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방문
-윤이정, 중양표국을 방문하다
현재 중양표국의 식객 신세인 소년 유경영이 그 황색 배첩을 본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다. 소년이 그것을 목격했을 때 그 황색 종이 쪼가리는 보초 당직을 서 고 있던 장씨의 손에 들려 ‘임시’ 국주 집무실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문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이 배첩에 평상시와 달리 흥미가 동한 것은 배첩을 들고 가는 표사 장씨의 얼굴에 나타난 노골적인 적의 때문이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사람 좋은 장씨가 저토록 인상을 찌푸리는 것일까?
담장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않았던 소년은 언제나 어린 여동생과 함께 남창지국의 담벼락 안에서만 놀았고, 이런 둘을 딱하게 여겼는지 심심할 때마다 그들을 상대해 준 이가 바로 이곳의 말단 표사인 장씨였다. 언제나 장씨의 얼굴에 맺힌 웃는 얼굴만 보아오던 소년으로서는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 국주 집무실에서 나온 장씨의 얼굴은 더욱더 찡그려져 있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년이 장씨의 그런 복잡한 심리 상태를 세세하게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인상만으로도 질문할 거리는 충분했다.
“장 아저씨, 그 배첩 누구 건데 그렇게 인상을 팍팍 쓰세요?”
유경영이 장씨 옆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장씨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고개가 서서히 소년 쪽을 향해 돌았다.
“아, 경영이구나. 난 또 누구라고. 이것 말이냐? 이건 아주 나쁜 놈들의 두목이 가지고 온 거란다.”
장씨는 손에 든 황색 배첩을 부채질하듯 흔들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쁜 놈들의 두목이요?”
그렇게 말하면 악이 범람하는 이 세계에서 그 한 사람을 찾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래, 중원표국이라는 아주 나쁜 놈들의 소굴이지.”
장씨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걱정마라! 이제 그놈들이 이 용맹한 백무후의 표식 아래 무릎을 꿇을 테니 말이다!”
장씨가 새로 바뀐 무복에 새겨진 늠름한 백호 문양을 자랑스럽게 앞으로 내밀며 당당하게 외쳤다. 그때 백무후의 믿지 못할 신위를 목격한 그곳에 장씨도 함께 있 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 백호는 그의 수호신이 되었다.
유경영은 중원표국이라는 이름 너 자에 깜짝 놀랐다.
“그, 그 배첩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뭐죠?”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이 물었다.
“어라? 경영아, 너 왜 그러냐? 얼굴이 창백하다.”
갑작스럽게 안색이 나빠진 유경영을 보며 마음씨 착한 장씨가 되물었다. 그러나 소년은 장씨의 그런 따뜻한 호의에 감사하고 있을 경황이 없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동생 선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오빠의 갑작스런 반응에 질겁한 탓이다.
“음… 그러니깐… 잠깐만!”
조금 전 들었던 이름을 까먹은 장씨가 다시 배첩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곧 자신이 까막눈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에… 그러니까… 유… 아니, 윤인가..
까막눈이라 글을 읽지 못하니 다시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을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 줘보세요. 제가 글을, 아니, 제가 읽어볼게요.”
소년은 장씨의 손에 있는 배첩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너무나 돌발적인 행동이라 장씨는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그러면 안 되는데. .?”
그러나 유경영은 이미 배첩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팔랑!
어디선가 불어온 산들바람이 멍하게 서 있는 소년의 손에서 배첩을 빼앗아갔다. 장씨가 깜짝 놀라 허공에서 팔랑거리는 황색 배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땅바닥에 떨어뜨려 먼지투성이가 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너…….”
장씨는 무례한 소년에게 뭔가 주의를 주려고 했으나 소년은 어린 소녀의 팔을 이끌고 저만치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왜 저러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씨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배첩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까막눈인 채 그대로였다. 그래도 그는 이름이 있는 부분이 어딘
지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중원표국 금강십이벽(金剛十二壁) 풍마도(風魔刀) 윤이정(尹利貞).
백무후의 신태가 수놓아진 깃발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사납게 펄럭였다. 사방에서 펄럭이는 수십 개의 백호 문양 깃발에 놀란 윤이정이 장씨에게 물었다. “이봐! 사방에 정신없이 나부끼는 이 하얀 깃발들은 다 뭔가?”
“보시다시피 백호기(白虎旗)입죠.”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장씨가 대답했다.
“본 대표두도 눈은 뚫려 있네. 저것이 백호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란 건 알아. 근데 중양표국의 표식은 내가 알기로 검(劍)과 연화(蓮花) 아니더냐?”
“그 깃발은 저쪽에 있습죠.”
장씨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과연 검과 연화가 수놓아진 중양표국의 깃발이 보였다.
“그럼 이 많은 백호기는 무엇이냐?”
“이 백호는 저희 중양표국을 지키는 수호신입죠.”
“수호신?”
“예. 그렇습죠, 나으리. 이번에 사천에서 이 먼 남창까지 오는 대장정에서 저희들은 그만 악당들을 만나고 말았습죠. 시커먼 복면을 쓴 자들이었는데 다들 뼈가 아 릴 정도로 으슬으슬 살기를 내뿜으며 저희 표사들을 주눅 들게 했습죠. 이상한 놈들이었습니다. 표행을 털면서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그러지를 않나… 표물을 터는 산적들이 자주 대는 이유하고는 좀 다른 이유였죠. 아무래도 산적질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놈들이었던 같습니다요.”
대수롭지 않게 장씨의 주절거림을 듣고 있던 윤이정은 ‘아이들’이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뭐라고 했나, 장 표사? 자네 방금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느새 그의 어조는 누그러져 있었고, 호칭도 ‘너’에서 ‘자네’로, ‘장씨’에서 ‘장 표사’로 바뀌어져 있었다.
“아, 예. 분명 그 악당 놈들이 그렇게 말했습죠.”
장 표사가 미간을 좁히고 눈꼬리를 치켜세운 다음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몸을 짐승처럼 낮게 숙인 채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흐흐, 순순히 아이들을 내놓아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윤이정이 반색하며 외쳤다.
“그 얘기 좀 다시 해주게. 꼭 듣고 싶어서 그러네.”
행방불명된 부하들의 단서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게 된 것이다. 그가 비록 차갑고 잔인한 사내라 하나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 안내만 해드리고 다시 일하러 가야 되는뎁쇼? 나으리처럼 귀하신 분이 저 같은 천한 것과 오래 붙어 있으실 수 있겠습니까?”
장씨는 본능적인 감으로 몸을 뒤로 뺐다. 한번 튕기고 보는 것이다.
“어허, 장 표사! 왜 이러나? 같은 동업자끼리! 자, 이걸로 술값이나 하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묵직한 느낌에 장씨는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게다가 그 유명한 윤이정이 자신을 동급으로 치켜세워 주니 우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 드릴까요?”
장씨는 자신이 지닌 모종의 출생의 비밀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기세로 물었다.
“그 습격자 복면인들의 인상착의부터 시작해 주게.”
“좀 긴데요? 국주님을 기다리게 할 수야…….”
“갑자기 배탈이 나서 뒷간에 갔다가 간다고 전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합죠.”
잠시 후 장씨가 국주 집무실에 전언을 전하고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나?”
“걱정 마십쇼. 잘 싸고 오시랍니다.”
“고맙… 쿨럭! 뭐, 일단 자리를 옮기세. 여긴 사람의 이목이 너무 많아.”
두 사람은 일단 뒷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약간 냄새가 나도 할 수 없었다.
“자, 이제 이야기해 보게.”
“음, 그러니깐 말입죠…….”
장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황금은 사람의 혀를 매끄럽게 하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음이 다시 한 번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진짜 있긴 있었던 사실인가?”
장씨의 목격담을 전해 들은 윤이정의 첫 반응은 어안 벙벙, 어리둥절로 요약할 수 있었다.
“물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입니다. 사실이고말구요. 제가 비록 일자무식의 까막눈이라 해도 평생 정직을 자랑으로 삼은 놈입니다. 그런 제가 어찌 감히 제 소 중한 주둥이로 거짓을 씨부렁거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의심하시면 섭섭합니다요, 나으리.”
“으음, 미안하네. 너무 황당해서 그러네.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 같아서 말일세. 느닷없이 벽력처럼 새하얀 백호의 무리가 나타나 순식간에 스물 가까이 되는 복면 고수들을 깡그리 청소했다고 하니 어찌 쉬이 믿음이 가겠나?”
“그러니 바로 전설입죠! 그러니 바로 기적입죠! 그것을 하늘의 가호로 여기신 국주님이 그 백호님들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저희 중양표국의 새로운 상징으로 삼으 신 겁니다. 이 옷을 입고 있는 한, 저 깃발이 흔들리고 있는 한 어떠한 악당 놈도 감히 저희 중양표국을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그런 말을 속으로 조용히 되뇌며 윤이정이 물었다.
“그게 끝인가?”
“끝입니다. 뭐 또 물어볼 일 있으십니까?”
“자네 혹시 그 아이들이 이곳…….”
탈환 계획의 발동에 대비해 두 아이가 머물고 있는 숙소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인해 놓고자 했던 윤이정의 시도는 느닷없이 들려온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묻혀 빛 을 잃고 말았다.
“어이! 이보게, 장씨! 아직인가? 너무 오래 걸려서 국주님이 그분이 혹시 똥통에 빠지신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계신다네! 별일없나?”
세상 사람, 귀가 있는 사람은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친 사람은 장씨의 오랜 친구이자 목청 좋기로 유명한 한씨였다.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얘기해도 충분할 것을 굳이 저토록 쩌렁쩌렁거리는 큰 소리로 외치다니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별일없네! 이분도 똥통에 빠지지 않았으니 걱정 말게나!”
장씨도 지지 않겠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가? 잘되었군! 어서 빨리 돌아오게! 국주님께서 기다리신다네!”
“알겠네!”
대답을 마친 장씨가 재빨리 윤이정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나으리. 더 늦었다가는 제가 경을 치겠습니다. 어서 절 따라오시지요. 소인이 앞장서겠습니다.” 장씨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윤이정은 아쉽지만 문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쳇, 나머지는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성과는 충분했다.
뒷간으로 볼일 본다며 사라졌던 장씨와 윤이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유경영은 선아를 데리고 재빨리 굵은 나무 뒤로 숨었다.
“오……!”
숙녀를 대하는 처신이 이래서야 되겠냐고 한마디 불평을 터뜨리려던 여동생의 입을 소년은 조그만 손으로 재빨리 틀어막았다.
“쉿! 조용히 해!”
심각한 기색에 멈칫했는지 여동생의 반응이 조용해졌다.
“어서 오시오, 윤 대표사. 중원표국을 지키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열두 개의 방패에 대한 쟁쟁한 명성은 귀 따갑게 들었으나 만나기는 처음이구려. 만나서 반갑소 이다.”
“원 무슨 과찬의 말씀을! 저야말로 사천에서 욱일승천하고 있는 대중양표국의 명망 높으신 주님을 만나게 되어 광영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전 대표사가 아니라 대표두입니다.”
윤이정이 딱 잘라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웃음이 걷히지 않은 얼굴 그대로였다.
“아아, 참! 그랬었지? 그랬었어! 내 잠시 착각했구먼! 미안하네, 윤 표두!”
“대표두입니다!”
이번에는 약간 신경질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웃고 있던 소안(顔)의 가면(假面)에 엷은 금이 갔다. 반면 장우양의 가면은 여전히 완전무결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겉에 쓰고 있는 얄팍한 유리 가면’이 먼저 깨지는 쪽이 패배였다.
“으음, 거듭 미안하구먼. 듣자 하니 변비가 있는 것 같은데 시원하게 잘 싸셨는가?”
“그게… 잘 쌌습니다.”
대답할 말이 궁한 윤이정은 잠시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가 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말았다. 단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졸지에 그는 변비 환자가 되고 만 셈이다.
“저런저런! 조심해야지. 과일을 좀 많이 드시게나. 물도 많이 마시고. 그래야 미리미리 사전에 예방된다네. 잘못하다 찢어지면 고생이 바가지니 변비는 빨리 낫는 게 좋다네.”
“벼, 변비는 없지만 조, 조언은 감사합니다.”
자신을 변비 환자로 낙인찍고 하는 조언에 윤이정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안으로 삭여야만 했다. 끝내 장우양은 그를 정식 명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절대 실수나 착각이 아닌 의도적인 우롱(愚弄)이었다. 앉으라는 권유도 하지 않은 채.
“그래, 어쩐 일인가?”
‘이놈이 진짜…….?
“그전에 좀 앉을 수 있겠습니까? 작은 방에 서 있으려니 불편해서요.”
말속에 뼈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의를 차리러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아, 미안하네. 또 깜빡했구먼. 어서 앉으시게, 어서.”
“감사합니다.”
엎드려 절 받기였지만 자신을 도발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오빠, 어디 가?”
“쉿! 조용히 따라와. 소리 내지 말고. 알겠지?”
소년은 소녀를 데리고 건물 벽에 바짝 붙은 채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임시’ 국주 집무실을 향해 다가갔다. 의심의 안개를 거두고 확신을 얻기 위해서라도 저 방문 너머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소년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여동생까지 끌고 온 것이 크나큰 실책이었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 무 늦어 있었다. 다행히 동생은 아직 조용히 있었다. 마침내 국주 집무실에 다다른 유경영은 살짝만 건드려도 깨질 것 같은 유리 인형처럼 조심조심 벽 쪽으로 다가 간 다음 벽에 귀를 바짝 댔다. 그러자 익숙한 장 국주의 목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왔다.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윤 표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니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구려.”
“잘못 찾아왔다라……. 제가 잘못 찾아온 겁니까, 아니면 장 국주께서 잘못 말하고 계신 겁니까?”
두 사람의 언사는 어느덧 날을 세운 칼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두꺼운 진흙 벽도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유경영은 마른침을 삼킨 채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확실히 답변해 주겠소. 우리 중양표국에서는 청룡은장주의 자식을 보호하고 있지 않소이다.”
“장 국주님, 그 말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전 그 아이들의 숙부 되는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숙부는 아니지요.”
피도 이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장우양이 대꾸했다.
“물론 피는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유 장주와 전 피보다 진한 의리로 맺어진 누구보다도 돈독한 의형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사실을 숨 기셔야만 하겠습니까?”
그 말을 벽을 통해 들은 유경영은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갑자기 세상이 캄캄해지고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피보다 진한 의리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본 국주는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습니다. 윤 표두의 말만 덜컥 믿기에는 사 안이 너무 무겁군요. ‘의리’가 ‘오리’가 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윤이정이 폭발했다.
“전 며칠 전 이곳 시장터에서 그 아이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 아이, 경영이가 저에게 직접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그 아이들 이 없다고요? 흥! 그 말을 누가 믿겠소!”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는 법이오. 며칠 전과 오늘의 상황이 똑같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
“말 돌리지 마십시오, 장 국주! 경영이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중양표국의 장 국주께서 청룡은장의 혈사를 엄밀히 조사하여 반 드시 진상을 밝혀주시겠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여기에 머무르겠다고 말입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유경영은 당장 방 안으로 뛰어들어 가 외치고 싶었다. 방금 한 발언 중 일부는 사실이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몽땅 거짓부렁이라고 말이다. 소년은 이를 악문 채 거 칠게 벽을 움켜잡았다.
“그 아이들이 왜 ‘자칭’ 숙부라고 주장하는 댁을 따라가지 않았나 궁금하구려. 왜 ‘자칭’ 피보다 진한 의리로 맺어진 부친의 의형제이자 자신들의 숙부인 당신에
비해 난 그냥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뭔가 미심쩍은 점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소이까?”
말해놓고 보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그 점을 집중 공략해야 할 듯했다.
“자꾸만 말을 돌리지 마십시오. 전 분명히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청룡은장의 후계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진짭니까?”
“진짜요.”
벌컥! 탕!
“그럼 이건 뭡니까?”
장우양이 말릴 새도 없이 윤이정은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윤이정과 유경영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소년의 눈이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장 국주님, 이제 이 아이들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그건…….”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유경영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둡고 탁한 검은 눈과 마주치자 그는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 서웠다. 그 압박은 아직 열두 살 소년이 견디기에는 힘든 것이었다.
“잘 있었느냐, 경영아?”
“예, 잘 있었습니다, 숙…….”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말끝을 흘려 버렸다.
“아니, 왜 그러느냐? 안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아, 아닙니다. 별일없습니다.”
“그러냐? 다행이구나. 난 또 이곳에서 너희를 괴롭히는 줄 알았잖느냐.”
윤이정의 냉소 섞인 시선이 장우양을 향했다.
“자, 이제 중양표국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겠군요. 국주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런 거짓말을 하셨다니 말입니다.”
“그건……?”
장우양은 뭔가를 결심하며 입을 악물었다.
“그 아이는 청룡은장주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억지란 말인가? 윤이정은 장우양의 입에서 튀어나온 얼토당토않은 주장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당황스럽기는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뭐란 말입니까? 갑자기 국주님의 의견이 궁금해지는군요.”
우선 궁색한 변명이나 한번 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우양은 이러한 유인책에 동요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선언하듯 말했다.
“유 소협은 더 이상 청룡은장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그는 청룡은장의 장주로서 저희 중양표국의 가장 중요한 동업자입니다.”
“예에?”
“뭐, 뭐라고!”
쿠쿵!
실로 엄청난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윤이정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유경영까지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장 국주님?”
“들으신 그대로요, 윤 표두. 우리 중양표국은 청룡은장의 부활과 재건을 위해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 말, 진심이십니까?”
“무례하구려, 윤 표두. 상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말이오. 계약을 농으로 한단 말이오?”
“하지만 저 아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말짱 헛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저 아이도 이번 일을 꽤 뜻밖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십대 소년이 얼버무리기에는 너무나 큰 정신적 혼란이었다.
“경영아, 장 국주님과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네 생각을 말해보거라. 정말 장 국주와 동업할 생각이냐? 그렇지 않으면 숙부인 날 따라가겠느냐?” 숙부라.. 따뜻하게 느껴져야 할 정겨운 이 말이 왜 이리도 저주스럽고 증오스럽게 들린단 말인가.
“저는…….”
소년이 뭐라고 입을 열었다.
“저는… 입니다.”
아직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잘 들리지 않는구나.”
“유 장주, 확실히 이야기를 하게. 이제 자네는 사업가야. 일가를 짊어져야 할 우두머리라네. 나이 따윈 상관없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서게! 사람들은 확신없는 우두머리를 따르지는 않네.”
소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미 소년의 눈에 망설임은 없었다. 소년은 불타는 눈으로 숙부라 불리던 작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속에 새겨 넣 기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제 청룡은장의 제구대 장주인 성은 유, 이름은 경영입니다. 저는 저기 계신 중양표국의 장 국주님과 더불어 비열한 배신과 화염 속에서 무너져 내린 청룡 은장을 다시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 당당한 선언에 장우양이 반색하며 말했다.
“오! 잘 말해주었네, 유 장주. 우리 중양표국은 전력을 다해 자네를 지원해 줄 걸세.”
“많은 조력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두게. 우린 이제 한 배를 탄 동지 아닌가!”
의젓한 인사와 함께 유경영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사례했다.
“진심이냐?”
한때 숙부였던 자와 한때 숙질이었던 소년의 눈이 허공중에 부딪쳤다. 소년은 무릎을 꿇고 싶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소년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살기였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소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장우양이 소년을 돕기 위해 기세를 방출했다. 그제 야 유경영은 숨 쉬기가 조금 편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전지, 진심입니다!”
그러자 폐를 쥐어짜고 있는 듯한 압력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윤이정은 자릴 떠났다. 이만 물러가겠다는 인사도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장우양은 말리지 않았다. 앞으로 이 합작 단체를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던 것이다.
‘후회라……. 그 말은 소년에게 한 말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일까??
장우양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확신할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그는 이 어린 소년과 운명공동체라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