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9권 12화 – 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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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9권 12화 – 검시

검시

번거로운 절차

날이 밝았다.

때때로 빛은 밤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추악한 진실을 들추어내 보여주곤 한다.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밤은 항의하지만 그 항의는 언제나 빛의 물 결 속에 묵살당할 뿐이다.

빛은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 그곳에 경계를 긋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은 그어졌고, 그것은 몇몇 사람 들을 매우 수고롭게 만들었다.

웅성웅성!

천무학관 소속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노란 금줄을 치고 행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신고를 접수하고 막 출동한 참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사건 현장을 보존하는 일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단위 면적당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찍힐 수 있는지 시험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이는 없었다. 특히 그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살인 사건 현장일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남창은 대도시인만큼 관(官)의 영향력도 크다.

보통 이런 인명 사고를 수습하고 조사하고 처리하는 큰일은 관의 역할이었고, 관은 그 책임을 방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 피해자의 신분이 무림인임 이 밝혀질 때 관의 태도는 갑작스럽게 변한다. 그 사건에 대한 조사 책임과 권한이 천무학관으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천무학관 휘하에 있는 한 대대 가 그 일을 맡게 된다. 관과 무림 사이에 이루어진 고도의 정치적 조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아무리 무림에서 이름이 쟁쟁하다 해도 관의 입장에서 보면 민 간인은 민간인임이 분명했다. 민간인에게 공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이 경우 관은 관련 분야 전문가에 대한 협조 요청’이라는 형태로 ‘무원대(無怨)’의 출동을 요청하게 된다. 무원대는 천무학관 휘하의 조직이지만 한시적 인 임시 고용의 임시직이라는 형태로 일시적인, 그러나 합법적인 공권력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일련의 복잡하고도 세련된 고도의 정치적 거래 및 조율을 통해 천무학 관은 바라마지않던 남창 내에서 벌어지는 무림인 간의 상해 사건 및 살인 사건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적법한 권한을 지니게 된 것이다.

억울함을 없게 하라는 뜻을 지닌 이 부대의 최우선 목적은 시체를 검시하고 그 살해 방법을 파악한 연후에 이를 근거로 하여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었다. 이때 수반 되는 검시 및 조사가 모두 합법적인 권력의 방패 뒤에 가려지게 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점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이 무원대를 맡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형산일기 백무영과 삼절검 청흔으로 두 사람 모두 구룡의 일인이자 구정회의 두 기둥이었다.

그들은 관도의 신분임에도 벌써부터 몇 가지 중임을 맡고 있었다. 남창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무림 관련 사고는 천무학관에서 전담하는데 이때 대부분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처리한다. 학생들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취지하에 진행되므로 어른들이 그 일에 관여하는 일은 많지 않다. 직접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현실이라는 게 살다 보면 이론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워낙 빈번하게 발생하다 보니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일이 잔뜩 있다. 때문에 아직 한창 배울 나 이에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쌓아둔다는 것은 나중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다. 머리에 든 것은 언제나 자주 망각의 숲 속에 버려지지만 몸에 새겨진 것은 쉽게 잊혀지는 법이 없다.

“그럼 시작할까?”

“준비됐네.”

백무영의 말에 청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 일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청흔은 거적으로 덮인 시신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해지는 것 또한 의무라네, 친구.”

친구의 불평에 백무영이 한마디 했다.

“의무라…….”

그들 역시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특수한 일에 종사한다고 해서 정신이 고양되거나 삶이 풍요로워지는 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정서를 메마르게 하고 감정을 피폐하게 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때문에 모두들 이 일을 기피하고 꺼려한다. 두 사람 역시 난자당한 시체를 보 며 흥분하는 악취미 따위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모두 꺼려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이 일을 자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남들보다 위에 선다는 것은 더 많은 권리를 지니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만큼의 의무를 이행해야만 한다. 양쪽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는 소수만이 사람들의 존경과 부하들의 신망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부하들이 자신보다 더 열심히 일하길 기대하는 것은 그다지 희망적인 관측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무를 이 행해야만 했다. 그래서 남들이 기피하고 본인이 그다지 원치 않음에도 이 일을 택한 것이다. 물론 남들에게 강제로 이 일을 떠넘길 수도 있었다. 그만한 힘 정도는 두 사람에게 모두 주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위의 지지를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달콤한 권력만을 탐하는 윗대가리를 좋아할 부하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조직이든 위는 적고 아래는 많다. 건물과 마찬가지로 조직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

는 구성원 간의 강력하고 견고한 믿음과 지지가 필요하다. 신뢰는 조직이란 건물을 단단히 이어주는 아교와도 같은 것. 그것을 잃어버린 체제는 필연적으로 와해될 수밖에 없다.

“옛부터 자격이 부족하면 역성혁명(易姓革命)도 가능하다는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나!”

“누구 말씀인가? 옛날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유명인의 말씀이 분명한 것 같은데?”

“아주 유명인이시지. 맹자(孟子)님 말씀이라네.”

“나 같은 무지렁이 무부도 들어봤을 만큼 유명인이시로군.”

한나라 이후 유학(儒學)이 국가의 통치 도구로 채택됨에 따라 기득권 수호적인 측면이 특별 강화되었지만 그 실체를 파고들어 가보면 결코 그런 안이함을 용납하 지 않는 엄격함이 깃들어 있는 학문이다.

정명(正名)이란 그런 것이다.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이름을 바꿀 순 없으니 그 이름을 걸고 있는 대상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정명이란 쉽게 말해 이름값을 못하면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충실한 사상인 것이다. 때때로 이름은 그 값을 시세에 비해 너무 후려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에누리가 없다는 것 또한 특징이다.

때문에 청흔과 백무영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내키지 않더라도 값을 온전히 치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가진다 해도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속 적인 투자와 관리가 필요하고 제대로 투자 관리를 못하면 쫄딱 망한다는 점에서 장사랑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었다.

“유명인이기 때문에 그 말이 오래도록 남은 것일까, 아니면 말이 시간의 풍상에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었기에 유명인이 된 것일까? 자넨 어떻게 생각하 Lt?”

“나한테 묻지 말게. 난 학자도 아닌 데다가 도가(道家) 사람이라고. 설마 내가 무당파 사람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친구?”

“학문에 경계가 있겠나? 시야가 좁아지면 절름발이나 다름없게 된다네, 친구.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그 사상은 썩어 들어가기 마련이라네. 여기 이 시체 처럼 말이지.”

그러면서 백무영은 시체 거적을 한번 툭툭 쳤다.

“나의 사문인 형산파도 도가 계열이지만 유학도 재미있다네. 무공을 익히는 것만큼 문(文)을 익히는 것도 흥미진진하지.”

“누가 구정회의 문상 아니랄까 봐서. 하지만 아마 천무학관의 관도 대부분이 자네 말에 동의 안 할 걸세. 그런 하품나는 걸 왜 하냐고, 질풍처럼 칼을 휘두르고 번 개처럼 주먹을 내지르며 땀이나 흘리는 게 훨씬 더 신나고 통쾌하다고 말할 걸세.”

“그렇겠지. 인정하네. 하지만 이런 사람이 한 사람쯤 있어도 나쁘지 않잖나?”

“적당히 해주게.”

“알겠네. 그럼 우선 현장 기술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검시의 기본은 현장 묘사에서부터 시작된다. 무턱대고 시체를 후비적거리는 게 검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검시란 매우 엄격한 규정과 규칙에 의해 진행되는 과정이며 언제나 신중을 요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절차를 사랑했고, 굳이 절차를 무시할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해 규정된 정식 과정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특히 이런 인명과 관련된 공적인 일은 통일 성 유지와 원활한 업무 관리를 위해서도 절차를 지켜주어야만 했다.

“시친(屍親:시체의 친척)이 있나?”

절차에 따라 백무영이 물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친은 없지만 동료로 보이는 인물을 봤다고 합니다. 이 근처에 사는 자는 아니니 시친은 멀리 있을 겁니다.”

“그럼 시친을 검시 증인으로 삼을 수는 없겠군.”

그럴 경우는 시친이 도착하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검험檢驗)에 참여한 증인 수 명에게 각각 다짐을 받아둬야 한다. 시친이 오기를 하릴없이 기다리다 시체가 부패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이럴 때는 이웃사촌이나 친구를 대신 증인으로 세우기도 한다.

백무영은 시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 번 훑어 내렸다. 품새를 보아하니 천무학관 입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남창에 온 이가 틀림없었고, 그럴 경우 혼자 오는 경 우는 드물었다. 특히 그자가 군소방파가 아닌 대문파에 소속된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 동료로 보이는 자들이 어디 있는지 아나?”

청흔이 물었다.

“예, 증언에 의하면 청운객잔에 여장을 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 부대원 다섯을 데리고 가서 데려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검시를 하기 전에는 증인의 확인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천무학관에서는 관에서 하는 것처럼 똑같은 과정으로 검시를 진행했다. 그래야 나중에 관에 자료를 넘겨줄 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선 안색부터 살펴보기로 하세.”

달려가는 부하의 등을 눈으로 전송하며 백무영이 말했다.

안색은 사인(死因)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지표였다.

때문에 안색도 살피지 않고 다짜고짜 무턱대고 시체의 배부터 가르는 무식한 짓이었고 상식적인 검시관이라면 피해야 마땅한 행위인 것이다.

환자에게 칼을 대는 것이 의사에게 남겨진 최후의 수단이듯 시체에 칼을 대는 것은 검시의 가장 마지막에 홀로 남겨진 단계라는 점에서 생자와 사자를 다루는 것 은 다르면서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굳이 비상식적이고 무능한 검시관이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백무영과 청흔은 천천히 시체의 안색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흑암색을 띠는 걸 보니 타물에 의한 상처인가?”

흑색은 구타나 목을 매는 상흔의 매우 중요한 지표였다.

“그렇다면 굳이 이 은비녀는 쓸 필요가 없겠군.”

청흔이 순결한 처녀처럼 은빛으로 새하얗게 빛나는 은색 비녀를 하나 들어올리며 아쉽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무원대의 소유품으로 관에서 직접 관리해서 품급까지 매긴 진품 중의 진품이었다.

그러나 중독사가 아닌 경우 이 비싼 검시 도구가 활약할 기회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단 찔러보기는 하세.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실낱같은 가능성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지 않겠나?”

백무영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심심해서 찔러본다고?”

청흔의 귀에 그렇게 들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든지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잖나. 게다가… 비싼 물건인데 자주 써줘야 본전을 뽑을 수 있지 않겠는가? 놀려두기만 하는 것도 기물 낭비일세. 도구는 쓸 때에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지. 이 은비녀가 머리 장식용은 아니지 않나?”

청흔은 어떤 불쾌한 상상에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면 수백 개의 시체를 찔러본 비녀를 순도가 높다는 이유로 머리 위에 달지는 않겠네.”

게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실 하나를 그는 애써 무시했다. 중독사한 시체의 경우 초검이나 복검을 할 때 모두 은비녀를 넣어 시험하도록 하는데 그 넣는 곳 이 문제였다. 검시 권장 절차에 의하면 은비녀를 인후(咽喉) 깊숙한 곳에 찔러 넣었다가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꺼내어 비녀의 색이 변했는지를 살피는데 은색이 검은 색으로 물들면 중독된 것으로 간주한다.

귀하고 비싼 은비녀를 찔러 넣는 곳이 목구멍이라는 것만 해도 큰 문제인데 개중에는 이 인후의 위치를 잘못 이해해 콧구멍에다가 찔러 넣는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행인지 불행인지 사후 경직 후라 콧물이 딸려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르스름한 조각들이 심심찮게 묻어 나오 곤 했는데, 결코 상쾌한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경험들이었다.

시체의 콧구멍에 사정없이 쑤셔졌던 그런 물건을 머리채에 꽂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청흔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떤 미인이라도 단숨에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군. 그 정도 되면 이미 살인 무기가 아닐까?”

적어도 정신이 피폐해질 것만은 분명했다.

“동감일세. 그렇다면 이 은비녀의 사용처는 단 한 곳뿐이군.”

그러면서 백무영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혹시 모르지 않나. 독을 먼저 먹인 다음 신체가 마비되어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서 습격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청흔이 마지못해 동의했다.

“콧구멍에다가 꽂진 말게.”

백무영이 친절하게 검시관의 가장 빈번한 실수에 대해 언급했다.

“자네 콧구멍과 착각하진 않을 걸세. 그러니 걱정 접게나.”

청흔은 약간의 감미롭고 어두운 유혹을 느꼈지만 적절한 절제심을 발휘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은비녀를 시체의 인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곳은 그나마 나머지 몇몇 구멍들보다는 상당히 청결하고 건전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시체한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당사자가 불평불만을 터뜨릴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 크나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 인후에 꽂혀 있던 은비녀를 들어올린 청흔은 햇빛 아래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이보게, 무영.”

“왜 그러나?”

시체를 이리저리 살피며 시체 검시 기록표인 ‘결안정식’에 기록하고 있던 백무영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겼는데 말일세…….”

“뭔가?”

“독을 만들고 전문적으로 독충을 기르며, 식물의 독을 모으고 독약을 매매하며 사람의 목숨을 해친 경우에는 각각 일정한 형벌이 주어지게 되지 않나?”

“그렇지.”

그것이 법이었다.

“그렇다면 사천당가(四川唐家)는 얼마나 오랫동안 형(形)을 살아야 할까?”

그제야 백무영은 이 친구가 농담을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아마 두부 살 일은 없을 걸세.”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독을 실험하고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사천의 악명 높은 당가가 아니었던가. 그들의 독과 암기에 대한 집착은 가히 편집증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당가의 가훈이 무엇이던가! 일일일독(一日一毒)!

하루에 한 가지씩 새로운 독을 실험하고 새로운 독을 만들어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실은 너무 오랫동안 가둬놔야 하기에 당가를 만든 건지도 몰라. 당가의 건물은 사실 공식 문서상엔 감옥으로 분류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백무영은 조심스럽게 가설 하나를 제시했다.

“음… 일리가 있군.”

어차피 계속해서 형량이 쌓일 테니 잡아넣는 것 자체가 헛수고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감옥으로 등록해 놓는 게 훨씬 편할지도 몰랐다. “이상없네.”

다행히 당가에게 의심의 눈을 돌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백무영의 시야에 그것이 들어왔다.

“이쪽은 이상이 있군!”

흠칫!

청흔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그어진 혈선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상흔이었다.

“선홍색(色)이로군.”

찌푸린 이마를 펴지 않은 채 청흔이 말했다.

“그럼 자상흔(刺傷痕)이군. 검상인가?”

“아닐세. 검상치고는 상처가 너무 미세하네. 아무리 정밀한 검초라도 이런 식의 얇은 상처는 만들어낼 수 없네.”

“검은 아니라……. 그럼 흉기가 무엇인 것 같나?”

잠시 고민하던 백무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건 사검(劍)에 의한 상흔 같네.”

청흔은 친구의 판단이 잘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늘하늘한 실 같은 걸로 사람을 베는 그 기술 말인가? 그런 걸로 이 정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인가?”

“숙달된 고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일세.”

“그건 또 왜 그런가?”

“이런 독특한 독문무기를 쓰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네. 그중에서 이토록 사람을 절명시킬 정도의 기술을 가진 자는 더욱 적다 할 수 있지. 우리는 이 살해 도구를 알아냄으로써 용의자의 범위를 최소한도로 축소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유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듣고 보니 그렇군. 이제야 시체를 뒤적거린 보람이 나타나는 모양일세.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구지? 이 남창 안에서 사검으로 이름 높은 무인의 이름이나 이야기 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걸 밝혀내는 게 우리의 역할일세.”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시체의 붉은 상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백무명이 말했다.

“게다가 이런 상처, 전에도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거든.”

요 이삼 년간 항상 평지풍파의 중심에 서 있었던 긴 앞머리의 청년을 떠올리며 백무영이 말했다.

시친 대신 생전 친구였던 네 명이 소환되었다. 다들 무슨 일 때문에 자신들이 잡혀왔는지 몰라 모두들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떨 것 없네. 그냥 몇 가지 사항만 확인하면 될 테니까.”

일단 청흔이 나서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예…….?”

모두들 쭈뼛쭈뼛 힘없이 대답한다.

“자자, 힘 빼게. 예전에야 혐의가 있든 없든 일단 두들겨 패고 시작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거든.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네.”

본인은 위로랍시고 한 말인지 몰라도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말이었다. 더욱 딱딱하게 굳어진 청년들을 향해 청흔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선 신원 확인부터 하도록 하지.”

청흔은 쫄아서 손톱만 하게 줄어들어 있는 네 명을 데리고 금줄을 넘었다. 뒤따라오던 네 명의 안색이 변한다. 금줄을 치고 있는 대원들의 분위기가 흉흉한 까닭이 었다. 게다가 이곳은 어디로 보나 살해 사건 현장이었다. 그들이 용의자로 지목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흔은 시신을 덮고 있던 거적을 들추었다.

“아는 얼굴인가?”

“헉!”

네 명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과 웃고 떠들며 음주가무를 함께 즐기던 친구였던 것 이다.

“아아아아!”

그중 한 명은 어지간히 심약한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 한심한 모습에 청흔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여보란 듯 기절까지 해서는 곤란했다. 그것도 천무학관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말이다.

“깨우게!”

기절했던 심약한 친구가 정신을 차리자 다시 청흔이 물었다.

“혹 의심 가는 사람은 있나?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던가?”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네 명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예, 있습니다.”

청흔의 눈에 기광이 흘렀다.

“정말인가?”

“예.”

여전히 불안한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잠깐 여기 백 대주 좀 불러와라.”

“옛!”

백무영은 이쪽 방면에 대해서는 그보다 전문가라 할 수 있었고, 그도 그런 친구의 전문성을 존중해 주고 있었다.

“흐흠, 이건 기대하지 않은 수확이로군.”

그렇지 않아도 좀처럼 목격자가 나오지 않아 골치를 썩고 있던 참이다.

“우선 네 명을 각기 흩어지게 한 다음 진술을 듣도록 하지.”

“왜? 한자리에서 들으면 편하잖나?”

청흔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럼 서로 입을 맞췄는지 알기 어렵게 돼. 따로따로 경위를 들어야 나중에 대조했을 때 차이점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법이지.”

“과연!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군!”

청흔이 감탄하며 손바닥을 쳤다.

“심오는 무슨, 그냥 상식일세, 상식. 뿐만 아니라 네 가지 각기 다른 주관에 의한 관찰을 보다 객관화할 수도 있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지.” “당장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음, 그리고 두 번 연속으로 진술받는 것도 잊지 말게.”

“그건 왜?”

“그게 관례라네. 그래야 위증하기 힘들거든.”

“번거롭군.”

“참게! 관청들도 살인 사건 정도 되는 큰 사건의 경우 세 번 복검하는 것이 적법한 절차라네! 우린 두 번이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인명 사건은 신중하게 처리한다는 이념하에 이루어지는 이런 절차를 ‘삼복제(三覆制)’라 칭했다.

“어떤가?”

사정청취가 모두 끝난 후 청흔이 물었다.

“음, 용의자의 용모파기에 대한 네 사람의 진술이 모두 일치했네.”

침중한 목소리로 백무영이 대답했다.

“들어볼까?”

그의 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는 서식을 펼쳤다.

“성별은 남자, 나이는 이십 세 전후, 소매가 긴 흑의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오른팔에 황금 완장을 차고 있었다고 하네.”

“뭐라고! 황금 완장을?”

“그래, 그렇다는군.”

“그럼 입관 시험관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건가? 누가? 왜?”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는 그에 따른 원인과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살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네. 하지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네.”

그리고 백무영은 속으로 몇 가지 사안을 검토해 보았다. 그러자 즉시 몇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어느 것 하나 재미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한 가지로 꼽는다면?”

헷갈리는 것은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그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건이네.”

“홧김에 죽였다는 건가?”

“쉽게 말하면 그렇네.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은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지 않았나? 우리가 이 일을 맡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도 그 황금 완장이 돌아왔겠지. 안 그런가?”

“내가 그 경우라 해도 과연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하기 힘들어.”

그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요즘 주변에 유난히 소화불량 환자나 복통 환자가 많은 것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또 다른 특징은 없는가?”

“사실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남아 있네.”

“왜 그걸 이제야 말하나?”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네.”

‘신중?”

신중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친구를 이토록 긴장시키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마지막은 이건 네 명 모두 동의하는 특징인데 범인은… 앞머리가 무척 길어서 그 길이가 눈을 덮을 정도였다고 하는군.”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이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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