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9권 15화 – 침묵(沈默)으로 나누는… 대화(對話)
침묵(沈默)으로 나누는… 대화(對話)
-비류연 對 청흔
“이봐요, 현운! 그 얘기 들었어요? 대사형이 잡혀갔대요, 그 대사형이!”
아직도 약간 볼이 상기되어 있는 진령의 얼굴은 불가능이 가능해졌다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의 얼굴 같았다.
“아, 진 소저. 물론 들었지요. 어제저녁부터 그 일 때문에 학관 전체가 거의 축제 분위기였으니까요. 사실 진 소저가 너무 늦게 안 겁니다.”
주작단 내부에서도 자축주를 마신 이가 여럿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현운은 묘한 눈길로 진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그 대사형이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소만?”
“예? 그건 어째서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진령이 반문했다.
“조금 전에 그대의 정인(情人)인 궁상이도 잡혀갔기 때문이라오.”
그리고 현운은 곧장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과 동시에 묵직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던 청년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일세, 남궁 단주.”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백의청년이 고개도 까딱 않고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백 ‘소협’!”
앉기 위해 의자를 잡던 백무영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의자를 뺀 다음 그곳에 앉았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어 유감일세.”
남궁상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확실히 사람을 초대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로군. 운치는 고사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야.”
사방은 답답할 정도로 어둡게 막혀 있었고, 창은 사람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동전 구멍만 하게 뚫려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 곳으로 빛이 제대로 들어올 리 만무했다. 채광 상태도 형편없는데 조명 상태도 형편없어서, 어둠을 밝히는 데는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초 한 자루만이 암흑 속에서 홀로 미약한 빛을 비추고 있 을 뿐인지라 내부는 더 더욱 음침해 보였다.
시설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도 문밖에 좌우로 시립해 있는 살기등등한 경비병의 환영을 받아야 했다. 그때 썼던 유일한 출입구인 철문은 그나마 지금 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딜 봐도 결코 사교적이라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사과한다면 받아주겠네.”
남궁상이 선심 쓰듯 말했다.
“미안하지만 사과할 수는 없군. 공무(公務)니까 말일세. 자네가 이해해 주게.”
남궁상은 자신의 선심이 거절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비난하지는 않겠네.”
자네의 입장을 이해해 주겠다는 말이지만 백무영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초반의 신경전은 그렇게 적당한 선에서 끝이 났다.
남궁상이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여기로 부른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으리으리한 곳에 불려올 만큼 화려한 일에 연루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또 모르지 않나? 요즘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일세. 차분히 잘 생각하다 보면 혹시 떠오를 수도 있지 않겠나?”
이 방을 지칭하는 이름은 ‘취조실’이었고 백무영이 원하는 것은 그 이름값에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남창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사건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입시생 연속 살해 사건 말인가? 하지만 난 죽인 적 없는데? 죽이기는커녕 보지도 못했네. 보지도 못한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나? 그런 신통방통한 능력은 안 타깝게도 가지고 있지 않네.”
그러자 백무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 증언은 나중에 자네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네. 그러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거짓 증언?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의 눈에서 칼날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이 빛을 무디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고, 그 두 사람 중 어디에도 백무영 은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백무영 역시 구정회의 문상을 맡고 있는 몸이었다. 겨우 기세에 밀려 굴복해 버린다면 체면 문제였다.
백무영과 남궁상의 눈빛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만일 누군가가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허공에서 불꽃이 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 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네. 책임질 말이라면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게.”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목소리로 백무영이 대답했다.
짝짝!
“들여보내게.”
백무영의 박수 신호에 맞춰 육중한 철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잔뜩 주눅이 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네 명의 젊은이가 차례로 걸어 들어왔다. 옷 차림새로 보아 명문정파의 제자들이 분명한데 그런 것치고는 추천할 만한 태도라고 할 수 없었다.
“어떤가? 이 네 사람,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나?”
남궁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확실히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극히 최근에.
그리고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하나, 둘, 셋, 넷…….?
아무리 다시 세어봐도 손가락이 하나 남았다. 그새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난 것도 아닐 텐데 하나가 남았다.
“이상하군.”
“뭔가 기억난 거라도 있나?”
약간의 기대감을 나타내며 백무영이 반문했다.
“한 명이 모자라.”
“흠, 그런가? 누가 모자란단 말인가?”
그 모자란 사람은 거적에 싸여 아직 무원대 시체 보관소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백무영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듯 시침을 뚝 뗀 채 반문했다. “침 뱉은 놈!”
“침 뱉은 놈?”
엉뚱하기 짝이 없는 그 대답은 그가 기대했던 답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건 또 무슨 놈인가?”
혼란스럽다 보니 말도 꼬이기 시작했다. 은근히 부아도 치밀었다. 그래도 참아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슬슬 저주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 친구들 옆에 공중도덕을 어긴 놈이 하나 더 붙어 있었거든. 설마……?”
남궁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백무영을 바라보며 검지만 위로 들어 두어 번 찌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백무영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 번 끄덕여 주었다.
“아마 당분간은 만나기 힘들 걸세.”
“왜 그런가?”
“죽었거든.”
그 대답에 남궁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쩌다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약간 짜증 섞인 말투로 백무영이 대답했다.
‘혹시 대사형이?!?
엊저녁에 있었던 일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놈은 남겨둬라!”
그 지시를 들었을 때 아무리 명복을 빌어줬다지만 설마 진짜 골로 갔을 줄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남궁상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강의 분위기라도 파악하기 위해 불려온 꼬맹이 네 명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어 얼굴 표정을 잘 살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영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왜 저러지? 설마 다들 저 남궁상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네 명 모두 겁에 질린 토끼처럼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남궁상을 정면으로 쳐다보려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이들 네 명이 남궁상의 손과 발에 부드럽고 상큼하게 어루만짐당한 것은 멀지도 않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고, 그때의 흔적이 아직까지 멀쩡 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남궁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죄졌냐? 왜 다들 그렇게 주눅 들어 있나? 설마 자네들이 얼굴을 보인다고 해서 내가 대뜸 달려들어 얼굴 가죽을 벗기기라도 하겠나?”
돌려 말하면 얼굴을 안 보이면 얼굴 가죽을 확 벗겨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어느새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네 명 은 번개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남궁상은 그들의 면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니, 다들 얼굴이 왜 그렇게 얼룩덜룩한가?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여기저기 멍이 들고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참으로 안됐다는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보며 남궁상은 물었다.
“네놈이 그랬잖아!”
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은 굴뚝같았지만 어제 교훈을 내일의 거울로 삼아 그들은 입을 모았다.
“아, 아닙니다. 별일없었습니다.”
“거보게. 별일없었다잖아?”
남궁상이 어깨를 으쓱하자 백무영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자, 자네 정말 많이 변했군! 예전엔 이렇게 뻔뻔스럽지 않았는데! 별일없긴 뭐가 별일이 없나? 오돌오돌 떨고 있는 저 모습만 봐도 당장 알겠네! 그러니 더 이상 발뺌하지 말고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게!”
평소 단정하던 그의 이마에는 지금 검붉은 핏대가 튀어나와 있었다.
“세상도 사람도 고정된 건 없는 걸세! 사람은 움직이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그렇게 핏대 세우지 말게. 내 이야기해 줄 테니.”
***
“카아아아악! 퉤!”
여럿이서 작당 먹어 나타난 게 너무나도 눈에 빤히 보이는 도전자들 중 한 놈이 삐딱하기 그지없는 안하무인 격인 태도로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기수식인 ‘카아아아악!’도 잊지 않았다.
이 어이없는 광경―엄밀히 말하면 자살 현장―을 목격한 남궁상의 낯빛은 순식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오, 하느님!’
그는 불러도 응답 없는 하늘을 향해 탄식했다. 그의 낯짝에 몰려 있던 핏기가 급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얼간이가!
‘무, 무슨 짓을……!?
골을 싸매고 싶을 정도로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엎어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뱉어낸 침은 다시 집어삼킬 수 없다. 그러나,
그걸 가능케 하는 인간이 딱 한 명 있었다.
“궁상아~!”
‘궁’에서 올라가고 ‘상’에서 내려오며 ‘아’에서 늘어지는 목소리. 남궁상은 그것이 심사가 대단히 꼬인 목소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옙, 대사형!”
남궁상이 즉시 대답했다.
“저놈만 남겨둬라!”
굳이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아도 그놈이 어느 놈인지는 눈 감고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
“옙! 알겠습니다, 대사형!”
나머지는 혼자 알아서 몽땅 처리하라는 말이었지만 남궁상은 한마디도 불평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무대에 서지 않는 배우는 연기를 할 수 없듯이 존재는 존재가
존재로서 존재하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진리의 좋은 점은 모든 곳에 무작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경우를 따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길 때도 때와 장소를 잘 골라야 한다는 사실은 시공마저 초월한 명명백백한 진리라 할 수 있었다.
세월의 진토에도 때 묻지 않고 빛나는 저 진리의 거울에 비추어볼 때 지금은 시간과 공간의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 이럴 때 잘못 건드리면 남궁상 자신까지 덤 터기 쓰는 수가 있었다.
‘저 망할 놈이 감히 벌집을 건드리다니…….’
그는 속으로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이게 무슨 동네 양아치 싸움인 줄 아나…….’
저 어이를 상실한 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놈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화약고에 한번 붙은 불은 몽땅 폭발할 때까지 꺼지지 않는 법, 비상수단이 필요 했다.
이것은 동네 깡패들의 흔히 있는 맞짱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착각도 이만저만 착각이 아니었다. 이건 엄연한 고수를 앞에 둔 지극히 고난이도 의 싸움이었다.
그놈의 의도는 허탈할 정도로 명백했다. 아마 더러운 인상과 그에 못지않은 추잡한 입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졸렬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이야기했듯 이 이건 동네 패싸움 수준의 저열한 싸움이 아니었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도 못한 주제에 함부로 방정맞게 날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 같았다.
진짜 고수의 눈에 잔꾀는 통하지 않는다. 그놈은 그걸 알았어야 했다. 자신이 나타나는 그 순간 이미 벌거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아니, 사실 볼 것도 없이 나타나기 직전의 기척과 발소리만으로도 이미 견적이 나왔다는 것을. 그러니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나 갔을 것을 그 자식은 주제도, 상대도, 장소도 제대로 파악못하고 망둥이처럼 날뛰고 말았다. 근질거리는 주둥아리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그만 범해서는 안 될 치명적 금기를 범하고 만 것이다.
‘한판 붙어봅시다!’ …라고?
말을 반으로 쪼갤 때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 절단면이 무지 날카로워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눠야 할 때와 나누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자식이 얼마나 분수 계산에 재능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친 상대는 그런 시답잖은 것까지 일일이 고 려해 주는 맘씨 착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비류연은 같잖은 허세를 가장 싫어했고, 저질스런 짓거리를 혐오했다. 어차피 그런 건 진짜한테는 다 필요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 어이없는 놈은 자신이 내린 치명적인 오판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세상이란 것은 언제나 사람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묻기에. ‘인과응보(因果應報).’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네 글자가 단지 불교 홍보용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놈은 오늘 온몸을 다 바쳐 처참하게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
“그래서 죽였나?”
코앞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백무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안 죽였네! 그러니 유도심문하지 말게!”
짜증나는 목소리로 남궁상이 대답했다.
“쳇, 들켰군. 하지만 진짜로 그랬단 말인가?”
백무영은 여전히 못 믿겠다는 말투였다.
“진짜라니깐. 믿어도 되네.”
그 마음 이해 안 가는 바는 아니라는 얼굴로 남궁상이 대답했다.
“미쳤군…….”
“동감일세!”
오늘 최초로 보이는 의견 일치였다.
“요즘 수험생들도 질이 많이 떨어졌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네. 정말로 그 정도 수준으로 자신이 붙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난 더 놀랍더군.”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네.”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다 안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망상은 적당히 하는 게 건강에 이로울 텐데 말이야.”
“그래서 어찌 됐나?”
“나는 단박에 비 공자가 그 녀석을 조지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지. 그래서 난 그 일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변 정리를 하기로 결심했다네. 그
래서 비 공자가…….”
“잠깐만!”
백무영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왜 그러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그 비류연이란 친구를 비 공자라 칭하나? 따지고 보면 자네 후배 아닌가?”
“쿨럭! 후, 후배라…….”
남궁상은 각혈하며 그 단어가 주는 무시무시한 위화감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사실이긴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 따위는 그의 현실에 어떤 영향 력도 미치지 못했다. 전혀 현실감이 없기에 오히려 참신하게 들리는 표현이었다.
“공자라니… 너무 공손한 칭호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네.”
‘야, 비.류.연!’이라거나 ‘어이, 류연 후배!’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단죄의 대상이었다.
“난 나이나 학년에 상관없이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기 때문이네.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서 더 뛰어나지는 건 아니지 않나?”
이 대답이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라는 것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안 될까?
여기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백무영 둘뿐이 아닌가? 아무리 대사형의 귀가 밝고 눈이 날카롭다 해도 그 이목이 여기까지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부 르던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대사형을 비류연이나 류연 후배, 혹은 좀 막 나가서 ‘그 자식’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비록 외따로 떨어진 대나무 숲 속에서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힘껏 외쳐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끊임없는 갈굼과 피나는 교훈 덕분인지 마음보다 혀가 먼저 알아서 그를 방해했다. 그나마 타협을 본 것이 비 공자라는 칭호였다.
‘정신 치료라도 받아야 하나…….?
대사형님’께서 주위에 없는데도 알아서 그 존재에 주눅 드는 것은 정말 문제였다. 하지만 생사의 경계선에서 대사형에게 차마 입에 담기 힘든―하지만 당시로선 무척이나 통쾌했던ᅳ어떤 특정한 말들을 용감하게 쏟아냈던 노학이 그 후 그 일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그로서는 험한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그때의 광경이 스쳐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언어 순화가 이루어지곤 했다. 게다가 그 편지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실수였다. 지금은 마치 여벌의 목숨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에 비하면 지금 자신은 단지 심문당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조심은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게 일 터진 다음에 당황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했다.
“나는 지금 대사형의 눈이 닿지 않고 귀도 미치지 않는 곳에 있건만 그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내가 나를 스스로 금제하니 내가 아닌 누가 나를 구할 수 있 겠는가?”
이런 경우에도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적용되는 것일까? 자신이 잡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길게 생각할수록 비참해지기만 했다. “에잇, 어차피 칭호라는 것은 그저 구분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표시 아닌가. 내용 전달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니 어제 있었던 이야기나 계속하도록 하세.” “부탁하네.”
남궁상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 저들 네 명의 운명에 대해 상담 중이었다.
***
“잠깐 우리들은 딴 데 가서 얘기나 나눌까?”
남궁상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앞으로 벌어질 참극을 이 애송이들에게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리 썩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것이 뻔했다. 그러 나 이 녀석들은 그의 세심하고 상냥한 배려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배은망덕하게 다음과 같이 지껄였다.
“그냥 여기서 계속해도 괜찮습니다, 선배님!”
빠직!
남궁상의 이마에서 푸른 혈관이 꿈틀 맥동 쳤다. 자연 목소리도 험해졌다.
“잔말 말고 그냥 따라오라면 따라와!”
부릅떠진 그 눈에 담긴 서슬 퍼런 기백에 다섯은 모두 움찔하고 말았다.
“다 너희들을 위한 거다!”
거저 주는 은혜를 발로 차려 하다니! 아마 자신이 지금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아직 어린애들한테 너무 끔찍한 것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정체성도 제대로 확립 안 된 어린애들에게 교육상 안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선배로 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학관의 평판을 정도 이상으로 떨어뜨리는 것도 사양이었다.
‘저 얼간이는 교육적 지도를 받을 운명인 게 틀림없어.’
문제는 그 교육적 지도라는 것이 지독히 비교육적인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대사형은 이미 불량스럽게 타락한 녀석들에게 인간적으로 관심을 쏟 는다던가 혹은 차분히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삐뚤어진 게 바로 원상 복구될 수 있다는 이론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은 실제로 매우 희박했 다. 깨끗한 물을 탁하게 오염시키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데는 그것을 더럽힌 것보다 수천, 수만 배 이상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처럼. 여 기에 교육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미 굳어버린 가치관은 좀처럼 변하려 들지 않는다. 때문에 그 가치관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여전 히 반성이란 걸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은 딱딱하게 굳어져 종국에는 화강암처럼 단단해진다.
타이르거나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럴 경우 보통 사람들은 순순히 포기한다. 그러나 전혀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비류연이 어 느 쪽 인종인가 하면 그는 전적으로 후자 쪽이었다. 그는 포기를 모를 뿐만 아니라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되어서야 되겠냐는 상식적인 질문은 언제나 그의 앞에서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자신도 피해를 당할 각오를 해야지! 피의자의 인권 따위 내 알 바가 아냐! 널리고 널린 피해자도 제대로 구제되지 못하는데 피의자의 인권 따위에 신경 쓸 여가가 어딨냐?”
가끔은 그 의견에 동감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남궁상도 알고 있었다. 피의자의 인권 따윈 복수를 미덕으로 삼는 이 무림의 생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조용히 다 른 곳으로 끌고 가서 즉결 처분하기로 했다.
사실 남궁상 자신도 그 광경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좀 밟히다 보면 세상이 넓다는 것도 금방 알게 되겠지.’
우물안에서 아무리 박 터지게 싸워봐야 우물 밖의 달리는 말발굽에 한번 밟히면 즉사라는 것을.
남궁상은 되도록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했다. 괜히 생각 짧은 놈 때문에 함께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뒤에서 졸래졸래 따라오는 후배 예비생들 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겨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것들은 분위기 파악도 하나 제대로 못하나? 유유상종이라고, 이쪽도 그렇게 인내심 이나 분별력이 뛰어나지는 않은 듯했다.
남궁상은 자신에게 떠넘겨진 떨거지들의 면모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청성, 해남, 곤륜, 그리고 화산..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며 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뭐, 내가 팔대세가 사람이라서겠지…….’
경로는 불분명하지만 이미 조 편성 내용은 외부로 유출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이좋게 편먹고 올 리가 만무했다. 어느 시험이든 큰 이익이 걸 리면 걸릴수록 언제나 그곳에는 크고 작은 부정들이 연루된다. 그건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천 년 후에도 아마 그 모습은 크게 변치 않으리라. 왜냐하면 큰 이익이 걸릴 때 인간은 언제나 부정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니까. 획득할 수 있는 이익에 비례에 부정에 대한 욕망도 커지는 법. 만일 그런 유혹을 이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다.
‘에휴!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남궁상은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까 인사는 했냐?”
남궁상이 물었다. 남겨진 친구라고 쓰고 얼간이라 읽는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뇨.”
그럴 시간이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럼 미안하군.”
남궁상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왜죠, 선배님?”
너희들같이 개념없는 애들을 후배로 둔 적은 없다고 말하려다 속 좁아 보인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 그만뒀다. 대신 한마디만 해주었다.
“마지막이 될 테니까.”
여러 의미에서 그것은 마지막일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전혀 이해 못했군…….’
뭐, 무리도 아니었다. 조금 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시체는 자네들이 잘 수습해 주게. 싸가지가 없어도 친구는 친구 아닌가.”
아련한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남궁상이 조용히 말했다.
***
“일은 그리된 것이네.”
“그리된 거였군. 그리고?”
“그걸로 끝이네.”
“그럼 자네들은 안 죽였단 말인가?”
“안 죽였지.”
“그럼 왜 죽었을까?”
“글쎄, 왜 그랬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