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진가, 장홍을 호출하다
-염도, 면회 가다
“어떤가, 홍? 해볼 생각이 있는가?”
“음…….
마진가의 물음에 장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는 관주 집무실. 그는 호출을 받고 은밀히 이곳을 방문했다. 그가 현재 마진가와 밀담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즉, 대화가 가능하기 위한 최소 요건인 침묵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다면 거절해도 좋네. 요즘 자네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겼나 하는 걱정도 드니 말일세.”
“아닙니다, 제 고민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 배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것뿐입니다. 이번 일, 제가 맡겠습니다.”
“오, 그래 주겠나?”
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대로 적들의 농간에 놀아날 수야 없지요.”
무죄라는 심증이 있어도 물증이 없다면 유죄임을 확신하며 처벌을 부르짖는 여론을 잠재울 수 없다. 마진가를 설득해 지금 감옥에서 빼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 도 없다. 더 많은 비난이 빗발치게 될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세계. 그렇게 되면 아무도 지도부를 믿지 않으리라. 믿음을 잃어버린 지도부는 비렁뱅이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걸 받게.”
마진가는 품속에서 패하나를 꺼내 장홍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관주 직속령일세. 그리고 사령장을 한 장 써주지.”
마진가는 즉시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뭔가를 적은 후 홍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학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승천무제 개시일 전까지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네. 그때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진실에 상관 없이 그를 처벌할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네.”
그때쯤이면 학관의 여론은 불처럼 일어나 비류연의 처벌을 주장할 것이다. 그의 무죄를 믿는 사람보다 유죄를 믿는 사람이 더 많고 유, 무죄에 상관없이 처벌받기 를 바라는 사람은 앞의 둘을 훨씬 상회(上廻)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뭔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하게.”
“추가 근무 수당도 꼭 부탁드립니다.”
마진가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뭐랄까…….”
“솔직해진 거죠. 친구를 잘 사귀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너무 물들진 말게. 반찬만 가리지 말고 사람도 좀 가리고.”
“적당히 물들겠습니다. 그러니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는 되고 싶어도 되기 힘드니까요.”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염려되네그려.”
“그것보다 수당 건은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말래도. 안 떼먹네, 안 떼먹어!”
“여기다 서명하면 되나?”
중년 사내는 장부의 여백 한쪽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곽 노사님. 그곳에다 하시면 됩니다.”
젊은 수감 담당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팔목에서부터 보이는 붉은 소매, 붉은 옷, 그리고 그보다 더 붉은 머리카락. 바로 염도였다.
그동안 거쳐야 했던 복잡한 절차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나 있던 염도는 지금 이 상태에서 내공을 일으켜 ‘검염기(劍焰氣)’를 방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시험해 볼
까 말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시 한 번 그 귀찮은 절차를 반복해야 된다는 사실이 싫었기 때문이다. “예, 이쪽 면회 신청자 쪽에 날짜랑 시각을 쓰시고 그 옆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염도는 수감 담당이 시키는 대로 날짜와 시각을 차례대로 기입하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서명했다.
“조금 전에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몇몇 면회를 거절당했다던데?”
“아, 조금 전에 남궁상 선배와 진 소저가 다녀간 것 말씀이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천무학관 구류 규칙에 의하면 아직 심리 중에 있는 용의자와 관도들의 접촉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물론 무사부의 지위에 있는 분들은 예외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몇 명이나 죽었나?”
가볍게 툭 던지는 듯한 질문이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니, 죽다니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현빈이 반문했다. 그는 원래 무당파의 제자로 현재 이곳 ‘세원옥(洗怨獄)’의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어제 구금된 구류자와의 면회를 신 청하면서 묻는 말이 그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말 그대로 그의 신병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냐는 말일세.”
현빈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다시 표정을 원상 복구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사망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만.
“한 사람도 없었다고? 그럴 리가…….”
이번에는 염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런 일은 그의 상식 범위 안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부상자는?”
이번에야말로 있겠지 기대하며 염도가 물었다.
“물론 부상자도 없습니다.”
현빈은 도사답게 정직하게 말했다.
“거짓말!”
염도가 단언했다.
“예? 거, 거짓말이라니요? 참말입니다.”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바로 묵살당했다.
“위에서 불문에 붙이라는 명이라도 떨어졌나?”
염도의 눈빛이 아궁이의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반대로 추궁하는 목소리는 땅에 붙을 듯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날카롭고 강렬한 그의 안광을 정면으로 받고도 평정 을 유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젊은 옥지기 현빈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두렵다 해도 없는 사실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 진짭니다, 염도 노사님!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떨어질 명도 없지요. 왜냐하면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믿어주 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필사적이었다. 그 절박함이 염도의 마음속에 의심의 단초를 싹트게 만들었다.
“그가 순순히 잡혔다고?”
현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순순히 잡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염도의 입에서 단번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그가 순순히 잡히지 않았는데 사상자가 없었다고? 자네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나? 좋은 배짱이다!”
아무래도 상식ᅳ지극히 개인적인―이 납득을 방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다시 조금 험해졌다. 현빈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짓말을 했다고 화내면 모를까 왜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데 화를 낸단 말인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노, 농담이라니요? 제가 어찌 감히 노사님께 농지거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입니다. 태상노군과 장삼봉 조사님의 영전에 맹세코 제 말은 사실입니다.”
신앙이나 믿음 같은 건 일신의 형편에 따라 언제든지 팔아먹을 수 있는 게 인간이긴 하지만 이 현빈이란 친구는 그렇게 악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믿는 최고의 가치에 대고 맹세했는데 더 이상 추궁하기도 미안했던지 염도의 이글거리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 말만은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그 인간의 본성을 생각했을 때 그런 일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적어도 사망자가 삼 개 조 이상은 나왔어야 했고, 부상자는 헤아리다 지쳐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 사실이 너무나 부조리하게 다가왔다. 그가 어찌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놈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할 수 없지. 당시 현장에 있던 놈들을 찾아가는 수밖에.’
그제야 비로소 염도는 괴물 포획자들이 포획한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내공 문제는 어찌했나?”
“안심하십시오. 물론 혈도를 짚어 억제해 놓았습니다.”
적절한 조치가 취해졌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말이었지만 염도의 눈은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겨우 점혈(穴)밖에 안 했다고?”
“뭐, 뭐가 잘못됐습니까요?”
“당연하지. 이런 안일한 대처를 봤나! 전신 대혈에 금침 백팔 개를 꽂아놓아도 안심이 안 될 판국에 겨우 손가락 몇 번 꾹꾹 찔러놓고서 어찌 안심할 수 있단 말인 가?”
백팔 개의 금침을 전신 요혈에 박아 넣어 기운의 운행을 방지하는 비법은 금제(禁制)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고 악독한 금제법으로 불리는 ‘백팔금침봉혈술(百八禁 針封穴術)’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뒤져 봐도 이 시술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흉악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건 인권 유린입니다, 노사님! 백팔금침봉혈술은 옛날 혈월마교 같은 마도에서 사용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의 금제법 아닙니까? 아직 진범으로 확정된 것 도 아닌데 어찌 그런 잔인하고 끔찍한 술을 쓸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런 강력한 금제법을 시술할 수 있는 능력자도 없구요.”
단전을 파괴하고 사지의 근맥을 끊어도 안심할 수 없는데 무슨 헛소리람? 염도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현 사태의 중대한 심각성에 대해서 이 녀석들은 전혀 인 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졌다. 인권 유린 걱정하다가 학관 유린 사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선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좋아, 그럴 만한 능력자가 없다면 아쉽지만 할 수 없지. 그럼 적어도 수갑은 튼튼한 걸 썼겠지?”
“물론입니다. 아직 비록 용의자 신세라지만 그것까지 안 할 수는 없지요.”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못 미덥기는 여전했다.
“수갑의 재질은 뭔가?”
“재질이요?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이곳을 방문하셨지만 구류자의 수갑 재질까지 신경 쓰시는 분은 염도 노사님 한 분뿐이십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네.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나?”
그가 비록 호전적이고 광포하다는 평을 듣고 있긴 하지만 애꿎은 옥졸들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 즐길 만큼 악취미는 아니었다. “예, 물론 무쇠로 만들었습니다.”
연행용과 구금용은 재질이 달랐다.
염도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겨우 무쇠 따위로? 차라리 지푸라기로 묶어두지 그러나?”
어이없어하는 염도의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의 대부분의 수갑은 무쇠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만?”
돌아온 건 코웃음이었다.
“헹, 그런 현실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론 따윈 듣고 싶지 않네! 당장 상부에 건의해서 만년한철로 된 수갑을 얻어오게!”
“노, 농담이시죠?”
염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결코 이런 식의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빈은 그렇지 못했 다.
“마, 만년한철로 된 수갑은 이곳이 아닌 특급 범죄자들만 특별 구금하는 최상위 감옥인 ‘봉마옥(封魔獄)’에 감금되는 전대 마두들에게만 사용되는 특별 사양입니 다. 제작 단가도 비싸고 그 수량도 한정되어 있고, 이런 하위 감옥까지 보급되지는 않습니다.”
“뭐라고? 예산 문제 같은 시시한 이유 때문에 그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자에게 종이 수갑보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는 무쇠 수갑 따위나 채워놓는단 말인가? 차라리 그냥 풀어놔 두게. 차고 있으나 없으나 똑같으니 말일세.”
너무나 격렬한 의외의 반응에 현빈은 입을 떡 벌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부실하겠습니까? 명색이 무쇠인데 말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게. 난 분명히 충고했으니 말일세.”
충고를 해줘도 귀를 막고 있으면 백 마디 진리가 무소용인 법이다. 들으려는 자세가 안 되어 있는 놈을 위해 더 이상 소중한 혀를 혹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그전에 조금은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인 방법 같았다.
“됐네! 안내나 하게.”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 현빈은 얼른 몸을 돌려 감옥 안으로 향했다.
감옥이란 건 언제나 음습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특히 지하라는 입지는 그런 느낌을 더욱 부채질한다. 염도는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음(陰)의 공간
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끼 낀 돌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안으로 들어가던 염도는 묘한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약해서야 어디 제대로 탈옥에 방비할 수 있을까? 파 도 치는 해변 위에 세워진 모래성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처 상태를 들은 터라 마음이 더욱 심란했다.
“여깁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착잡한 마음과 싸우던 염도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현빈은 지하 뇌옥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옥사 한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면회 시각은 이각입니다. 그럼 전 이만. 잠시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수고했네.”
현빈은 가볍게 읍하며 물러갔다. 염도는 천천히 옥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분노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특별 취급 당해야 마땅한 존재가 전혀 특별 취급 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옥사의 재질이 다른 곳과 똑같은 나무일 수 있는가! 이곳 의 옥사는 나무를 네모지고 굵게 잘라 그것을 좌우와 교차하는 방식으로 엮어놓은 곳이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감옥이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봐도 이런 말랑말랑한 벽과 푸석푸석한 각목이 그 인간의 손길과 발길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몽상 같은 비상식을 신봉하기에 그의 정신은 너무나 또렷했다.
괴물을 가두는 우리라면 그 재질은 만년한철 정도는 되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예산 문제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헛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만년한철씩이나 되는 비싼 놈은 안 되더라도 적어도 백련정강급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염도로서는 하찮은 나무 재질의 감옥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 었다. 나중에 참상이 일어나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법인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이 부실하고 무성의한 행정의 정점 뒤에서 인류 최대의 위협ᅳ개인적인 판단이지만ᅳ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되었습니까?”
약간 퉁명한 어조로 염도가 물었다. 비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회적인 약자는 언제 어느 때나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저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법이지요. 힘없는 자의 호소에 귀 기울여 주는 자는 언제나 드문 법이니까요.” “하아? 천지가 뒤집혀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요. 도대체 누가 힘없는 약자란 말입니까?”
염도는 각혈할 뻔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 당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 않습니까?”
어떤 잘못된 척도를 얼마만큼 잘못 사용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오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여기 있잖아요? 바로 여기! 진실인 걸 어떡하겠습니까?”
비류연은 태연자약했다.
“거짓된 진실도 있습니까?”
염도가 냉소했다.
“많죠.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거짓된 진실을 진리인 양 믿고 살아가잖아요?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죠.”
“그래서 거기에 또 하나의 거짓을 더하기로 결심한 겁니까? 왜 그런 모습인 겁니까?”
“이 모습이 어때서요?”
비류연이 팔을 편 채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쩔그렁 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감옥 안을 울렸다.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갇혀 있는 겁니까? 당신답지 않게!”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나다운 게 뭐죠? 지금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정말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나의 일부분, 그것도 자신의 주관에 의해 해석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왜 나를 함부로 규정하려고 하는 거죠? 규정한다는 것은 규정된 이외의 것을 사상(捨 象)한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인가요?”
“그, 그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통에 염도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조악한 건조물을 부수고 밖으로 뛰어나가면 그게 나다운 건가요?”
비류연이 피식 웃으며 자유와 억압의 경계인 옥사의 창살을 툭툭 두드렸다.
“거기 안에 틀어박혀 있는 한심한 모습보다는 훨씬 당신답겠지요.”
“당신이 아니라 사.부.님이겠죠. 뭐, 때려 부순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건 신이든 부처든 두 동강 내겠다고 큰소리치는 비류연치고는 너무나 건실하기 짝이 없는 의견이었다.
“그런 상식을 알고 있다는 게 나로서는 더 충격적이군요.”
염도가 솔직한 감상을 피력했다.
“하지만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요. 확실히 범인은 빨리 찾는 게 좋을 것도 같군요. 아직까지는 일종의 유희로 받아들이고 여기서 놀아줄 수는 있지만 막상 일 이 닥치면 별로 억울하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그런데, 정말 안 죽였습니까?”
미심쩍다는 투로 염도가 물었다. 비류연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글쎄요.. .? 죽이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만들어주는 방법이 수두룩한데 굳이 그런 식으로 손쉽고 간단하고 허무하게 끝장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요? 대화랑 마찬가지로 분풀이도 상대가 있어야 하죠. 근데 안타깝게도 시체와 유령은 나의 상대 개념에 들어가지 않아요.”
묘하게 설득력있는 말이었다.
“죽은 놈을 추궁할 수는 없잖아요? 추궁을 하든 작살나게 밟든 일단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렇게 순순히 퇴장시킬 수야 없죠.”
“하긴…….”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바람에 왠지 납득해 버리고 마는 염도였다.
저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은 시간은 얼마 없어요. 음, 딱 일주일 남았군요.”
“왜 일주일입니까? 입관 시험까지는 아직 열흘 정도 남았잖습니까?”
시간이 얼마 없는 것치고 비류연은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판을 벌였으면 그 수습을 해야죠.”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또 벌일 겁니까? 판?”
“당연하죠. 오랜만의 건수인데 그냥 넘어갈 수야 없죠.”
“일주일 후라면 바로 궁상이 녀석의 비무가 있는 날이군요. 상대는 그 유명한 아미신녀이고…….”
“그것 말고 또 다른 일이 있나요? 일단 승률 관리는 임시 동업자에게 맡겨놨으니 안심은 되지만… 역시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요.”
남궁상과 약속한 것 이상으로 비류연은 일을 정말 크게 벌여놓았다. 그러니 두 사람의 대결에 관심을 쏟지 말라 뜯어말려도 관심이 쏠릴 판국이었다. 돈은 언제나 인간의 눈에 핏발을 세울 정도의 집중력을 제공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아참, 당신은 어디에 걸겠어요?”
비류연이 물었다.
“여기서도 영업입니까?”
그러자 비류연은 씨익 웃었다.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죠. 아니면 내가 울고불고하기라도 바란 겁니까?”
“그런 끔찍한 모습을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흐를 정도로 끔찍한 모습에 염도는 몸서리치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악몽은 잠잘 때 가끔 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눈 뜨고 있을 때까 지 악몽을 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범이 잡히는 게 먼전지 내가 이곳을 부수고 나가는 게 먼전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비류연이 말했다.
‘주객전도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비류연의 무신경한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진범을 잡고야 말겠다고 결심하는 염도였다.
“열심히 해봐요.”
여기서 끝났으면 격려의 말이었겠지만 그 뒤가 붙자 격려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돌변했다.
“천무학관 설립 이후 사상 최대의 파옥 사건 목격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염도는 흠칫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과연 목격자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
그 일이 발생하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비류연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는 아직도 약속에 매인 몸이었고 자신이 세운 기준을 함부로 변경하는 그런 얄팍한 남자 는 아니었다. 물론 가끔 어떤 사람의 낯을 볼 때마다 후회가 물밀듯 밀려올 때도 있지만 쉽게 꺾이는 신념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자신이 최대 파옥 사건의 동조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행복한 상상이 아니었다.
“애들한테도 안부 전해주세요. 이제 일주일도 채 안 남았다더군요.”
어째서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사람보다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더 안절부절못해야만 하는가? 감옥 안에서 판결을 기다리며 있는 사람이 오히려 느긋하다
니……. 이것은 대단히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뭔가 좋은 해결책은 없습니까?”
“없어요. 지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류연이 어깨를 으쓱한다.
“참으로 태평합니다그려. 그런데 지금은 그렇다는 것은……?”
“그래요. 지금은 수가 없죠. 하지만! 예상외의 변수가 발생한다면 뭔가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죠.”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군요.”
“대사형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염도 노사님?”
면회를 끝마치고 나오는 염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남궁상과 진령이었다.
“아, 너희들이구나. 면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들었다만? 많이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소식의 편린이나마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냐?”
염도는 남궁상의 거짓말에 대해 별달리 추궁하지 않았다.
“저… 염도 노사님께서는 이번 일이 대사형의 소행이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남궁상은 가장 묻고 싶은 말을 뒤로 돌리지 않았다.
“확신한다.”
“그럼 그걸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물론 있다.”
남궁상의 몸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쏠렸다.
“괜찮으시다면 그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넌 아직 그것도 눈치 못 챘느냐?”
염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되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 안목이 부족한 탓입니다.”
“부족한 점을 인식하고 있으니 더 책망하진 않겠다. 너희들은 혹시 시체들이 지니고 있던 전낭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
남궁상과 진령은 염도의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맞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황금충도 그 앞에서는 빛이 바래고 마는 비류연이 돈 되는 물건을, 이미 가치가 상실된 물체 옆에 놔두고 올 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양심이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 하겠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은 비웃음 섞인 코웃음뿐일 것이다. 그 뒤에 따라 나올 독설도 이제는 충분히 상상이 갔다.
‘흥, 그렇게 말하려면 죽이지를 말던가? 죽인 다음에 무슨 양심이야? 그저 자기 만족이자 위선이지. 한쪽의 의미가 사라졌으니 아직 의미가 남아 있는 쪽으로 가는 게 물건으로서는 행복한 일 아니겠어? 무사는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이 있잖아? 돈도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쓰여지고 싶을 거라고. 분명해.’
비류연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대사형은 무죄군요…….”
그 사실을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지 남궁상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아쉽지만 그렇다. 하지만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현재 학관 내에는 비류연을 처단해야 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자칫하면 무죄든 유죄든 상관없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과연 상층부는 계속적으로 점층되는 여론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보장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남궁상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궁상도 모르는 새에 상황은 자꾸만 비류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