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16화 – 남궁상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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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8권 16화 – 남궁상의 위기

남궁상의 위기

-날아오는 비도

“어이, 궁상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남궁상은 화들짝 놀랐다. 순간 그 목소리가 지옥에서 울려 퍼진 귀곡성처럼 그의 고막을 때렸던 것이다. 겨우 쉴 수 있게 되었나 하고 좋 아했더니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악몽이었다. 남궁상은 마지못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피로에 찌든 눈으로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대사형..

그곳에는 꿈에 볼까 두려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웃고 있는 비류연이 있었다. 자기를 비롯한 주작단 전원 반경 삼십 장 안에 대사형이 있을까 봐 그동안 배워왔던 온갖 감청술을 다 동원하고, 육식동물을 경계하는 초식동물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도 왜 매번 뒤를 잡히고 마는 걸까? 언제나 그는 기척도 없이 그들의 뒤 에 등장했다.

남궁상은 오늘 아침 거울에 비춰졌던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신의 몰골은 영양실조가 걸린 게 아닐까 하고 의심될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퀭한 두 눈 은 피로에 찌들어 있고 눈 밑에 검게 낀 기미는 문신이라도 되는 듯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생기가 돌던 두 뺨은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홀쭉해졌고 색깔은 창백했으며 감촉은 푸석푸석했다. 과도한 피로에 지친 어깨는 무거운 짐이라도 짊어진 듯 굽어져 있었다. 항상 꼬질꼬질한 개방 출신의 노학도 지금의 자신 에 비하면 귀공자였다. 그리고 그를 지금과 같은 시체나 다름없는 꼴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겨우 특훈이란 명목 하의 ‘도살(屠殺)’에서 몸을 빼내 잠시 잠깐의 해방감을 맛보고 있던 이 행복에 겨운 순간을 잔인하게 파괴하며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울상 짓진 말라고. 내가 꼭 나쁜 놈이라도 된 것 같잖아?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겠냐?”

남궁상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미 다 잡혀 먹히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죠’라고 외치고 싶은 게 그의 용암처럼 들끓는 진심이었지만 참았다. 진 실의 순교자가 되기에 그는 아직 너무 젊고 창창했다.

“응, 너도 그거 받았냐?”

남궁상의 오른팔에 차인 금색 완장을 본 비류연이 물었다.

“어? 그러고 보니 대사형도……?”

비류연의 오른팔에도 남궁상의 그것과 같은 금색 완장이 차여 있었다. 완장 안에는 검은 글씨로 ‘천무(天武)’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 썩 훌륭한 감각이라고 할 수도 없고, 별로 멋대가리도 없지만 이걸 안 차면 이걸 안 준다고 해서 말야.”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검지와 엄지로 모종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할 수 없이 봐주기로 했다.”

“입관 시험관에 발탁된 사람은 언제나 이 ‘완장을 차야 한다는 영이 떨어졌으니 따라야죠. 어쩌겠어요. 규칙이잖습니까?”

“근데 내가 궁금한 건 말야, 왜 그런 쓰잘데기없는 규칙을 만들어냈냐 이 말이지. 어디다 쓰려고? 그냥 시험관으로 뽑힌 애들 자랑하라고 준 걸까? 내 생각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이걸 받았을 때부터 계속 뭔가가 마음에 걸렸던 비류연이다.

“설마 이런 간단한 천 쪼가리에 무슨 수작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냥 구분하기 위해서 준 거겠죠.”

“뭐랑 구분하기 위해서?”

“그, 그건…….”

남궁상은 대답할 말이 궁했다.

왜 굳이 시험관들을 따로 확인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누굴 위해서? 무엇 때문에?

‘올해는 입관 요강에 약간의 변동 사항이 있을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할배의 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뭔가 있어.”

“그런데도 왜 계속 차고 계시는 겁니까?”

비류연의 성격에 저걸 떼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얌전히 차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거래니까.”

“예?”

“내가 이 입시 시험관을 맡은 건 거래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그 거래를 내 쪽에서 깰 순 없잖아? 그건 내 사상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아, 그렇군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해가 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사형은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남궁상이 물었다.

“아, 중양표국 남창지국에.”

“거긴 왜요?”

“아, 볼일이 좀 있어서. 어제 표물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거든.”

“뭐 부탁한 거라도 있으셨어요?”

“아니. 이번엔 표물이 무사히 도착했는지만 확인할 뿐이다.”

“중양표국 사람도 아니시잖아요?”

“그럴 일이 좀 있거든. 같이 갈 테냐?”

가면 쫄따구 노릇이나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 간다고 개기면 나중에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당장이야 내색하지 않겠지 만 이 인간은 사소한 일도 절대 잊지 않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마 자신을 불러 세운 것도 다 의도가 깔린 포석이었을 것이다. 아직 자신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이런 일 가지고? 그냥 시간 있으면 가는 거고 가기 싫으면 마는 거지, 이런 쓸데없는 데 고민할 힘이 있으면 남겨뒀다가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쓰라구.”

“아, 아닙니다. 따라가죠. 동행하겠습니다.”

“진짜냐? 정말 가고 싶긴 한 거야?”

미심쩍다는 말투로 비류연이 물었다.

“아니, 예. 물론이죠. 저하고 인연이 없는 곳도 아니지 않습니까?”

비류연은 남궁상을 다시 한 번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래? 그럼 가자구.”

“예!”

***

“유소협!”

여인이 살짝 손짓하며 청년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유 소저?”

유운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유란은 오른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놈들 어때요? 하나는 검도 하나 안 차고 있잖아요. 전신은 허점투성이고 말이죠.”

거의 남자 같은 말투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장신구보다도 검에 서린 검광을 더 좋아하는 그런 여자였다.

“아, 저기 검은 옷과 하얀 옷 말인가요?”

“맞아요. 그 두 사람이에요.”

“괜찮아 보이는군요. 별로 세 보이지도 않고.”

“어떻게 저렇게 허점투성이인 사람이 저 ‘황금 완장’을 찰 수 있었을까요?”

유란이 한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혹시 권법을 쓰는 자가 아닐까요?”

유란은 유운비의 추측을 단박에 부정했다.

“권법을 쓰는 자치고는 소매가 너무 헐렁해요. 각법을 쓰는 자 같지도 않고. 게다가 정신이 있는 놈인지 없는 놈인지… 저렇게 앞머리가 치렁치렁 길어서 눈까지 가려 버리면 시야가 좁아질 텐데도 저러고 쏘다니다니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놈인지 모르겠네요. 틀림없이 약한 놈일 거예요.”

유란이 단정적으로 결론 내렸다.

“확실히 약해 보이긴 하군요. 옆에 함께 있는 백의검객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복식만으로 보면 명가의 제자가 틀림없는 것 같아요. 저 핼쑥한 얼굴은 개방 사람이 아닌가 의심되는군요. 등도 굽어 있고, 패기라곤 느껴지지 않네요. 어느 문파 인지 알겠어요?”

“걸음걸이를 보니 구대문파는 아니고 아마 팔대세가 출신인 것 같군요. 저 복식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남궁세가 같습니다.”

“호호호, 팔대세가라니 더욱 잘됐군요. 우리 구대문파의 실력을 보여줄 기회이니 말이에요.”

아직도 구대문파와 팔대세가 사이에는 경쟁 의식이 잠재하고 있었다. 근 백 년에 걸쳐 쌓인 반목이 하루아침에 풀어지지는 않는다. 과거의 망령이 아직도 현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비판이 무림명숙들로부터 제기되고는 있었으나 아직 비판만 있을 뿐 실천 방법은 미비했다. 과거를 힘껏 떨쳐 버리기에 아직 인간들의 정신 수준은 한참 미성숙했다. 특히 유란이나 유운비 같은 미래를 짊어져야 할 젊은이들이 그런 과거의 망령에 얽매여 사고가 편향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보이지 않는 업의 사슬이 미래로 향해야 할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마음에서 때때로 샘솟는 이 유없는 증오가 먼 과거에 쌓았던 업의 찌꺼기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앗! 모퉁이를 돌았어요!”

노리고 있던 목표물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서 쫓아갑시다.”

두 사람은 자신이 점찍어놓은 사냥감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 스스로 자진해서 지옥의 아가리에 발을 담갔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궁상아, 기억에 있는 애들이냐?”

비류연은 여전히 앞을 바라본 채 물었다.

“아뇨. 없는데요? 대사형 쪽이 아닐까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남궁상이 대답했다.

“나도 기억에 없는데. 기억에 있으면 뭣 하러 너한테 물어보겠냐?”

“그것도 그렇군요.”

“흠, 언제나 있는 불평분자들일까?”

“뭐, 대사형이 길 가다가 습격당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남궁상이 말했다. 일상에서 경이를 느끼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것은 비류연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렇긴 하지만…….”

비류연과 나예린이 동시에 서 있는 것은 도덕 윤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용납할 수 없다고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도 학관 내에는 많았다. 그런 이들이 가끔 잊을 만하면 한번씩 무리 지어 비류연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겨우 두 명이서 쫓아온 적은 없었는데?”

최소한 넷에서 다섯 이상이었다. 이런 조촐한 미행은 최근에 당해본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저렇게 무모한 만용을 부릴 수 있는 애들이 아직 남아 있었나? 역시 너한테 볼일있는 거 아니냐? 너도 이름값 좀 오른 이후로 종종 있었잖아.”

“전 습격이라 불릴 만한 수준은 아니었죠. 그냥 결투 신청 정도였습니다.”

“이겼냐?”

“물론입니다.”

“다?”

“당연하죠. 한 번도 진 적은 없습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졌으면 벌써 학관에 소문이 쫙 퍼졌을걸요? 그만한 이야깃거리도 없을 테니까요. 다들 때는 이때다 하고 잘근잘근 씹었을 겁니다. 주작단의 명성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녀석들이 늘어나더라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저희들은 아직 살아 있잖아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만약 졌다는 소문이 돌았으면 대사형께서 가만있질 않으셨겠죠. 저희도 살아 있기 힘들었구요.”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비류연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떻게 하죠, 대사형?”

따돌리던가 맞서 부수던가 둘 중 하나였다.

“난 뒤통수에 파리 날아다니는 거 질색이다. 왠지 가려워지거든.”

“그럼 결정난 거군요.”

그래! 비류연이 고개를 한 번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이 골목이 끝나기 전에 끝내자.”

“네!”

“어?”

“앗!”

유란과 유운비가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은밀하게ᅳ나름대로 본인들이 생각하기에ᅳ미행하고 있던 대상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 있는 약간 넓은 공간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그 대상들은 감쪽같이 그들의 시야를 벗어났다.

“이런, 쫓아가요!”

“아, 예!”

유란이 다급하게 외치며 경공을 발휘했다. 유운비도 뒤따라 뛰었다. 그러자 약간 너른 공터가 나왔다. 유란은 서둘러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날 찾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란과 유운비는 깜짝 놀라 신형을 홱 돌렸다. 그곳에는 앞머리가 눈을 덮고 있는 남자가 태평하게 돌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부,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방금 사방을 둘러본 그녀였다.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분명히 그때는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마자 나타났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고 싶지만 문제는 그것이 눈앞에서 버젓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성은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릴 미행했지?”

어느새 나타난 얼굴이 핼쑥한 백의검사가 물었다. 그 핼쑥한 얼굴의 검객은 어느새 자신들이 나온 골목 한가운데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용건을 들어볼까?”

비류연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란과 유운비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검을 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선배님! 아미파의 제자 유란이라고 합니다.”

“점창의 유운비입니다.”

아미파와 점창파의 제자라고 소개한 말에 비류연과 남궁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적어도 조무래기는 아닌 것 같군.”

남궁상이 말했다. 비류연의 평상시 말투가 그한테도 조금은 전염된 모양이었다.

“조, 조무래기…….”

유란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언제 기회가 돼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겠는가. 그러나 아직 비류연은 입도 안 연 상태였다.

“아니, 그냥 애송이 맞는 것 같은데?”

“애, 애송이…….?”

유란과 유운비는 각혈할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눌러야 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이 수치를 반드시 되갚아주겠다고 두 사람은 속으로 지킬 수 없는 맹세를 했다. “그래, 용건이 뭐냐?”

비류연의 물음에 유란이 앞으로 나섰다.

“아미의 유란, 그리고 점창의 유운비는 천무학관 입관 희망자의 자격으로 비무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자네들, 승천무제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상태네. 입관 희망자라면 마땅히 그때를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닌가?”

남궁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닙니다. 시험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유란이 당찬 목소리로 항변했다.

“금시초문인데?”

남궁상이 말했다.

“그럼 선배님의 그 오른팔에 차인 황금 완장은 뭐죠?”

“그건 천무학관 입관 시험인 승천무제의 시험관 자격을 나타내는 징표 아닌가요?”

“이건…..”

“맞네.” 남궁상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희들과 비무를 하셔야죠.”

“내가 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감수해야 하나?”

“그게 규칙이니까요.”

유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때 비류연이 손을 들어 두 사람 사이의 언쟁을 제지했다.

“잠깐! 규칙? 무슨 규칙?”

“새로 바뀐 입관 요강이죠.”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유란은 말했지만 비류연과 남궁상에게는 전혀 당연한 게 아니었다.

“바뀌었다고? 뭐가? 어떻게?”

이번엔 비류연이 물었다.

“정말 모르세요?”

“몰라!”

비류연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좋아요. 할 수 없죠.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유란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들어 가장 오른쪽의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제일백일차 천무학관 입관 시험 요강.”

‘많이도 치렀네’라는 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금세 사라졌다.

“하나. 천무학관 입관 희망자는 오른팔에 천무라는 글씨가 새겨진 황금 완장 찬 입관 시험관을 보면 누구나 비무를 신청할 수 있고 시험관은 반드시 이 비무에 응 해야만 한다.”

어떠냐는 듯 유란이 비류연과 남궁상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남궁상은 사태가 잘 파악이 안 되는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하나 더 읽어드릴까요?”

그녀의 시선이 조금 왼쪽으로 움직였다.

“하나. 비무는 반드시 일 대 일로 행해져야 한다. 단 시험관의 동의가 있을 시에는 다 대 일의 싸움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전자 중 오직 한 명만이 황금 완장을 가질 수 있다.”

“이딴 걸 가져서 뭐하게?”

비류연이 완장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이 서찰의 거의 맨 마지막 쪽으로 움직였다.

“하나. 황금 완장을 소유한 입관 희망생은 일차 시험과 이차 시험이 면제된다.”

황금 완장은 예선 시험을 보지 않고 바로 본선 시험으로 직행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예전에 ‘승천패’가 지녔던 역할을 계승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다만 그것 을 획득하는 방법이 변했을 뿐이다.

“말도 안 돼! 그런 얘긴 듣도 보도 못했는데?”

남궁상이 외쳤다. 학관 어디에도 그런 공고가 난 적은 없었다. 그런 큰일이 어떻게 아무런 공지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시험에서는 과거 명문정파의 제자들을 특별 우대하던 정책이 사라졌어요. 대신 황금 완장이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자, 확인해 보세요. 제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러면서 자신이 들고 있던 서찰을 내밀었다. 남궁상은 얼른 다가가 그 서찰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쭉 훑어보았다.

“어때?”

“천무학관의 직인이 틀림없군요.”

서찰의 마지막에 찍힌 인장을 확인하고는 남궁상이 대답했다.

“당했군.”

“예?”

“영감탱이들에게 당했어. 우릴 골탕먹이려고 작정을 하고 안 가르쳐 준 거지. 우린 멋지게 한 방 먹은 거고.”

“왜 그런 일을?”

“몰라. 신입생들뿐만 아니라 시험관들도 시험해 보고 싶었는지 모르지. 능구렁이 영감탱이들 같으니라고.”

말을 마친 비류연은 공터 한쪽으로 걸어가더니 바위 하나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남궁상을 보고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귀찮다. 빨랑 처리해라.”

“예에.”

남궁상이 성의없이 대답했다.

“몸 풀기라고 생각해.”

비류연이 한쪽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며 한마디 덧붙였다.

“무시하지 마시지요, 선배님들!”

계속되는 무시에 유란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반드시 저 약하게 생긴 주제에, 허점투성이인 주제에 재수없기로 하늘을 찌르는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들끓는 마음이 비류연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또 무시당했거나.

“하? 상대를 고를 안목도 없는 애송이를 무시하지 않으면 누굴 무시하는데?”

비류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여전히 그의 평가는 가차없었고, 수많은 이를 화병에 걸리게 만든 그 혀는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뭐, 최고의 상대를 찾아왔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비류연은 양쪽 검지를 빙글 돌려 남궁상을 가리켰다.

“설마 진짜 이기려고 날 고른 건 아니겠지? 너희들 같은 애송이 두 개 정도면 이쪽의 궁상맞은 형아만으로도 충분해요.”

두 사람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남궁상을 향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데, 굳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남궁상 역시도 표현 방법만 문제 삼을 뿐 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약하다고 고른 상대에게 연달아 무시당하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승복하지 못하겠습니다!”

유란이 외쳤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유운비가 따라 외쳤다.

“뭐, 백 마디 말이 한 번의 경험만 못하지. 직접 체험해 보면 알 것 아니겠어? 이길 수 있으면 이겨봐. 둘이서 덤벼 저쪽 형아를 이길 수 있으면 내 완장도 주지. 그 럼 되겠어?”

“정말입니까?”

나름대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의외의 제안에 유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내가 애송이들이랑 농담 따먹기나 할 정도로 한가해 보여?”

그러자 곤란하게 된 사람은 남궁상이었다.

“대사형, 그, 그건..

남궁상이 당황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왜 자신없냐?”

“그건 아니지만…….”

다만 일이 잘못됐을 때 겪어야 되는 대가가 두려울 뿐이었다.

“그럼 상관없잖아? 빨리 끝내고 볼일이나 마저 보러 가자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배님? 설마 질까 봐 두려워하시는 건 아니겠죠?”

“진다고? 지금 누구보고 진다는 건가?”

남궁상의 전신에서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유지되던 엉거주춤한 인상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 그 어마어마한 기 운에 유란과 유운비는 순간 몸을 움츠렸다. 조금 전 보였던 핼쑥하고 힘없어 보이는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오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가르쳐 줄 테니.”

이렇게 되면 절대 질 수 없었다. 앞으로 학관에 들어가게 되면 비류연 같은 인간의 상상과 상식을 초월하는 괴물과 부대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올바른 대처법 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큰일이 벌어지고 말리라. 사실 이미 때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말이다.

“그럼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유란의 검은 두 눈동자가 투지로 불타올랐다.

고조되는 전운을 가로막은 것은 비류연이었다. 남궁상을 비롯한 두 사람은 의아한 눈으로 이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삼(三)으로 할까, 오(五)로 할까?”

세 손가락과 다섯 손가락을 반복적으로 번갈아 펴며 비류연이 남궁상에게 물었다.

“오로 하죠.”

남궁상이 다섯 손가락을 펴며 대답했다.

“좋아. 그럼 삼으로 가지.”

남궁상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하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사람도 둘인데 그냥 오로 가죠? 삼은 좀…….”

남궁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가 좋아?”

남궁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둘이 합해서 오로 가자구. 그럼 불만없지?”

“그, 그런… 한 사람당 오로 해야…….”

“그럼 둘 해서 삼으로 갈까?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어때?”

비류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오로 가죠.”

마침내 남궁상은 승복하고 말았다. 그는 아직 비류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실패하면 벌금 있는 거 알지?”

“그걸 잊을 리 있겠습니까?”

“이번에 실패하면 두 배야!”

“아니, 왜요?”

“그건…….”

그러나 비류연의 말은 유란에 의해 끊어졌다.

“무슨 얘기시죠?”

싸우려다 말고 무슨 짓거리인지 그녀는 알 권리가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남궁상은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뜻은 비류연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아, 별거 아냐. 그냥 애송이 둘을 쓰러뜨리는 데 몇 초가 필요한가 계산해 본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들 말아요.”

엄청 신경 쓰였다.

“지금 그 말씀은 저희 두 사람을 쓰러뜨리는 데 오 초면 충분하다 그 말씀이십니까?”

“뭐, 난 삼 초면 충분한 것 같지만 말야. 그런데도 실패하면 당연히 과징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제 유란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평생 받을 수모를 오늘 하루에 다 받고 있는 듯했다.

“만일 오초 만에 저희들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를 뿌드득 갈며 유란이 물었다.

“그땐 우리의 패배라고 해도 좋아. 만일 오 초를 넘기고도 쓰러뜨리지 못하면 이 꼴사나운 완장 두 개 다 넘겨주지.”

비류연의 시원스런 대답은 두 사람에게는 의외였고, 남궁상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어떻게 상황을 점점 유리하게 만들지 않고 점점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 가? 남궁상은 울고 싶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비류연이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남궁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역시 비류연을 만난 것 자체가 실수였다. 하늘의 농간이거나. 그는 자신의 장담대로 천재였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재. 하늘의 재앙[天災]……. 

“동시에 덤비게. 상대해 주겠네.”

포기가 빠른 남궁상은 왼팔을 쭉 뻗어 왼손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오게.”

그의 검은 아직 검집에서 뽑히지도 않은 채였다. 옆에서 앉아 있던 비류연은 이미 오래전에 방관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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