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6화 – 후두둑 떨어지는 남정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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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둑 떨어지는 남정네들

-후두둑! 후두둑!

그것이 언제였더라? 월향정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나예린의 눈은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색을 잃었던 회색빛 그때를.

***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세계의 풍경은 색 바랜 잿빛이었다.

어릴 적부터―아직 여성으로서의 징표가 몸에 나타나기 시작하기도 전부터—나예린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세상의 반이 그녀에게 위협 그 자체나 마찬가지 였다. 왜냐하면 세상의 반이 안타깝게도 남자였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무슨 이유 에서인지 직업, 나이를 불문하고 이 어린 소녀를 한 번 보기만 하면 반하고 마는 것이었다. 모든 이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자제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 러했다. 육체의 매력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선 영역의 어떤 알 수 없는 매력이 사내들의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사로잡고 마는 것이다. 불행한 점은 결 코 이 소녀는 단 한 번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어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데 무슨 상관이냐고?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외면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현실은 훨씬 더 냉엄하고 변태적이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직 순진무구하기 때 문에 안전하리라 여겼다면 남자라는 인종들의 야성(野性)과 변태도(變態度)를 너무 얕잡아본 것이다. 이 세상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계였고, 그중에는 긍정적인 다양성이 있는 만큼 부정적인 다양성도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다. 원래 다양성이란 서로 다른 것들의 집합이기에.

때문에 그녀는 심각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녀를 가지고 싶어하는―여러 가지 의미에서―수컷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무림맹주 나 백천은 딸을 여인들만의 금역인 검각(劍閣)의 제자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 팔불출 아버지가 몇 년 동안 제대로 볼 수도 없는 곳으로 딸 을 보낼 결심을 했다는 것만 봐도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부언하자면 딸과 헤어질 때 나백천은 체통도 잊고 눈물을 펑펑 쏟아 검후 의 따가운 눈총을 사야 했다. 또한 그 일이 있은 이후 검각 방면으로의 ‘업무차’방문이 잦아졌다고도 한다. 검후는 그런 그를 매우 귀찮아했다.

‘체통을 지키시게, 맹주!’

그것이 나백천을 만날 때마다 매번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검후의 입버릇이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안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협이 완전히 가셔진 것은 아니었다. 육체의 위협은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정신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 다.

용안(龍)!

이때 이미 아직 어린 소녀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능력이 소녀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더럽히려 하는 가장 오염된 생각과 정면으로 부딪 친 여린 정신은 어떻게 될까? 그녀가 마음의 문을 모두 걸어잠근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어린 소녀의 거의 본능적인 방어 행동이었던 것이다.

“…쟤가 바로 그 애래요!”

“아, 아빠가 무림맹주라던……..

“근데 그런 귀한 집 천금이 이런 후미진 남해(南海)엔 왜 왔데?”

“글쎄요. 소문에 듣기로는 유괴 위협과 다른 여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던데요? 왜 그 있잖아요…….”

“어머, 정말 남사스럽다, 얘!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또 모르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도 그렇네. 근데 얼굴이 너무 차갑지 않니? 꼬맹이 주제에 저런 싸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라니……. 얼굴 좀 예쁘장하면 단가? 아니면 자기는 무림맹주의 딸이라는 거야, 뭐야? 하긴 우리 정도는 우습게 보이겠지. 거만하기는.”

“그러게요. 아버지가 무림맹주라는 이유만으로 특별 우대라니! 눈꼴시어서.”

사람의 마음속 깊은 어둠 안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부정적인 사념들이 소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와 소녀의 위태위태한 정신을 오염시켰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자신의 능력을 조절할 능력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몰래 속닥거린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어두운 사념은 격한 탁류가 되어 그녀의 세계로 끊임없이 흘러 들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악의(惡意)가 버무려진 고까운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해도 과장은 아니었다. 사람이 지닌 질투는 무서운 음적인 파장 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아직 어린아이인 그녀가 버티기엔 버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용안이란 제어 불능의 능력이 그 음적인 파동을 수십 배로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 능력을 담아내기에 아직 어린 소녀의 그릇은 너무 작았다. 그릇 안에 담지 못할 과다한 능력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담긴 그릇을 깰 수도 있었다. 아직 햇빛에 채 마르지도 않은 점토 그릇 같은 소녀의 정신은 지나치게 오염 된 정신의 과도한 유입으로 막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사자 독고령이었다.

“어머, 네가 예린이구나? 정말 반갑다. 앞으로 너의 사자가 될 독고령이야. 잘 부탁한다.”

눈앞에 내밀어진 하얀 손, 햇살처럼 밝은 미소. 그 미소가 여명(黎明)이 되어 회색빛 세계에 최초의 빛을 가져다주었다.

독고령은 진심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찬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특별했던 자신의 능력은 언제나 사람의 말에 담긴 진실과 거짓을 의도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수많은 칭찬이 자신을 향해 쏟아졌지만 그 이면(裏面)에 독 이빨을 감추고 자리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질투(妬)와 욕망(慾望)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간 의 어두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독고령의 말에는 한 점의 사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감탄하며 축복해 주고 있었다.

나예린은 처음으로 남들에게 아름답다고 인식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더러운 거짓은 감히 범접하지도 못했다. 모두가 자신을 부정(否定)할 때 그녀만은 자신을 긍정(肯定)해 주었다.

당시 안대가 필요없었던 독고령은 생명의 빛과 활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 찬란한 생명의 빛을 보며 나예린은 처음으로 타인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에 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고, 영원히 자신은 그것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진심으로 언니라 부를 수 있는 소중한 한 사람을 얻었다.

독고령은 어린 그녀를 지켜주었고, 수많은 질시와 질투에서 그녀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었다. 소녀의 물기 어린 그릇이 금 가지 않고 무사히 마를 수 있도록 시 원한 그늘이 되어주었다. 그 그늘이 없었다면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에 급속도로 말라 버린 여린 그릇은 가뭄 날의 논처럼 갈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고마움을 말 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예린에게 있어서 독고령은 친혈육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독고령이 행방불명되어 지금은 생사(生死)조 차 알 수 없는 것이다.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고,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언니…….”

다시 한 번 그녀의 붉은 입술로부터 기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손을 놓고 멍하니 서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리고 미웠다.

***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오자 엄동설한(嚴冬雪寒)의 추위 속에서 결집되어 있던 생명의 싹이 움트며 만물이 생동하고 있었지만 한 여인의 얼굴에는 아직 진정한 봄 이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미녀의 한숨은 수많은 사내들의 가슴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계절감마저 흐리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사방에서 만물이 소생하고 있었지만, 이 정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직 차가운 겨울의 기운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효과에 대해 의심 할 여지 없는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겨울이 지배하는 봄의 정원에 한 여인이 침입해 들어왔다. 새하얀 백의, 백옥을 깎아 만든 것이 분명한 검집과 그곳에 꽂힌 검의 하얀 손잡이, 심원한 지혜가 담긴 검은 눈동자, 당당한 기도. 만인(萬人)을 압도하는 풍모(風貌)라는 표현은 오직 사내대장부에게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내들은 이 여인을 알현하는 순간 당 장 자신들의 우매한 주장을 철회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강호에 사람도 기인이사도 많고 그중 확률적으로 거의 오 할이 여자라고 하지만 아름다움 속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내뿜을 수 있는 사람은 단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의 가슴에 수놓아진 것은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비상백홍(飛翔白鴻) 육익문(六翼紋). 침입자는 바로 여중제일인이자 나예린의 사부이기도 한 검후 이옥상이었다.

이옥상은 나예린이 있는 정원에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무례하게 낯짝도 비추지 않고 도둑놈마냥 시 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움츠린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차피 낯짝을 내놓을 담도 없는 것이겠지.

“스물셋, 아니, 스물다섯이군.”

잠시라도 그녀의 이목을 속인 두 명의 실력은 칭찬받을 만했다.

이 둘 중 하나가 바로 애소저회(愛小姐會)의 영구 명예 회장인 ‘비연태’였지만 검후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런 시시콜콜한 강호 변태 동향까지 파악하고 있을 필요 는 없었다.

모두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우러러보기만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직접 부딪쳐 볼 용기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그런 미적지근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꼴사납다!”

검후가 일갈했다.

그녀는 단체 꼴불견을 그냥 눈감아줄 만큼 자상하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꼴값 떨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이 그녀의 자상함이었다.

검후가 지면을 향해 발을 한 번 굴렸다.

둥!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호수 위에 인 파문波)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곧 사방 십 장을 뒤덮는 반구 형태의 보이지 않는 결계가 완성되었 다. 검후가 펼친 검의 결계(結界)였다.

그 경계(境界)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 마음 안에 그 공간이 담긴 순간 결계 안은 그녀의 마음이 그러하고자 하는 그대로 일어나는 절대의 공간으로 화했다. 단검에 한해서이기는 하지만 그 사실이 지닌 의미는 지대했다. 즉, 이 검권(劍圈)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였다. 그들

이 아직 멀쩡히 숨 쉬고 있는 것은 뭔가의 착오이거나, 아니면 한 여인의 단순한 변덕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능력이 특출해서는 아니었다. 이 결계 안에서 그녀가 마 음먹고 죽이지 못할 생명은 없었다. 그녀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이 안의 모든 생명체의 생사여탈권을 관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직 단 한 명, 나예린만이 흠칫했을 뿐이다.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능력이 일천하여 그 수준밖에 안 된다는 이 야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목이 타인의 칼날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이토록 요지부동(搖之不動)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펼친 검계 안에 조금은 심술궂다 싶을 정도의 살기를 흘려보냈다.

참(斬)!

그것은 오직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살기였지만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무형의 검의(劍意)가 사방을 향해 뻗어갔다. 그 다음 순간 그녀의 검계는 죽음의 지배 하에 놓여졌다.

의지가 발동하자 마음의 검―심중지검(心中之劍)―이 마음을 꿰뚫었다.

“크허억!”

그러자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불청객들이 다들 벼락 맞은 참새 떼마냥 화들짝 놀라더니 우아하지 못한 비명과 함께 후두두둑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검후의 마음은 실제로 그들을 베었던 것이다. 다만 다들 육체가 아닌 정신을 베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비록 육체에 터럭만 한 상처도 없다고는 하나 그 효과 는 지대했고, 그 결과 또한 명백했다. 그녀 정도의 고수쯤 되면 육체에 상처가 나든 나지 않든 크게 상관없었다. 때로는 육체의 상처보다 정신의 상처가 더 무섭고 치명적일 때가 많은 법이다. 그 상처의 정도가 심하면 백치가 되거나 광인이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심지어는 정신의 소멸까지도 발생할 때가 있다고 한 다. 그렇게 되면 육체는 오직 숨만 쉴 뿐 더 이상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목각 인형으로 변한다.

다만 이번엔 맛보기로 가볍게 베었기 때문에 화들짝 놀라는 정도로 끝났을 뿐이었다.

땅바닥에 후두둑 떨어진 사내들이 찌리릿 마비된 몸을 움직이기 위해 뒤집힌 자라처럼 사지를 아등바등거렸다. 정말 볼썽사나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숨을 곳이 없게 나무를 몽땅 뽑아버릴까?”

과거에는 왕궁에 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자객들이 숨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나? 절세미인을 지키는 일이니 황제를 지키는 것보다 오 히려 중하면 중했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황제가 죽는다 해도 태자가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면 그만이지만 절세미인의 뒤는 누가 이으란 말인가? 그러니 희소성에 서 보면 미인 쪽이 황제보다 더 중하지 않겠는가?

“못난 놈들!”

검후가 바닥에서 아등바등거리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다시 일갈했다.

“썩 물러가거라! 너희들에게는 자격이 없다!”

검후의 일성에 벼락 맞은 물고기마냥 바닥에서 파닥거리던 남정네들이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쌩 소리가 날 정도로 잽싸게 사라졌다. 감히 그녀의 말을 거역할 만 큼 간덩이가 부은 인간은 여기에 없었다.

“한심한 파리 떼 같으니라고.”

꼬인 파리 떼들을 훠이훠이 일격에 쫓아낸 검후의 평가는 북풍한설보다 싸늘하고 냉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예린을 바라보기 바로 전까지였다.

“린아, 여기 있었느냐?”

검후의 표정은 파닥거리던 수컷 떼들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자 나예린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서둘러 슬픔을 거두며 나예린이 인사했다. 그러나 한순간에 털어버리기엔 그동안 쌓였던 슬픔이 너무 깊고 두터웠다.

“쯧쯧, 너는 어디 가고 슬픔만 남았느냐?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삶이 풍요로워지니까. 하지만 그 감정에 휩쓸리게 되면 그것은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평소에는 잔잔한 호수와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해일로 돌변해 버린다는 것을 검후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있고 나서 슬픔이 있는 것이지 슬픔이 있고 난 다음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항상 너 자신을 잃지 않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러나 아직 세상에 대한 불신을 버리지 못한 채 자기애조차 부족한 제자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검후는 언제나 제자가 자 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항상 질문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제자는 또다시 요동치는 불안 속에 몸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능한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놈은 어딜 간 거야?”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너는 누구냐?”

검후가 물었다.

“사부님의 제자입니다.”

나예린이 대답했다.

“그럼 검후의 제자가 아닌 너는 누구냐?”

검후가 재차 물었다.

“천무학관의 관도입니다.”

검후가 또다시 물었다.

“천무학관의 관도가 아닌 너는 누구냐?”

잠시 생각한 나예린이 대답했다.

“무림맹주 나백천의 딸입니다.”

“그것 역시 네 자신이 아니라 네 자신이 맺고 있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더냐. 그 관계에 무림맹주 나백천은 있어도 너 나예린은 없구나.”

아버지에게는 이름이 있어도 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검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타인에게 자신을 비추려 하지 마라. 네 자신이 있기 전에 어떻게 거울에 자신을 비출 수 있겠느냐? 나 검후의 제자도 아닌, 검각의 제자도 아닌, 천무학관의 학생 도 아닌, 무림맹주 나백천의 딸도 아닌 너는 누구냐? 이런 관계가 없으면 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거울이 있는 다음에 거기에 비추어진 네가 있는 것이 냐, 아니면 네가 있는 다음에 거울에 비친 네가 존재하는 것이냐? 너는 누구냐?”

그것은 강렬한 물음이었다. 나예린은 그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다.

“나는 과연 뭐지??

끊임없이 관계 속에서 자신을 수립하도록 훈련받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 관계 모든 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뭐지?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겨난 거지? 아니, ‘나’라는 건 어떻게 규정되는 걸까? 나와 연결된 모든 관계가 없어도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 는 걸까?”

그때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에 들려왔다. 그것은 기억의 잔향이 가져다준 목소리였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에 차 있을 수 있냐고요? 글쎄요… 그건 믿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이래봬도 꽤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구요. 자기가 누구인 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뿐이죠. 이 상대적인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규정하는 창조적 행위는 하늘[天]도 신(神)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에게 부 여된 권리니까요. 관계란 내가 있는 다음에 생겨나는 부차적인 ‘덤’일 뿐이에요. 차이를 경험하기 위한 장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가족, 조직, 국가 모두 관계의 장(場)일 뿐이지 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리 주위에서 나 자신을 억지로 조형하거나 규정 지으려 해도 궁극에 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 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입니다. 이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행위죠. 인간은 그 순간 자유를 속박당하고 타인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요.”

“그럼 어떻게 자신을 찾을 수 있죠? 이미 잃어버린 자신은 어떻게 해야……?”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 따위는 잊을 수 없어요. 다만 망각하고 있을 뿐이죠,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를. 사방을 둘러봤는데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 면 기분 나쁘지 않겠어요? 여기도 같은 얼굴, 저기도 같은 얼굴. 똑같은 복장, 똑같은 사고방식, 똑같은 말투, 으엑~ 난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우린 모두 태어 나면서부터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그 미몽(迷夢)에서 깨어날 수 있죠? 그 기억상실증에서 말이에요.”

“방법이야 부지기수(不知其數)지만… 그중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진정한 목표를 설정하는 거죠. 먼저 뭔가를 선택해야 돼요. 그것이 시작이죠.”

“목표?”

“예, 목표. 번드르르한 조직에 들어가서 모가지 잘리지 않은 채 죽을 때까지 녹봉(祿俸) 받아먹으면서 사는 그런 시시껄렁한 목표 말구요. 목표에서 중요한 건 자 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발견하는 거예요. 그럼 자연히 목표가 세워지죠. 목표가 세워지면 그 목표를 향하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정할 수 있죠. 이 세 상에는 가능성이라 불리는 수억 개, 아니, 무한 개의 산들이 있죠. 그중 어느 산을 오를지 먼저 결정해야 그곳으로 향하는 구체적인 길이 생겨나지 않겠어요? 무작 정 산을 올라갔다가 정상에 다다른 다음에야 ‘얼래, 이 산이 아닌개벼?!’ 했다간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 산을 오르는 데 수십 년이나 쏟아 부어놓고선 말이죠.”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그럼 류연이 그렇게 돈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 곧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인가요?”

“글쎄요? 과연 어떨까요? 확실히 최대의 돈을 목표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꽤 많아 그 산이 좀 붐비긴 해요. 근데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말이에요. 뭐,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뒷동산을 목표로 오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미개척지가 잔뜩 있지만요. 어느 산에 오를지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 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자신을 찾는 첫 단계가 아닐까요?”

“에계, 첫 단계요? 그럼 그 다음 단계도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래서 아까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했잖아요. 그 뒤에도 단계가 몇 개 더 있는데 저도 아직 다 가보지는 못했어요. 이게 가도 가도 끝이 없더 라구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질문.

“예린은 어떤 산에 오르고 싶어요?”

“전……”

언젠가 비류연과 나누었던 말들이다. 그때 무엇이라 대답했더라?

기억이 나버렸다.

“제 이름은 나예린,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검의 길을 추구하는 검객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여자입니다.”

검후는 자기 제자의 이 명확한 대답에 놀랐다. 내용보다는 그것을 말하는 태도에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자기에 대한 확신이 얼핏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 의 여자라는 건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탓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의 인정인지, 아니면 한 남자의 여자라는 의미인지 모호했다. 그러나 검후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건 나중의 재미로 남겨두도록 하자.’

“그렇다면 너는 이 강호에서 한 사람의 검객으로 살아가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냐?”

“예, 사부님. 전 피를 싫어하지만 검 속에 담긴 이(理)를 쫓아가는 일은 즐겁습니다. 전 제 생각 이상으로 검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검과 떨어진 저를, 검 법을 익히지 않는 저를 상상하는 것이 힘들 것 같습니다.”

나예린의 대답은 사부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눈물을 핑 돌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검후는 그 감격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 한 사람의 검객으로서 슬픔에 빠지는 것 말고도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검(劍)의 도(道)를 추구하는 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랜만에 한번 해보겠느냐?”

검후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애검을 툭툭 쳤다.

“사, 사부님하고 말씀입니까?”

“그래. 오랜만에 너의 성취를 보고 싶구나, 화산에서는 그 녀석 덕분에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한 꺼풀 자신을 벗어던진 제자의 성취를 한 아이의 사부로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이 정도 도락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물론이다. 지금 이 시간 여기에서 사양지심(辭讓之心) 따위는 전적으로 사양한다.”

나예린은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검후의 검은 허리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두렵고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이 검집에 들어 있든 빠져나와 있든, 혹은 아예 없든 그것은 검후 정도의 고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나예린은 사부의 발검술(拔劍術)이 얼마나 쾌속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오너라!”

검후의 말에도 나예린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검을 중단에 든 채 서 있었다. 검후 정도의 고수를 향해 함부로 검을 들이미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이 승부에서 조급함은 독이었다. 나예린은 침착한 눈으로 검후를 응시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의 검객.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전력을 다해 부딪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 그뿐이었다.

‘과연…….?’

검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잃어버린 자아를 어느 정도 되찾았기 때문일까? 조용히 서 있는 제자의 검은 과거보다 무척이나 안정되어 보였다. 제자의 발전을 보 는 것은 사부로서 언제나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진 완벽한 균형 속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법. 검후는 살짝 자신의 몸에 허점을 만들었다.

찌를 능력이 되면 찔러보라는 명백한 도발. 그리고 그것은 시험이기도 했다.

검후의 제자쯤 되면 이런 도발에 넘어가 줄 줄도 알아야 한다. 너무 몸보신에 안주하다 보면 검후로부터 가차없는 응징이 날아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역시 망설이 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검후 정도의 초절정고수쯤 되면 그녀가 내보이는 허점은 달[月] 같은 것이 된다. 즉, 보이긴 하지만 잡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보이기는 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을 유혹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상관없었다. 목표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나예린 역시 달을 손에 쥐기 위해 전력으로 손을 뻗었다. 비홍검의 일초인 ‘비홍약파’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대신 빠르고 정확하며 실패했을 때 대응하기 편한 검식이었다. 상대는 여중제일인. 단 한 수에 배부르리라고 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한참이나 빗나가고 말았다.

푹!

빠른 속도로 찔러간 나예린의 검이 검후의 심장을 관통했다. 나예린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당연히 피할 것이라 여기고 앞으로 이어질 다섯 수를 이미 생각 해 두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녀의 용안(龍眼)으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경악이었다. 다음 순간 검후의 신형이 흩날리던 새하얀 눈발이 북풍에 흩어지듯 그녀의 눈앞에서 흩어져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딜 보고 있느냐?”

검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녀의 귓가였다. 어느새 그녀는 제자의 배후를 점한 뒤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나예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 았다. 그녀는 놀람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항상 얼음 같던 제자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르자 검후의 마음은 매우 흡족했다.

“비설보(飛雪步)라는 것이다. 시전시 그 형상이 흩날리는 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 사실 내가 붙인 거란다. 내가 만들었으니 이름 정도는 내가 지어줘야지.” 

“비설보…….?”

나예린이 조용히 그 이름을 입 안에 넣고 읊조려 보았다. 좋은 느낌이었다.

“그래, 유령 같은 것보다 훨씬 운치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잔상의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너도 분신과 잔상의 차이는 알고 있겠지?”

“예, 사부님. 하지만 잔상의 효과만으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제자의 지적에 검후가 씨익 웃었다.

“과연 눈이 날카롭구나. 기업 비밀이라서 알려주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이건 사실 분신에 잔상 효과를 최고로 입힌 것이다. 좌우로 동시에 잔상을 일으 키며 빠져나가기 때문에 시신경에 혼란이 생겨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듯 보이는 것이란다. 이것은 아직 너의 사자도 배우지 못한 기(技)다.”

“독고 사자도 배우지 못한 기…….”

그것을 지금 자신에게 먼저 전수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예린은 검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배울 수 없습니다. 사자도 배우지 못했는데 어찌 제가 먼저 배울 수 있겠습니까?”

“너에게는 이 기를 배울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이 비전을 전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령이도 그걸 배울 자격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 아이 는 지금 여기에 없지 않느냐?”

“하, 하지만.”

검후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큰 배가 뜨기 위해서는 두텁게 쌓인 물이 필요하고 붕새[鵬鳥]가 구만 리(九萬里) 창천(蒼天) 위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구만리 두께만큼 쌓인 바람이 필요한 법. 물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배를 실을 힘이 없고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대붕(大鵬)을 실을 힘이 없다. 쌓아놓은 적공(積功)이 없다면 너는 무력(無力) 하기만 할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령아를 구하고 싶다면 그 아이가 너의 능력을 필요로 할 때 거기에 응(應)할 수 있도록 너 자신의 실력을 쌓도록 해라. 날아야 할 때 날고 싶어도 날지 못하는 비참한 꼴은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검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천 근과도 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또한 그녀의 말은 고대로부터 천 년을 이어온 장구한 가르침의 일부이기도 했다.

“배워두거라. 그래서 더 나빠질 일은 없을 테니. 게다가 언제 이것이 필요해질지 누가 알겠느냐?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때[時]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준비된 자만이 자신의 곁을 화살처럼 스쳐 지나가는 때를 잡을 수 있다. 령이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이 기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위기에 빠져서 그 아이 자신의 능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위험에 빠졌다면 그곳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겠니? 그러니 익혀두고 숙련하도록 해라. 겸 양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이 못난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나예린이 공손하게 읍하며 말했다. 검후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고 재빨리 바꾸고자 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이 사부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구나.”

“하문하십시오.”

공손한 어조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그… 아이 말이다. 비류연이라고 했던가?”

순간 나예린의 몸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검후는 그 점이 재미있었다.

“이름 하나만으로 이 아이를 이 정도로 동요시키다니……. 나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일인 것을…….?

얼음 조각을 미소 짓게 만든 아무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알면 알수록 비류연이란 미지의 인간에 대해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그 아이의 사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도 사천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사천이라…….?

그것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광범위했다. 사천에 있는 문파들이 어디 한둘이란 말인가.

“신분 차가 많이 나면 나중에 힘들 텐데 상관하지 않더냐?”

“나, 나중이라니요?”

갑자기 상상하지 않았던 미래가 소급되자 나예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넌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냐? 네가 아직 무림인이라서 그렇지 다른 여아들이라면 이미 다 가정을 꾸렸을 텐데, 나예린의 가슴에 뭔가 무거운 것이 쿵 내려앉았다.

“거,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 할 생각도 없습니다. 혼인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혼인… 그녀의 삶과 미래에 가장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말이었다. 누군가와의 혼인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 두 글자는 자신의 인

생에,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구나.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쓰임이 조금 다른 듯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의를 아는 제자였다.

“사람의 삶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란다. 그만큼 부정확하고 그런 만큼 다양하다. 그러니 앞으로 그 문제를 생각해야 될 때가 올 것이 다. 그래서 그의 신분 말인데…….”

검후는 제자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던져 준 채 다시 자기가 묻고 싶은 곳으로 돌아갔다.

“류연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닙니다.”

나예린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대답에 검후는 두 번 놀라고 말았다. 그 단호함에 한 번 놀라고 그 표현에 두 번 놀랐다.

“이 아이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과거의 그녀를 알고 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냥 놀려보려 한 말인데 어쩌면 진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때 자신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검후였다.

“그쪽이야 신경 안 쓴다고 해도 너의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겠느냐?”

“아버님께서 신경 쓰신다 해도 그는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류연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호오, 그만한 능력이 된다는 것이냐? 대무림맹주의 견제에도 끄떡하지 않을 만큼?”

“그런 사람이니까요. 류연은 남의 지위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의 똑같은 대답에 검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폭적인 신뢰인지 자포자기인지 이 사부로서는 분간할 수가 없구나. 앞으로 꽤 골치 아프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너희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예린의 어머니는 그런 것에 무척 민감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화석처럼 굳어버린 사회적인 규범이 두 사람을 가만 놔둘 리 없었 다.

“내 비록 화산에서 본의(本意) 아니게 너희 둘 사이를 공증했다만 나의 공증이 너희 아버지에게는 먹힐지 몰라도 너희 어머니에게까지 먹힐지는 확신할 수 없구 나.”

그녀가 공증을 했다는 소문은 십중팔구 바람보다 빠르게 강호 전역으로 확산되어 갈 것이고, 아마도 곧 나백천과 그의 부인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나백 천은 폭발하는 부인의 불같은 분노에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네 팔불출 아비는 나의 체면을 봐서라도 뭐라 반발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희 어머니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는 예전부터 그런 걸 따지는 아이가 아 니었지. 게다가 그 아이는 너의 부모다. 자식의 미래에 참여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 내가 비록 네 사부이긴 하나 그 자리까지 빼앗아서야 쓰겠느냐?”

비류연이라면 분명 이 대목에서 한마디 했을 것이다. 자식의 결정을 신용하지 못하고 그 미래를 함부로 재단하려 하는 것은 자식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불행 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일 뿐이라고. 스스로 둥지를 떠나려 하는 아기 새의 날갯짓을 막으면 그 아기 새는 날개를 단련시킬 기회를 잃고 연약해진 날개는 언젠가 강풍에 꺾여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아직 나예린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먼 이야기입니다, 사부님.”

“글쎄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시간의 화살은 멈추지 않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란다. 게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사람을 위협하지. 그건 그 렇고, 그 녀석은 요즘 뭘 하고 있느냐? 통 보이질 않더구나. 둘이서 이야길 좀 나누려 했더니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자신의 애검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탄력있고 날씬한 허리에 걸린 그 하얀 물건은 그녀가 말하는 ‘대화’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제가 듣기로는 제자들 때문에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단기 속성 훈련 중이라고.”

“제자? 나이가 얼마나 됐다고 제자란 말이냐?”

“그런 게 있다고 했습니다. 소꿉놀이 같은 거라고.”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사실 그녀도 알지 못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을 캐묻는 성격도 아니었다. 애초의 그녀 역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차가운 얼음의 칼날 같다는 평까지 받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름답지만 지극히 차가운 검광.

“소꿉놀이? 어디서 꼬맹이들이라도 주웠나?”

비류연이 들었다면 뭐 비슷하지요’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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