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9권 14화 – 침묵(沈默)으로 나누는… 대화(對話)
침묵(沈默)으로 나누는… 대화(對話)
-비류연 對 청흔
이 사람과 있으면 말이란 그저 마음을 전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나예린은 문득 생각했다. 말이 없으면 대화를 하지 못한다 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단순한 강박관념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함께.
말이 없는 대화라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인간이 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의사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란 상상 이상으로 시야가 좁아서 말이란 것에 너무 신경을 빼앗겨 말이 나온 근원을 때때로 잊어버리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 말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말[言]에 사로잡히고 만다. 한 번 말의 함정에 빠진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그 무지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달랐다. 그는 말에 사로잡히지도 않았고, 심지어 관습에도 사로잡히지 않았고, 자신의 사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 의 이름은 비류연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직접 부딪쳐 온다. 그 때문에 알기 쉽다. 그것이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 에게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가 자신을 굽히는 것을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긴 하지만, 이제 공인된 연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현재 독특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사용 중인 언어는 무언(無 言), 또 다른 이름은 침묵이었다. 쉴 새 없이 혀를 놀리는 것만 아니라 잠시 혀를 쉬면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의 언어가 가져다주는 고요함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 준 사람도 비류연이었다.
나예린은 대화가 무척 서툴렀다. 특히 남자와의 대화는 더욱더 그러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에게 있어서 남자란 경계의 대상이었지 대화의 대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부친인 무림맹주 나백천이었지만 대화가 많은 부녀지간은 아니었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직무상 너무나 바빴고, 그녀는 너무나 어렸 다.
열두어 살 때부터 여인들만 있는 검각에서 생활한 덕분에 이런 경향은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극단적인 환경은 극단적인 반응을 낳는다. 그것이 편협함이라 불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아슬아슬함과 치열함은 외줄타기와도 같다고 한다. 줄을 타다 줄 위에서 중심을 잃은 곡예사는 언제나 크게 다치기 마련이다. 검각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발 생할 수 있는 경험의 극단화를 우려한 검후는 일정 나이가 되면 한 번씩 타 명문정파의 남자 제자들과 함께 자그마한 회합을 열곤 했었지만, 나예린은 그때도 방 안 에 틀어박혀 있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니 대화가 능숙하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과의 접촉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차갑지만 맑게 울리는 그녀의 옥음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 기를 쓰고 꼬꼬댁 거리는 남정네들에게는 잔인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녀는 대화의 능숙 이전에 왜 대화를 나눠야만 하는지 그 필요성조차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남 자란 단지 혐오와 경계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 사실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비류연은 처음 볼 때부터 다른 이들과 어딘가 달랐다. 그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왠지 어디선가 만난 듯한 기시감, 본 적이 없음에도 본 것 같은 친숙한 느낌, 한순 간이지만 마음의 방어막을 허물어뜨린 자연스러움.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일까지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때는 이미 입술을 빼앗긴 이후 였다.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역겹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을 허용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검을 휘둘렀다. 다시 연결된 접촉의 선을 끊기라도 하듯.
그러나 한번 이어진 인연의 사슬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외피를 살짝 긁는 데 그치고 말았다. 아무리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설마 그런 그들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은 당시의 나예린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남자에게 마음을 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천무학관의 그 누구 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비류연과 있으면 지루하고 권태롭고 하품나는 이야기의 실이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애써 뭔가 화젯거리를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이 서로 조용히 감응하고, 고요히 소통하고 있다는 온기 어린 달콤함을 맛보기에 충분했다.
혀를 벗어난 말에 심장이 깃들어 있는 법 없고, 던져진 말엔 언제나 위선과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남아 있는 법. 백 마디, 천 마디, 만 마디 사랑의 말도 하루아침에 거짓과 위선과 허위로 뒤덮인 거대한 묘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침묵에 위선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마음을 울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소리가 아니라 또 하 나의 마음이기에. 공명(共鳴)이란 그런 것이리라.
그의 침묵이 자신의 마음을 울리고, 자신의 침묵이 그의 마음을 울린다. 백 마디 교언, 천 마디 기도로도 반응하지 않던 그녀의 굳은 마음이 단 한 음절의 말도 깃들 어 있지 않은 무언의 침묵에 지금 진동하고 있었다.
묵묵히 울리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 조화를 이루어 두 개의 울림이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마음을 퍼져 나가 세계로, 우주로 뻗어나간다. 그의 울림에 반응한 자신의 울림이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는 게 느껴진다. 영혼이 함께 공명하며 조화 속에서 기뻐하고 있었다. 이 감정, 태어나서 처음 생겨난 이 마음을 무엇이라 불러 야 할까? 얼어붙어 있던 마음속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석양이 진다. 붉은 파도를 일으키려는 듯 바람이 분다. 홍수처럼 밀려올 것 같은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고요에 몸을 내맡겼다. 시간이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졌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선율만이 남아 있었다.
평소 한번 열리기만 하면 수많은 독설을 칼처럼 휘두르던 비류연의 입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용히 굳게 닫혀 있었다.
운향정에서의 만남 이후 그의 불꽃이, 그의 손끝과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불꽃이 그녀의 마음을 꽁꽁 감싸고 있는 차가운 얼음을 한 겹 한 겹 녹여오고
있었지만, 완전히 녹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손의 온기가 그녀의 얼어붙어 있던 손을 녹이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서리 친 창백한 입술에 뜨거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지만, 아직 그녀의 마음을 두르고 있는 저 북해의 빙정보다도 차갑고 단단한 얼음 결정을 완전히 융해시키기에는 그 열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뜨거운 불꽃이 아닌 겨울 자락 끝에 비치는 이른 초봄의 햇살 같은 온기는 그녀의 얼어붙어 있는 마음의 장벽을 조금씩 조금씩 그녀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 한 사이에 융해시키고 있었다. 이 작업은 자각의 뒤편에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졌기에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황폐할 대로 황폐했던 척박한 동토의 땅 에는 어느새 조그마한 신뢰의 싹이 돋아나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에게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아름다운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두렵지만 어떻게든 전하고 싶다고, 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방해자 들만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그리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영원히 울려 퍼질 것 같던 선율은 틈입자의 등장으로 인한 아주 조그마한 잡음에 땅에 떨어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부서져 내렸다. 신경에 거슬리는 잡 음의 파편들을 맞으며 나예린은 안타까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류연…….”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침묵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비류연이 고개를 돌렸다. 나예린 역시 고개를 돌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두 명의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두 분! 잠시 시간있으신지요?”
완벽한 침묵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던 두 사람의 세계를 침범한 이는 구정회의 문상이라 불리는 형산일기 백무영과 무상 비천룡 삼절검 청흔이었다. 투명한 이 슬이 되어 조금씩 녹아가던 마음이 다시 급속도로 차갑게 재동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가라앉아 있던 차가운 한기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무슨 일이죠, 백 소협, 청흔 소협?”
그 한겨울의 서릿발 같은 냉랭한 대꾸에는 구정회의 문상도 주춤하게 하는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서슬 퍼런 한기에 놀란 백무영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내 가 무슨 중죄라도 지었나? 그녀의 이유없는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만 당황해 버렸다.
“아… 저… 그러니깐…….”
날카로운 이성의 결정체라 불리던 남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더니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이 친구, 당황했군.’
청흔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의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탄하고 또 즐거워하며 청흔은 친구의 그런 희한한 모습을 이끌어낸 이에게 망설 임없이 경의를 표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기에 빨리 연인을 찾아보라니깐.
청흔은 혀를 차며 속으로 생각했다.
‘잘생기고 똑똑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면 뭐 하나? 실적이 없는데! 경험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잔뜩 있다고 내가 그렇게 일렀는데 계속 무시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잖아!’
겉에서 보는 것과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엄연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다 좋은데 이론만으로 세상을 다 파악할 수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 단점이었다. 관찰만으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다 알았다는 듯 행동했다. ‘이미 해보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굳이 번거롭게 그걸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말해 버리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자신의 반론은 정해져 있었다.
“아, 글쎄, 검증받지 않은 이론은 그저 가설에 불과할 뿐이라니까, 친구!’
물론 서로 자신의 의견을 절대 굽히지 않았으므로 타협점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이 친구는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실로 무지했 다. 면역도 없었다. 한마디로 허점투성이였다. 체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가설은 공허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그러니까…….?
일단 운을 띄웠으면 뒤를 이어야 하는데 문장은 황망함 속에서 분해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의 가장 강한 무기였던 말문이 막히자 당황의 늪은 더욱 질퍽해져 발버둥 치는 그를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빠져나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용무로 여기에 왔는지조차도 순간 망각하고 말았다.
나예린의 목소리가 더욱더 차가워졌다.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전 아직 용무조차 듣지 못했으니까요.”
딴청 부리느라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말보다 더 차갑게 들리는 말이었다.
“저희는 그러니까… 그렇지! 공무(公務)! 바로 공.무.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나 소저!”
마침내 백무영은 막대한 심력 소모의 대가로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여 자신의 용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공무요? 곧 해가 지고 하늘 위로 별이 떠오를 이 시각에요?”
보통 공무 시간은 묘시 초(오전 6시)부터 신시(오후 5시)까지였다. 무인은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시작 시간이 빨랐고, 끝나는 시각은 평균적인 해 지는 시각 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야, 야근 중입니다!”
“아니, 난 죄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고 있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 기억났다. 그러자 다음 말을 이을 용기가 솟구쳤다. 그렇다. 자신은 공무 중이었다. 잠시 박력에 눌려 움찔하긴 했지만 죄책감 따윌 느낄 이유가 없었다.
“야근이요?”
미심쩍은 어조로 나예린이 되물었다.
“예, 야근입니다. 저희도 쉬고 싶은데 워낙 사건의 중함이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서요. 아직 젊은 나이에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정직하고 모 범적인 관도인 나 소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저희가 용무가 있는 쪽은 바로 저쪽입니다.”
비류연을 가리키는 백무영의 손가락에는 왠지 모를 적의가 서려 있었다.
“이 친구, 여전히 동요하고 있구만.’
청흔은 조금 전부터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을 연속해서 저지르고 있는 친구를 걱정 반 재미 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 지만 아무래도 이 친구에게 일을 계속 맡겨두는 것이 조금 불안해졌다.
청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용무가 있는 쪽은 나 소저가 아니라 저 친구죠. 저희들도 두 분만의 오붓한 시간을, 에흠,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워낙 이번 일이 화급을 다투는 일이다 보니 이렇게 실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관용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나 소저.”
나예린이 비류연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지켜볼 요량인지 그녀 곁에서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문 채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 다. 그러다 보니 자연 대화의 주도권은 아직까지 나예린에게 넘어간 채 그대로였고, 어떻게든 그녀와의 대화를 서둘러 매듭짓고 좀 더 상대하기 편한ᅳ어디까지나 그들의 상상과 편견과 착각의 산물이긴 하지만ᅳ상대와 본론으로 함께 넘어가고 싶은 그들의 욕구는 계속해서 묵살당해야만 했다.
“방해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 걸 보니 저에게도 그 공무상의 이유를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두 분?”
난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백무영과 청흔은 서로를 번갈아 마주 보며 누가 먼저 입을 열어 여인의 원한을 한 몸에 받는 영예를 누릴 것인지 에 대해 눈빛만으로 치열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투를 방불케 하는 장렬함이 깃든 눈짓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평소 쓰지 않던 미세한 안면 근육까지 최대한 혹사시 켜야만 했다. 몇 가지 의견들이 오가더니 이내 무언의 합의로 끝을 맺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백무영이었다.
“좋습니다. 저희들이 여기 온 이유를 알려 드리지요. 어차피 공무를 집행하다 보면 자연 아시게 될 일이니 말입니다.”
비류연을 향해 약간 몸을 돌린 그는 품속에서 공무집행서 한 장을 꺼내 들더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용무를 힘주어 읽어 내려갔다.
“천무학관 삼 년차관도 비류연 자네를 다섯 건의 입관 희망자 살해 혐의로 구속하네!”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의 은밀한 대처가 무색하게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비류연의 대응은 미쳐 날뛰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 의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류연…
백무영의 비정한 선고를 들은 나예린의 목소리는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이나 심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의 빛만 있을 뿐 비난의 빛은 없었다. 나예린은 비류연의 결백을 믿었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그동안 쌓아왔던 신뢰의 탑을 섣불리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보고 느껴왔던 그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무엇인가 한마디 해주길 내심 바랐다. 그러면 자신의 동요하는 마음도 진정될 것 같았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비류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를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흔히 있는 일이죠. 걱정 말아요.”
뭐가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일까? 설마 강호에서 일어나는 살인을 말함인가? 백무영과 청흔은 비류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이해했다. “그렇군요.”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게, 뭐가 흔히 있는 일이라는 건가?”
백무영은 나예린에게 묻기에는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인지 대신에 비류연에게 물었다.
“아니, 그것도 몰라요?”
그런 상식 중의 상식을 모르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그런 태도로 비류연이 되물었다.
“모르네.”
상한 자존심 때문에 미간을 찡그리긴 했어도 백무영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 점은 비류연의 마음에 조금 들었다.
“오호, 꽤나 솔직하네요. 좋아요. 그 솔직함을 봐서 얘기해 주죠.”
비류연이 생색 내며 말했다.
“어서 말해보게.”
선심 쓰듯 하는 비류연의 말에 백무영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래그래, 빨리 말해보게.”
옆에서 청흔도 ‘나의 혀는 단지 거들 뿐’이라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언제나 흔히 있는 일, 그래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 혹자는 자신의 죄를 피하기 위해, 혹자는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게 위해 산 제물을 바치 는 것. 바로 누명이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 그 자체인 양 말하는 비류연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졸지에 무고한 자를 연행하러 온 악한, 내지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무능한 자’로 전락해 버린 두 사람으로서는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네는 지금 자신이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억울하다 이건가?”
“아뇨. 억울하진 않아요.”
그건 또 의외의 대답이었다.
“무슨 뜻인가?”
“어차피 백배로 되돌려줄 건데 굳이 지금 억울해할 필요는 없죠. 그게 누군진 몰라도 남에게 누명을 씌웠으면 그 응보를 받을 각오가 되어 있겠죠. 난 오늘부터 그 때가 오기를 즐겁게 기다릴 테니 억울할 일이 어딨겠어요.”
어떤 분노도 억울함도 서려 있지 않은 그의 말투는 마치 ‘내일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요? 정도의 일상적이고 평탄한 어조였으나, 어딘지 즐겁기까지 한 그 말에 오 히려 갑자기 오싹 오한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무서븐 놈!’ 이런 놈과 척을 지면 평생 괴로울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게 곧 억울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백무영이 따지고 들었다.
“굳이 그렇게 해석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요. 사실 안 억울하다는 증거가 있나요? 그 증거를 눈에 보여주기만 하면 억울한 것을 그만두고 안 억울해질 수도 있 죠. 물론 안 억울해질 수 있는 증거는 보여줄 수 있겠죠? 설마 그런 것마저 없다면 잡혀가는 사람이 무척 상심하지 않을까요?”
“그건…….”
백무영이 말끝을 흐리는 모습을 비류연은 상대방은 볼 수 없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호오, 설마 아직 없다는 이야기?”
그의 말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정말인가요, 백 공자?”
나예린도 놀란 얼굴이 되어 백무영을 바라보자 그의 부담은 두 배가 아닌 네 배로 증가했다. 무언가 대답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꽉 채웠다. 이럴 경우 대답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상대방의 불신만을 초래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무영은 한 박자 쉬고 다시 말을 내뱉었다.
“증인은 있습니다.”
그것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류연의 피식하는 콧바람 한 번에 날아가 버릴 만큼 덧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역시 증거는 아직 없다는 이야기군요!”
나예린이 지적했다. 백무영은 갑자기 고개가 천근만근 무거워지기라도 한 건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땅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귓속으로 혀 차는 소리가 또렷이 들 려왔다. 쯧쯧..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분이시네요. 물론 상상력은 중요하죠. 인간이 경험한 그 이상의 지평으로 인간의 예지를 끌어가 주는 가장 궁극적인 원동력이니까요. 때문 에 우리는 형이하의 세계에 살면서 형이상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탐구할 수 있는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
“저 친구,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알 것 없네. 신경 끄게. 그냥 이야기의 주제를 흐트러뜨리려는 수작이니 말일세!”
청흔의 물음에 백무영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 그런가? 난 또 내가 못 알아먹다 보니 무슨 심오한 이야기인 줄 알았네. 음, 그랬었구먼!”
청흔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류연은 ‘그’ 수작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도 경험과 체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되죠. 튼튼한 기반 위에 튼튼한 건물이 서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자신의 경험이나 현실적 근거도 없이 무제약적으로 상상력을 전개했다가는 망상밖에 남지 않죠. 얼렁뚱땅 넘어가는 버릇은 좋지 않아요. 이 경우는 특히 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봐요, 당신! 이제 그만 망상에서 깨어나시지!’라는 것이었다. 저 한마디 욕을 하기 위해서 형이상의 세계를 돌아 현상을 거쳐 다시 형이하 의 세계로 돌아오는 장대한(?) 여정을 거쳤던 것이다. 역시 만만히 볼 놈은 아니었다.
“우리가 얼렁뚱땅 넘기려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헛다리 짚고 있다고? 증거도 없이, 증인이라 칭하기도 부끄러운 목격자도 못 되는 참고인만을 근거로?”
백무영이 날카로운 어조로 반문했다.
“그렇게까진 얘기하지 않았는데 두 분의 양심에 찔리는 데가 있었나 보군요. 그럼 두 분께선 자신들의 추측이 틀렸을 경우에 대한 특별한 각오는 되어 있으시겠 죠, 물론?”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비류연이 찬찬하게 힘주어 말했다.
“특별한 각오? 무슨 각오 말인가? 우린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공무를 수행할 뿐이네.”
백무영의 대답에 비류연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없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잡아넣는 게 공무인 건 아니죠.”
그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백무영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정적이라 할 만한 정황 증거는 있네.”
“그건 뭐죠?”
“바로 시흔일세.”
“시흔?”
백무영이 그 반문을 기다렸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그렇네. 이번 시체에는 거미줄 같은 붉은 상처가 나 있었네.”
그 순간 비류연의 눈빛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류연… 설마…….”
뭔가 말하려 하는 나예린을 비류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요. 예린은 가만히 있어요.”
다시 비류연이 백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무척 흥미롭군요.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어요?”
어디까지나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비류연이 물었다. 백무영은 조금 귀찮긴 했지만 자신들이 검시하던 상황과 그때 발견하게 된 푸른 상흔들, 가슴패기의 미세한 상처에 대해 매우 자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 백무영의 이름과 사문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건대 분명 검에 의한 상처는 아닐세. 그것은 보다 특수한 흉기에 의한 치명상이었네. 분명 사검(劍) 계통의 흉기 일세. 내가 알기로 그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와호잠룡지지인 천무학관 내에서도 오직 자네뿐일세. 그리고 그 시체의 친구 들 모두 자네가 그 친구를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네. 그런데도 발뺌할 셈인가?”
비류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들 앞에선 그 기(技)를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뒤라도 캔 건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에 따라 그동안 구정회는 비류연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모아왔던 것이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놈이기는 했지 만 백무영은 꽤 많은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푸른 상흔은 내가 남긴 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죽이지는 않았어요. 그런 쓰레기는 죽일 가치도 없으니깐. 게다가 새끼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애송이 얼간이를 상대로 왜 그런 거창한 무기까지 꺼내 들어야 하는지 그 점이 이해가 안 가는군요. 닭 잡는 데 용 잡는 칼을 쓴다는 게 너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 전하는 것도 아니고.”
“맞아, 맞아. 사실 나도 그 점이 의문이긴 했지.”
그런 의문은 청흔 역시도 최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에 무의식중에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청흔, 자넨 좀 조용히 하게. 그럼 자네는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단 말인가?”
백무영이 짜증 섞인 말투로 한마디 했다. 청흔은 잠시 투덜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자 비류연이 말했다.
“여전히 날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중에 가서 남의 장단에 꼭두각시 춤을 춘 책임은 어떻게 지실 건가요? 그것도 공적인 임무를 맡아 공정하고 사 심없이, 냉철하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할 분께서 말입니다. 그런 헛짓거릴 하라고 사람들이 책임을 맡긴 것은 아니잖아요? 그 자리에 있는 만큼 그 책임을 져야 죠. 안 그런가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에는 칼이 숨겨져 있었다.
“만일 아니라면 자네가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는 건가? 감히!”
그러자 비류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군요. 빚은 꼭 받아내야 하는 성격이라서요. 전 채무 관계를 무척 중시하죠. 그걸 잘 해결하는 것이 곧 신용을 지키는 일이 니깐요.”
그 누구도 구정회의 문상과 무상을 두고 이토록 큰소리친 사람은 없었다.
“과연 자네에 대한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군. 오늘 보니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은 오직 자네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말인 모양일세. 과연 자네에게 그 만한 역량이 있을까? 우리들을 누구라고 생각하나?”
백무영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투기가 솟구쳐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하기에는 지난 짧은 인생 동안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비류연은 코웃음을 치며 그 위협을 흘려 넘겼다.
“그러니깐… 구정회라는 별 볼일 없는 애들 모임의 문상과 무상이었던가? 지위 한번 거창하네요. 그만큼 실력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빈 수레가 요란하단 말도 있 잖아요? 만에 하나 그런 지위가 두 사람을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깐 지금이라도 버리는 게 좋아요. 계산 착오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니깐 요. 그건 그렇고, 그쪽이야말로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날 안다고 생각해요? 내가 못할 거라 생각하나요? 그럼 좋아요. 내가 만일 지금 동행하지 않겠 다고 하면 어떡하시겠어요?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궁리해 오셨나요?”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마침내 청흔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다면 힘으로 끌고 가겠네!”
청흔의 위협에도 비류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걷히기는커녕 더욱 짙어졌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번 견식이나 해볼까요? 그쪽 분은 안 끼어들어요? 난 둘이 같이 덤벼도 상관없는데? 그래 봤자 결과는 변하 지 않을 테지만.”
비류연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아니꼽긴 했지만 백무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양했다.
“아, 난 두뇌파라서 말일세. 보통 힘쓰는 일은 저 친구에게 맡겨두는 편이라네. 난 잠시 관망하도록 하지.”
“그럼 불리할 텐데. 뭐, 휘 녀석을 힘들게 했던 그 무공을 한번 견식이나 해볼까요? 그때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고 싶군요.”
“자네한테 굳이 그런 오의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청흔이 냉소하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 대답은 청흔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어느 틈엔가 비류연이 그의 등 뒤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흔은 깜짝 놀라 기겁하며 급히 신형을 틀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으니깐.”
거 보란 듯 비류연이 웃으며 말했다. 청흔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어느새 등 뒤로 돌아간 거지?”
방심했다고는 하나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할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자네의 뜀박질 재간이 뛰어난 건 인정하겠네. 하지만 그 발재간만 가지고는 날 이길 수 없을 걸세.”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그건 그렇고, 이제 생각이 바뀌었나요? 등 뒤에 매달린 나머지 두 개의 검도 장식은 아니겠죠?”
“물론일세. 이 녀석들은 결코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을 걸세.”
마침내 청흔은 전력을 다해 비류연을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옛날 그때만 생각하면 큰 오산일 걸세.”
“그때랑 같다면 죽어야죠. 아무런 진보도 없었다는 얘기니 말이에요. 날 실망시키지 말아줬음 좋겠군요.”
“물론 실망시키지 않겠네.”
청흔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대꾸했다.
슉슉슉!
청흔의 등에 꽂혀 있던 두 자루의 검이 마치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뽑혀 나왔다.
‘삼환회선비검으로는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초반부터 삼정태극검혜의 지극(極) 오의(義)인 무극검(無極劍)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세 개의 검이 한데 어울리고 천지인이 합일하며 그 안에서 생겨나는 네 번째 검, 무극검! 그는 이 초식으로 이 년 전 삼성무제에서 모용휘와 은하류 개벽검과 맞붙 어 비긴 적이 있었다. 최강의 오의를 사용하고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검기를 연마해 왔다.
‘그때는 미완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깊이 면에서는 아직 부족하긴 했지만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미 완벽하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 앞에서 세 자루의 검이 원형을 그리며 삼태극도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흠, 그때 휘 녀석에게 썼던 그 기술인 모양이군요. 꽤나 강한 기술이긴 하지만 여전히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게다가 이미 한번 견식도 해봤다구요.”
그러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이것이 한번 봤다고 파훼될 무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리고 그때와 똑같다 생각하면 큰 오산일세.”
“글쎄, 그럴까요?”
“그런 말은 이걸 받아본 다음에나 하시게!”
삼원합일! 선천태극! 무극지도!
세 자루의 검이 한데 어우러지며 그 안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을 지닌 검강이었다. ““받아라!”
삼정태극검혜 오의(奧義).
무극검(無極劍).
일관(一貫).
삼태극처럼 한데 어우러지는 세 자루의 검에서 발생한 무형의 검강이 모든 것을 꿰뚫을 기세로 비류연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가히 번천지복할 만 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당황하지 않고 정면을 향해 나아갔다.
“아, 글쎄! 순서가 틀렸다니깐!”
비류연의 오른팔에 차여 있던 묵룡환이 풀림과 동시에 그의 오른팔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달팽이도 하품할 만큼 말도 못하게 느린 속도였다. “끝났다!”
청흔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만 했다.
“마, 말도 안 돼!”
기식이 흐트러질지 모를 위험에도 청흔은 그만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승리 확정을 시샘이라도 하듯 그의 눈앞에서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던 무형의 검강이 마치 그를 피하기라도 하듯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를 셋으로 나눌 수는 있어도, 나눠진 셋을 다시 하나로 합친다고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요!”
비뢰도(飛刀상급오의(上級奧義).
변역(變易)의 장(章).
적중화(中和).
느리게 움직이던 비류연의 오른손이 청흔의 가슴 앞에서 눈부신 속도로 회전하는 세 개의 검 사이를 여전히 느린 속도로 비집고 들어갔다. “안 돼! 위험해!’
청흔이 보기에 그것은 자살 행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쾅!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청흔은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십여 걸음 뒤로 연신 물러나고 말았다.
“우웩!”
청흔의 입에서 한 바가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청흔!!”
친구를 믿으며 안심하고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백무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급히 하늘 위로 솟구치는 그의 손에서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깃발 신호와 동시에 정원 일대를 포위하고 있던 서른 명의 무원대 대원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추가로 투입된 칠십여 명의 구정회 회원들이 엄폐를 풀고 일제히 뛰 쳐나왔다.
다시 붉은 깃발이 좌로 두 번, 우로 세 번 움직였다. 그러자 무사들은 그 수기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이며 검진을 형성했다. 약 백여 명에 이르는 대인 원으로 구성된 검진이 순식간에 비류연을 포위했다.
“이건 또 뭐죠? 환영 인파인가요? 그것치고는 숫자가 꽤 많군요.”
비류연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도검지림을 바라보며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미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역시 두 사람만 오기에는 걱정이 됐나 보죠? 소심하기는.”
비류연이 안됐다는 어조로 한마디 했다.
“난 그저 완벽을 기하고자 했을 뿐이네.”
이 많은 인원을 깃발 하나만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만 봐도 백무영의 능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류연은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도검지 림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보게, 청흔? 자네 괜찮나?”
백무영이 연신 다섯 걸음을 뒤로 물러난 뒤에 피를 토한 청흔을 부축하며 물었다.
“난… 괜찮네……. 쿨럭쿨럭!”
진탕된 기혈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청흔이 대답했다.
“그러기에 늦기 전에 편먹고 덤비라고 했잖아요.”
비류연이 혀를 차며 청흔에게 말했다.
“쯧쯧, 보아하니 이 년 전 그때 이후로 그다지 진전이 없었던 모양이네요. 그래서는 우리 깔끔이를 이기지 못하겠는데요. 좀 더 연마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그 깔끔이는 모용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본인이 들었으면 기겁할 호칭을 아무렇지도 않게 갖다 붙이는 비류연이었다.
“어, 어떻게 파훼했나?”
청흔이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평생을 연마한 지극한 검기가 파훼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청흔이었다. “변화의 중심을 잡으면 어떤 변화도 무력해지기 마련이지요. 게다가 무극을 둘이나 셋으로 나눌 수는 있어도 그 둘이나 셋을 단순 덧셈식으로 더한다고 해서 무극 이 된다는 식의 단순무식한 사고는 곤란하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러니 이렇게 손쉽게 변초의 뿌리를 파악당하는 거라구요. 댁이 진짜 무극(無極) 을 체현(體現)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깨지지는 않았겠죠.”
당연하지 않느냐는 어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그걸 직접 몸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았다.
“아직 나의 공부가 부족했단 말이군. 내가… 졌네…….”
청흔은 자신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뭐,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풀 죽진 말아요. 나야 천재니까 그걸 파훼할 수 있었던 거니깐요.”
자화자찬도 서슴지 않는 비류연이었다.
“자, 그럼 이겼으니 이제 그만 가도 될까요? 이 사람들 좀 치워주겠어요? 이거 살벌해서야 원.”
겨누고 있는 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안광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네. 자넨 우리와 함께 가야 하네.”
벡무영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비겁하군요.”
챙!
잠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예린이 차가운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며 한마디 했다. 숫자로 핍박한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청흔과 백무영에게 있어 될 수 있으면 극구 피하고 싶은, 매우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검진을 이루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순간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이들도 모두 남자다 보니 빙백봉 나예린을 사모하는 이들의 수가 과반수가 넘었다. 그런데 그런 자 신들의 우상에게 미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다 보니 심적 동요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직을 이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고 만 것이다. 물론 그런 만큼 비류연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아무리 자네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이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걸세.”
백무영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자, 어떻게 할텐가?”
만근보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비류연이었다.
“하나만 물어보죠. 이곳을 시산혈해로 가득 채우고 싶어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그리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 순간 장내의 긴장감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해졌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금세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 후에는 혈육이 난무하는 피의 잔치가 있을 뿐이었다.
“자네가 그럴 수 있겠나?”
“물론 난 내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요. 뭣하면 증명해 보여줄 수도 있지만…”
그 순간 장내에 있던 백여 명의 사내들은 마치 사나운 맹수가 지척에서 내뿜는 듯한 서늘한 살기를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스륵!
그러나 비류연은 위압적으로 들어올리던 손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에휴, 관두죠. 예린도 옆에 있고 죄짓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로 괜히 덤터기 쓸 수는 없으니깐요.”
비류연은 양 손바닥을 뒤집은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런 싸구려 흉계를 꾸민 녀석은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죠.”
“자넨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로군.”
청흔이 식은땀이 맺혀 있는 목뒤를 쓸며 탄식했다.
“칭찬 고마워요. 그들의ᅳ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ᅳ이번 계획이 만일 실패로 돌아간다면ᅳ뭐,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겠지만―그들도 그 무서움을 맛뵈기 정 도는 할 수 있겠지요.”
“지금 당장 그들을 쫓을 생각인 건 설마 아니겠지?”
아직도 연행을 거부할 생각인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아뇨. 일단 시간이 필요하니까 굳이 지금부터 나설 필요는 없죠. 일단 동행하기로 하죠. 그런데 그러려면 장신구도 차야 하나요?”
“장신구? 아, 수갑 말이군!”
청흔은 조금 후에야 비류연이 한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넨 아직 용의자니 반항하지 않겠다면 굳이 수갑을 채우진 않… 았으면 좋겠으나 규칙은 규칙이니 어쩔 수 없네. 이해해 주기 바라네.”
비류연은 의외로 순순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양 손목에 차여 있는 두 개의 묵룡환이 백무영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눈에 띄지 않기엔 그것들 은 너무 화려하고 독특했다.
“이건 뭔가?”
묵룡환에 새겨진 승천하는 용 문양을 바라보며 백무영이 물었다. 조금 전 바닥에 떨어졌던 하나도 어느 틈엔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이런! 선객이 있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군요. 이것도 일종의 족쇄죠. 장신구 역할도 하지만. 그러니 뭐 하나 더 찬다 해서 큰 상관은 없을 듯도 하군요. 어서 채워 요.”
비류연이 두 손을 한데 모아 내밀며 재촉했다.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큰일은 없을 듯싶어 그 위에다가 그냥 채우기로 결정했다.
‘그래 봤자 그냥 장신구겠지…….’
그러나 그것은 장신구 이상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기관장치 같은 것은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허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무기였다.
“현재 몸에 지니고 있는 병기가 있나?”
“없다고 하면 믿을 건가요?”
“아니, 못 믿겠네.”
“그러면서 뭘 묻나요? 하지만 자신의 소중하고 은밀한 것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군요. 도중에 방에 들렀다 가도 될까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청흔?”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지는 않나?”
백무영이 전음을 사용해 물었다.
“흐흠…….”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애저녁에 난리를 쳤겠지. 별일없을 것 같네. 굳이 일을 귀찮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나?”
“좋네. 현재 자네 몸은 어떤가?”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네. 유사시에 움직이는 데도 무리는 없을 걸세.”
“그럼 그렇게 알겠네.”
“뭐, 상관없지 않을까?”
잠시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한 태연한 태도로 청흔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쓸데없이 복잡한 것보다는 간결한 게 더 좋은 법이다.
“감사하군요.”
비류연이 수갑을 찬 채 인사하자 사슬이 서로 부딪치며 쩔그렁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류연’,
자신의 눈앞에서 비류연의 손에 수갑이 차여지는 것을 보며 나예린은 따끔 가시가 돋아난 듯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속수무책인 자기 자신이 왠지 싫었다. 혐오 스러웠다. 뭔가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이 갑작스런 운명에 저항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녀의 손은 그녀의 검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
도 그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단 한 수, 단 일 초면 저 수갑은 더 이상 수갑이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한낱 쇠 쪼가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베어버릴까?”
평상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만일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시켰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만둬요’라는 비류연의 말이 그녀의 손을 멈추게 했다. 나예린은 고개를 들어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비류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요. 예린답지 않으니까요. 굳이 이런 일에 예린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 괜한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요.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그 냥 감정의 낭비일 뿐이에요. 이 정도도 혼자 못하면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어요? 이 정도쯤은 스스로 혼자 하게 둬요. 나를 믿는다면. 나는 나를 믿으니 예 린도 나를 믿어줘요. 그럴 수 있겠죠?”
그만두라는 말보다 더 무거운 말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며 굳게 다물어져 있던 그녀의 붉은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믿겠어요.”
비류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과장스레 수갑을 흔들어 보였다.
짤랑짤랑짤랑!
흉포한 용도에 비해서 무척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흠, 꽤 좋은 수갑이네? 철과 청동의 합금인가? 만년한철은 아니고… 백련정강쯤 되어 보이는군요.”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 철의 부딪치는 소리만으로도 비류연은 금속의 종류를 판별할 수 있었다.
“잘 아는군. 자네가 야철 기술 쪽에도 조예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
청흔이 의외라는 듯 대답했다.
“이쪽 일은 좀 경험이 있으니깐요. 뭐, 내 가녀린 두 손목에 차이기에는 좀 만듦새가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뭐, 당장에 개선될 것 같지도 않고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기로 하죠.”
“수갑에도 격이 있나? 자넨 정말 특이한 친구로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연행도 해보았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처음일세.”
청흔이 반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반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것 다행이군요. 어리석은 대중들의 무리 중에 끼어 있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에요. 난 처음이란 걸 좋아해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곳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는 그 쾌감. 그 쾌감은 밤사이 하얗게 흰 눈이 쌓인 마당에 맨 처음 자신의 발자국을 찍을 때의 그 쾌감보다도 더 강렬하고 짜릿하죠. 그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몰 라요. 절대로.”
전입미답의 영역, 금단의 영역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자신의 자취를 남기는 일이 그는 좋았다. 그것이 때때로 그 금역을 할퀴는 상처가 된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터였다.
“보통은 이상하다고 말한다네. 미치광이라고 하거나.”
“아무런 판단 없이 과거의 인습이 조종하는 대로 그저 기계적으로 춤추는 무지몽매한 꼭두각시 인형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나까지 자청해서 그럴 필요 는 없잖아요? 강물에 떨어진 물방울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사라져 모르게 될 테니깐. 그럼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될 게 뻔하잖 아요? 나 자신의 존재를 망각해 가면서까지 그런 쓸데없는 데 힘 빼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시간 낭비도 이만저만한 시간 낭비가 아니니깐요. 그럼 갈까요?” 비류연이 자청해서 말했다. 마치 자신의 길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듯, 수동적인 자신이 되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서려 있는 듯했다. “그… 그러세. 가지.”
오히려 두 사람이 그의 움직임에 휘말려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잠시 걸음을 옮기던 비류연은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나예린을 향했다. “굳이 전송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예린. 나중에 면회나 와요. 맛있는 거 많이 싸 들고. 하지만 걱정만큼은 하지 말아요. 그 정도로 허약하진 않으니까요.” “류연… 조심하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약간 굳은 얼굴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그러자 비류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그거 기쁜데요. 그럼 곧 풀려날 거니깐 얼마 뒤면 다시 볼 수 있어요. 나도 당신을 미인 파옥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깐요. 그때 또 이야기를 나눠요.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비류연은 태평하게 손까지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연행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회에 참석하러 가는 사람처럼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류연..”
나예린이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말로 뒷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힘도 방법도 없었다.
그는 그들을 따라 붉게 타는 불길한 노을 너머로 사라졌다. 나예린은 붉은 석양에 녹아내리는 듯한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일은 그녀에게 무척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마음을 닫고 현실과 거 리를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그러나 이번 일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어떤 결과도 낼 수 없었다. 이런 일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답을 구하지 못한 그녀의 심정은 모래폭풍에 별[北極星]을 잃고 사막을 헤매는 여행자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이럴 때 령 언니가 있었더라면……?”
고민을 함께 나눠줄 좋은 상담 상대가 되어주었을 텐데…….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슬펐다. 그리고 그 아픔 속에서 그녀는 깨달았다. 비 류연을 만나기 전 자신은 사자인 독고령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세상과 교류를 끊은 밀폐된 자신과 세상과의 유일한 접점이었다는 것을. 독고령이 실종된 직후 정신이 붕괴되지 않은 채 아직까지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옆에 비류연이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령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
지금 두 사람을 모두 잃은 그녀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두 개의 접점을 그녀는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투둑!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말을 잃은 벙어리처럼, 빛을 빼앗긴 장님처럼, 소리를 잃은 귀머거리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물속에 빠진 듯 숨 쉬기가 괴로웠다.
모든 것이 다시 캄캄해졌다. 모든 감각이 자신의 몸으로부터 박탈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세계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 다. 발아래에서 무시무시한 검은 구멍이 입을 쫙 벌렸다. 발 디딜 곳이 사라진 그녀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떨어져 내릴 뻔했다. 두 번 다시 기어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려는 몸과 마음을 간신히 추스렸다.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이래서는 조금의 발전도 없잖아? 그래서는… 그래서는…….’
나예린은 한 가지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는 절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예전에는 모든 것과 동떨어져 세상과 단절한 채 크고 넓은 벽을 주위에 두르고 고독 속에서 그토록 혼자 있고 싶었는데, 정작 혼자가 되고 나니 누군가가 옆에 있 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혼자 남겨져 있는 것이 못 견디게 가슴 아프고 두려웠다. 모든 존재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 배척했던 것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끌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결이 필요했다.
독고령은 세상의 소통을 단절하고 무의식의 심연으로 침잠해 가려던 자신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채 마지막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녀 자 신이 입었던 깊은 상처조차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채, 왼쪽 눈의 아픔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직 피도 이어져 있지 않은 이 못난 동생을 위해서.
그런데 자신은 어떠한가?
“난… 또다시 도망치려 했다. 하마터면 잘못을 반복할 뻔했구나.”
독고령의 그런 마음도 은혜도 모른 채 지금까지 그저 뻔뻔스럽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녀의 마음에 아무런 보답도 응답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발견되지 않은 독고령의 마음은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씨앗인 채로 남고 말았다. 자신이 조금만 주변으로 눈을 돌렸더라면 바로 발견할 수 있었을 보석 같은 씨앗을.
지금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그녀의 마음에 대한 모독이었다. 지금까지 쏟아 부어준 애정을 이대로 사장시킬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 마음을 꽃피워야 했다. 그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한순간의 작은 ‘깨달음’은 인간을 순식간에 절망에 빠뜨리게 할 수도 있고 순식간에 구제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은 곁에 없지만 죽은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과의 경험은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경험이었다. 독고령에게 서 마음의 따뜻함과 배려를, 비류연에게서 마음의 강함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시작과 끝을 모르는 거대한 관계 망의 과정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사람과 자연은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우리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었고, 앞으로 다시 연결될 거라는 징표와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끊을 수 없는 것을 끊으려 했으니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으리라!
그녀는 결심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도망이란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어두운 힘을 발 산한다. 의식의 차단만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 바닷가의 모래장에 서 있으면 인간의 의도 따윈 상관 않고 파도는 친다. 무시한다고 해서 파도가 사라지는 법 은 없다. 그런 터무니없는 걸 바라다가는 낼름 삼켜져 익사할 뿐이다. 이제 더 이상 파도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으리라. 세상의 파도에 힘껏 맞서리라.
‘류연도, 령 언니도 모두 내 손으로 되찾고 말겠어!’
이제 혼자 설 때였다. 꼭 껴안고 있던 무릎을 풀고 그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갈 때였다.
‘언니, 지켜봐 주세요!’
스스로의 다짐에 대한 다짐은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보다도 강력하다고 그녀에게 말해준 사람은 비류연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강 한 맹세라고. 언제나 감시가 가능하고, 언제나 패기가 가능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 회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지켜지는 것도 지켜지지 않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그러니 나는 나 스스로에게 맹세하겠다. 반드시… 반드시… 두 사람을 찾고야 말겠다고. 이제 스스로 서겠다고.’
이제 알을 깨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