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뇌광, 번뜩이다
-길, 막히다
길이란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간에, 일단 걷기로 결정했다면 그 길을 걸으면서 만나게 될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미리 각오를 굳히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 각오도 없다면 그 길은 아예 포기하는 게 낫다. 이따금 결심도 없이 가다가 중도 복귀하거나 주저앉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모두 지나친 무대포 정신으로 심신을 무 장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중양표국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나무가 좌우로 빽빽이 들어서 있는 울창한 산길이었다. 많은 짐을 지고 산길을 지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지만 목적 지로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이 근처에 있는 산길 중 가장 넓고 가장 낮으며 가장 정비가 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세심함과 면밀함과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까마득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관부의 토목 담당 부서가, 그렇게 빈둥빈둥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세금을 축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산중 도로가 주변 산행로에 비해 지나치게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산적들이 남몰래 삽 들고 내려와 대규모 정지(整 地) 작업을 하며 도로를 정비해 놓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관부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며 부정했지만 사실 이 주장은 대부분 진짜였다. 그렇다면 산적들이 백 성의 편의를 증진시키고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이런 훌륭해 보이는 짓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며 인과론의 절대성을 강력히 소리 높여 주장하긴 했지만 원인없는 결과가 있기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몇몇 특수한 경우 빼고 이런 평범하고 지극히 세속적이며 평범한 일반 상황의 경우에는 보통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직업윤리와 상통하지 않을 법한 이런 일을 솔선수범해서 행한 데는 어떤 특별한 이유, 즉 인과(因果)의 원인(原因)이 존재했다. 꽤나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정평이 난 이 근방의 몇몇 산채의 산적들이 갑자기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개과천선해서 남들이 보지 않을 때마다 선행을 하고픈 참을 수 없는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뇌가 근육으로 들어차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이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격언에 감화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런 유의 말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약탈이나 살인, 방화 같은 나쁜 일을 할 때는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증거 인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구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형편이었다.
이자들에게 있어 험난한 산행(山行路)의 정비 작업은 일종의 영업 전략이었다. 그들에게 이 도로는 중요한 장사 수단이었고, 보다 많은 고객을 유치하자면 ‘목’도 중요하지만 다른 산행로들과 차별되는 매력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택한 판매 전략이 바로 도로 정비였다.
이곳의 산이 다른 곳보다 낮은 것은 하늘이 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목을 보고 ‘교통의 요충지가 될 것을 예상하고 둥지를 튼 것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더욱더 많은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산로를 정비했다. 그리고 약간 치졸한 수법이긴 하지만 다른 산의 산행로 앞에는 아름드리 나무를 싹둑싹둑 베어서 앞길을 막거나 하 는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산적이었고, 그런 야비한 수법은 그들의 직업관과 매우 합치했다. 이 도로 정비 전략과 치졸한 수법은 생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용의주도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영업을 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렸 다. 처음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면 아마 이 길에 대한 인상이 나빠져서 손님이 대폭 감소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길을 이용하는 통행객들이 많아지기를 기다렸고, 사 람들이 이 길에 익숙해지자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상인과 표국을 상대로 영업을 개시했다. 그들에게는 꽤 그럴듯한 대의명분도 있었다.
-이 산길을 정비한 사람은 우리들이니 누구든 이 길을 통과하려면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상인들이나 표국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전문가였다. 장사나 표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고, 그럴 때마다 싸우면 남는 건 산더미처 럼 쌓인 빚더미뿐이었다. 그러니 싸우기보다는 흥정을 하는 쪽이 유리했다. 덤벼오는 산적들과 일일이 맞서다가는 필연적으로 막심한 손해가 야기될 수밖에 없는 터였다. 그로 인한 부담은 고객에게 떠넘기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길까지 닦아놨으니 이쪽 산적들은 그래도 양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 산길은 산적들이 출몰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양표국도 이미 출발 전부터 각오를 하고 나름대로의 통행료도 따로 챙겨왔건만, 그 각오를 헛되이 하고 싶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 오 늘은 다른 날과 뭔가 달랐다.
“국주님! 국주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나도 이상하다는 데는 동의하네, 강 대표두. 하나…….”
장우양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자꾸만 날 두 번씩 연달아 부르지 말게. 한 번만 불러도 나의 귀는 아직 멀쩡하니 자네의 부름에 응할 걸세. 알겠나?”
“예.”
“알면 됐네. 그럼 이제 자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을 말해보게.”
“국주님께서도 눈치채셨겠지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말입니다. 단 한 번도!”
“역시 그렇지? 벌써 세 번째로군. 아무 일도 없는 게 말일세. 나로서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네.”
국주가 가볍게 한숨을 토해내자 실질적인 인솔자인 강 대표두도 팔짱을 낀 상태에서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휴일이라서 쉬는 걸까요?”
노동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때때로 휴식도 필요한 법. 사람을 혹사하기만 해서는 일의 능률이 안 오른다는 것을 안 녹림산채가 체질 개선에 들어갔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장우양은 단호히 부정했다.
“산적들이 쉬어가면서 일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 게다가 벌써 세 군데나 그냥 지나쳐 오지 않았나? 아무 일도 없이 말일세. 단합대회를 간 것도 아닐 테고.”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이때 다가온 진소령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이 산에 들어오기 전과는 한참이나 변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
런데 장우양과 강 대표두가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속닥속닥거리고 있으니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아, 별거 아닙니다, 진 여협. 산에 들어온 이후 아무 일도 없어서 잠시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참이었을 뿐입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안 되는 건가요?”
의아한 얼굴로 진소령이 반문했다.
“물론 아무 일도 없는 게 가장 좋은 일이죠. 하지만 너무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립니다.”
“왜죠?”
납득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납득할 때까지 묻고 또 물어 완전히 해소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다.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모를까 아무 일도 없는데 걱정을 하니 말이죠. 그런데 이게 또 너무 조용합니다. 지나치게 말이죠. 보통 이때쯤 되면 영업소 두세 개는 지나왔을 텐데 보시다시피 아무도 영업하러 나오지 않았지요. 이 정도로 큰 규모의 표행이면 산에 들어오기 오리 전부터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건 확실히 이상합니다. 정기휴일이라 해도 통행세를 징수하는 부하 두세 명은 남겨두었어야 정상입니다. 그게 연중무휴를 주창하는 그들 의 영업 방식이죠.”
“영업소라뇨?”
또다시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 나오자 진소령이 반문했다. 대답한 사람은 장우양이었다.
“아, 영업소란 말이죠…….”
영업소란 산적들이 관리하는 통행세 징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중양표국도 과거 주작단과 비류연이 개입되었던 몇 번의 사투로 인해 녹림으로부터 꽤 악명 을 얻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는 이들은 없었지만 꽤 큰 세력권을 가진 산채는 그래도 적절한 통행세를 요구해 오곤 했다. 이쪽도 함부로 전투에 들어갔다가는 괜 한 인명 피해나 표물 훼손의 위험이 있었기에 적절한 가격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곤 했다. 인명 피해와 표물 훼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얍삽한 산 적들은 세가 부족하다 싶으면 집요하게 표물만을 노리고 손상을 입히려는 경향이 있었다. 표국으로서는 이보다 더 미치고 팔짝 뛸 일은 없었다. 때문에 문제 발생은 항상 최소한으로 억제해야만 했다. 아무리 싸워서 이길 것 같아도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지 않는 게 표행의 정석이었다. 세력만 믿고 날뛰다가는, 십 년 전 세 하나만 믿고 뻐기며 산적들을 경시하던 중원표국이 겪은 ‘복호산의 수난’을 재현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당시 막대한 표물을 싣고 복호산을 지나던 중원표국의 거 의 모든 수레들이 불화살 세례를 받고 전소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훔치기보다 파괴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보여준 일종의 시위였다. 표행에 실패한 중원표국 은 고객에게 엄청난 금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중천의 태양처럼 찬란했던 신용도는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떨어진 신용을 다시 끌어올리는 데는 막대 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그런 꼴만은 사양이었다.
“참 얄궂은 일이지요. 산적들의 영업 행위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장우양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신처럼 평범한 인간은 일상이 깨지는 것에 대해 언제나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것이 비록 나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정도 대규모 표행에 이 정도 긴 여정을 지나왔는데도 아무도 영업하러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표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일 뜨던 해가 뜨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이들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좋은 산적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리는 절대로 없었다. 그러니 기뻐하기보다는 그 다음에 더 큰 재액(災厄)이 찾아올 지 모른다는 걱정이 기쁨을 앞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하늘을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안에 떠는 것도 정신 건강상 그다지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 었다. 하지만 이곳의 터줏대감인 ‘살호채’는 표행을 한 번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
“굳이 영업하러 오지 않는데 찾아갈 필요도 없고 사정할 필요도 없겠지요.”
진소령이 말했다. 사실 그녀는 왜 산적들에게 정당하지 않은 통행세를 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옳지 않은 것과 타협하는 길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역시 찜찜하군요.”
“영업 장소를 옮긴 건 아닐까요?”
진소령이 말했다.
“그렇게 공을 들여 길까지 닦아놓았는데 그럴 리는 없습니다.”
검술에 대해서라면 진소령에게 백 년쯤 뒤처져 있을지는 몰라도 산적들의 생태와 습성은 이쪽이 전문이었다. 자꾸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라 그들을 괴롭혔다. 하 지만 표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그들로서는 지금의 평화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몇 발짝 안 되는 곳까지 다가온 유란이 진소령에게 물었다.
“참 이상해요. 저런 식이면 어떤 경우든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요, 사부님?”
그러자 어느새 곁에 나타난 유은성이 대신 대답했다.
“사람은 자신들의 일상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끊임없이 변하는 만물유전하는 이 세계의 본성이지만, 인간은 모순되게도 안정을 지향한단다. 인간은 안주하
길 바라기에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거든.”
그리고는 왼쪽 옆에 있던 조카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안주하는 자는 발전하지 못한다. 운비야, 너도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사백님.”
그러자 진소령이 말을 받았다.
“어차피 변하지 않는 사실은 끝없이 변한다는 것뿐이다. 기왕 변하는 것 곤()이 붕새가 된 것처럼 크게 변화[化]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유란아, 너희들은 변 화를 두려워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 사부님!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유란이 대답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그분께서는 뭘 하고 계시느냐?”
진소령이 물었다.
“예, 사부님. 표행이 출발한 이후 수레 위에서 계속 주무시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수레가 덜컹거려도 깨지 않습니다. 떨어지지도 않고요.”
만일 한 번쯤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훨씬 더 호감이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부님.”
“뭐가 말이냐?”
“그런 사람에게 왜 그런 존칭을 쓰시는 겁니까, 사부님? 그냥 이상한 할아버지일 뿐 아닌가요? 그런데 사부님씩이나 되시는 분이 왜 그런 경칭을 쓰시며 어려워하 시는 겁니까?”
뾰로통한 얼굴로 유란이 말했다.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답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몽땅 내뱉어 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런..
“그런 건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그녀는 가까스로 참았다. 진소령도 자신의 제자가 이 대답에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는 한마디를 더 덧붙여 주었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미지와 조우했을 때는 항상 주의하거라. 그때는 자신의 본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본능은 때때로 인간이 어설프게 쌓아온 편견에 근거 한 얄팍한 감정보다 훨씬 나은 판단을 내려주니 말이다.”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표행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잠깐 멈춰라!”
그자는 표행의 선두와는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정체불명의 복면인이 표행 앞을 가로막았는데도 장우양과 대표두의 얼굴에는 희색마저 어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 덕분에 갑자기 불안했던 마음이 싹 가시고 여유로운 기분이 든 탓이었다.
“아, 오래 기다렸네. 어서 오시게나.”
먼저 장우양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환영하고 있었다. 표행을 가로막은 살룡대의 수석조장 혈표는 기대 이상의 환영에 잠시 당황했다.
“…..?”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반갑게 환대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혈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언제나 밤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며 악행만을 일삼아온 그가 언제 언감생심 이런 환대를 받아볼 수가 있 었겠는가.
“근데 좀 이상합니다, 국주님.”
“또 뭐가 이상한가?”
장우양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는 평범한 게 좋았다. 그는 평범지향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휘하에 있는 강 대표두는 그의 그런 바람을 간단히 묵살해 버렸다.
“예, 또 이상합니다.”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니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한 걸 멀쩡하다고 말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근처 영업소 중에서 익명 영업을 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만난 산적들은 밉상이긴 해도 다들 얼굴을 드러내고 산적질을 했다. 저토록 시커먼 복면을 쓰고 일하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 산적질이 상 당히 뒤가 구린 일이긴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의 등만 쳐 먹고 사는 힘만 센 바보들이니 그 정도 애교라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합자께선 어느 봉우리에서 오신 분이시오?”
합자란 녹림에서 동업자를 칭하는 은어였고, 봉우리나 덤불은 산채를 의미했다. 장우양은 그가 어느 산채 소속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
이번에는 대답해 줄 만도 하건만 상대는 여전히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진짜… 이상하군.”
장우양은 혹시 상대가 청각 장애자이거나 벙어리가 아닐까 하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세워보았다.
“아이들을 내놓아라!”
혈표가 잔뜩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물론 주… 응? 아이들?”
흔쾌히 대답하려던 장우양의 말이 뚝 끊어졌다.
“아이들? 이보게, 강 대표두. 혹시 이번 표행 목록에 그런 것도 있었나?”
강 대표두가 표물 목록을 한 번 쭉 훑어본 후 대답했다.
“어딜 보아도 그런 품목은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 그런가? 난 또 우리 중양표국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신매매업에 뛰어들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네. 휘유~”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우양이 활짝 펴진 얼굴로 흑의복면인을 향해 말했다.
“들으셨소? 우리 중양표국은 목록에 기재된 물품 이외의 것을 비합법적으로 운반하거나 하는 따위의 신용 불량한 표국이 아니오. 그러니 내줄 것은 아무것도 없소 이다.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없는 걸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물론 표물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해도 돈을 두 배로 줄지언정 표물은 넘겨줄 수 없는 표국의 특성상 넘겨줄 수 없는 건 매한 가지였지만 말이다.
“흥, 거짓말하지 마라! 흔적이 그쪽 표행에서 끊겼는데도 시치미를 뗄 생각이냐? 순순히 아이들의 신변을 인도해라! 그렇지 않다면.. .!”
“그렇지 않다면 어쩔 셈인가요?”
진소령이 불쑥 앞으로 나오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꽤나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진소령의 몸에서 발산되는 살기를 읽지 못했는지 혈표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것참 흥미로운 제안이로군요.”
“흥! 웃을 수 있는 것도 거기까지다!”
척!
혈표가 손을 들어 신호를 하자 매복하고 있던 수십 명의 복면인이 좌우의 풀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조용하던 숲의 공기는 차가운 살기로 가득 차 올랐다. 복면인 하나하나가 모두 범상치 않은 기도의 소유자였다.
“어, 어느 틈에…….?”
유란과 유운비가 당황한 눈빛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진정들 해라!”
유은성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주위를 스윽 훑어보았다.
“어떠냐? 생각이 바뀌었나?”
혈표가 차가운 냉소를 머금으며 다시 물었다.
“이거 참, 식구들이 많다고 굳이 자랑할 것까지는 없지 않겠소?”
장우양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도 이제 옛날의 조그맣던 표국의 국주가 아니었다. 자신은 비록 평범 지향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동안 급성장하는 표국의 주인으로서 그에 걸맞게 그릇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장우양이었다. 그동안 연마된 연륜이 지금의 이런 대응을 가능케 했다. 때로 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표사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진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는 아무리 대가리 수가 많아도 종이 인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표 인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장우양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의 도우심인가. 지금 그에게는 믿을 만한 비장의 수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더욱 투지가 불타올랐다. 천하오검수의 일 인과 점창제일검이 그를 비호하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동안 쌓아왔던 공덕이 빛을 발할 때인 것이다. 선(善)을 잘 쌓은 집에는 반드시 복이 든다지 않는 가. 역시 적선(積善)은 해놓고 볼 일이었다.
“감히 우리의 행사를 방해하겠다는 거냐? 일개 표국 주제에?”
순간 장우양의 이마에서 푸른 핏대가 불끈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외쳤다.
“일개 표국이라니! 말조심해라! 앞으로 삼 년!”
장우양이 오른팔을 쭉 뻗으며 손가락 세 개를 힘차게 폈다.
“장담하건대 삼 년 안에 우리 중양표국은 업계 일위인 중원표국을 제치고 진정한 강호제일표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장우양이 검을 든 팔을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는 맹세했다.
“나 장우양! 저 하늘이 내려다보는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약속한다!”
“와아아아아아!”
그 호기 어린 모습에 사기가 충천한 표사들이 칼을 치켜들며 함성을 터뜨렸다.
장우양은 그 함성을 들으며 자신감에 차 올랐다. 한 판 맞붙어볼 만했다.
“란아, 네가 나가거라!”
진소령이 제자 유란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순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반경 안에 있던, 즉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인해 휘둥그레졌다. 사선으로 서슴없이 제자의 등을 떠민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예, 사부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읍하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란이 대답했다.
“운비야!”
그러자 유은성이 사질 운비를 불렀다.
“예에?”
반문하는 사질 겸 조카에게 그는 단호하고 치명적인 판결을 가차없이 내렸다.
“여자 혼자 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셈이냐? 얼른 준비해 나가거라!”
그는 그다지 ‘예’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오늘 잠자리를 땅 밑으로 이 장 정도는 더 깊게 파야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왕이 아니 기 때문에 삼 장 이상 파는 것은 그만두었다.
“꼭 그래야 하나요?”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백 유은성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휘번쩍거렸다.
감히 진 소저 앞에서 수치를 안겨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단호하고도 견강무쌍(堅强無雙)한 의지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을 통해 이런 상태의 사백에게는 감히 개겨서는 안 되며 그 명령에 다소의 억지가 서려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된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다, 당연히 농담이었죠, 사백님. 그러니 그런 무시무시한 눈빛은 거두시기 바랍니다.”
“재미없는 농담도 농담이라 칭하느냐?”
“얼른 가서 냉큼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 모르기에 오 장 이상 떨어지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괜찮겠습니까? 저런 젊은이 둘만으로?”
걱정스런 어조로 장우양이 물었다.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진정한 실전 경험을 쌓아볼 수 없지요.”
사자의 엄격함이 서린 말이었다.
“앞으로 가야 할 곳은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니까요. 그들이 앞으로 치러야 할 시련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진소령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아니었다.
“유대협.”
“걱정 마십시오, 진 소저. 전력을 다해 보호할 테니. 저에게 이 정도 거리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러나 운이 따라주었는지, 아니면 안 따라주었는지 첫 실전을 향해 심신을 잔뜩 긴장시킨 채 접근해 가던 이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실전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버 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불어닥친 하얀 질풍이 이 두 사람의 앞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하얀 뇌광이 번쩍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