.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무리 지옥이라 해도 알면서도 보내야만 하는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같은 남자로서 왠지 남자 간의 유대를 부수는 배신을 저지르고 있는 듯했기에 그의 마음은 아팠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을 추스렸다.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책임지 는 자로서 개인적인 사감에 몸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때로는 비정하게 부하를 사지로 내모는 경우도 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 도. 그는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눈물은 속으로 삼켜야 하는 것이다.

“부탁하네, 홍!”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마진가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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