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서신
-오후의 낮잠
칠봉(七鳳) 중 한 명인 아미일봉 진령 앞으로 한 통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따뜻한 햇살이 겨울의 끝 자락을 잠식해 가는 초봄의 늦은 오후였다. 그녀는 그때 뇌전검 룡이라는, 대사형 비류연의 표현대로라면 요란무쌍찬란한 별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궁상 떨기가 주특기인 연인 남궁상과 나란히 정원을 거닐며 산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천무학관 곳곳에는 각양각색으로 지어진 정자와 자연석을 이용해 아름답게 꾸며진 연못과 잘 가꾸어진 나무와 싱싱한 초록색 풀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들이 많이 있어 연인들의 각광을 받고 있었다. 진령이 서찰을 건네받은 곳은 그런 곳들 중 하나인 월영정이었다.
서서 읽기가 어색했는지 정자 안으로 자리를 옮긴 후 서둘러 서신을 열어본 진령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누구에게서 온 서신일까? 혹시나 다른 남자에게서 온 것은 아닐까? 이름에 걸맞게 궁상맞은 상상에 정신을 혹사시키고 있던 남궁상의 의심을 그녀는 화사한 미소 와 함께 즉시 불식시켜 주었다.
“상, 이것 보세요. 고모님께서 이곳으로 오신대요!”
갸름한 그녀의 우윳빛 얼굴 위에서 기쁨이 호수 위에 비친 빛의 파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당신 고모님이라면 그……?”
진령은 미소 안에 긍지를 담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그분이에요!”
그 대답만으로도 남궁상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지금 아미파에 계시는 게…….”
물론 여기 파양호 옆에 위치한 남창에서 사천까지는 거리가 좀 되긴 해도 왕래조차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령의 고모라면 바로 ‘그 사람’, 아니, ‘그 분’이었다.
칠봉의 한 명으로 아미일봉이라는 칭호를 가진 진령보다 수십 배나 더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는 희대의 여걸. 또한 그녀는 진령의 동경의 대상이자 목표이기도 했 다. 같은 아미파의 제자이면서도 차기 아미파 장문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아미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아미신녀(蛾眉神女)!”
무심결에 흘러나온 남궁상의 목소리에는 경외감이 깃들어 있었다. 충분히 외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검경(劍境)의 조화에 있어서는 아미제일이라고까지 칭해지 는 여장부, 덕지덕지 붙은 직함을 떼고 진짜로 붙으면 그 실력은 장문인인 혜심 사태조차 초월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여고수, 강호 뭇 남 성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미모를 지니고도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은 철의 여인, 절벽 위의 꽃, 하늘 위의 별.
사천성의 대도에 위치한 ‘진가(陳家)’는 대대로 아미파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깊고 단단한 인연을 맺은
때로 무식한 데다가 잘못된 교육 때문에 과격하기까지 하다. 특히 알량한 남성 우월주의에 입각해서 펼쳐지는 망상력은 정말 짜증과 피곤함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 다.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지. 게다가 말은 또 왜 안 통하는 건지.
직접, 명확하게, 의심할 여지 없이 확고한 대답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조해서 받아들이는 족속들이 있다. 분명히 인간의 언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데도 언제나 의 사소통은 되지 않는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화도 안 통하는 저능아와 맺어지고 싶은 마음 따위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거참…….”
남궁상의 감탄 아닌 감탄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진령은 계속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안부 편지였다. 그동안 만난 지 오래되었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검술에 진전은 있었는가 궁금하다는 그런 내용 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최근에 검도에 작은. 깨달음이 있어 조금 진보를 보았다고 적혀 있었다.
작은 깨달음이라니…….
“이번에는 정말 큰 성취를 얻으신 모양이구나. 정말 이분이 이룬 성취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어지간해서는 쓰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런 그녀가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썼다. 그것만으로도 뭔가 하나의 대사건이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진령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높은 목표였는데 이 목표는 언제나 멈춰 있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쫓아가는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말이다.
‘뭐, 그렇기 때문에 존경하는 거지만.
한시도 자기 개발과 발전을 멈추지 않는다. 주위에서 아무리 떠받들어 줘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절대 안주하지 않는다.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애초에 다른 것이다. 그러니 범인의 칭찬 따윈 전혀 흥미가 없다.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것은 초인의 영역 그 너머였다.
“지금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사실 그 정도면 이미 충분히 초인이라 불릴 만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더 강해질 데가 남았다는 걸까?
정말 기가 막혔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마구잡이로 앞에서 뛰어가 버리면 뒤쫓아가는 후배들은 숨이 차서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배려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힘들다는 것을 진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고모는 만일 뒤쫓아오는 이가 지쳐서 후들거리거나 멈춰 버리면 떨궈놓은 채 걸음을 더 빨리해서 저만치 앞서 나가 버릴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자기 연마만으로도 벅찬데 후배까지 돌볼 시간이 어디 있어!’라고 불평 불만을 터뜨릴지도 모른 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 단을 읽어 내려가던 진령의 표정이 한순간에 싹 바뀌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얼굴의 표면 위로 떠오르며 기이하고 복잡한 감정의 문양을 그려냈다.
조금 전 기쁨에 들떠 있던 생생한 모습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래요, 령?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나요? 안색이 나빠요. 서신에 뭐 안 좋은 이야기라도 적혀 있나요?”
이 갑작스런 변화에 놀란 남궁상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 그는 근심 걱정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인재였다. 지금이야말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할 기회라 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근심 걱정도 한동안은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남자, 남궁상이었다.
“휴우우우~”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일을 어쩌지…….?
농담이라면 좋으련만, 자신의 고모가 농담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절망했다.
진령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앞을 향한 채 팔만을 옆으로 뻗어 남궁상의 코앞에 서신을 내밀었다.
남궁상은 잠시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를 향해 내밀어진 작고 가녀린 손에 힘껏 쥐어진 서신과 이제는 그의 시선을 피해 땅바닥을 향해 있는 진령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읽어봐도 괜찮아요?”
그녀가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며 승낙의 표시를 했다.
“음, 어디 보자.”
남궁상 역시 조금은 궁금했던 차에 잘됐다 싶어 냉큼 그것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우리 귀여운 아령이에게.
그동안 잘 지냈니? 고모도 잘 지낸단다. 네가 천무학관에 입관한 후로 사 년. 너의 웃음을 본 지도 벌써 사 년이 흘렀구나. 그래서 이번 만남이 더 더욱 기대된단다. 너의 사매인 유란이도 이번 길에 함께 가 게 될 것 같구나. 그 아이가 이번에 사문의 추천을 받아 천무학관에 입관하게 되었단다. 너하고는 고작 일 년 터울인데 많은 차이가 나고 말았구나. 나도 그 아이를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는 데…(중략)…
궁상은 상처받고 말았다. 주제에 남자라고 사내대장부의 자존심이란 게 그에게도 있긴 있었 던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그는 진령이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령은 안이한 위로로 현실을 왜곡할 뜻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는 그런 의지가 잔뜩 들어가 있었 다.
“아니요. 그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해요. 게다가 그분에게는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거든요.”
그 버릇이 언제나 작은 문제를 태산만큼 크게 키우는 원흉이었다.
“나쁜 버릇이라뇨?”
“그분은 손속에 사정을 두실 줄 몰라요. 거의 언제나 전력을 다해 부딪쳐 버려요. 좋게 말하면 진지하고 나쁘게 말하면 인정사정없죠.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오히 려 더 가차없으면 가차없었지 사정 봐주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 ‘나쁜 버릇’은 오늘날의 그녀를 있게 해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아무리 남궁상이 구룡 중 한 명으로 뇌전검룡이라는 분에 넘치는 별호로 불리우고 있기는 있지만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험난한 강호의 누차에 걸친 검증을 받아온 아미신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 과연 당신이 그분의 연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칠변만화(七變萬化)-일곱 번의 변초로 만 가지 변화를 그 안에 담는다고 해서 불리워진—라 고까지 불리우는 그분의 연환기를? 천하오검수 중 유일한 여류검객인 아미신녀 진소령의 검초를?”
그렇다. 아미신녀 진소령은 여성의 몸으로는 유일하게 천하오검수에 이름을 나란히 올린 천재 여검객이었다. 한마디로 빙검 노사과 수준에서 논의되는 절정의 검 객이라는 이야기였다. 아직 남궁상에게는 손에 닿지 않는 별이었다.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하겠죠?”
“어머,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네요?”
“현재를 부정해 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남궁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건 대사형의 말?”
“그렇죠. 그 사람이 내 뼈에 새겨 넣은 말들이죠.”
“…우리 모두 그랬죠.”
현재는 과거의 바탕 위에 서 있고 현재는 미래의 바탕이 된다. 이 역사의 순환 고리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현재의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 도피였고, 현실의 삶이란 무대를 떠난 이에게 쳐줄 박수 따윈 설령 신이라 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극기(克己)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럼 우선 어떻게 해야 하죠?”
남궁상이 걱정과 초조함이 역력한 얼굴로 진령에게 물었다. 일일이 타인에게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머리를 먼저 짜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실로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게 죄라면 죄. 진령은 속으로 다시 한 번 무한의 한숨에 하나를 더 보탰다.
“글쎄요…….”
애인한테 물어보면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기라도 한다는 건가?
이런 한심한 남자는 일찌감치 차버리는 게 좋을 텐데…….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죄인이었다.
“어,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죠?”
강해지기 위한 동기로는 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지만 그런 것에 체면 세울 때는 아니었다.
때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야 겨우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남궁상이 안절부절못한 채 고민에 빠져들었다. 당황한 채 우왕좌왕하며 흐트러진 마음으로 제대로 된 타개책을 마련하려는 그 용기는 실로 가상했다.
아미신녀 진소령이 요구하는 수준은 상당히 높을 게 분명했다. 그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다면 최소 퇴출이고, 최악의 경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사망(死亡)이 었다. 그 경우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대사형에게 부탁해 볼… 허걱!”
난마(亂麻)처럼 뒤엉킨 번뇌의 사고 끝에 나온 한마디. 무책임한 주둥이에서 무심결에 흘러나온 말의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남궁상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순 식간에 온몸이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버린다. 그나마 핏기가 남아 있던 얼굴에서 색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데는 눈 깜짝할 사이면 충분했다. 그가 받은 정신적 타격은 그만큼 컸다. 과거의 악몽이 망각의 둑을 허물고 물밀듯이 밀려왔다. 꾹꾹 묻어놨던 기억의 지반을 꿰뚫고 거칠게 분출한다.
“지금 그 말… 진심이에요, 상?”
진령은 경악으로 휘둥그레진 봉목으로 남궁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조금 감동하고 말았다. 남궁상이 자신을 위해 그런 끔찍한 위험(!)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몸을 던질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에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 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뇨. 설마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지만 그런 짓까지 한다는 것은.
감격에 겨운 물기 어린 진령의 눈빛이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쑥 사신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안 될 말이지, 안 될 말이야.”
남궁상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비록 찰나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가 가져다준 충격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당황하긴 당황했었나 봐요. 해선 안 될 말을 하다니 말이에요. 그것은 인간이 걸어갈 만한 길이 아니에요. 령도 알잖아요?”
“몰라요!”
진령의 대답은 차가웠다.
남궁상은 조용히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책망했다.
“이렇게 비통할 수가! 내가 잠시 정신이 엇나가서 혼돈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구나!’
“그럼 포기하겠다는 건가요? 앞으로 나갈 길이 있는데 여기서 포기하겠단 말이에요? 당신에게 저는 겨우 그만한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요?”
“그, 그건…….”
말문이 막혀 버린 남궁상은 가타부타 대꾸도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를 책하며 가슴을 쳤다.
“에구구! 나도 참 제정신이 아니었지. 아무리 무의식적이라 해도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생각을 다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그런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해결책 따위 는 저만치 접어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때인 것을!’
꼭 지옥까지 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살아서도 분명 한줄기 구원의 빛은 틀림없이 그의 머리 위를 비춰주리라.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만일 대사형에게 단련받는다면…….?
그다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확실히 강해지긴 할 것이다. 그 점만은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었다. 확신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줄 자 상함(?)이 저쪽에는 충분히 겸비되어 있었다.
그 섬뜩하고 전율스런 자상함이 떠오르자 갑자기 오한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저기 만일 그렇게 되면 고모님을 만나기도 전에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그 경우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싫어요?”
진령이 물었다.
“당연하죠!”
남궁상은 주먹을 불끈 쥐고 피를 토하듯 속에 담겨져 있던 마음의 퇴적물을 뱉어냈다.
“대사형의 그 비비 꼬인 지랄 맞은 성격을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신기하네요! 그건 미친 짓이에요! 대사형에게 부탁이라니!”
그의 몸이 격렬한 흥분으로 심하게 떨렸다. 혀 뿌리가 끊어지고 턱 관절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수십만 단어를 내뱉어도 마음 깊은 곳에 쌓인 이 울분을 모두 토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사자보다 사납고 여우처럼 약삭빠르고 독사보다 교활하면서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도박은 밥 먹듯 하고, 관심있는 것이라고는 우리들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잘 괴롭힐 수 있을까 매일매일 틈날 때마다 궁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요! 틀림없어요! 그 인간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인간이라구요! 그 괴 물을 인간이라고 명명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모독입니다!”
“흐흠!”
한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 단순한 미소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꾼 다면 그 미소의 의미에 대해 한 번쯤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 미소의 주인이 길게 기른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조금 섭섭한걸.”
세상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다.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년 비류연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부터라고 묻는다면 서찰을 뜯는 소리부터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어디서라고 하면 그들의 머리 위에서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엿들은 거냐고 하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용의가 있었다.
선객(先客)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그가 거기 있었던 것이 필연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단지 날씨가 좋아서 맛있는 낮잠이나 즐겨볼까 가 볍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가 좋아하는 여러 낮잠 자는 장소 중 하나였다.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일광 조절, 단잠을 깨우지 않을 만큼의 조용함, 눈을 감아 민감해진 귀를 즐겁게 해주는 바람과 나무들의 군무(群舞) 소리, 그리고 완벽한 독립성.
월영정의 정자 위는 한가로이 오수(午睡)를 즐기기에 더없이 운치있는 장소였다. 잠자던 사자를 깨운 것은 오히려 남궁상과 진령 쪽이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참담한 실책에 혀를 깨물고 싶었으리라.
그렇다. 비류연은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처음부터! 어디까지? 끝까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남궁상과 진령은 세상살이를 너무 얕봤다.
그들은 지금까지 재앙신의 코 아래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쯧쯧,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은 없는데.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언제나 도와줄 것을.”
기(氣)를 이용해 주위에 방음막을 펼쳐 놨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바로 아래라 해도 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마음껏 중얼거릴 수 있었다.
“이거 다시 내가 나서야겠군.”
사랑스런 제자 겸 사제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우게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자신의 제자 겸 사제가 누군가의 시험에 턱걸이도 못하고 탈락하는 것은 그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약간의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할 용의가 있었다. 조금 수고롭겠지만 무시당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받아 주지 않으면 이쪽이 곤란하다. 그런 허약체를 자기 손으로 길렀다고 여겨질 것을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씨익!
“좋아, 일이 재미있게 되겠군.”
재앙이 흉험하게 미소 지었다.
여러 가지 계획을 머리 속에서 짜내며 비류연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참, 그런데 궁상이 한 놈만 신경 써주면 나머지 아해들이 편애한다고 질투하지 않을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인기인은 언제나 괴로운 법이라며 비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너무 풀어줬으니 이제 슬슬 조금 더 엄하게 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마침 화산지회에서 제자들에게 조금 실망했던 고로 단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 다. 때마침 좋은 기회였다.
이 순간 남궁상과 진령을 포함한 주작단 열여섯 명은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떨어야 했다.
“왜 그래요, 상? 갑자기 몸을 떨고.”
“아뇨.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어서요.”
“사실 저도 방금 그랬어요. 차가운 얼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조짐이 좋지 않았다.
“별일없으면 좋으련만……..”
때로는 이성보다 육체의 직감이 더 잘 맞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에 적중하기 전에는 중간에 되돌아오는 법은 결코 없다.
특히 비류연이란 인간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화살이 날아가다 맥없이 떨어진다 싶으면 쏘아진 화살 꽁지에 가차없이 채찍질을 할 인간이었다.
물론 비류연에 대한 그의 평가는 진령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도 그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자신에게 남아 있는 뒤가 보이지 않는 외길을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겁이 난다는 건가요?”
진령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남궁상을 힐책했다.
“아니, 그러니깐…….”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남자는 없었다.
“똑바로 말해 보세요, 남궁상! 피하지 말아요. 나를! 그리고 당신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서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자신이 자꾸만 외면해 왔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래요… 사실은 겁이 나요.”
고개를 푹 숙인 채 남궁상이 말했다.
“나는… 대사형이 무서워요. 그 사람하고만 있으면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자꾸만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아 두려워요.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거짓으로 가득 찼던 세 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 세계 속에서 안주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하는 연약한 마음을 가진 가련한 인간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진령은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겁먹지 말아요. 사실 나도 대사형이 무서워요. 만족이란 걸 모른 채 사람의 한계를 자꾸만 넘어서려 하는 그 집착이 두려워요. 하지만 우린 이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요. 안주하고 싶어도 이미 안주할 수 없어요. 이미 우린 쉴 곳을 잃었으니까요. 더 이상 어린애인 채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함께 앞으로 가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그것은 그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따뜻한 한마디였다. 이런 여인을 만날 수 있었던 자신은 행운아였다.
“정말 그래 주겠어요, 령?”
“물론이에요, 상!”
““잘들 논다!”
“그렇죠… 잘들 놀죠… 어?”
의아함을 느낀 남궁상이 붕어처럼 눈을 꿈뻑이며 진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녀는 혼인도 하기 전에 미망인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땅에서 솟아난 것일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불쑥 눈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 두 사람도 익히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가 앞머리에 가려지지 않은 입을 열었다.
“실로 화려한 평가, 솔직한 의견 고맙다, 궁상아. 많은 참고가 되었다.”
“헉!”
남궁상과 진령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흐르던 눈물도 삽시간에 말라 버렸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 참고가 된 걸까?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노학이 어떻게 됐더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뇌리 속에 되살아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