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7권 8화 – 세 번의 만남 용천명, 벽(壁)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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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7권 8화 – 세 번의 만남 용천명, 벽(壁)을 보다

세 번의 만남 용천명, 벽(壁)을 보다

요즘 천무학관 안은 묘한 흥분으로 잔뜩 들떠 있었다.

신화(神話)의 강림(降臨).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 천무삼성의 신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신화는 일반인에게 손을 뻗어주지 않고 새침한 절세미녀처럼 항상 구름 위에서 노 닌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실제로 접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짧지만 슬픈 상식만으로도 천무삼성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쉽 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 전설 세 개가 한자리에 모인다고 상상해 보라. 그 광경이 얼마나 장대하겠는가. 게다가 벌써 이(二) 주 이상 같은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천무삼성이 어느 한곳에 이토록 오래 머문 것은 무림의 역사를 뒤져 보아도 지난 백 년 이후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들 상호 간에 개별적인 만남은 있을지언정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두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강호의 제문파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기 때 문에 불편하거나 귀찮은 점도 적잖았던 것이다.

그들이 지금 한자리에 모여 침묵으로 일관한 채 지그시 눌러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십 년 동안 재담가들의 입은 심심하지 않을 터였다. 온갖 억측과 유언 비어가 난무하게 되리라.

어차피 사람 사이에 퍼지는 이야기란 대부분 그런 것이었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어차피 입으로 열심히 떠들며 소문을 부풀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진실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관심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 자신들에게 즐겁고 유익한 허구다. 자기만족이란 마약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언제나 그들은 생각은 짧고 말은 길다.

요요한 검처럼 빛나는 초승달이 서쪽 하늘 끝자락에 금방이라도 검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 있는 야심한 밤.

용천명은 사문의 비보(秘寶)인 녹옥여래신검을 무릎 앞에 가지런히 놓아둔 채 그 앞에 경건함과 죄스러움이 한데 뒤섞인 마음으로 꿇어앉아 있었다. 방 안. 어둠 이 내려앉은 밤은 고요함 그 자체였고, 탁상 위의 등잔 하나만이 붉은 영혼을 이리저리 살랑이며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언뜻언뜻 벽가에 일렁이는 암영(暗)의 어지러운 군무가 꼭 번뇌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 같았다.

최근 들어 용천명은 과연 이 ‘녹옥여래신검’이라는 과분한 보물을 지녀도 될 만큼의 마땅한 자격이 자신에게 정녕 있기는 있는지, 그동안 뭔가의 착오에 의해 자 신에게 일시적으로 위탁되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끊임없는 의구심에 번뇌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의혹의 검은 불꽃은 소리도 없이 모락모락 피어오르 더니 그의 머리 속 한 켠에서 음흉스럽게 똬리를 튼 채 빠져나갈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녹옥여래신검(綠玉如來神劍)!

소림 속가의 권위의 상징. 명예와 긍지를 알고 부동심의 경지에 오른 불심을 아는 자만이 지닐 수 있다는 대소림사의 신물. 이 지고한 비보를 받았다는 것은 막강 한 권위와 함께 신성한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권위는 세속되지 않으며 소유자의 생명이 다하거나 그 자격의 부적절함이 의심될 때는 그 즉 시사문으로 회수된다.

이것을 소유한 자는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녹옥여래신검의 소유자에 걸맞은 정당하고 올바른 행동을.

그러나 화산에서 자신은 어떠했는가?

화룡(龍)이 미친 듯이 날뛰고 불꽃의 폭풍이 검은 재를 흩뿌리며 광란의 춤을 추던 그 화염 지옥에서 자신은 한마디로 정의해서 한심함 그 자체였다.

자신은 끝없는 무력함 속에서 상황을 타파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무기력한 한 사람의 방관자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 꼴사나운 무능의 극치도 따로 없을 것 이다.

그가 화산에서 만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리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점이었다. 자신이 안주하고 있던 세계가 얼마나 작고 좁고 편협한 세계였는지, 그동안 허명에 사로잡혀 우쭐거리고 있던 용천명이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그는 절감해야 했다.

낼름거리는 불꽃의 혼돈 속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차원이 다른 진정한 강함의 세계였다.

특히 천무삼성과의 만남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 죽음의 공포와 함께 끝없는 무력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아는 것도 아는 거라 했던가? 공자님도 나는 내가 뭘 모르는지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깨닫자 신기하게도 잠자던 그의 눈이 떠졌다. 세계가 바뀌었다.

그러자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이미 한 번 눈이 떠진 이상, 이미 시야가 바뀐 이상 옛날의 그 잔인한 무지(無知)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두 번 다시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망각의 휴식처를 잃어버린 그에게 남은 길은 전진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첩첩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개안했다고 해도, 아무리 뭔가를 깨달았

다 해도 그것을 바탕으로 직접 몸으로 체현하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체득이 아니었다. 진정한 깨달음이 아닌 것이다. 유사 이래로 얼마나 많이 이들이 자신의 이 상을 쫓아가지 못하고 그 괴리감에 절망하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파멸했던가.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그것을 실천할 인내와 의지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현실과 이상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에 집어삼켜질 위 험이 있었다.

‘체용(體用)의 도리’를 화두로 삼아 명상하다 보니 어느새 밤은 달과 함께 그의 곁을 지나 새벽의 여명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해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 다.

벌써 삼 일째.

잠을 못 이루는 밤이 또 한 번 지나가고 있었다.

“후우~ 골방에서 앓기만 한다 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리라는 법은 없지.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

바깥 공기를 마시지 못한 지도 오늘로 사흘째.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가 방을 나섰을 때는 어느덧 해가 중천에 걸려 있는 오후였다.

삼 일 만에 보는 태양은 어둠에 묻혀 있던 그의 눈에는 너무나 눈부실 정도로 찬란했다. 용천명은 무의식 중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따끔따끔 따가운 두 눈은 그동안 자신을 외면해 온 어리석은 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책망처럼 느껴졌다.

“나오긴 나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씁쓰레한 고소가 그의 입가에 지어졌다.

“겨우 가벼운 산책 하나조차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다니… 마치 갈 길이 보이지 않아 헤매고 있는 나 자신 같구나. 난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번뇌의 늪에서 몸을 빼내올 수 있는가? 목까지 차오른 질척질척한 검은 진흙이 목구멍을 틀어막기 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쉽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얼마나 편하겠느냐? 진리의 세계[絶代界]와 다르게 현상계에서는 멈춰진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네가 무 엇인가 되고 싶다면, 무언가를 그 손에 넣고 싶다면 그 무언가를 이룩하기 위해 먼저 움직이도록 하거라.”

어린 그를 앉혀놓고 조용히 말씀하시던 사부님의 말씀이 갑자기 뇌리에 떠올랐다. 존경하던 사부님이 그의 마음밭에 심어놓았던 작은 씨앗이었다. 그 씨앗 하나가 지금 막 생명을 얻어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일단 걸어볼까?”

그렇다. 사부님의 말씀대로였다.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멈춰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일단 발길이 가는 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그의 발길이 이끄는 새로운 인연을 그는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용천명은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는 피곤했고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구름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긴 채 그저 흘러 만 가고 싶었다.

여러 사람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전혀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 인사에도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그에게 그들의 인사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평소 항상 깔끔하고 사교성이 높았던 그로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직접 실행하고 있었다. 평상시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주위에서 몇몇 사람들 이 수군수군거리기는 했지만 그런 뒷담화는 그의 귓가 근처에도 근접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방기된 그의 인식 안으로 최초로 비집고 들어온 존재는 한 쌍의 연인(戀人)이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보무도 당당하게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자랑은 아니 지만 그는 아직 연인이 없었다.

먼저 저쪽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용형?”

“어머! 안녕하세요, 용 공자?”

두 사람은 그도 아는 인물들이었다. 아니, 아마 천무학관에서 이 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이들은 유명한 연인 사이였다. 뇌전검룡 남궁상과 아미일봉 진 령. 일각에서는 천무학관 최강의 연인들’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듯했다. 비류연과 나예린이라는 알 수 없는 조합을 연인 사이로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다들 그 일에만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용천명이 이 둘을 눈여겨본 것은 이들이 히히덕거리며 그의 염장을 지르는 연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뇌전검룡 남궁상. 남궁세가의 삼남, 구룡의 한 명, 그리고 주작단 단주.’

눈앞에 있는 상대의 정보가 그의 머리 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강해졌다. 용천명의 흐려졌던 눈동자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그의 정신이 남궁상과 진령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인식했다. 이 둘은 처음부터 구룡칠봉에 뽑 힐 만한 인재였다. 강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견줄 만큼은 아니었다. 구룡칠봉만 놓고 보아도 이 둘보다 강한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이 둘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이 둘뿐이 아니었다. 언제나 사(四) 개 사신단(四神團) 중 최하위로 꼽히던 주작단 역시도 마찬 가지였다. 한 꺼풀 벗겨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전혀 다른 인물로 탈바꿈했다고나 할까. 옛날 같은 온실 속의 고수(?)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말 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제대로 된 표현을 찾기 힘든 것은 그가 그동안 그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해보지 못한 경험을 체험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그는 그 사실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늪에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 는 지금에 와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가 남궁상과 진령을 포함해 주작단원들에게 느꼈던 언사로 형용할 수 없었던 모호한 감각. 그것은 그 들이 몇 번의 시련과 좌절의 늪에서 발버둥 치며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들에게는 확실히 전장을 헤쳐 나온 노회한 노병 같은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 다. 그들은 더 이상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봄의 바람, 여름의 폭풍우, 그리고 가을의 찬 서리와 겨울의 눈보라를 이겨내고 차가운 겨울의 대지 위에 당당히 꽃을 피운 매화(梅花)와도 같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모든 것이 보장되는 이곳에서 심신이 나락에 떨어질 만큼의 시련을 당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천무학관은 좋게 말하면 ‘무(武)의 전당(殿堂)’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인위적으로 조작된 환경 안에서 고수를 재배하는 온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비바람과 북풍한설의 시련이 들이닥치기에 천무학관의 온실 벽은 너무나 두꺼웠 다. 그래서 다들 지난 화산지회에서 발생한 돌발적인 실전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다. 화산에서 타오른 화염은 때때로 현실의 엄격함을 외면한 그들 에 대한 엄중한 경고 조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그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남궁상에게 묻고 싶은 마음을 그는 억지로 억눌렀다. 그것은 함부로 남과 나눌 수 있는 비밀이 아닐 터, 자기 자신의 마음속 깊이 침 잠되어 있는 비밀일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그의 자존심이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래서 용천명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인사했고, 한 사람과 두 사람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다섯 걸음 정도 지나쳐 걸어 간 진령이 고개를 살짝 돌려 멀어져 가는 용천명의 등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용 공자는 요즘 무슨 고민이 많은가 봐요? 전에는 저런 풀어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무척 심란한 일이 있는 모양이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누가 도와줄 수는 없겠지요.”

남궁상은 용천명이 어떤 상태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도 한 번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이런 확신은 품지 못했을 터이다. 그런 건 말 로 설명한다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 절대로 알 수 없는 경험의 영역, ‘체용(體用)’의 영역에 그것은 놓여 있는 것 이다.

“그래요. 우리도 저런 적이 있었죠. 우리 열여섯 명 모두.”

두 번 다시 그런 기분은 맛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기엔 아직 너무나 많은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용 형 같은 사람은 가장 밝은 길을 걸어왔던 사람, 지금껏 아마 한 번도 그런 부(不)적인 감정을 겪어보지 못했겠지요. 무척 힘들 겁니다, 그 늪에서 벗어나기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 남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기에 그저 자신들의 삶에 충실하 기 위해 팔짱을 끼고 산보를 계속했다.

아직 평화가 남아 있을 때, 대사형의 눈길이 아직 그들에게 닿지 않을 때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겨야 한다.

막간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몇 번씩이나 거대한 사건에 휩쓸린 그들이기에 더욱더 절감하고 있었다.

이 평화가 계속되기를…..

남궁상과 진령. 두 사람이자 한 쌍의 연인인 이들의 곁을 지나간 용천명은 계속해서 걸었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걷기 시작한 후로 몇 시진이 지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유의미한 게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걷는 것이었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물결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남궁상과 진령의 그림자가 컸기 때문인지 그들은 전혀 그의 인식지평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두 번째로 그의 인식지평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익히 잘 알려진 유명한 후배인 칠절신검 모용휘였다.

전설의 곁에 머무는 자. 검성 모용정천의 손자라는 그 위치는 대소림의 차기 속가 후계자로 지목받고 있는 용천명 자신마저도 때때로 질시의 시선을 감추지 못하 게 할 정도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수려한 용모의 준수한 미남자에 천재 검사로 이름이 높았던 모용휘는 입관 당시 그 실력과 배경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구정회와 군웅팔가회 사이의 세력 구도가 요동칠까 봐 긴급 비상 회의까지 소집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남부러울 것 없는 청 년이었지만 지금 모용휘의 상태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다!”

용천명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만큼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한 상태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았다.

용천명의 느낌은 정확했다. 모용휘 역시 혁중 노인과의 충격적인 면담 이후 번뇌에 휩싸인 채 고뇌의 늪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배경도 외모도 그의 고민에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런 것에 기댈 만한 모용휘도 아니었다.

용천명이 보기에 지금 모용휘에게는 자신의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몸은 여기에 있으되 그의 정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모용휘는 자아를 상실한 듯한 멍한 눈을 한 채 뭐라고 알아듣기 힘든 낱말들을 중얼중얼거리며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저쪽이 대화를 나눌 만한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자신은 고작 삼 일째였지만 모용휘의 저 초췌한 상태로 미 루어보아 닷새는 족히 넘은 것 같았다.

‘항상 결벽증일 정도로 유난히 깔끔 떠는 걸로 유명하던 그가 저렇게 풀린 모습이라니……. 헉! 설마 나도 저런 건가? 아냐! 그럴 리 없어!’

용천명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인사도 없이 그냥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고통 속에서 고민하는 서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일 것이기 에.

외부의 자극에 의해 잠시 반짝 했던 그의 이성은 다시 흐릿해졌고, 용천명은 다시 멍한 눈을 한 채,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 의 발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는 방황하는 바람에 몸을 실었다.

용천명이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빡빡머리였다. 그것도 같은 동문으로 소림의 제자였다. 그는 바로 주작단의 한 명인 일공이었다.

오늘 자신이 만난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한 남자와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왜 그들만 그의 세계 속에 들어왔을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무심한 척해도 무의식 중에 암중으로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인연이라는 건가?”

일공은 불호도 외지 않고 한 손으로 반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법(法)을 구해서는 자신 스스로의 육신도 버릴 수 있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자신 스스 로 팔을 끊어 혜가단비(慧可斷臂)라는 고사를 남긴 이조(祖) 혜가를 기리기 위해 소림사의 제자는 다른 불문의 제자들과 달리 합장하지 않고 한 손만 가슴께로 들 어 올려 인사하는 반장을 했다. 용천명도 마주 반장했다.

“과연 소문대로 과묵하구나.’

하지만 인사 한마디쯤은 있을 줄 알았기에 용천명은 그걸 기다렸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말 한마디도 아깝다는 듯 일공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그를 스쳐 지나 바삐 어디론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황당해져 버린 용천명은 눈을 끔벅이며 멀어져 가는 빡빡머리의 빛나는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러자 오늘 방을 나선 이후 처음으로 용천명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천무학관이 소유하고 있는 땅은 상당히 넓었다. 게다가 뒤에는 조그만 뒷산까지 있었다. 그곳에는 동굴이 몇 개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독자적인 수련을 하고자 하 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인공 동굴이었다. 하지만 다들 검을 휘두르고 주먹을 뻗을 수 있는 연무장이 대세인지라 일공이 찾아온 이곳 ‘벽관동(壁觀洞)’은 그리 인 기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아마 백날 벽 보고 멀뚱히 앉아 있거나,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잠겨봤자 그다지 강해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그래서 이곳은 오늘도 썰렁했다.

청소 관리도 잘 하지 않는지 먼지만 수북이 쌓인 채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일공은 망설임없이 한 동굴로 들어갔다. 그 동굴 앞 쪽만 먼지가 쓸렸는지 아래 바위의 색깔이 다른 곳에 비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가 최근 자주 이곳에 찾아왔다는 증거이리라. 용천명은 기척을 죽인 채 조용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타인의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그러나 같은 동문 인 데다가 학관 선배라는 입장이 그런 거부감을 약화시켜 주고 있었다. 인공으로 파여진 동굴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간 일공은 편편한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명상에 들어갔다.

“면벽 수련인가?”

면벽 수련이란 문자 그대로 벽을 면해 보고 하는 수행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벽관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이름은 거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달마 대사가 구 년 동안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수련법이 바로 이것으로 단순히 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통해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대의 법계를 응시하고자 하는 수행법이었다.

용천명도 무림의 금기를 깨고 여기까지 뒤쫓아오기는 했지만 이 이상 방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역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다리기로 했 다.

면벽하고 있는 일공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세계로 빨려드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용천명을 사로잡았다. 자기 자신이 이 세계와 동화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잊는 망아(忘我)의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사실 무림문파로서 이름이 드높긴 하지만 실제로 소림사는 선종(禪宗)이었다.

‘선(禪)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수히 많은 대답이 나오겠지만 일단 주먹다짐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소림사는 선(禪) 의 구도보다는 무공으로 더 유명해져서 다들 무림문파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소림의 사람도 점차 무공을 연마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채워지다 보니 정신의 유산은 점점 더 그 빛을 바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갔다.

“…배님… 선배님… 용 선배님…….”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용천명은 번쩍 눈을 떴다. 생경한 풍경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여긴 대체…….”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을 불러 깨운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과묵한 일공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헉!”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역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참선 수행은 최고의 수면제였다. 삼 일 밤낮을 괴롭히던 불면증을 일거 에 날려줬으니 말이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난 얼마나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걸까? 이, 이런!’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용천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래 수련 장소까지 따라온 주제에 팔자 좋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정말 일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오늘은 너무 자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 그… 저…….”

여기선 무엇인가 말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용천명은 뭔가를 말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서 무슨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진퇴양난의 곤경에서 용천명을 구해준 것은 오히려 일공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 참선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주셨던 거지요?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아니… 뭐… 감사랄 것까지야…….”

이렇게 되면 사양하는 쪽이 부끄러워진다.

“오랜만이네.”

“예, 오랜만입니다.”

같은 소림의 제자로서 이 둘은 아는 사이였다.

“무엇을 바라본 건가?”

“제 자신을 바라보았지요.”

멀뚱히 벽만 바라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네 자신?”

“예, 제 나약한 자신이 보였습니다.”

“자네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면벽을 했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제 자신이 보인 것은 그 과정의 일부일 뿐이지요.”

“일부? 그렇다면 자네는 무엇을 위해 면벽을 한 건가?”

그러자 일공은 오히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하다니?”

양쪽 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대화가 평행선을 긋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의사 방향을 틀어야 했다.

“물론 더 강해지기 위해서이지요’, ‘보다 더 강한 무공을 손에 넣기 위해서입니다’와 같은 그가 기대했던 류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달마 조사님을 보다 잘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달마 조사님을?”

“예.”

“그렇다면 더 잘 이해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위대하신 달마 조사님께서는 많은 무공과 그에 관련된 많은 무서들을 남기셨지요.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연구된 지금까지도 그분의 가르침이 완전히 파악된 것 은 아닙니다. 그분이 남기신 ‘역근경’과 ‘세수경’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석이 분분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남기신 많은 무공들 중 상당 부분이 실전 상태나 다름없 는 상태에 처해 있지요.”

“그러나 그분이 저술하신 무서의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온전히 전해져 오고 있네. 장경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엄중히 보관된 채 말일세.”

그러자 일공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은 가르침의 편린이 구결과 도안이라는 미미한 형태로 종이 위에 남아 있는 것들일 뿐이지요. 현세에 인간의 몸을 빌어 나타나지 않는 무공은 그저 이론일 뿐입니다. 그것이 실전 상태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현세에 드러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경험될 수 없는 점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동일했다.

“그것과 면벽이 무슨 관계가 있나?”

“전 참선(參禪)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선이란 앉아서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선불교의 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가장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수행정진 방법 이었다. 물론 방법의 정확성이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니, 무공수련 중이 아니었던가?”

일공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자기 공부 중이었지요. 강호란 곳은 원체 무(武)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그분의 신화경에 든 무공이 더욱 부각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는 중원 선(禪)의 창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는 범인(凡人)으로서 어찌 그 가르침의 핵심을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소림사가 그저 손과 발만 휘두르고 무공한답시고 청석 바닥이나 부수고 금강나한(金剛羅漢)이랍시고 온몸에 동을 칠하고 이마로 돌이나 깨는 차력사들의 모임은 아니지 않 습니까? 소림의 정수는 ‘선(禪)’에 있다고 전 믿고 있습니다.”

“평소에 과묵하기로 이름난 자네가 입을 여니 어떤 변설가보다도 더 신랄하군. 그래서 자네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가?”

“전 그저 달마 조사님을 만나고자 할 뿐입니다.”

묵언 수행 같은 것인가?

“그럼 달마 조사님을 만나서 어쩌려는 건가?”

궁금증이 치민 용천명이 물었다.

“죽여야지요! 아미타불!”

일공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죽여… 뭐… 뭐라고?! 콜록콜록콜록!”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용천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 돌발적인 충격에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이 멎지를 않았다. 가슴을 두드려도 진정될 기미가 없자 용천명은 몇 군데의 혈도를 짚어 겨우겨우 기침을 진정시켰다.

“그것참 흉험한 이야기로군. 자네, 제정신인가? 아무리 봐도 소림의 제자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로군. 지금 그 한마디만으로도 나는 자네를 계율원으로 소환 할 수 있네. 그걸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그 검을 지니고 있는 한 언제든지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그런 흉사를 입에 담는가?”

용천명이 명백한 비난조로 그를 힐난했다. 그러자 일공이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지요. ‘신을 만나면 신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어, 어흠! 그건 참… 과격한 발언이로군.”

뼛속 깊이 불제자인 그로서는 거부감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도 했지요.”

또 무슨 말? 왠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에 용천명은 침묵을 지켰다.

“……”

그러나 그 속뜻이 일공에게는 전해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야, 이 바보 땡중아!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이 필요하지. 하지만 강을 건넜는데도 그때도 뗏목이 필요할까? 강을 다 건넌 다음에도 굳이 힘들게 그걸 끌고 다 닐 필요가 있을까? 난 부처님이 ‘나를 숭배하라, 우민들아!’라고 설법하신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부처님을 우상화하는 것은 훌륭한 영업 전략이 라고 생각해. 이윤 창출에도 유리하고 이해하기도 훨씬 쉽지. 그 점은 나도 감탄하고 있어. 선점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잖아. 돈만 많 이 내고 구원받는다잖아. 얼마나 좋아? 너희 스스로 부처가 되어라라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보다 알아먹기도 쉽잖아? 뭐, 인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직 접 자진해서 시범까지 보여주신 부처님한테야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는 장사가 잘 안 되긴 할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냥 뭐 그렇다는 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 그런 불경스런!”

용천명은 오늘에서야 마침내 불문(佛門)의 적(敵)을 만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분개했다.

“예,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수행 도중 만난 신도 부처도 인간 스스로가 신과 부 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이지요. 확실히 그 사람 말대로 부처님이 위대한 것은 그분이 신이 아닌 인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나?”

“예, 부처님을 존경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신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의 한계지평을 신의 영역까지 확장시켜 준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업적이라고요. 공자나 노자나 장자 역시 그런 면에서 진정으로 존경하고 본받 을 만한 선구자들이라고요. 천 몇 년 전에 서쪽에서도 비슷한 일을 한 사람이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했지요. 그곳은 비단길을 지나 고비사막을 건너 천축보다 더 먼 곳이라 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있자 이번에는 용천명 자신이 혼란스러워졌다. 다들 너무나 생소한 관점들이라 도저히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달마 조사님 그분이 쌓은 진리의 탑은 금강석처럼 단단하네. 자넨 소림이 쌓은 그 천 년의 권위에 도전할 셈인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위협적인 어조로 화내는 것뿐이었다.

“금강석을 세공할 때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일공의 반문에 용천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강석(다이아몬드). 보석 중의 보석, 절대 불변의 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떠한 강철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지 고지순의 강함. 때문에 진리의 표상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금강석이 어떻게 세인의 입맛에 맞게 세공되어지는가? 인간에게 보여지는 것이 원석 그대로인 것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금강으로 금강을 다루는가? 보석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고 관심사도 아니었다.

“모르네.”

일공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진흙입니다.”

“진흙?”

용천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믿기지 않으십니까?”

장난치나? 진흙이라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흙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흙이었다.

“가장 부드러운 토(土)로 가장 단단한 토(土)를 다스린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자연의 세계입니까?”

일공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능유제강(能柔制强)이라는 건가?”

일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단단하다는 물질이라 불리우는 금강석 역시 가장 부드러운 진흙에 깎이는 법입니다.” 용천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찬란히 빛나는 금강석이 되기보다 금강석을 연마할 수 있는 진흙이 되겠다는 것인가?”

일공은 그저 미소로써 물음에 대답했다.

“오늘은 너무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비록 묵언(默言) 수행자는 아니지만 많은 말은 진심을 훼손시키기도 하지요.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용천명도 역시 편수로 합장하고는 불호를 외웠다. 그의 몸짓은 매우 경건했다. 그는 일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나이인데도 그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올랐을까? 무공 실력이라면 자신 쪽이 위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공부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용천명은 자신이 그동안 알고 왔고 집착해 왔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전율이 그의 사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 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고 있었던 것이다. 계탁이 씻겨 나가자 눈이 떠졌다[開眼].

이제 다시 시작이었다. 그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용천명은 지금껏 좌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앞길은 언제나 찬란한 광채로 휩싸여 있었고 어떤 고난도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다섯 살 때 소림사 이대장로 중 한 사람인 공심(心) 대사의 손을 잡고 산문에 들어선 이후 그는 정식으로 소림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불도에 귀의한 것은 아니 었다. 공심 대사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그의 머리를 밀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할 수 있을 만큼 판단력이 선 뒤에 스스로 삶을 결정하라는 배려였다.

공심 대사의 배분은 실제로 소림 방장인 혜정 대사보다 한 배분 더 높았다. 동배분의 공허 대사를 제외하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은 소림에 없었다. 또한 공심 대사 는 숭산에서 소림 무학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소림 무학의 인간 보고라 할 만한 고승이었다. 소림 무공의 정수는 그 심오함이 지극했지만 총명하고 노력할 줄 알았 던 용천명은 마른 솜이 물을 흡수하듯 소림의 절학들을 일신상에 흡수해 나갔다. 소년은 사부님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자신이 그분의 예상보다 더 빨리 무공을 터 득하고 이해하면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노안에 띠며 기뻐해 주었다.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는 더욱 열심히 했다. 심오 난해하던 소림의 절학도 그를 곤란에 빠뜨 리지는 못했다.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그의 성취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것이었고, 그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그보다 십 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사문의 형제들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소림 역사상 최연소로 소림십팔나한관(少林十八羅漢關)을 통과했고, 이어서 일 년 후에는 나한관보다 한 단 계 위인 ‘소림사대금강관(少林四大金剛關)’을 또다시 최연소로 통과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소림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십팔나한조차 그보다 한 수 아래임이 증명되자 소림은 또 한 번 경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림의 정신을 일통한 기재가 나왔다며 연신 불호를 읊조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감사의 게송(偈頌)이 소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제 그의 상대가 될 만한 이는 사대금강과 소림 방장, 그리고 사부님과 사숙님 정도뿐이었다. 그의 재능에 탄복한 사문으로부터 소림사대지보(少林四大至寶)인 ‘대환단의 복용 허가가 내려졌다. 소림은 이번 기회에 용천명을 앞세워 그동안 잃어가고 있던 소림의 위신을 한꺼번에 회복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선종의 사람이 라면 세속의 평판이나 명예 따위에 심신을 더럽히지 말고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 은 없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혹시나 있다면 그들은 항상 백 보 안에 대머리가 없는지 신경 쓰고 다녀야만 할 것이다. 백보신권(百步神拳)에 원거리 저격(狙擊)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소림의 생각은 주효했다. 용천명은 단숨에 무림의 영재들이 죄다 모인다는 천무학관에서 가장 빛나는 신성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창천룡이라 부르며 구룡의 으뜸에 놓았다. 구파의 기재들이 그를 중심으로 하나둘 모여들었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파의 영재 모임인 ‘구정회’를 설립하여 사문의 기 대에 부흥했다. 팔대세가와 군소방파의 영재 모임인 ‘팔가회’와 사이가 좀 안 좋긴 했지만 그에게는 팔가회주 마하령의 그런 모습이 오히려 귀여워 보일 따름이었 다. 아무런 문제도 될 게 없었다.

그의 입지는 흔들림없는 단단한 반석 위에 서 있었을 터였다. 그의 앞길에 언제나 부처의 가호와 빛나는 광채로 가득 차 있었을 터였다. 좌절이란 이제 그와는 인 연이 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했던가? 그는 숭산도 아닌 화산에서 생애 처음으로 좌절을 맛봤다. 좌절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탓일까? 겨우 한 번 이라고 되뇌어도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상 최연소로 소림십팔나한관을 통과할 때도 요즘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힘들기는 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용천명의 떨리는 시선이 자신의 무릎 앞에 은은한 녹빛으로 빛나는 한 자루의 검을 향했다.

‘사부님…….’

하산할 때 속가의 모든 권속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권위의 상징인 저 녹색의 보검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고색창연하던 그 꿈도 지금에 와서는 장마철의 잿빛 구름처럼 빛이 바래 있었다.

자아(自我)에 대한 확신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화강암처럼 단단한 암석인 줄 알았는데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고운 모래라니… 나도 참 한심하군, 한심해.”

무림 최고의 성지 소림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 부르며 치켜세워 주고 내일을 짊어질 기재라며 아껴주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소림사의 제자라는 사 실에 긍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ᅳ소림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할 것!

그 약속을 그는 깨뜨리고 말았다. 그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화산지회에서 천무삼성과 직접 겨루어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좌정관천(坐井觀天)하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우물 안 개구리라도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는 몰라도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는 안다고 했는데 그의 우물은 뚜껑마저 덮여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무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한 마검익 추명이라 했던가. 그와도 상대를 했지만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다. 그저 승기를 잡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인이라는 대공자 비는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녹옥여래신검, 달마십삼검은 불살의 검이다. 녹옥여래신검을 지닌 자는 검을 뽑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결과는 어 떠한가? 검은 뽑혔고, 피를 묻혀야 했다.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도 어떤 소득도 없었다. 그는 그저 방관자에 불과했다.

용천명은 조용히 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가부좌를 튼 채 포개진 양손을 단전 위에 올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 다음 그는 조용히 자신의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이르면 무엇을 보게 될까? 지금까지 익히고 있던 무공이 모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까? 가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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