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비명
-비류연은 어디에?
“어이, 노학! 대사형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왜 그래, 현운?”
“아니, 저녁부터 안 보여서.”
“그럼 잘된 일이잖아?”
“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안 보이면 또 안 보이는 데서 무슨 일을 꾸밀지 불안하잖아?”
“하긴 그것도 그래.”
현운의 의견에 노학이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아아악!”
편월의 밤 아래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
확실히 비류연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평소보다 열심히 자신에게 도전하는 어리석은 아해들을 계도하기 위해 남다른 열성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러나 천리마보다 빠르다던 그 소문이 이번에는 골병이라도 든 모양인지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 바람에 그에 대한 도전은 아직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겉보기 에 눈에 띄는 특출난 기운이 없고, 들고 다니는 마땅한 무기가 안 보이다 보니 만만해 보인 모양이었다.
글쎄, 그러니까 그런 건 낭비라니깐…….
자신이 강하다는 걸 여기저기 광고하고 다녀서 좋을 건 없다는 게 평소 비류연의 지론이었다. 원래 드러난 칼보다 갈무리된 칼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억억억억억!”
그때 다시금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어디지?”
비류연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억컥컥컥억컥컥컥!”
또다시 어디선가 들리는 연속적이면서도 독특한 비명 소리.
기분탓일까? 비명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꾸에에에엑!”
마지막으로 단말마처럼 터져 나온 돼지 멱따는 소리에 비로소 비류연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으로 묻힌 그곳에 한 인영이 바둥바둥 힘겹게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첫 비명을 제외한 비명 소리는 모두 그의 발밑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던 것이다.
“응?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마침 오늘 처음 만나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비류연이 물었다.
“아까 전부터요.”
그의 발밑에 깔려 있던 청년이 퉁퉁 부운 얼굴 위로 눈물을 콸콸 쏟으며 대답했다.
“아참, 그랬었지?”
그제야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군.”
숨 가쁘게 얻어터지고 있던 쪽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으엉엉엉엉엉! 제발 살려주세요! 다신 안그럴게요!”
“진짜?”
“진짜요.”
“그럼 너가 왜 맞는지 알고 있는 거냐?”
““저… 아뇨…….”
“그래? 그럼 계속 맞아라!”
“으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엉엉엉엉!”
“걱정 마!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
“헉헉헉!”
청년은 삭신이 쑤시는 몸을 이끌고 남창의 어둠 속을 질주했다.
등 뒤로 그 자신을 압박하는 어떤 존재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입관 시험을 치르기 위해 쌓아두었던 내공이 모래 위에 뿌려진 물처럼 급격히 소진되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몇 달씩이나 공들여 특별 관리해 왔던 육체 의 근육은 피로에 찌들고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앞으로 보름이면 드디어 평생을 바쳐 준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입관 시험 날이었는데…….
‘젠장!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동안 그의 삶은 오직 이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준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아직 철이 들기도 전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생기기도 전에, 자기 자신이 누군지 확인하기도 훨씬 이전부터 그는 이 좁은 등용문을 통과하기 위해 헤엄치기를 강요당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갑작스런 위협에 정면으로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을 뿐이다. 승천무제를 통과하는 방법 이외 의 것을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 이외의 사태가 자신에게 닥쳤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판단이 재빨리 서지 않았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야! 썅!’
사실 그동안 그의 모든 판단은 타인이 대신해 주고 있었다. 부모와 사문이 모든 의사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었 다. 철들기 전부터 그것은 당연한 풍경이었으니까.
편리한 점도 있었다. 스스로 뭔가에 대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로 인해 뇌가 굳고 뇌 주름 사이에 이끼가 끼거나 곰팡이가 피는 것 정도는 그에 게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기로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다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법을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누가 따로 가르쳐 준 적도 없었다. 그가 배운 것은 오직 천무학관 입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기교들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순발력있게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 안에 내재된 가능성을 현실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 는 언제나 주된 관심사에서 벗어난 주제였다. 천무학관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보장되는 줄로만 줄곧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곳에 들어가기는커녕 문 앞에 서보지도 못한 채 생애 최초로 홀로 덮쳐 오는 위협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싸운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천재(天災)처럼 갑작스럽게 그를 덮친 것뿐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격(格)이 다른 강적과 조우했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혀끝에 붙어 다니는 상스러운 욕지기를 내뱉으며 시선을 회피한 채 줄달음질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남창의 어둠은 끝없는 미로라도 되는 듯 희망의 빛을 전혀 던져 주지 않았다.
‘포기할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숨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뭐야? 벌써 포기하는 거냐, 시시하게?”
등 뒤에서 자신을 위협하던 적이 어느새 눈앞에서 자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헐떡이는 숨 속에서 겨우 목소리가 삐져 나왔다.
“밤이 너의 모습을 감춰줄지는 몰라도 너의 소리까지는 감춰주지 못하는구나.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해서야. 쯧쯧쯧!”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한 어투였지만 그 어투 안에 담긴 내용은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도망치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인생 상담을 받아볼 충동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려는 의도에 불과했다. “좋은 질문이군.”
이런 얕은 수작에도 상대방은 서슴없이 응해주었다.
“내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지.”
다음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도망이라고 다 똑같은 도망이 아니야.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최강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괜히 작전상 후퇴란 말이 있는 게 아니거든. 어디로 도망칠지, 어떤 방식
으로 도망칠지, 어떻게 하면 추적자를 속이고 따돌릴 수 있을지 등등, 어떻게 해야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도망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씀이지. 도망갈 때 가더라도 그 정도는 염두에 두라고.”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최악의 사태에 대해 항상 대비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도망칠 수 있지.”
그런 세부적인 방식의 도망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 하지만 그런 방식 같은 건 배운 적이 없는걸요?”
청년은 오직 ‘싸운다’와 ‘도망간다’ 두 가지밖에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쯧쯧, 누가 안 가르쳐 줬다고 못한다는 건가?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군 그래. 그럼 어깨 위의 그 동그란 건 뭐 하러 달고 다니느냔 말이야. 거치적거리게스리.” 괴인은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듯 청년을 바라보았다.
“자네, 이름이 뭔가?”
그러나 곧 손사래를 쳤다.
“아니, 됐네, 됐어! 어차피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이름을 물어봤자 헛수고겠지.”
“이름 정돈 가지고 있다!”
“있다?”
괴인의 목소리가 조금 사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있습니다.”
청년은 금세 꼬리를 말았다. 그제야 괴인은 만족했다.
“어차피 남이 모두 결정해 준 인생이잖아?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과거도 현재도 미래까지도. 그런데 굳이 귀찮게 살아서 뭐 하려고? 마시는 공기와 물이 다 아깝 군.”
괴인의 말투는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런 심한 말을.
태어나서 한 번도 혼나본 적이 없는 청년은 분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풋!”
계집애 같은 말에 괴인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남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그는 크고 성대하게 웃어 젖혔다.
“그럼 네가 천무학관에 들어간 다음 뭘 할지 결정해 놨단 말야? 만일 그런 게 있다면 한번 들어보고 싶군. 말해봐! 말해봐!”
“그… 그건…….?”
아무리 기억의 서랍을 뒤져 봐도 그 후의 일은 텅 빈 새하얀 백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것 봐! 어차피 들어간 다음에 뭘 할지도 모르고 있잖아? 무엇을 위해 들어가고 싶은지도 모르는 곳에 들어가서 뭘 할 수 있겠어? 거기 들어가면 갑자기 깨달음이 우주에서 삐리리 날아와 득도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거 아냐?”
괴인의 말투는 여전히 신랄했다.
“하, 하지만…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괴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청년의 말을 사정없이 끊어버렸다.
“그러니까 소용없다니깐 그러네, 그 정도 포부로는. 그러니 그냥 죽어. 귀찮잖아?”
함께 저녁이나 하자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어차피 피륙(肉)의 몸으로 숨은 쉬고 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죽는다고 해도 변하는 것도 없을 거고.”
괴인의 말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냥 꼭두각시의 실이 끊어지는 것 정도의 일일지도 몰랐다.
“너 하나쯤 없어도 세상은 잘만 굴러가. 어차피 너 같은 건 똑같은 게 하도 많아서 하나쯤 빠져도 티도 안 나거든.”
괴인의 말이 계속될수록 청년의 정신은 끝없는 나락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해. 날 웃겨준 보답으로 고통없이 잠들게 해줄 테니.”
짤랑!
괴인이 어둠 속에서 한 걸음 빠져나왔다. 달빛이 그자의 몸을 적신다. 밤에 녹아들어 간 긴 소매의 흑의무복, 그리고 눈까지 가리는 긴 앞머리. 긴 앞머리 밑으로 드 러나 있는 그자의 입가에 상냥한 미소가 어렸다.
사라락!
바람이 불었다.
보이지 않은 사신(死神)의 손길을 그 안에 품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